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481. 너무 약해서
‘내일쯤이려나.’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현여고에 다녀온 지 나흘째. 그동안은 몬스터의 대규모 습격이 없었다. 지성이 없는 녀석들의 산발적인 소규모 습격은 있었지만, 상호가 나서야 할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란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고민이었다.
태화를 데려가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또 효은이 없는 시점에서 나빛을 데려가는 것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은 계속 고민만 할 뿐, 마음속으로 정해둔 적이 없었다.
세상 저편으로 가는 길에 누구를 데려갈 것인가.
‘역시 세희는 데려가기 싫은데…….’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세희는 전투를 겪으며 나날이 강해졌다. 이젠 상호가 아르게스에서 구르던 시절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데려가기가 싫었다.
그냥 데려가기 싫었다.
‘보루고 나발이고…….’
검 손잡이를 두드리는 검지가 점점 빨라졌다.
‘왜지?’
태화랑 나빛을 데려가는 건 상관없는데, 왜 세희는.
그는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답을 찾지 못해 터덜터덜 막사로 향했다.
‘……또 졸리군.’
한숨을 내쉬듯 하품을 하면서.
* * *
“누나.”
침대에 걸터앉은 예경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응?”
“어디 갔다 왔어요?”
상호는 예경과 같은 침대의 반대편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는 중이었다.
예경은 대답 대신 침대로 올라와 그의 뒤에 앉았다.
“머리 말려 줄까?”
“왜 대답 피해요.”
“그래서 머리는?”
“……네.”
수건이 예경의 손에 쥐어졌다.
상호는 눈을 감고 머리를 덮은 수건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아 있던 수분감이 예경의 손길을 따라 사라져 갔다.
머리가 반쯤 말랐을 때, 상호는 다시 물었다.
“누나.”
“응.”
“말 안 해줄 거예요?”
“글쎄……. 딱히 별일 아닌걸.”
예경이 씩 웃었다.
“그냥 출동 이야기야. 어떤 임무에 지원이 필요하다, 갈 수 있겠느냐, 그런 얘기…….”
“방금 지어낸 것 같은데.”
상호는 샐쭉한 눈빛으로 예경을 흘겼다.
“그쵸?”
“아하하…….”
“내가 누나 거짓말하는 것도 몰라볼 것 같아요?”
“상호가 감이 좋네, 응. 감이 좋아~.”
예경은 그저 웃었다.
상호는 자신의 촉이 글러먹은지도 모르고 근거 없는 확신에 빠져, 어딘가 거만한, 그러나 예경의 눈에는 귀엽게 보일 뿐인 표정으로 예경과 눈을 마주쳤다.
“속일 생각 마요.”
“그럼, 그럼.”
예경이 키득거리며 수건을 내려 상호의 눈을 가렸다.
“앗…….”
예상치 못한 공격에 상호가 당황한 사이, 가늘지만 강인한 팔이 상호를 안고 침대로 자빠뜨렸다.
예민해진 귀에 따뜻한 소곤거림이 닿았다.
“잘까?”
“……네.”
상호는 예경을 끌어안았다.
* * *
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날은 유독 비가 많이 왔다. 몬스터들도 이런 날에는 찝찝해서 영 움직이기 싫을 듯한 날씨였다. 상호도 이토록 습한 날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예경과 둘만 쓰는 생활관에 앉아 TV를 보거나, 아무 목적 없이 기지를 쏘다니곤 했다.
그러다 가끔 효은이 머무르는 생활관 주변을 지나칠 때면, 혹여나 마주쳤다가 또 놀림을 받을까봐서,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조심히 걸음을 옮기다가, 또 생각해보니 괜히 아니꼬워서 일부러 성난 발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를 십여 분째.
‘응?’
먼발치에 예경이 지휘통제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문으로 다가갔다. 소리 없이 닫히는 문에서 대번에 구린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예경이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하는 것이다.
‘대체 뭐길래…….’
문에 귀를 대니 안쪽의 소리가 들렸다.
“백예경 하사?”
“예.”
“대위 천명욱이요.”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막사에서 들어본 적 없는.
“백 하사는 헌터로 받은 계급이니까, 날 군인처럼 대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는 직속 상관이니, 좀 편하게 말해도 괜찮겠지.”
“네. 상관없어요.”
예경이 흔쾌히 대답했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사내가 말한 대로 예경은 헌터. 군대 밥을 먹으려고 군인이 되긴 했지만 누군가의 부하는 아닌데.
사내가 누구기에 직속 상관이라고 하는 걸까.
“설명은 얼마나 들었지?”
“공문만 읽었습니다.”
“부대 이름은 아나?”
“모릅니다.”
“저승부대.”
대체 그게 뭔데. 상호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다. 임무 도중에 죽어도 나라는 책임져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네 선택이고,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다. 각서는 썼나?”
“네.”
“마지막으로 묻지.”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결정에 후회 없나?”
“없습니다.”
“좋아. 내일 아침까지 떠날 준비 해둬.”
떠난다니.
자신에겐 그런 말 한 마디도 없었는데. 상호는 멍하니 문에 기대어 사내의 말을 곱씹었다.
떠난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저승부대라는 건 또 뭔지.
‘대체…….’
그때 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린 상호는 온 힘을 다해 지휘통제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콰아아앙
두 쪽이 나 날아가는 문.
비산하는 나뭇조각 사이로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내와 예경을 향해, 상호는 눈을 부릅떴다.
“누나.”
“……으응.”
예경이 쓰게 웃었다.
“들었어?”
“들었어.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누나. 누나가 직접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상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딜 간다는 거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날 떼놓고 가려고 한 거야? 이 인간은 또 누구야?”
“상호야, 그게…….”
“동생이 힘이 좋군.”
천명욱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둘에게서 돌아서며 손을 슬쩍 들었다.
“정리되면 다시 이야기하지.”
“예.”
예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상호를 복도로 밀어붙였다.
상호는 예경의 이런 눈빛을 오늘 처음 보았다. 서늘한 칼날처럼 날이 서 있는 느낌.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고고하게 우뚝 선 기암과도 같았다.
예경의 손가락이 상호의 어깨를 꾸욱 파고들었다.
“상호야.”
“……네.”
“넌 아직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어.”
상호의 눈 아래가 씰룩였다.
“설명부터 해요, 누나. 어딜 가는데요? 왜 가야 하는 건데요?”
“전쟁을 끝내러. 누군가는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럼 왜 나한텐 말 안 했는데요?”
“네가 따라오려고 할 테니까.”
“왜 못 따라가는데요?”
“아직 부족하니까.”
그 말에 상호는 발끈했지만, 예경이 먼저 입을 열어 상호의 말문을 막았다.
“상호 너는 네가 얼마나 강하다고 생각해?”
“여기서 두 번째요.”
“첫 번째는 누구지?”
“누나죠.”
“그럼 나한테도 위험한 곳을 네가 따라오게 놔둬야 하겠니?”
“어차피 늘 그래왔어요.”
상호는 하나 남은 눈을 치뜨고 예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경의 눈높이는 그보다 약간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나도 따라갈래요.”
“……상호야.”
“나도 구를 만큼 굴러봤어요. 두 눈 다 멀쩡했을 때랑은 다르다고요. 누나가 겪어온 위험들, 전부 다 옆에서 똑같이 겪었고, 누나보다 크게 다친 적은 있을지언정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뻔했던 적은 없어요. 그리고 누나도 내가 아니었으면 위험했던 적도 많았고. ……나는.”
그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단 강해요.”
“…….”
예경이 말없이 상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상호의 어깨를 잡은 손을 천천히 내리더니, 조용히 돌아서서 중앙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는 건가. 상호는 멍하니 예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나?”
“따라와.”
예경이 현관문을 열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네 말을 증명해 보자.”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선생님.”
“……아.”
상호는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끔뻑였다.
“또 졸았네.”
“잠이 많아지신 것 같아요.”
세희가 그의 곁에 걸터앉았다.
상호는 그런 세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난 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
“……세희야.”
“네?”
“세희…….”
천세희.
상호는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들었던 어떤 생각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단 걸 깨달아서.
그러나 무언가, 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상호가 한숨을 푹 쉬고 얼굴을 쓸어내리자 세희가 피식 웃었다.
“잠이 덜 깨셨나 봐요.”
“그런 것 같네.”
꿈속에 사는 듯이.
그는 물 없이 세수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세희야.”
“네?”
“할 말이 있어. 잠깐만 나와 봐.”
“네.”
둘은 생활관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 * *
“날이 좋네.”
상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고 푸르른 하늘. 하이얗게 살찐 구름. 완연한 가을의 공기가 쉼 없이 그의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곁에서 걷던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맑고, 시원하고……. 그치?”
“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미안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상호는 세희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세희야.”
그런 이야기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을까. 세희는 그 즉시 고개를 돌려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만약에, 만약에 있잖아……. 내가 널 여기 두고 아르게스로 가버리면…… 아마 네가 날 쫓아오겠지?”
“당연하죠.”
즉답.
당연하다는 대답을 이보다 더 당연하게 할 수 있을까. 헛웃음을 치는 상호에게 세희가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몰래 갈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세요.”
“그럼 말을 했겠니…….”
상호는 되도록이면 웃지 않으려 했으나, 세희가 너무 귀여웠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이야기를 꺼낸 거야. 세희야. 솔직히 말할게. 널 데려갈 생각은 없어.”
“……그러면 누구 데려가는데요?”
“지윤이랑, 수호부대원 중에서 둘 뽑아갈 계획이야.”
그 말에 세희가 날카로운 눈빛을 지었다.
“이유는요?”
“넌 너무 약해.”
상호는 검을 뽑았다.
“물론 넌 여기서 두 번째로 강하지.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강할지도 몰라. 하지만 날 따라오기에는 부족해.”
“제가요?”
세희도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시험……하시는 건가요?”
“시험은 시험이지만 내가 말하는 건 모두 진심이야. 자. 너는 너무 약하지만 어떻게든 날 따라오고 싶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
세희의 검이 시퍼런 날을 드러냈다.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듯이.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검을 까딱였다.
“증명해야겠지?”
“……네.”
“죽일 각오로 들어와.”
“네.”
세희의 발이 땅을 박찼다.
* * *
퍼억
“……커헉!”
소년의 몸이 진창을 데굴데굴 굴렀다.
젖은 흙이 온몸에 묻어나고, 또 그 위로 비가 내려 흙을 씻겨 내렸지만, 고통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호는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약해.”
예경이 그의 손목을 밟았다.
움켜쥔 검이 손에서 흘러내리려 했다.
“인정해, 상호야. 넌 약해. 너는 네가 두 번째라고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지금 널 봐, 상호야. 내 몸에 칼끝 한 번이라도 닿은 적이 있어?”
“…….”
상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예경의 말대로 그와 예경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지금껏 함께 싸워왔는데도 격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 자체가 다른 것처럼. 혹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처럼.
천재.
예경은 마나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낀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또 처음으로 심법을 깨달은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했으며, 그 심법을 혼자서 개량, 개발해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강기.
거기에 괴물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동체시력까지. 전투에 필요한 능력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갖추고 있는, 천재 중의 괴물이자, 괴물 중의 천재.
그게 예경이었다.
상호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X발.’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상호는 예경에게 밟힌 손을 비틀어 빼내고 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에 담지도 못했을 번개 같은 속도로.
하지만 예경은 가볍게 그의 검을 튕겨냈다.
“누나는 고집이 너무 센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해.”
그러거나 말거나 상호는 다시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예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호의 검이 쩍쩍 갈라지더니, 쏟아지는 빗방울 중 하나가 닿자마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
상호는 땅에 흩어진 금속 파편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예경이 검을 집어넣었다.
“넌 아직 안 돼.”
“……!”
상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따라간다. 어떤 위험이 있어도, 어떤 시련이 있어도 그리하겠다고 검을 잡은 날 맹세했다. 검은 깨져도 맹세는 깨질 수 없었다.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는 손잡이만 남은 검을 죽을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해봐야 될 거 아냐……!”
치솟은 강기가 예경을 향해 휘둘러졌다.
예경은 검도 뽑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상호의 강기를 잡고 비틀었다.
“갓난애를 계곡에 들여보낼 수는 없잖니.”
비튼 위치에서부터 강기의 맥이 끊겼다.
흐린 안개처럼 흩어지는 검푸른 강기 너머로, 예경의 시퍼런 하늘색 강기가 두 줄기 날아왔다.
상호의 양 손목을 향해서.
퍼퍽
강기가 명중하자 상호의 열 손가락이 힘없이 늘어졌다.
“……큭!”
떨어진 검 손잡이가 진창에 박혔다.
상호는 손잡이를 주우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손목을 내려다보니 검붉은 피멍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근육이 파열된 모양이었다.
“으……!”
“들어가서 치료받아.”
예경이 돌아섰다.
“결론은 났지?”
“아직……!”
“증명 못한 거야.”
목소리가 확고했다.
“이 이야기는 끝났어, 상호야. 이제 그만하자. 더 고집부리면 누나도 이제 화낼 거야.”
“겨우 그런 게 무서운 줄 알아!”
악에 받친 상호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아직 안 끝났어! 손이 없다고 못 싸워?! 발로 싸우면 될 거 아냐! 내 발도 부러뜨려 보든가!”
하지만 예경은 이제 대꾸하지 않았다.
돌아선 예경이 막사를 향해 걸었다. 빗속에 상호를 남겨 놓고서. 상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두 손과 부러진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X발.’
다시 싸워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백 번을 싸워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둘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좁혀지지 않을, 재능과 노력, 그 모든 것을 포함한 인간 자체의 차이가.
‘X발…….’
상호는 몸을 구부렸다. 진창에 이마가 박힐 때까지.
그리고 가슴에 난 멍이 터져 목으로 피가 올라올 때까지, 하늘을 등진 채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 * *
카가가각……
강기와 강기가 맞부딪혀 갈려 나갔다.
상호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세희의 검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세희가 검을 미끄러뜨리고 공격할 생각이란 것을 알아서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세희의 뒤에 강검을 만들었다.
기의 흐름을 알아차린 세희가 그의 검을 떨쳐내고 옆으로 굴렀다.
치익
작은 발이 땅에 끌리며 흙먼지를 피웠다.
상호는 끊임없이 강검과 함께 세희를 압박했다. 한순간도 발을 멈출 수 없게. 강검은 오른쪽으로, 검은 왼쪽으로 조여들어서.
그러자 세희는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검과 검 사이를 빠져나옴과 동시에, 검을 튕기듯이 휘둘러 강기를 쏘았다.
콰앙
얼굴로 날아든 강기가 검에 가로막혀 폭발했다.
상호는 검을 한 차례 휘둘러 먼지를 걷어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법이네.’
그의 예상보다 강했다.
강한 건 알았다. 세희는 이곳에서 두 번째로 강한 게 맞았다. 그 분명한 사실을 상호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세희가 도현과 해련보다 강해졌다는 것을.
그러나 그의 뒤를 따라잡았을 줄은 몰랐다.
‘검술은 이미…….’
더 손볼 게 없는 상태.
검뿐만이 아니라 단전도 전쟁을 하는 동안 쑥쑥 커져서, 이제는 예경의 몫을 제한 상호의 원래 내공만큼 자라 있었다.
따라잡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강하구나.’
손목이 욱신거렸다.
‘그때의 나와는 달리…….’
하지만 그 거대한 내공을 다루는 기술은 어떨까. 상호는 내공을 끌어냈다.
세희의 주변에 수많은 강검이 나타났다.
도합 열두 개. 어떤 것은 위를 향하고, 어떤 것은 아래를 향하고. 또 어떤 것은 정확히 세희를 겨눴다. 어떤 방향으로든 베고 찌르기 위해서.
검푸른 강기가 살기를 풀풀 뿜어냈다.
“……쳇.”
세희가 혀를 차며 자세를 낮췄다. 맹수가 먹잇감을 노릴 때처럼.
언제든 튀어 오를 준비가 끝난 용수철처럼.
‘뚫겠다고…….’
상호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너답다.’
첫 대련에서부터 그랬다.
그러나 강검은 이야기가 다르다. 형태가 변화무쌍한 강기에 동세가 변화무쌍한 이기어검이 더해져 있으니. 단순한 덧셈이 아니라 변화무쌍에 변화무쌍을 곱해 예측할 수 없는 검로, 검막, 검의 입체까지도 능히 자아낼 수 있었다.
인간의 머리로는 계산할 수 없고.
계산을 하더라도, 인간의 몸보다 촘촘한 그물을 피할 순 없었다.
파훼법은 단 둘뿐.
그물이 짜이는 것을 막거나.
‘그물이 짜이기 전에 빠져나오거나…….’
그러나 무게를 가진 인간이 강검보다 빠를 순 없었다.
그러니 현실적인 방법은 하나.
최대한 많은 강검을 만들어, 상대의 강검을 막는 것.
‘모르지 않을 텐데.’
상호는 말없이 세희와 대치했다. 털끝 하나 미동도 하지 않고서.
그러는 동안에도 세희는 강검을 만들지 않았다. 만들 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한둘쯤은, 아니 다섯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텐데도 세희는 절대 강검을 만들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이해가 갔다.
‘강기가 충분히 단단하다면…….’
전투의 기본요소는 강도와 속도.
‘몸이 충분히 빠르다면…….’
강검이 모든 방향을 에워싸고 있지만, 결국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검은 하나.
그 하나만 모든 내공을 쏟아 부순다면, 다른 강검들이 몰려들기 전에 포위를 빠져나와 상호를 공격할 수 있을 터였다.
활로를 뚫는 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충분한 강도. 충분한 속도.
‘……하지만 불가능해.’
사람은 강검보다 빠를 수 없기에.
상호와 세희의 반응속도는 거의 같은 수준이니, 상호가 반응하기 전에 뛰어든다는 선택지도 고를 수 없었다.
‘불가능해…….’
상호는 그렇게 믿었다.
그럼에도 눈동자 깊은 곳에 한 줄기 촛불이 일렁이는 것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저도 모르게 품고 있기 때문에.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해 세희의 근육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절대로.’
그 순간 세희의 발이 땅을 박찼다.
상호는 반응했다. 틀림없이 반응했다. 세희를 둘러싼 강검들이 일시에 세희의 앞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러나 세희는 그곳에 없었다.
‘……!’
눈을 부릅뜬 상호의 앞에 세희가 나타났다.
한껏 뒤로 당긴 검이 이미 그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하늘보다 더 하늘색인 강기를 두른 채.
상호는 급히 검을 들었다.
‘……아.’
그러나 세희의 검에서 뿜어지는 빛이, 불꽃이, 눈이 멀 것처럼 눈부셔서.
찰나의 순간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하…….’
상호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능했구나.’
몰랐다. 정말로. 이런 게 가능할 줄은.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들어온 하늘빛이 눈앞을 온통 물들였다.
* * *
한참을 빗속에 쓰러져 있었다.
하도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었다. 머리는 비에 쫄딱 젖었고, 몸에는 흙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상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도 눈빛만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차라리 싫어서라면 인정할 수 있었다. 그도 그의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예경의 성격이 하도 좋아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버려졌을 터였다.
그러나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하다는 이유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 끝났어.’
상호는 비틀거리며 막사를 향해 걸었다.
* * *
콰앙
생활관 문이 부서질 듯 세차게 열렸다.
이 기지에 이딴 식으로 문을 다루는 사람은 단 한 명뿐. 침대에 누워 있던 효은은 확신을 가지고 문가를 돌아보았다.
“……꺄악!”
웬 시체가 한 구 서 있었다.
무덤을 파헤치고 나온 듯 온몸에 흙을 묻히고, 물을 뚝뚝 흘리며 복도에 발자국을 남긴 소년. 양 손목에는 피멍이 들었고, 안대를 쓰지 않은 눈은 퉁퉁 부은 채였다.
상호가 성큼성큼 다가서자 잠옷을 입은 효은이 침대 구석으로 물러났다.
“야……, 야! 오지마!”
“야.”
“오지 말라고, 등신아! 드럽게……! 무슨 꼬라지야, 미친놈아! 빨리 씻고 오든가!”
“시끄럽고.”
상호는 피멍이 든 손목을 내밀었다.
“치료해.”
“……뭐? 뭐하다 다쳤는데?”
“알 필요 없고. 치료나 해.”
효은이 눈썹을 치켰다.
“그딴 식으로 나올 거야?”
“해달라고.”
상호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치료만 해. 너도 내가 빨리 꺼져주는 게 좋을 거 아냐. 치료만 하면 바로 꺼져줄게. 빨리 해. 지금 기지에 신앙인이 너밖에 없잖아.”
“싫은데.”
“……하라고.”
억눌려 있던 감정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의 들끓는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효은은 새침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죽을병도 아니구만. 내가 왜 너 때문에 내 체력을 낭비해야 하는데? 말도 X같이 하는 새끼한테.”
“니 일이니까, X발년아.”
“뭐…….”
정통으로 틀어박힌 욕에 발끈하던 효은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호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꺄아아악!”
“……윽.”
피멍 든 손목이 지끈거렸다.
상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밑에 자빠진 효은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얕고 빠르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드득 갈리는 이 사이에서 짓이겨진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달라고, 개새꺄. 제발 좀 해달라고…….”
“…….”
효은은 울먹이는 상호를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효은은 곧 평소처럼 짜증과 심술이 가득한 눈빛으로 돌아와, 상호의 흙 묻은 가슴을 밀쳐내고 발로 걷어찼다.
“싫어.”
“……야.”
“넌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효은의 날 선 눈빛이 상호를 찔렀다.
“그래놓고 뭐 맡겨 놓은 것마냥 당연하게 해 달라? 안 돼. X까. 다 니 업보야.”
“…….”
그 말에는 상호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다가, 병자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터덜터덜 걸어 효은의 생활관을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효은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X발놈.’
그녀는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침대에 누워, 붉어진 뺨을 누가 볼세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자빠뜨려질 때 놀란 심장이 아직도 날뛰고 있었다.
* * *
생활관에는 예경이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씻지 않은 모습이었다. 상호처럼 비에 젖고, 몸에는 상호가 튀긴 흙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그래도 대체로 상호보다는 훨씬 깨끗했다.
예경이 문가에 선 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씻으러 갈까?”
“…….”
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두커니, 피멍이 든 손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예경을 노려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 뜻을 알았을까. 예경이 검을 들고 일어났다.
“정말 다리까지 때려야 해?”
“…….”
“그러면 받아들여 줄 거야?”
“…….”
상호는 예경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예경의 멱살을 잡고, 서서히, 그러나 강하게 끌어내려 예경의 귓가와 자신의 입의 높이를 맞췄다.
“안 끝났어요.”
주먹을 쥔 손이 미친 듯이 지끈거려도.
“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절대로 안 끝나요. 내가 죽기 전까진…….”
“……그래.”
예경이 상호의 팔뚝을 잡았다.
“그러면 계속 해보자.”
저 혼자 열린 창문으로 상호의 몸이 던져졌다.
“……윽!”
상호는 허공에서 다급히 균형을 잡았다. 예경이 던진 힘이 어찌나 센지 벌써 막사가 저 멀리까지 작아져 있었다.
쏟아지는 비 사이로 흐릿한 인영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꽈앙
무딘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크흑……!”
상호는 다시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땅에 처박히기 직전, 정신을 차리고 낙법을 썼지만 손목에 무게가 실리고 말았다.
그래도 상호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퍼억
지탄 하나가 그의 오른쪽 종아리를 때렸다.
상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가 간신히 버텨냈다. 하지만 다음 공격을 피해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지금 공격이 날아오면 그냥 맞아야 했다.
그걸 예경도 알았기에 구태여 공격하지 않았다.
“상호야.”
그의 앞에 내려선 예경이 나직하게 말했다.
“더 할 수 있겠어?”
“당연히…….”
“고집부리는 남자는 싫어.”
상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아픈 건 잊었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예경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근육이 다친 건 물리적인 문제였고, 기합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안 끝났어요.”
“……상호야.”
“사람이 살아있으면 당연히 안 끝난 거지.”
상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없다고 싸울 수 없는 게 아니고……. 발이 없다고 싸울 수 없는 것도 아니야. 내가 싸운다면 싸우는 거지 X발, 뭔 말이 그렇게 많아요…….”
“어떻게 싸운다는 거니?”
예경이 검을 들었다.
“넌 지금 검도 없는데.”
“검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고…….”
상호가 들어 올린 손에서 내공이 흘러나왔다.
“손이 없다면…… 손 없이 휘두를 수 있는 검을 만들면 되는 거야.”
“…….”
“아주 간단한 이야기잖아.”
손 앞에 흐릿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검의 형상을 갖춘 강기.
“내가 약하고 자시고는 상관없어. 난 계속 싸울 거야. 누나가 날 막으면 누나랑 싸우는 거고, 누나가 함께면 괴물놈들이랑 싸우는 거야. 어느 쪽이든 난 상관없어. 어차피 싸우는 건 안 변하니까. 그렇지만…….”
“…….”
“누나도 나랑 싸우는 건 싫잖아.”
예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도 했다.
상호는 그런 예경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인정해. 내가 누나 생각보다 강하다는 거……. 그걸 인정할 때까지, 질척이고 또 질척일 거야. 고집 센 남자가 싫어? 상관없어. 누나 좋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니까.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계속 싸워 보자고. 아직…….”
상호는 숨을 헐떡였다.
“끝나지…… 않았어…….”
내공이 너무 많이 들어서 기혈이 뒤틀리고 있었다.
단전 바닥의 바닥까지 박박 긁어모아 만든 검. 예경이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흐읍……!”
상호는 숨을 들이키고 손을 휘둘렀다.
손에서 이어진 기의 움직임을 따라 검이 쏘아져 나갔다. 정확히 예경을 향해서.
예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검이 닿기도 전에.
“……커헉!”
상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강기를 원격으로 조종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온몸에 내상이 있는데 기혈까지 뒤틀리자 고통이 배가 되었다.
몸이 덜덜 떨리고.
뱃속이 쥐어짜이는 듯했다.
“으……, 으헉……. 으…….”
꽉 깨문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그래도 상호는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예경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직…….”
상호의 떨리는 손이 예경의 옷자락을 잡았다.
“안…… 끝났…….”
예경이 그를 끌어안았다.
포근한 품이 상호의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빗물에 젖은 뺨에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에도. 녹아내릴 듯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봄날 햇살도 비하지 못할 만큼.
상호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떨리는 손으로 예경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 했다.
더 싸울 수 있다.
아직 싸울 수 있다.
“너무 약해.”
예경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너무 약해, 상호야…….”
“나는…….”
“너는 아직 약해. 게다가 어려. 그건 변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널 데려가지 않으려고 한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럼…….”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예경이 그를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언젠가 너한테도 나와 네 관계 같은 사람이 생기겠지. 그럼 그때 알게 될 거야. 굳이 내게 묻지 않아도…… 너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아직……!”
“충분해.”
상호가 힘겹게 쥐어짜낸 부르짖음이 예경의 품속에서 사라졌다.
“같이 가자, 상호야. 누나가 졌어.”
가장 절실했던 말.
그 말을 들은 상호는 예경의 품에 축 늘어졌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버려서.
그러나 마음만은 그 어떤 검보다도 강기보다도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누나.”
“응.”
“같이 가는 거예요.”
“응.”
“같이…….”
“응.”
예경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어디든 같이 가는 거야.”
억누르고 있던 고통과 피로가 파도처럼 그를 덮쳤고.
상호는 예경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 * *
세희는 눈을 끔뻑였다.
“……선생님?”
상호가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올려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희에게는 상호의 몸이 조금씩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세희는 당황해서 다시 상호를 불렀다.
“선생님……?”
“……약해.”
“네?”
이게 무슨 말인가. 방금 분명히 일격을 먹였었는데. 세희는 화나고 억울했지만 상호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황당하고 당황한 마음으로 상호에게 엉거주춤 안겨 있는데.
어깨에 습기가 느껴졌다.
“너무 약해.”
상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널 잃기엔 내가 너무 약해…….”
세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안긴 세희를, 상호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나직이 말했다.
“그게 무서운 거야. 널 잃는 게……. 내 모든 걸 알고 있는, 나라는 인간을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게…… 견딜 자신이 없었어. 누구도 견디지 못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일지라도…….”
“……선생님.”
“그래도…….”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강검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내가 졌으니까…… 같이 가자.”
“……네.”
세희는 상호를 마주 끌어안았다.
마음이 연결되어 있으니 알 수 있었다. 상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어떤 과거를 품고 살아왔는지. 단 한 치의 곡해도 없이, 그의 마음을 오롯이 알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같이 가는 거예요.”
“응.”
상호는 다시 그 말을 되뇌었다.
“같이…….”
언제까지고. 어디까지든.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품고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 한 소년과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