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483. 전야
“백예경, 백상호, 나효은.”
명욱이 그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참고로 백예경과 백상호는 남매다.”
“어머.”
동그란 안경을 쓴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매가 같이 온 거예요?”
“그렇다는군.”
그 말에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방에 자리한 사람들은 총 열한 명. 상호와 예경, 효은, 명욱을 제외하면 일곱 명. 그중에 여자는 한 명이고 남자가 여섯 명이었다.
안경을 쓴 여인.
“이쪽은 김민정.”
검을 든 사내가 둘, 맨손인 사내가 둘, 봉을 든 남자가 하나.
“박진구, 성태현, 이경준, 오성철, 이재훈.”
그리고 창을 든 사내가 하나.
“서도현.”
소개를 마친 명욱이 상호와 효은을 돌아보았다.
“막내들한테는…… 굳이 누가 몇 살이라고 말해줄 필요 없겠지. 근데 둘 중에선 누가 동생이냐?”
“얘요.”
효은이 상호를 가리켰다.
상호는 반사적으로 반항심이 솟아 효은에게 욕을 뱉을 뻔했지만, 그래도 동생이란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저 샐쭉하게 째려보기만 했다.
그런 그를 보고 민정이라 불린 여자가 쓰게 웃었다.
“벌써 사이가 안 좋은가 보네.”
“상호, 효은.”
명욱이 둘을 불렀다.
“기지에서도 싸우던데. 둘이 자주 그러나?”
“전 가만히 있는데 얘가 시비 거는 거예요.”
“이년이 먼저 X랄해서.”
지켜보던 대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고, 저렇게 예쁜 애랑 싸울 생각을…….”
“어려서 모르는 건지, 누나 때문에 모르는 건지…….”
“…….”
상호는 당신들이 뭘 아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명욱이 먼저 물었다.
“예경. 둘이 언제부터 싸웠는지 알고 있나?”
“으음……. 네에, 뭐.”
예경이 곤란한 듯 웃었다. 명욱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코앞에서…… 보긴 했죠.”
“누구 잘못이었지?”
“어어…….”
상호는 예경이 왜 뜸을 들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효은이 새치기했던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효은의 잘못이 명백한데 왜 효은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지.
곧 예경이 입을 열었다.
“상호요.”
‘……!’
상호는 어이가 없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예경을 돌아보았다.
“……누나?”
“거봐, 개새꺄!”
의기양양해진 효은이 상호에게 삿대질을 했다.
“니네 누나도 그러잖아! 세상에 줄 설 곳 좀 착각했다고 머리끄댕이부터 잡아당기는 새끼가 어딨냐?! 어?!”
“야이 씨…….”
발련아, 새치기해 놓고선 어디 은근슬쩍 날조를 하냐, 라고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예경이 그의 입을 막았다.
상호는 억울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끄……읍읍!”
“물론 효은이도 잘못이 있지만…… 그래도 상호가 조금 더 있다고나 할까. 제가 보기엔 효은이가 용서해 준다면 깔끔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그런가. 어때, 효은. 용서해 줄 수 있나?”
명욱의 말에 효은이 곰곰이 고민하더니, 선심 쓴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의 속이 더욱 들끓었다.
“이 X발, 누가 누굴 용서…… 읍!”
“그래요, 뭐. 내가 누나니까.”
“읍! 읍!”
“상호도 미안했다고 하네~.”
예경이 상호의 등을 내공으로 눌렀다.
바로 이런 상황이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옳고 그름을 제쳐두고 유도리만 찾는 상황. 상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허리를 펴려 했다.
“누나, 나 진짜 누나랑도 싸울 수 있…… 끄윽!”
허리가 앞으로 확 굽혀졌다.
상호에게는 바닥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효은이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사 잘~한다’라는 눈빛으로.
“으……!”
“이제 지난 일은 다 잊는 걸로 하자고.”
명욱이 상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남자 아니냐, 백상호. 사소한 건 잊어버려라. 그리고 효은이 누나니까, 앞으로 조금은 양보해 주고.”
“……끄응.”
마음 같아서는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더 소란을 피웠다가는 부대에서 내쳐질 게 뻔했다. 상호는 원래 예정된 대원이 아니었고, 효은은 필요에 의해 차출된 자원이었기 때문에.
상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좋아.”
명욱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났음에도 명욱은 무언가 말을 하지 않았다. 상호와 효은은 멀뚱히 서서 눈만 끔뻑였다.
의아한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민정이 슬쩍 손을 들었다.
“……저기, 대장님?”
“응?”
“저희 이제 뭐 하면 돼요?”
“아아, 잠깐만 기다려.”
명욱이 시계를 흘끗했다.
“아직 한 명이 덜 와서 말이야.”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왔다.
차갑다면 차가운 인상. 따뜻하다면 따뜻한 인상. 얼굴은 분명 평범한데 어딘가 비범한 기운이 풍긴다. 상호는 한참 동안 청년을 쳐다보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뭐야.’
전투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씻어도 지울 수 없는, 헌터 특유의 찌든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몬스터 한 마리 잡아 본 적 없으리라. 어쩌면 닭이나 물고기까지도.
다른 대원들도 어렴풋이 느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의아해하는 분위기를 명욱도 느낀 듯했다.
“손영주 대원이다.”
명욱의 소개에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우리 부대에 함께하게 됐다.”
“어떤 능력인데요?”
“점.”
그 말에 모든 대원이 눈을 끔뻑였다.
“……점이요?”
“점쟁이 말이야.”
“그거랑, 전투랑, 무슨…… 상관…….”
“전쟁과는 상관이 있지. 나도 점이란 걸 믿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하도 신통해서 안 데려갈 수가 없었어.”
“…….”
상호는 이 저승부대라는 곳에서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무슨 청동기 시대도 아니고 전투에 점쟁이를 데려가고 있나.
‘지금이라도 튀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청년이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네가 제일 의심이 많구나.”
“……예?”
그야 뭐, 표정을 보면 알 것 아닌가. 상호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였다.
영주가 슬쩍 웃었다.
“비밀이 하나 있지만, 여기서는 말 못하고…… 그 눈에 대한 이야기나 좀 해볼까.”
“…….”
상호의 하나 남은 눈이 영주를 노려보았다.
“눈동자 속에 친구가 보이네.”
영주가 뒷짐을 지고 상호의 주변을 둥그렇게 돌았다.
“떠나는 순간이 네 눈에 사진처럼 남아 있구나. 네 눈을 벤 녀석과…… 네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까지.”
그 말에 효은이 움찔하며 상호와 영주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상호는 그런 효은은 안중에도 없고,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 영주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의심을 하는구나.”
영주가 피식 웃었다.
“너는 아마 내 한평생을 의심하게 될 것 같다.”
“…….”
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한 가닥 하는 양반이란 건 알겠다. 그가 툴툴대면서도 더 따지고 들지 않자 명욱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내일 출발 준비해도 괜찮겠지?”
* * *
“……으음.”
상호는 무언가 답답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양옆으로 누군가가 꼭 붙어 자고 있었다. 기척으로 보아 한 명, 두 명, 세 명.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은율아, 이츠키, 다혜야…….”
“우웅…….”
“꾸웅…….”
아이들이 하나둘씩 웅얼거렸다.
“아직 더 자도 되지 않아요……?”
“아니, 자도 되는데…… 왜 내 침대에 있니?”
“그치만, 곧 있으면 선생님 오래 못 보고…….”
은율의 대답에 이어 이츠키가 상호의 위로 꾸물꾸물 올라왔다.
“가시면 저 넷이랑 먹고 자고 싸고 할 거잖습니까.”
“맞긴 한데…… 네 말뜻이랑 내 생각이 같은지는 모르겠네…….”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넷을 먹고, 저 넷과 자고, 저 넷에게…….”
“……아니야.”
농담할 기운이 남았구나. 상호는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나와 봐. 형 좀 보러 가야겠다.”
* * *
“물건 왔어?”
“아이고, 깜짝이야.”
상호가 문을 열고 들이닥치자 의자에서 졸고 있던 도현이 움찔했다.
“얌마, 너는 꼭 인사도 없이 용건만……. 인사가 얼마나 많냐, 좋은 아침이다, 밥 먹었냐, 한마디면 되는 거 가지고…….”
“됐고, 물건 왔냐고.”
“왔지.”
탁자에는 무언가 잔뜩 놓여 있었다. 등에 메는 가방, 허리에 차는 가방, 주머니가 달린 조끼, 허벅지에 두르는 주머니 띠.
도현이 등에 메는 가방을 열었다.
“전투식량이야.”
안에는 에너지바처럼 포장된 전투식량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하나가 한 끼 열량이야.”
“세상 좋아졌네.”
“정량대로 먹으면 다섯이서 일주일은 충분할 거야. 배는 좀 허하겠지만…….”
“……흠.”
사냥은 따로 해야 할 것이다. 많이 먹는 아이가 있어서. 상호는 식량을 하나 꺼내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도현이 조금 더 작은 가방을 열었다.
“이건 통신장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태블릿 PC 모양인데 훨씬 두껍고, 딱 봐도 단단해 보이는 금속 프레임이 위에 둘러져 있었다.
“뭔가 달라 보이네. 전에 쓰던 거랑…….”
“훨씬 나아졌지.”
도현이 통신장비의 전원을 켰다.
“전쟁 땐 마법공학이 없었으니까……. 있다고 해봤자 써먹을 수준도 아니었고. 그치만 이젠 다르지. 야, 상호야. 이거 봐.”
상호는 도현이 통신장비를 다루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이렇게 하는 거야. 옛날보다 훨씬 잘 터질 거래.”
“뭐야, 이거. 원래 쓰던 건 그 계산기 같은 액정이었잖아. 이거 이러면 밤에는 어떻게 써?”
“밝기 조절이 있어. 그리고 이거는 사진도 찍고 보내고 받을 수 있잖아. 전보다 지도 보기 훨씬 편하단 말이지.”
“그건 좋네.”
지명을 일일이 외우는 것보다야 지도에 그림 그려가며 설명하는 편이 알아먹기 쉬울 것이다. 아이들은 옛날 방식엔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이건 카메라. 이건 메신저. 뭐 핸드폰이랑 별다를 거 없으니까 너랑 애들이 못 쓸 일은 없을 거야.”
도현이 조끼를 집었다.
“이건 펼치면 우비가 되는 조끼. 위장에도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발열 마법이 있어서…… 추울 때 입어도 좋고. 잘 때 덮어도 좋고.”
“좋네.”
상호는 주머니가 달린 띠를 집었다.
“이건 뭐야?”
“아, 이건…….”
도현이 주머니를 열어 탁자에 털자 조그만 봉지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봉지 안에는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게 보였다.
한쪽이 비닐로 막힌, 둥그런 고리.
“이거 X발 콘…….”
“물통이야.”
도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외국 특수부대에선 잘만 쓴다.”
“아니 이거 누가 봐도…….”
“당연히 구조는 같지.”
“왜 수통을 안 주고?”
“이게 훨씬 많이 들어가. 비우면 훨씬 작고.”
“…….”
상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자들과 떠나야 하는데 수통이 이 꼬라지라니.
그래도 평소에는 물 마법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쓸 일이 없을 터였다. 유사시에는 대비해야겠지만.
‘그래도 X발…….’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
비닐 수통을 만지작거리는 상호에게 도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 용도로 쓰진 마라. 윤활유 없으니까.”
“……쓰겠냐!”
“따로 챙겨 줘?”
“필요 없어!”
상호는 화딱지가 나서 비닐 수통을 내팽개치고 돌아섰다.
“작전용 장비나 잘 챙겨.”
“그것도 오늘내일 안에 올 거야. 걱정 마. 그런데 너.”
“응?”
도현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겠냐? 애들끼리만 가도…….”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하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들 목숨까지 걸었을 리가 없으니. 상호는 문고리를 잡으며 도현을 흘끗했다.
“세희도 지윤이도 그 시절 나보다 낫고…… 나빛이도 이미 효은이만큼 강해졌어. 어쩌면 더 강할 수도 있고. 태화는…… 마법으로는 민정이 누나한테 안 되지만, 주술도 쓸 수 있고.”
상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누나 몫, 대장 몫만 맡으면 충분해.”
“……그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묻진 않을게. 가서 쉬어. 애들이 계속 찾는가 보더만.”
“그래야지…….”
“근데 진짜 윤활유 필요 없냐? 너 어릴 때 생각해보면…….”
“……필요 없다니까!”
콰앙, 부서져라 닫힌 문이 고통스런 신음을 내었다.
* * *
“으음…….”
예경이 곤란한 듯 웃었다.
“남는 생활관이 없나 보네.”
없었다.
기지 사람들을 달달 볶아서 영혼까지 끌어모아 만든 게 생활관 딱 두 개. 이곳은 원래 저승부대가 묵으라고 있는 기지가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살던 헌터들을 창고에서 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죠.”
“나도 상호랑 자고 싶었는데…….”
예경이 쓰게 웃었다.
“당분간 제때 못 씻고 침대에서도 못 잘 테니까…… 오늘 해두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겠네. 오늘은 날이 아닌가봐.”
“……그러게요.”
상호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아쉬운 기색을 숨겼다.
그때 샤워장 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구름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야.”
효은이 그의 등을 쳤다.
“누나한테 인사 안 해?”
“…….”
“어쭈, 대장 아저씨 말 못 들었어? 누나 대접은 해야지?”
“느금마.”
그 순간 상호의 이마에 예경의 딱밤이 날아들었다.
빠악
“……악!”
“어허, 나쁜말 금지.”
“아니……, 그건 쟤가 먼저……!”
“그래도 상호는 안 돼.”
“……!”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예경을 어찌할 순 없고, 상호는 가슴만 퍽퍽 두드렸다. 답답한 이 마음을 풀 데가 제 몸밖에 없어서.
효은이 예경에게 물었다.
“근데 둘이 왜 나와 있어요?”
“응, 생활관을 상호랑 같이 쓰고 싶어서……. 조금 돌아다녀 봤는데, 역시 잘 안 되네.”
“굳이요? 그냥 따로 자면 되잖아요. 꼴랑 하루인데.”
“상호가 나 없으면 잠을 못 자.”
“아니…….”
그렇게 말하면 이 인간이 놀릴 것 아닌가. 상호는 황급히 부정하려 했지만 효은이 코웃음을 치는 게 더 빨랐다.
“아 그래요? 누나 없으면 잠을 못 자는구나~.”
“아니라고, 등신아! 그런 거 아냐.”
“누나 없으면 무서워? 무서워쪄? 우리 상호 어떡해~. 우웅~.”
상호의 손이 효은의 머리채를 향했다.
그러나 하얀 머리카락에 손이 닿기도 전에, 예경이 재빠르게 손을 뻗어 상호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허~.”
“……누나!”
상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거 놔요, 진짜! 저 X발년 아가리 찢어버릴라니까!”
“어허~. 상호야, 나쁜말 안돼~.”
예경에게 붙잡힌 그에게 효은이 혀를 쏙 내밀더니, 새침한 걸음으로 생활관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오……!”
상호는 뒷목을 잡았다.
저년이 먼저 시비를 걸지만 않아도 욕이나 손찌검을 할 일이 없는데. 대체 예경이 왜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누나!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진짜!”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건 내가 아니라 쟤가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누나, 내가 이유없이 쟤 머리채 먼저 잡은 거 본 적 있어요? 지나가다가 갑자기 X발년이라고 하는 거 본 적 있어요? 없잖아요! 다 쟤가 먼저 하는 건데……!”
“그래두~.”
“……으아아아아악!”
벽에 머리를 박으려는 상호를 예경이 붙잡았다.
“안돼, 상호야~. 머리 나빠져~.”
“제발, 제발 누나! 나 진짜 속 터져요…….”
상호는 눈물이 철철 흐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누나. 누나 그거 알아요? 저년이 누나 욕한 거?”
“응? 효은이가? 나한테는 그런 적 없는데…….”
“쟤는 우리 남매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저번에 엄마 없는 티를 내네 어쩌네 그랬잖아요. 그럼 뭐예요. 누나한테도 엄마 없다고 한 거예요!”
그 말에 예경이 맹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더니, 곧 고개를 퍼뜩 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잉?”
“오잉이 아니라아아아!”
화를 내야 할 거 아니냐, 이 답답한 누나야. 상호는 하도 속에서 천불이 나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었다.
“누나, 누나, 나 진짜 저 X발년 한대만 때리게 해줘요. 딱 한 대만. 응? 응? 진짜 딱 한 대면 되니까!”
“어허, 그건 안 돼~. 효은이가 말실수한 거겠지.”
“실수면 생각이 없는 거고! 아니면 인간이 쓰레기인 거고!”
“자, 자…….”
예경이 상호를 안았다.
화가 나서 붉었던 상호의 뺨이 점차 다르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누나, 내 말 좀…….”
“참아야 어른인 거야.”
예경의 품이 상호의 얼굴을 온통 감쌌다.
“누나는 어른스러운 상호가 좋아.”
“…….”
“화 다 풀렸지?”
“……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화가 나든, 누구한테 화가 나든, 이렇게 예경에게 안겨 있으면 봄볕에 눈 녹듯 사르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예경이 키득거리며 상호의 등을 토닥였다.
“들어가자. 대원들한테 같이 자도 되냐고 한번 물어볼게.”
* * *
“야.”
효은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은근슬쩍 보지 마.”
“안 본다고, 개껌딱지야. ……악!”
이불을 뒤집어쓴 상호의 머리에 예경의 꿀밤이 날아들었다.
“나쁜말 금지!”
“아니, 이것도 안 돼요……?”
“사람 몸 가지고 놀리면 안 돼!”
“쟤는 나한테 맨날 애꾸라고 부르는데…….”
상호는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민정이 허락해준 덕분에 예경과 함께 잘 수 있게 되었다. 효은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치긴 했지만, 결국은 예경과 민정의 설득에 넘어갔다.
어째 민정이 더 열심히 설득한 것 같기도 했지만.
여자들이 옷을 다 갈아입자 예경이 상호의 이불을 내렸다. 그는 예경과 효은과 민정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뭐요.”
“아니, 그냥.”
상호도 이미 이불 속에서 옷을 다 갈아입은 채였다. 면티에 반바지. 여자들도 대략 그와 비슷했다.
예경이 상호를 끌어안고 침대에 엎어졌다.
“자자~, 자자~. 내일 출발이니까 일찍 자야지~.”
“누나, 누나, 숨막혀…….”
“불 끌게.”
민정의 말과 함께 전등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곧 양옆의 침대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코앞에서는 나지 않았다.
“상호야.”
“네.”
“잠이 안 와?”
“……조금.”
“누나돈데.”
달빛이 비추는 자리에서 예경이 빙긋 웃었다.
“상호야.”
“네.”
“아직 화났어?”
“아뇨.”
“화난 것 같은데.”
예경의 손이 상호의 손을 잡아 그녀의 머리로 이끌었다.
“머리채 잡을래?”
“……네?”
어안이 벙벙해하는 상호에게 예경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오늘 화난 거, 누나한테 다 풀어도 돼.”
그 말뜻을 알아들은 상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양옆에 사람들이 자고 있는데.
“그치만…….”
“소리 내면 안 돼.”
예경이 이불을 끌어올렸다. 그들의 머리 위까지.
“내일은 출발해야 하니까, 일찍 끝내자?”
“……네.”
상호는 예경의 머리채를 잡았다.
* * *
‘뒤지게 해댔었지.’
상호는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날은 밤을 지새웠었다. 화가 좀 많이 나서. 결국에는 다음 날 아침까지 한숨도 자지 못해 졸린 몸을 이끌고 첫 작전에 나갔었다.
오늘도 딱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오늘은 같이 자면 안된다니까…….’
그의 곁에는 또 은율과 이츠키, 다혜가 누워 있었다. 그저께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그의 몸이 작고 짧다는 것.
오늘이 은호가 된 날이었고.
내일이 출발하는 날이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때 밀려날 텐데……. 굴러떨어지는 건 아닌가 몰라.’
한숨이 푹 나왔다.
그래서 오늘은 같이 자기 곤란하다고 했는데, 그래도 아이들은 기어코 침대로 기어들어 왔다. 마지막 날만큼은 무조건 같이 자야 하겠다나.
덕분에 자면서도 그를 껴안으려는 아이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얕은 잠을 깨고 자고 수없이 반복하는 중이었다.
‘……익숙하지, 뭐.’
그 시절에도 그랬으니까.
그와는 반대로 아이들은 잠시도 깨지 않고 아주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아침에 은호를 데리고 죽어라 놀았더니 진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그는 다혜와 이츠키, 은율을 돌아보았다.
‘다들…….’
조그만 손이 셋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잘 지내야 해.’
앞으로도 쭉.
능력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해낼 것이다. 그가 걱정하지 않아도 분명히. 상호는 확신을 갖고 눈을 감았다.
그리운 포근함이 그를 잠으로 이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