<484화>
484. 출발
“쌤예.”
가방을 둘러멘 지윤이 그를 불렀다.
“준비 다 됐심더.”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챙겼다.
“나가자, 슬슬.”
“근디 쌤예.”
“응?”
“저 가스나 좀 어케 해 보이소.”
생활관 구석에서는 세희가 태화의 꼬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가자고, 등신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태화가 더욱 강하게 침대 기둥을 붙들고 버텼다.
“싫어! 안 가! 점심에 부식으로 조각케익 나온단 말이야!”
“야, 돼지년아! 눈깔만 파내서 들고 가기 전에 일어나!”
“케익! 케익──!”
보다 못한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태화의 손을 침대 기둥에서 떼어냈다.
“들고 가면 되잖아. 그만하고 일어나.”
“어, 진짜? 그럼 내가 쌤 꺼도 먹을래.”
“먹어. 다 먹어. 그러니까 가자, 이제.”
“웅! ……잠깐만.”
벌떡 일어나던 태화가 다시 침대를 붙들었다.
“오늘 재벌집 로맨스 마지막화 한단 말이야!”
“하아…….”
상호는 중지를 엄지에 걸어 딱밤을 장전했다.
* * *
“씨이…….”
이마에 빨간 자국이 남은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들이 모인 곳은 기지의 마당. 건물에 가까운 쪽에는 도현, 해련, 은율과 이츠키와 다혜가 서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상호와 떠날 아이들이 서 있었다.
상호는 아이들의 복장을 쓱 훑어보며 점검했다.
전투복. 전투화. 세희의 검. 나빛과 태화의 가방.
“다 챙긴 거 같네.”
그 말에 뒷짐을 진 도현이 입맛을 다셨다.
“가야겠네.”
“그래야지.”
“이번엔 성공해라.”
상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을 돌아보니 세희가 남는 아이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런 걱정도 담기지 않은 결연한 눈빛으로.
그 걱정은 다 은율과 이츠키와 다혜가 떠맡은 듯했다.
“……므아.”
다혜가 손을 흔들었다.
“아으아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세희가 말하자 지윤이 거들었다.
“어짜피 돌아올 긴데 멀 그래 우중충~하게 있노. 얼굴 피라 임마.”
“……잘 다녀와.”
은율이 여전히 우중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츠키도 무표정한 얼굴에 어딘가 힘없는 기운을 묻히고 상호를 바라보았다.
“약속 지키는 겁니다.”
“응.”
“계속 기도하고 있을 테니까…….”
해련이 씩 웃으며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걱정 말아. 선생님한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아르게스도 몇십 번을 왔다갔다 했고, 그놈하고 싸우는 것도 이번이 세 번째니까…….”
물론 이 임무의 통계적인 생존률이 50%라는 것은 해련도 알고 있겠지만, 그녀도 상호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상호는 해련을 따라 웃었다.
“다녀올게.”
아이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잘 지내고. 무슨 일 있다고 해도 내가 더 이상 뭔가를 해주진 못하겠지만…… 잘 해낼 수 있지?”
“네.”
“우아으아으.”
“그래. 진짜 갈게.”
그가 걸음을 떼자 아이들도 걸음을 떼었다.
세희는 그의 곁에서 앞을 보고 걸었고, 태화는 다른 쪽 곁에 달라붙어 꼬리를 촐싹거렸다.
“케익 줘. 지금 먹을래.”
“안 가져왔는데?”
“뭐어?! 왜!”
“너 미워서 그냥 내가 다 먹었어.”
“아이씨, 장난치지 말고 빨리 줘어! 진짜아!”
“원숭이냐, 임마. 아꼈다가 밤에 먹으면 더 좋잖아.”
“칫.”
그들의 뒤에서는 나빛이 기지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한 걸음 걷고 돌아보고. 또 몇 걸음 걷다가 돌아보고. 상호는 그런 기척을 알아차리고 나빛을 불렀다.
“나빛아, 가자.”
“아, 네.”
나빛이 발을 재게 놀려 그를 따라잡았다.
“선생님, 선생님.”
“응?”
“성력에 타서 가면 안 돼요?”
“조금만 걷자. 너희가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보게.”
“네.”
“나빛아. 그거 안 무겁나. 내가 들어 주까?”
“야, 쟤한테 식량 가방 주지 마!”
“뭐라카노, 점심 부식까지 기어코 뜯어내가꼬 묵는 시끼가…….”
꼭 소풍을 가듯 분위기가 가벼웠다.
도현과 해련은 도란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산을 넘기 시작할 때 돌아서서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이제 들어가자.”
“……네.”
“므아으…….”
아이들은 조금 더 남아 상호와 친구들을 지켜보았다. 산을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그 후에는 착잡한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본 후,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해련을 따라 기지로 들어갔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길은 알고 있겠지.’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없을 텐데.
떠나는 모습이 꼭 누군가를 닮아서.
‘같은 길을 간다고 해서…… 그 끝까지 같을 필요는 없다, 상호야. 네가 받은 상처 누구에게도 나눌 생각 마라. 너는 모르겠지만…… 너처럼 강한 사람, 그리 많지 않아.’
도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막사로 들어갔다.
* * *
“조를 세 개로 나눌 거다.”
명욱이 손가락을 세 개 들었다.
“1조는 후방 지원조. 민정, 효은, 영주, 상호가 여기 남는다.”
얇고 긴 나뭇가지가 땅에 깔린 지도를 툭툭 쳤다.
“나머지 2조와 3조는 정찰조. 나, 진구, 태현, 경준이 2조. 도현, 재훈, 예경, 성철이 3조. 2조와 3조가 각각 북쪽과 남쪽을 맡아서 여섯 시간 동안 동쪽으로 갔다가 여기로 복귀해 지원조와 합류한다. 그러면 왕복으로 총 열두 시간이 걸리는 거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다면 말이야.”
명욱은 잠깐 눈을 들어 대원들이 자신의 말을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그 후에는 다같이 여섯 시간 동안 2조와 3조가 탐색했던 길의 중앙으로 천천히 전진하며 숙영지를 찾는다.”
설명을 마친 명욱이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보완할 사항이나 궁금한 점 있나?”
“저기, 대장님.”
검을 찬 청년, 박진구가 손을 들었다.
“이동하는 속도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빠르게 가면 되겠습니까?”
“안전한 정도 내에선 최대한 빠르게. 그렇지만 처음 가는 길이니 안전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겠지. 경계를 철저히 하고 주변을 꼼꼼히 기억해둘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빠르게 정찰한다.”
상호도 손을 들었다.
“대장님.”
“응? 아, 그래. 상호. 말해 봐.”
“제가 누나랑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명욱이 손과 고개를 동시에 내저었다.
“안 돼. 조는 무조건 필요에 따라 편성한다. 상호 너는 몸으로 싸우는 대원들 중에선 제일 약하니까 후방 지원조로 가.”
“제일 약한지 강한지 어떻게 알…….”
“대장님.”
발끈하는 상호를 예경이 가로막으며 말했다.
“상호랑 같이 갈게요.”
“이유가 있나?”
“합을 자주 맞춰봐서. 저도 상호도 서로가 있어야 더 잘 싸우거든요.”
“늘 함께 있진 못할 텐데.”
명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따로 전투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천천히 그래 보죠.”
예경이 씩 웃으며 상호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남매라기에는 지나치게 애틋했을까. 둘의 모습을 본 대원들이 서로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동생이랑 사이가 엄청 좋네.”
“그러게. 내가 본 남매는 다 못 죽여 안달이었는데.”
“잠도 꼭 같이 자야 한대.”
“아이고, 하필 누나를 좋아해서…….”
“…….”
상호는 그런 그들을 샐쭉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곧 명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원들을 차례차례 가리켰다.
“좋아. 조를 다시 짠다. 민정, 효은, 영주, 재훈이 지원조. 2조는 그대로. 3조가 도현, 성철, 예경, 상호. 다시 말하지만 2조가 북쪽, 3조가 남쪽이다. 더 할 말 있나?”
대원들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좋아.”
명욱이 지도를 접었다.
“특이사항이 있으면 무전하고. 민정이 네가 지원조에서 잘 듣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상자가 생기면 바로 지원조로 복귀해.”
“넵.”
“출발하자.”
대원들이 조를 짠 대로 모여 걸음을 옮겼다.
* * *
“야, 상호야.”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상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청년을 쳐다보았다. 창을 들고 있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
“너 몇 살이야?”
“열여섯이요.”
“말 놔도 돼. 나도 아저씨 아냐.”
“몇 살인데요.”
“스물여섯.”
중학생한텐 아저씨 맞는 거 같은데.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야, 상호야.”
“……또 뭐요.”
“말 놔도 된다니까. 누나는 몇 살이야?”
“스물둘. 남친 있어요.”
“아니 그건 안 궁금했는데…….”
도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헛웃음을 쳤다.
그들의 앞에서는 예경이, 뒤에서는 성철이 주변을 경계하며 걷고 있었다. 상호가 맡은 곳은 왼쪽. 도현이 맡은 곳은 오른쪽.
왼쪽을 경계하며 걷고 있는데 이번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텐 안 물어봐?”
“아저씨는 딱 봐도 아저씨잖아요.”
“에헤이, 그래도 한번 물어봐줘. 생각보다 젊을지도 모르잖냐. 자, 자. 상호도 한번 맞춰 봐.”
“마흔다섯.”
“마흔일곱.”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냐?”
아마 어느 정도는 본인도 예상했겠지만, 막상 귀로 듣고 나니 딴죽을 걸 기운도 없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상호는 축 처진 성철을 무시하고 경계를 계속했다.
그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던 도현이 중얼거렸다.
“마나가 엄청 많네.”
그 말대로 이 땅에는 마나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운기조식을 하는 만큼의 내공이 체내로 흘러 들어왔다. 온몸의 기문이 다 트여 마치 스펀지처럼 마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며칠만 지내면 지난 몇 달간 쌓아온 내공을 상회하는 양을 쌓을 수 있을 듯했다.
“싸울 때 내공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만.”
“그러게요. 근데 아저씨 그래서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서른아홉. 형이라고 불러. 아직 그런 나이니까.”
“아저씨 결혼했어요?”
“짜식이……. 했지. 애도 있어. 딸 둘에 아들 하나……, 사진 함 볼래?”
“와, 애가 아빠를 안 닮아서 예쁘네요. 몇 살이에요?”
“임마, 눈썹이 닮았잖아, 눈썹이……. 열 살이야. 한 10년쯤 후에는 상호한테 소개시켜 줄지도 모르겠다. 야, 야. 상호야. 사진 함 봐라.”
“…….”
“짜식 저거 들은 척도 안 하네.”
상호는 묵묵히 걸었다.
몬스터를 경계하며 걷고 있지만, 기실은 몇 놈쯤 나타나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가 예경과 함께 갈 수 있는 실력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몬스터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걷기만 하겠구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 * *
촤아악
나무에 피가 튀었다.
상호는 세차게 털어낸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다친 사람 없지?”
“네.”
세희가 검을 털며 대답했다.
그들의 주변에는 늑대를 닮은 몬스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동강이 나거나 피떡이 된 채.
“벌써부터 몬스터가 있네요.”
“놈들한테도 전쟁인 거지.”
예전에는 놈들에게 전선이란 개념이 없었다. 아예 전략과 전술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다. 그만큼 인간을 무시했고, 무시할 만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오만함을 오래전에 한 여인이 깨뜨려 버렸다.
바로 이 땅의 심장부에서.
이제는 놈들도 위협을 느끼고 있을 터.
“나빛아, 지도 좀.”
“네.”
나빛이 가방에서 통신장치를 꺼냈다.
화면에 나온 지도에는 글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저승부대가 정찰하며 적어놓은 메모들.
상호는 한반도와 아르게스의 접경지를 가리켰다.
“여기에 몬스터가 집중돼 있을 거야. 선택지는 세 개야. 대놓고 빠르게 뚫은 다음 넓은 땅에서 숨기. 천천히 숨어서 통과하기. 옆으로 돌아서 가기.”
“……옆으로?”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바다로.”
상호의 손가락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헤엄으로는 한 열여덟 시간 정도 걸려. 열 시간 동안 헤엄쳐서 이 섬에서 쉬고, 또 본토로 여덟 시간 동안 헤엄치고.”
“뭐어?!”
태화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말이 되냐는 듯.
“열 시간? 여덟 시간? 사람은 그러면 죽어!”
“난 돼. 물론 너희가 못할 건 알고 있어. 나빛이 성력에 타서 가야겠지. 잠수함처럼.”
그러면 예상보다 좀 더 빨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섬을 경유할 필요도 없고.
상호는 통신장비를 끄고 나빛의 가방에 넣으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역시 바다로 가는 게 낫겠지?”
“아마도?”
“저도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빨리 바다에 도착해야 했다. 밤이 되면 나빛의 성력이 너무 눈에 띄어버린다. 바다에 자동차만한 초대형 발광해파리가 무더기로 떠다니지 않는 이상은 바로 들킬 게 뻔했다.
“얼른 가자. 놈들이 알아차렸을지도 몰라.”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상호와 아이들은 해안을 향해 이동했다.
* * *
고요하게 뒤척이는 푸른 바다.
상호는 그런 식의 말을 고교 교사가 되고 나서야 알았지만, 굳이 배우지 않아도 바다가 저 혼자 살아 움직인다는 듯한 느낌은 늘 받고 있었다.
저 눈동자처럼 반짝이는 수면 아래에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떨어지는 모든 것을 언제든 받아먹을 준비가 된, 이쪽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삶.
물가로 다가가는 그들의 전투화에 하얀 모래가 묻어났다.
“나빛아.”
“네.”
나빛이 손을 뻗자 바다에 황금빛 막이 나타났다.
공을 눌러놓은 듯 찌그러진 타원 모양. 위쪽에는 뚜껑이 달려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상호와 아이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뚜껑이 닫히고 금색 잠수함이 나아갔다.
“……으.”
태화가 한 차례 몸서리를 쳤다.
날은 아직 밝았지만 깊은 바다의 바닥엔 볕이 들지 않았다. 발아래로 펼쳐진 어둠을 보고 있으면 한없이 그 안으로 빨려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호는 태화의 어깨를 잡고 바닥에 함께 누웠다.
“위에 보고 있어.”
위는 경치가 좋았다.
푸른 유리창에 조각난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닮았다. 이대로 그냥 누워 있으니 꼭 관광을 온 것 같았다. 몬스터도 없고, 그냥 조용하기만 해서.
지윤과 세희도 슬그머니 그의 옆에 누웠다.
“다 눕지 마라, 얘들아. 나빛이 혼자 운전하게 두지 말고……. 아니, 됐다. 내가 일어날게.”
하지만 상호가 일어나자 지윤과 세희도 따라서 일어났다. 꼭 상호와 실로 연결된 인형처럼.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아니 얘들아. 너희 쉬라고 내가 일어난…….”
“쌤이 쉬이소.”
“나빛이는 저희가 놀아줄게요.”
세희와 지윤이 나빛의 곁에 다가앉았다.
상호는 나빛의 뒤편에 있어서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언뜻 보이는 볼의 움직임을 통해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마, 니 표정이 와 그라노.”
“몰라.”
“또 삐순이 됐나. 하이고, 졸업해도 그래 살끼가. 니 계속 그라믄 쌤이 니를 아로 보지 여자로는 안 본데이.”
“모른다구.”
“몰룬다궤에에~.”
누워있는 태화가 팔다리를 버르적거리며 나빛을 놀렸다.
그러자 나빛이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혁구가 날아올라 태화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뺙.”
“……야, 얘 좀 가라 그래.”
“몰라.”
“엄마면 애를 챙겨야 될 거 아냐!”
“꾸꾸는 엄마 맘 다 알아서 괜찮아. 내가 보내려는 곳이 꾸꾸 가는 곳이고 꾸꾸 가는 곳이 내가 보내려는 곳이야.”
“야이씨, 개소리 말고 이 치킨 좀 치우라고!”
“뺙.”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눈을 붙였다.
* * *
“……으음.”
다시 눈을 떴을 땐 수면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햇빛이 옆에서 비스듬하게 내리쬐는 것을 보니 아마 낮 3시쯤. 바닷가에서 출발한 것이 오전 10시 즈음이었으니, 수영보다 훨씬 빠른 잠수함의 속도를 고려하면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할 터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이들은 다 자고 있고, 나빛만 깨어서 통신장비의 GPS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요녀석들이…….’
혼자 둘 거면 그냥 깨우지. 상호는 얼른 몸을 일으켜 나빛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 심심했어?”
“아, 선생님.”
나빛이 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멍한 눈으로 앞을 보았다.
“물고기 보느라, 심심하진 않았어요.”
“애들은 언제부터 잤대?”
“한 시간 된 것 같아요.”
“으음.”
지금 너무 자면 밤에 못 자는데.
통신장비의 화면을 보니 4분의 3 지점쯤에 다다라 있었다. 대략 계산을 해보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
그는 가방에서 플라스틱 포장에 든 조각 케이크를 하나 꺼냈다.
냉장 마법이 걸려서 꽤나 시원했다.
“자. 먹어.”
“어, 이거 태화 거 아녜요?”
“이건 내 거야. 태화 건 따로 있어. 하나 먹으면 됐지 뭘 두 개씩이나 먹을라 그래.”
나빛은 상호가 건넨 케이크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한 입을 먹고는 배시시 웃으며, 조그만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상호에게 들이밀었다.
“맛있어요.”
“너 먹어.”
그러나 손의 높이는 그대로였고, 상호는 결국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나빛이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놀러 온 것 같아요~.”
“그러게.”
둘이서 바닷속을 거니는 것이 썩 좋았다.
전쟁이나 악마 따위는 모두 잊고,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연노랑 햇살을 맞으며, 원해의 새파란 물속을 나아가는 게.
꼭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 같았다.
발밑의 커다란 그늘만 외면한다면.
“나빛아.”
상호가 부르자 나빛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네?”
“선생님이 계속 꿈을 꾸는데…….”
그는 말을 잠시 끊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다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곤히 자는 중이었다.
“거기에 선생님이 항상 보고 싶었던 사람이 나오거든.”
“네.”
“그런데, 그 사람을 꿈에서는 항상 볼 수 있는데…… 꿈에서 깨고 나면 못 봐.”
나빛이 말없이 통신장치를 만지작거렸다.
“나빛이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많이 슬플까?”
“…….”
“나빛아?”
잠깐 딴청을 피운 걸까. 의아해하는 상호의 입술에 나빛의 작은 손이 턱 얹혔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우움.”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마세요. 저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절대 선생님 꿈 꿔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연회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일은, 만들지 말아요…….”
“……그럴게.”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마음대로 되진 않을 수도 있어……. 알지?”
“떽!”
나빛이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탁탁 두드렸다.
“무조건 잘 될 거예요. 그런 말 절대, 절대! 하지 마요.”
“그래도…….”
“떽!”
그 말에 나빛의 머리에서 꾸벅꾸벅 졸던 혁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상호를 향해 달려들어 머리를 마구 쪼기 시작했다.
“뺙! 뺙!”
“아오, 아프다, 혁구아……. 나빛아, 혁구 좀 떼어줘…….”
“제가 보내려는 곳이 혁구 가고 싶은 곳이고 혁구 가고 싶은 곳이…….”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머리에서 피 날 것 같아…….”
“뺙!”
잠수함이 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상호는 혁구의 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
바위로 이뤄진 해안가에는 동굴이 많았다.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장소는 찾기가 어렵다. 이렇게 쉬기 좋은 곳이 있으면 때가 조금 이르더라도 잠을 자두고 출발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상호와 아이들은 절벽에 난 동굴 중 좋은 곳을 찾아 걸었다.
“쌤, 쌤. 여기 어때? 딥따 넓어.”
“거긴 밀물 되면 물 찬다.”
그들은 조금 높은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좁긴 하지만 바다를 향해 트여 있으니, 눈으로도 코로도 찾기 힘들 것이다. 상호는 우비로 쓸 수 있는 조끼를 펼쳐 동굴 입구를 가렸다.
“자. 밥 먹고 자자.”
“엥, 또 자야 돼? 나 안 졸린데…….”
“잘 수 있을 때 자둬야지. 혈 눌러서 재워 줄게.”
“그건 기절 아냐?”
“아냐, 임마.”
지윤의 품에는 뭍으로 올라오기 직전에 잡아둔 물고기가 들려 있었다.
상호가 물고기의 내장을 빼내자 태화가 불을 피우고 검은 결정창으로 물고기를 꿰었다. 추운 계절인데다 북쪽에서 잡아서 그런지, 생선의 몸에서 기름이 줄줄 떨어져 내렸다.
상호는 기름이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성력으로 만든 도마에 생선을 올리고 칼로 썰었다.
“맛이 어떨진 모르겠다.”
“읎어도 맛있게 묵으믄 됩니더. 이 가스나나 따지믄서 묵지.”
“뭐? 내가 따지긴 뭘 따져? 너 내가 잘 먹으면 어떡할래? 쌤, 그거 줘봐, 줘봐. 빨리!”
“보채지 마, 임마. 자.”
“우움…….”
한 입을 먹은 태화는 눈동자를 오른쪽 위로 왼쪽 위로 굴리더니, 제대로 씹지도 않은 것을 꿀떡 삼키고는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케익이 땡기네, 갑자기…….”
“야, 밥부터 먹어. 너 그렇게 편식하다가 식량 다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야, 가방 안 내려놔!”
“뭐 어때! 배고프면 먹겠지! ……어라, 왜 케익 하나밖에 없어?”
“내가 먹었어.”
“우씨, 왜! 나 단 거 땡길 때 먹으려고 했단 말이야!”
“나도 땡기더라고.”
“아아아아아악! 왜! 왜! 평소엔 먹지도 않으면서!”
상호는 풍차를 돌리는 태화를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식량의 양이 충분하긴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미리 대체를 해둬야 했다. 식량을 덜 소비하기 위해서. 또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다행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그와 아이들은 배를 다 채울 수 있었다.
“자자, 이제.”
상호는 생선 대가리와 뼈를 동굴 밖으로 던지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종일 걸을 거야. 푹 쉬어 둬. 자기 힘들면 혈 짚어 줄게.”
세희가 손을 살짝 들었다.
“불침번은요?”
“내일 세희랑 지윤이는 친구들 업고 걸어야 할 거고, 나빛이는 오면서 못 쉬었으니까, 나랑 태화가 교대로 하자.”
“어, 그럼 내가 지금 할래. 나 안 졸려.”
“니 그래놓고 조는 거 아이가?”
지윤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짓자 태화가 발끈하며 불을 뿜었다.
“뭐! 못 믿겠으면 니가 서던가!”
“내는 니가 멀 제대로 하는 꼴을 본 적이 읎다. 졸지 마라. 졸믄 뿔모가지를 확 분질러뿐다잉.”
“흥.”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누울 자리를 찾았다.
습기가 찬 돌바닥이라 눕기엔 좋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딱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바닥에 누운 아이들이 꾸물거리며 그의 곁에 다가왔다.
“……얘들아?”
“저 팔 좀요.”
“지도예.”
“저는 배요, 헤헤…….”
근육이 단단해도 돌바닥보다는 나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상호에게 몰려든 꼴을 본 태화가 쌍심지를 켜고 버럭 소리쳤다.
“뭐야! 이러면 나는 베개 없이 자야 하잖아!”
“얌마, 내가 베개냐…….”
“니는 니 남친 놔두고 와 쌤 팔을 비노. 세희 팔이나 비라.”
“지랄마! 꺼져, 나 불침번 안 해! 야, 천세희! 일어나!”
“뒤질래?”
“선생님, 저흰 자요…….”
“으응.”
상호는 아이들에게 두 팔과 배를 내어준 채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