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482. 말할 수 없는 비밀
“오동통통~ 쫄깃쫄깃~.”
가느다란 손가락이 말랑한 볼을 잡아당겼다.
“낭심 강상호!”
“……놔라.”
“잇힝~.”
태화는 들은 척도 않고 상호를 안아 빙글빙글 돌았다.
드디어라고 해야 할까. 마침내 은호가 되어 버렸다. 상호는 여려진 팔다리가 맥없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났구만…….’
그동안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더니 아주 살판이 났다.
그렇지만 상호도 태화가 장난치는 게 아주 싫진 않아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태화의 품에 얼굴을 푹 묻었다.
빙빙 돌던 태화가 우뚝 멈췄다.
“맘마 줘?”
“……갑자기 뭔 소리야, 임마.”
“아냐? 아님 말고. 손이 가요 손이 가~.”
“과자가 먹고 싶으면 황금마차를 가……, 야, 야, 임마!”
“낭심 새우땅! 어라, 진짜 새우땅이네…….”
“손 안 치워?! 야!”
“자꾸만 손이 가는 걸 어떡해애애!”
“야……!”
* * *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호의 비명을 들은 아이들이 서둘러 달려왔지만, 다들 어려진 상호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귀여워할 뿐, 상호가 자유를 얻는 데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활관으로 들어온 세희가 상호와 아이들을 보고 당황했다.
“……선생님?”
“응.”
상호는 해탈한 표정으로 지윤과 다혜의 품 사이에 끼어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세희는 시원스레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웃거렸다가, 이내 한숨을 폭 쉬고는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일단 잠깐 나와 보세요.”
“으응. 얘들아, 이거 놔 주…….”
“주세요~ 해야제.”
“므아우아웅.”
“주세요…….”
지윤과 다혜는 그제서야 상호를 놓아주었다.
그 옆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던 이츠키와 은율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와 보세요.”
“으응…….”
애들 앞에서 못 할 말이 있는 걸까. 상호는 반은 의아, 반은 초조해하며 세희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세희가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선생님.”
“응.”
“아직 안 말하셨어요?”
그 말에 상호는 세희의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응.”
“미쳤어요?”
“켁…….”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닌가. 한 방 먹은 상호의 어깨가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희는 따져 물었다.
“왜요?”
“타이밍을 놓쳤어…….”
말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은 출발 전날까지 말하지 못했다.
한심하게 보여도 할 말이 없다. 고개를 푹 숙인 상호의 뺨을 세희가 잡았다.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치만 요즘 계속 분위기가 밝아서……. 거기다 대고 말할 수가 없더라. 그리고…….”
상호는 말을 깨끗이 맺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리고…….”
“그리고요?”
“나도 너희 웃는 걸…… 더 보고 싶었어.”
세희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말은 해야죠…….”
“그치…….”
아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데려갈 사람은 세희, 태화, 나빛, 지윤. 세희에겐 이미 한 판 뜨면서 말했고, 태화에게도 평소에 말해놓긴 했다. 나빛은 필시 무조건 따라오려 할 것이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지윤.
지윤도 아마 따라오려고 하긴 하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가자는 말을…….”
“그냥 말하면 돼요.”
세희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선생님 원망하지 않으니까.”
“……그럼 다행이지만.”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저녁 먹고 말해 볼게…….”
“너무 늦는 거 아니에요?”
“지금 말하긴 좀 그래…….”
“저녁에도 말하기 좀 그렇겠죠.”
“아냐, 저녁에는 꼭 말할게…….”
“꼭이에요.”
세희는 아이를 혼내듯 상호의 얼굴 앞에 검지를 세워 보이고 일어났다.
세희의 말이 맞다. 빨리 말하는 것이 옳다. 그래도 상호는 오늘 하루만은 아이들과 웃고 지내고 싶었다.
‘저녁에는 진짜, 진짜로 말해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다짐하며 세희와 함께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 * *
“……왜.”
세희는 어이가 없어 멍하게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아직도…… 말씀 못하셨어요?”
“……응.”
어른으로 돌아온 상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녁이 되면 말해야지, 밤이 되면 말해야지, 자기 전에는 말해야지, 벼르고 별렀는데 결국 다음 날까지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와 세희가 자리한 탁자 옆에는 도현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 말하고 가게?”
“그건…… 좀…… 그렇겠지.”
“다음번 기다려야 되겠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바로 출발하겠다 호기롭게 말해놓고는 겁이 나서 준비도 못 했다. 누워있는 민정이 알았다가는 속이 상하다 못해 썩어들어갔을 터였다.
진땀을 흘리는 상호에게 세희가 물었다.
“선생님.”
“응…….”
“어차피 해야 되는 거면 그냥 하면 되지 않아요?”
“……그렇지.”
이제 상호의 머리는 탁자에 박히기 직전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었을까. 도현과 세희는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상호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호야, 너…….”
“응.”
“효은이한테는 말 했냐?”
“……아니.”
“연락은 해?”
“…….”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상호가 입을 닫고 있자 도현이 뒷목을 잡았다.
“야 너 임마. 알만한 놈이 임마. 애인을 그렇게…….”
“……걔한텐 말 안 해도 돼.”
“야, 말이 돼?! 그렇게 중요한 걸……. 넌 예경이가 그러면 화냈으면서 정작 너는 그래?”
“…….”
이 또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상호를 세희가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애인이시잖아요.”
“걔랑은 좀 복잡해…….”
상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이들한테 말하기도 겁나고. 효은에게 말하기도 겁난다. 각기 다른 이유였지만 답답하고 한심한 건 매한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어쨌든 출발은 미룰 수밖에.’
잠을 자고 나면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나중에 얘기하자. 머리가 복잡해……. 어차피 시간은 또 생겼으니까. 그 안에 해결하면 되잖아.”
“그러다 다음번에도 말 못하세요.”
“…….”
“오늘 말하셔야죠.”
세희의 고요한 눈빛이 그의 속을 헤집는 듯했다.
감정이 동요하면 속마음을 들킬지도 모른다. 상호는 세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생각을 비우고 문가로 향했다.
“노력해…… 볼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는 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 * *
아침의 부대는 제법 한가로웠다.
밥이 좀 맛대가리가 없긴 했지만, 따로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저냥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곳 밥 맛없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오늘은 조금 일찍 먹어야 했다.
‘무작정 따라간다 하긴 했는데…….’
상호는 양치를 하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좀 쫄리긴 하네.’
예경과 싸운 다음 날, 명욱이란 사내가 그들을 데려가기로 한 날.
무슨 임무를 맡는 부대이기에 그딴 이름을 붙였는지. 밥은 똑바로 먹을 수 있을지. 잠은 잘 수 있을지.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조금은 겁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안 따라갈 건 아니지만…….’
상호는 손목을 흘끗했다.
양쪽 손목에 시커멓게 피멍이 남아 있었다. 어제 예경에게 강기로 얻어맞은 곳이었다. 덕분에 칫솔질도 쉽지 않았다. 아침 먹을 때도 젓가락질은 거의 하지도 못했고.
치료를 받아야 하겠는데.
‘……썅X.’
그 망할 인간을 또 찾아가야 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보나마나 또 X랄 염병하면서 안 해준다 하겠지…….’
그렇게 씹어대다가, 문득 어제 효은이 한 말이 기억났다. 너는 치료받으면서 고맙다는 이야기 한 번을 안 했다던.
상호는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았다.
‘……쳇.’
한 번쯤은 말해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좀 있으면 떠날 테니, 조금 쪽팔려도 하루면 끝. 그 싸가지 없는 쌍판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양칫물을 뱉고 세면실을 나왔다.
* * *
“……끄응.”
효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제의 그 일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려서는 밤새 뒤척이기만 하고 잠을 통 못 잤다. 그래서 이미 아침이 되어버린 이불 밖의 빛과 소음을 무시하고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아침밥도 거른 채.
생활관 문 열리는 소리가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우웅…….”
“우웅 이X랄 하고 있네.”
‘……?!’
효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뚜벅뚜벅 걸어온 상호가 효은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치 제 원래 생활관인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곳이 여자 생활관이라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나가, 미친놈아! 어딜 들어오는 건데! 야, 내 침대 앉지 마! 꺼져! 꺼져!”
“드럽게 시끄럽네.”
상호는 혀를 차고 팔을 내밀었다.
“빽빽대지 말고 치료나 해.”
“뭐?”
고개를 돌린 채 급하게 눈곱을 떼던 효은이 표독하게 그를 째려보았다.
“또 고맙다고 안 할 거잖아?”
“치료를 해줘야 고맙다고 할 거 아냐.”
상호는 팔을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보챘다.
“해줘.”
“…….”
효은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다가 이불을 걷어냈다.
성력을 담은 손이 상호의 손목에 얹혔다. 금색으로 빛나는 온기가 흘러들자 피부 밑에 고인 피가 서서히 사라지고, 찢어진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야.”
“뭐.”
“종아리도.”
“뭔 X랄을 했길래…….”
툴툴거리면서도 치료는 제대로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도, 다리도 멀쩡해졌다. 멀쩡해진 걸 넘어 다치기 전보다 더 가벼울 정도였다. 상호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태를 점검했다.
‘효과는 확실하네.’
그리고 효은을 흘끗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했던가. 막상 치료를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니 목구멍이 턱 막히고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X발.’
그래서 그냥 안 했다.
상호가 말없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효은이 쌍심지를 켰다.
“야, 개새꺄. 또 그냥 가냐?”
“누가 그냥 간대?”
상호는 콧방귀를 뀌고 효은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효은이 숨을 학 들이키고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야. 너, 너 지금 뭐…….”
“피하지 마.”
상호의 손이 효은의 뺨을 잡았다.
불이 난 듯 뜨거웠다. 손가락이 익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상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효은을 향해 더욱 가까이, 가까이 다가갔다.
효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가만있어 봐.”
“…….”
효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도 벌벌 떨리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그런데 다음 순간.
‘……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손길이 눈썹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뜨니 상호가 손가락에 묻은 눈곱을 바닥에 튕기고 있었다. 효은은 얼이 빠져서 멍한 얼굴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너…….”
“됐냐? 눈곱 떼 줬으니까 됐지?”
“뭐?”
“이걸로 퉁쳐.”
상호는 혀를 차고 문가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이제 너한테 치료받을 일 없을 거야.”
“뭐? 왜?”
“오늘 다른 데 가서.”
그 말에 효은의 발그레한 얼굴에서 연회색 눈이 끔뻑였다.
“어디 가는데?”
“니가 알아서 뭐하게?”
상호는 문을 열고 효은을 돌아보았다.
“뭐, 어쨌든…… 니랑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잘 먹고 잘 살으라고.”
“……결국 끝까지 고맙단 말은 안 하네.”
효은이 코웃음을 쳤다.
“꺼져. 중딩 새꺄.”
“흥.”
상호도 콧방귀를 뀌고 문을 닫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뒈지지 말고. 다시 보진 말자.”
대답 대신 문틈 사이로 가운뎃손가락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와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천명욱이란 사내와 약속했던 출발 시간이 되어 있었다.
‘X바, 빨리 가야지…….’
예경이 그를 떼놓고 가버릴지도 모른다. 상호는 황급히 복도를 달려 생활관으로 달려갔다.
* * *
“예?”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누가…… 더 간다고요?”
“어.”
명욱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 오기로 했는데, 어디서 뭘 하는지…….”
“…….”
상호와 예경, 명욱은 현관에 멀거니 서 있었다.
짐까지 다 싸서 가져왔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니. 상호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버리고 가죠.”
“하하…….”
명욱이 피식 웃었다.
“시간개념이 부족한 건 확실히 곤란하지만…… 그럼에도 데려가야만 하는 대원이라서.”
“……쯥.”
못마땅해 다리를 건들거리는 상호에게 예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명욱이 말한 대원은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상호의 두 눈썹 사이에선 골이 깊어져 갔다.
‘어떤 새끼야…….’
이 기지에 이만큼 양심 없는 인간이 둘이나 있었을 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마구 씹어대는데, 누군가가 느릿하게 중앙 현관에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효은이었다.
‘……?’
상호는 짐을 바리바리 싸든 효은을 올려다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쟤가 왜 저기서 나오는지.
“……너 뭐냐?”
“뭐.”
효은이 한쪽 눈썹을 치켰다.
“난 가면 안 되냐?”
“아니…….”
얼이 빠져 있던 상호는 효은의 뻔뻔한 표정을 보고 정신이 확 들었다. 늦은 게 누구인데 얘는 왜 이렇게 당당한가.
이빨이 부드득 갈려나갔다.
“야, 너…… 왜 이제 왔는데?”
“밥은 먹어야 될 거 아냐?”
“너 아까는 자고 있었잖아. 야, 미친년아. 약속이 있으면 미리미리…….”
상호의 말을 듣던 예경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상호야? 너 효은이 자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생활관에 들어가서.”
“응? 효은이 자고 있는 생활관에 뭐 하려고 들어갔어? 혹시…….”
“치료받으려고 그랬어요! 이상하게 말하지 마요.”
“그렇구나아~.”
또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명욱과 효은을 번갈아 째려보았다. 설마하니 명욱이 기다리던 부대원이 이 인간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얘도 부대원이라고요?”
“응.”
명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가능한 신앙인이 필요해서. 치료 실력도 비교가 안 된다던데.”
“…….”
그렇긴 하다. 상호 자신이 제일 많이 느껴봤다. 하지만 인정하긴 싫어서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명욱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준비는 다 됐나?”
그때 별안간 효은이 짐을 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응?”
“양치만 좀 하고.”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야이 X빨련아. 양치는 무슨 양치야! 안 집어넣어?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건데, 개년아!”
“거 얼마나 기다린다고 X랄이야? 너 얼마나 기다렸는데? 몇 분 몇 초 기다렸는데? 남자새끼가 쪼잔하게 그거 조금 못 기다리냐?”
“야, 너 하나 기다린다고 나랑 누나랑 이 아저씨랑 셋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닌 뻔질나게 걸어오면서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안 하더라? 니 그래놓고 아직도 할 말이 있냐? 양심이 있냐?”
“참나…….”
효은은 콧방귀를 뀌고는 한마디를 툭 내뱉으며 세면장으로 향했다.
“엄마 없는 티 오지게 내네.”
“…….”
상호의 손이 효은의 머리채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그런 일도 있었지.’
상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세희에게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지 어느덧 나흘째. 그간 몇 번의 작은 전투를 제외하고는 딱히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작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효은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전쟁 끝난 뒤에 머리채를 더 많이 잡은 것 같은데…….’
주로 침대에서.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손끝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효은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전화를 한다 해도 작전에 관한 내용은 말해주지 않겠지만.
그냥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그치만 안 하던 짓을 하면 의심할 테고…….’
무언가 핑곗거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 이성적으로는 통화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안 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냥 효은이 마지막 작전에 관한 걸 모르게 두고 싶었고, 또 상호 자신의 마음도 심란해질까봐.
그렇지만 자꾸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꼭 마음속의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전화를 걸라고.
‘……으음.’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상호의 눈이 흔들렸다.
아르게스로 출발하면 더 이상 핸드폰은 쓸 수 없다. 마법공학 통신장비를 들고 가긴 하지만, 소리를 함부로 낼 수 없는 상황이 많을 테니.
연락을 한다 해도 통신장비와 통신병을 건너 말을 전하는 게 한계일 것이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
‘…….’
상호는 결국 번호를 눌렀다.
아마 두세 번은 걸어야 받을 것이다. 그런 여자니까. 상호는 지레짐작하며 연결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통화가 연결되어 살짝 움찔했다.
‘빨리 받네.’
늘 남을 기다리게 하는 여자였는데.
전환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치, 굳이 따지자면 귀치를 살피며 가슴을 졸일 뿐.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효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남을 기다리게 하는구만…….’
결국은 상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보세요.”
[…….]
“강상호인데요.”
[…….]
“혹시 거기 나효은이라는 사람 있으신지…….”
[…….]
“없으면 끊을게요.”
[……새꺄.]
효은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뒤질래?]
“바빴어.”
[바쁘다고 연락을 다 씹어? 문자 한 번을 못해? 너 나 관리하냐? 너 설마 밀당이라고 이러는 거야?]
“응.”
[개새끼…….]
상호는 낄낄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안. 미안해. 그래도 난 사람 기다리게 하면 이렇게 사과하잖아.”
[사과하면 다냐? 넌 보면 뒤졌어, 진짜. 그래서 뭐 할라고 전화했는데? 넌 볼일이 있어야만 연락하잖아. 넌 늘 그랬어 개새끼야. 생각하니까 화나네? 이 X발새끼 전쟁 끝나니까 코빼기도 안 보이고 살다가 나빛이 병 물어본다고…….]
“에이, 그런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고…….”
효은이 갑자기 풀악셀을 밟으며 말을 쏟아냈지만, 그는 가볍게 흘려 넘기고 말을 이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뻥치지 마. 니가 그런 인간이냐?]
“오늘은 진짜야.”
그 말에 효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괜한 말을 했을까. 상호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냥 전화한 거야, 그냥……. 심심해서. 요즘 전투가 없어서 한가해가지고…….”
[그래?]
“응.”
[이기고는 있냐?]
“글쎄…….”
놈들이 아예 물러난 것인지, 웅크린 채 기회를 엿보는 중인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악마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란 사실.
“당장은 괜찮아. 근데…… 더 이상 헌터가 없어. 있는 헌터는 이미 다 긁어모아서……. 잠깐만, 근데.”
문득 생각이 났다.
“설미 누나한테…… 못 들었어?”
[들었지.]
효은의 목소리엔 한기가 서려 있었다.
[니가 나한텐 안 오고 설미한테만 왔다 간 것도 다 알고 있지.]
“……누나가 아니라 학교에 갔다 온 거지.”
[아 그래? 미진이였어? 그쪽도 아닌가, 교장선생님?]
“야, 교장선생님은…….”
어디선가 해련이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 밖이나, 창문 밖에서.
상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고쳤다.
“어차피 나 있는 곳으로 오게 되어 있었어. 누구 만나러 간 게 아니야, 애초에……. 나빛이 학교 축제 데려간 거였어.”
[그래?]
“응.”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야.”
[뭐.]
“너는 요즘 뭐해?”
[나 꼬맹이랑 할머니랑 화투 치면서 놀지.]
“…….”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냐. 상호는 한숨을 쉬다가 창문 밖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야. 나 있잖아.”
[응.]
“요즘 자꾸 옛날 꿈을 꾸거든.”
효은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는 말을 이었다.
“거기 니가 나오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넌 솔직히 맞을 만했던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싸가지가 없었는지…….”
[뭐래, 븅신아. 다 니가 X랄했던 거지.]
“너 기억 나? 옛날에 있었던 일들 다?”
[너보단 잘해.]
“몇월 며칠 몇시 몇분 몇초인지 다?”
[뒤질래?]
그런 걸 따졌던 게 바로 너였다,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상호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의 귀에도 간신히 들릴 만큼.
“……고마워.”
[뭐?]
효은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전화 잘 안 들려!]
“고맙다고.”
[갑자기 뭐가?]
“그냥. 다.”
그 말에 효은은 말이 없다가,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누구 임신시켰냐?]
“……그런 거 아니야.”
[이 새끼 왜 갑자기 불륜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 딱 그건데. 불륜해놓고 여자한테 미안해가지고……. 아냐?]
“아니라고, 진짜 아냐.”
상호는 혀를 차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말해두고 싶었어.”
[……참나.]
효은이 콧방귀를 뀌었다.
[전쟁이나 빨리 끝내고 찾아오셔. 시골도 이제 질리니까.]
“그래야지.”
[언니랑 적당히 치고.]
“……응.”
[애들 건드리지 말고.]
“…….”
[전화 좀 해.]
이제 하지 못하게 될 텐데.
상호는 한참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씩 웃고 대답했다.
“그래.”
지어낸 거짓말 목록에 또 몇 개를 추가하면서.
“다음에 또 연락할게.”
[……뒈지지 마.]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이러다간 죽는 날까지 거짓말만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상호는 핸드폰을 꼭 쥔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듣고 싶은 목소리는 들었다.
‘이제 하나 남았군.’
거짓말은 하더라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그는 도현에게 방송을 부탁하기 위해 번호를 눌렀다.
* * *
“그러니까…….”
태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번 은호 된 날의 다음 날……에 출발한다고?”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통제실 옆 도현의 방. 탁자 주변에는 상호의 제자들과 해련, 도현이 서 있었다.
태화가 재차 물었다.
“가는 사람은 나랑, 얘네 셋이랑…… 쌤만?”
“응.”
“기간은…… 일주일?”
“응.”
“목표는…….”
“악마놈들 대빵.”
그 말에 은율과 이츠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세희는 태연하고, 나빛은 의연하고. 지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고, 태화는 조금 멍한 눈으로 상호를 바라보는 중.
그리고 다혜는.
“……아으!”
상호를 향해 무언가를 따지고 있었다.
굳이 세희에게 전해듣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았다. 상호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다혜는 안 돼.”
“느악?!”
“말했잖아. 의사소통이 안 되면 작전 못 한다고……. 다혜는 여기 남아서 내가 하던 일들 맡아. 교장선생님이랑 같이.”
“꾸웅…….”
다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고개는 끄덕였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이츠키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승산은 충분합니까?”
“…….”
상호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 있게 답하고 싶지만, 실제로도 자신이 있었지만, 또 따지고 보면 근거가 있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솔직히 승산이 높지 않았다.
“하기 나름이지.”
물론 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승산이 높을 수 없는 이유는, 악마를 죽일 수 있는 건 상호인데 악마의 눈은 태화에게 있다는 사실.
전투에 필수적인 요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
“승산이 높든 낮든 해봐야 하는 거야. 그놈이 우리한테 연습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잖아. 전에는 정보가 충분치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적어도 정보는 충분해.”
잘 찌르면 죽는다.
그 간단명료한 정보 하나면 충분했다.
“태화는 당연히 가야 하고, 그놈하고 싸우기 전엔 내 상태가 정상이어야 하니까 신앙인도 당연히 가야 해. 그리고 나빛이는 신앙인 중에서 제일 잘 싸우지. 그치만 내가 이 둘을 동시에 지키긴 힘드니까, 나빛이를 지킬 사람이 좀 더 필요했어. 그게 세희랑 지윤이야.”
설명을 마친 상호는 은율, 이츠키, 다혜, 해련과 차례대로 눈을 마주쳤다.
“뭔가 더 보충해야 할 사안이 있나?”
“지윤이는…….”
해련이 지윤을 흘끗했다.
“아직 이르지 않나, 싶은데.”
맞는 말이었다.
보조를 맡은 태화와 나빛을 제외하고, 주 전력인 상호와 세희에 비하면 지윤의 실력은 아직 부족했다. 아무리 초강기를 쓰고, 수천 마리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더라도.
그러나 상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윤도 세희처럼, 떼놓고 가면 쫓아올 아이라서.
“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해련이 검지를 들어 강기를 피웠다.
“나도 이제 초혼강기 쓸 줄 아는데…….”
“그러니까 다혜랑 같이 악마 잡으라는 거예요. 이츠키한테도 눈은 있지만 악마의 심장은 못 보니까…….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면 혼자서는 못 막아요.”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민정도 없다.
모두를 지키러 가는데 정작 지킬 모두가 사라지면 의미가 없으니. 상호가 데려가는 인원은 최소여야 했고, 남는 인원은 최대여야 했다.
상호는 다른 넷을 돌아보았다.
세희, 태화, 나빛, 지윤.
“너희는 괜찮겠어?”
“네.”
“응.”
세희가 즉답하고,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뭐, 이미 한 번 죽었었는걸. 세상을 구하는데 쌤이 함께면…… 난 안 갈 이유가 없지.”
“저도요.”
나빛이 상호를 바라보았다.
“저도 안 갈 이유 없어요.”
“그래.”
남은 사람은 한 명.
상호는 지윤을 돌아보았다.
“지윤이는?”
“…….”
지윤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였다. 상호는 잠시 기다렸다가 엄지로 문가를 가리켰다. 지윤과 단둘이서만 이야기할 생각으로.
“지윤아, 잠깐 나와서…….”
“글쎄예.”
지윤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솔직히 겁나는디…….”
고요한 눈빛의 끝은 약지에 끼운 반지에 걸려 있었다.
“아부지도 그랬겠지예.”
“아니.”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난 본 적 없어. 지윤이 네 아버지가 겁내는 거. 만약 겁이 난다 했더라도…… 너희 생각하면 싹 사라지셨을 거야. 절대.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도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반지를 보는 지윤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맺었다.
“만약 겁이 난다면 안 따라오는 게 맞다. 네 선택이야.”
“……그렇습니꺼.”
반지 낀 손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라믄 겁 안 납니더.”
“……그래.”
상호는 모두를 쓱 둘러보았다.
“그럼 결정난 거야. 출발은 내가 어려진 다음 날……, 같이 가는 사람은 세희, 태화, 나빛이, 지윤이. 이대로 작전을 짤 거고, 갑자기 큰 전투가 생기거나 하지 않는 한은 바뀔 일 없을 거야. 너희도 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해도 되지?”
“……네.”
“……므앙.”
은율과 이츠키,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은 했지만,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가라앉는 건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보기가 싫어서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호는 애써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난 한 번 해봤고…… 이번에도 될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거니까. 너희가 걱정해 봤자 내가 이미 다 해본 걱정이야.”
“선생님.”
“응?”
은율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거짓말하면 티가 나요.”
상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
“선생님이 거짓말할 땐, 선생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버려요……. 아, 선생님이 거짓말하시는구나. 말하기 싫어하시는구나. 우릴 속이면서까지 숨기셔야 하는 게 있구나……. 지금 여기도 저 말고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래?”
그는 애써 웃었다.
“난 잘 몰랐네……. 그렇게 티가 나? 그치만 오늘은 거짓말 안…….”
“오늘 거짓말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응?”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어리둥절해진 상호의 눈이 빠르게 끔뻑거렸다.
“……그럼?”
“그런데 계속 그 표정을 짓고 계세요.”
은율의 시선이 상호의 얼굴을 훑었다.
“뭔가를 숨기는 표정, 웃다가도 금방 쓸쓸해져 버리는…….”
“…….”
말이 아니라 표정으로 드러나다니.
말에서 드러날까 걱정해서 효은에게도 연락 안 하다가 오늘 하고 생각보다 의심을 안 받은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었는데. 결국 얼굴 마주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상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다가, 흔들림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구나.”
“숨기는 걸 다 말씀해 주실 필요는 없지만…….”
은율이 눈을 내리깔았다.
“다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저희가 걱정하는 것도 어쩔 수 없어요.”
“……그렇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응. 네 말이 맞아. 내가 숨기는 게 많은 것도 사실이고…… 너희가 걱정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게 맞지.”
그래도 숨기는 걸 말해줄 순 없는 법이라.
상호는 엷은 한숨을 쉬고 씩 웃었다.
“미안하다. 그걸 말해줄 순 없고……. 너희한테 계속 걱정하라고 하는 거랑 똑같겠지만…… 그래도 말해줄 순 없어. 그치만 이건 약속할게.”
“어떤…….”
“걱정 안 해도 돼.”
그 목소리에는 웃음기도, 쓸쓸함도 없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 말라는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전혀. 전혀 할 필요가 없어. 지금 너희가 하는 모든 걱정, 열흘 후면 싹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하지 마. 그냥 하지 마.”
“그래도…….”
“하지 마.”
상호의 단호한 말에 은율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그 말이 먹혔을까. 조금 전보다는 표정이 약간 밝아진 듯도 했다.
“……네.”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이 정도면 됐겠다. 상호는 다시 씩 웃고 엄지로 문가를 가리켰다.
“이제 가서 쉬어. 나는 형이랑 교장선생님이랑 좀 더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그 말에 다른 아이들은 다 일어났지만 세희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살짝 심통난 표정으로.
“저희랑도 작전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아냐. 그 얘기가 아냐. 그 이야기 할 땐 꼭 부를게. 잠시 나가 있어 줘.”
“……네.”
결국은 세희도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아이들이 다 나가고 문이 닫히자 도현과 해련을 돌아보았더니.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뭐야, 뭐 말할 거 있어?”
“형.”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뭐 숨기고 있는 거 진짜 티나?”
“조금?”
“조금이면, 애들이 말하기 전엔 몰랐단 거야?”
“난 니 옛날이랑 비교하면 지금은 뭔 표정을 짓든 다 똑같아 보이는데?”
“…….”
이쪽은 또 그런가.
“교장선생님은요?”
해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비슷하지? 강 선생 어릴 땐 절대 안 웃었잖아. 쓸쓸한 표정도 별로 못 봤는걸. 백 하사랑 같이 있을 때였으니까…….”
“……그랬겠죠.”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가로 향했다.
“그냥 그거 궁금했어요. 교장선생님도 쉬세요.”
“뭐야, 어른만 남겨놓길래 뭐라도 말해주려는 줄 알았더니만.”
“……하하.”
이 둘한테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상상이 안 가서.
그는 복도로 나와 하품을 했다.
‘통화도, 설명도…… 결국은 다 해냈구만.’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
작전을 시작하면 많이 못 잘 테니, 미리 자두는 게 좋으리라. 상호는 조금은 가벼워진 걸음으로 생활관을 향했다.
꿈에도 그리던 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