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480. 기억
“백상호.”
상호는 뒷짐을 진 채로 눈을 끔뻑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예.”
“백예경.”
“예.”
둘을 유심히 보던 중년인이 고개를 기웃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아하하…….”
머쓱해진 예경이 상호를 품에 끌어당기며 웃었다.
셋이 있는 곳은 대대장실. 말이 좋아 대대장이지 실력으로 급이 나눠지는 헌터 사회에선 사실상 기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년인과의 관계를 더 정확히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윗대가리는 윗대가리. 절대적인 상명하복의 관계는 아니지만 부대 밥을 먹고 생활관 침대를 쓰려면 중년인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 말 많이 듣죠.”
“그래? 뭐, 그건 됐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중년인이 책상에 놓인 서류를 둘러보며 말했다.
“남매 둘이서 못 쓰러뜨린 몬스터가 없다고. 스카드블라인드, 플레임레그, GB 3까지……. 아주 괴물이구만 그래.”
상호는 뚱한 표정으로 다리를 건들거렸고, 예경은 그저 씩 웃었다.
“하긴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중년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상호와 예경을 훑었다.
“그렇지만 자만하지 않는 게 좋아. 너희만큼 강한 헌터도 수십 명이 왔었지만…… 대부분 일주일도 못 버티고 전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헌터는 대부분 자신 있다고 말했지. 너희 남매는 어떨까. 자신 있나?”
“예.”
예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습니다.”
“……그래.”
중년인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백예경. 백상호. 최전방에 잘 왔다.”
* * *
“……으음.”
상호는 가슴팍을 짓누르는 무게를 느끼며 눈을 떴다.
시야를 온통 가린 하얀 흰머리. 나빛의 것보다 좀 더 은색에 가깝다. 이 흰머리의 주인은 대체 누군가.
사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으응…….”
해련이 상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자는 중이었다.
상호가 부르자 해련은 고개를 부스스 들어 눈을 마주치다가,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다시 가슴팍에 철푸덕 얼굴을 박았다.
밤새 흘린 침자국이 입가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애도 아니고…….’
상호는 한숨을 쉬고 해련을 옆으로 내리려 했으나, 해련이 양팔과 양다리로 그의 온몸을 붙들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우악스럽게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오 진짜, 교장선생님!”
“으응……?”
“잠을 대체 어떻게 주무시는 거예요! 이거 놔요! 아니 애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몸나이는 이제 내가 더 어릴걸~.”
“그럼 이제 술도 마시지 마요!”
“그거랑 이건 다르지~.”
“……에휴.”
상호는 한숨을 쉬고 해련을 밀어냈다.
자다가 출동하면 바로 갈아입어야 한답시고는 얇고 펑퍼짐한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다. 거기에 티셔츠 아래로 비치는 굴곡진 윤곽과 탄력이 느껴지는 뽀얀 피부까지.
어딜 봐도 원래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까지도.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지인들 보기 안 쪽팔리세요?”
이곳에 있는 헌터들은 태반이 S급 베테랑들이고, 대부분은 10년 전 해련을 만나본 적이 있다는 것.
하지만 해련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 선생이 할 말인가? 한참 어린 여자애들이랑 한 방에서 살고 있으면서.”
“보호자잖아요. 법적으로도 실제로도…….”
“뭐 어때. 이 나이 먹고 주변 눈치 봐야겠나~.”
“……제발 자기 편한 대로 신체연령이랑 정신연령을 바꿔 쓰지 말아주세요.”
언제는 어려서 괜찮고. 언제는 늙어서 괜찮고. 살다살다 나이를 뷔페처럼 골라먹는 경우를 볼 줄은 몰랐다.
상호는 맞은편 침대에서 눈을 살며시 뜬 다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므앙.”
다혜가 누운 채로 고개를 꾸벅였다.
예현제를 다녀온 지 하루. 생활관 가운데의 책상에는 상호가 가져온 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둥실 떠올라 상호의 바로 옆 침대로 날아들었다.
이불 속에서 하얀 손이 나와 과자를 낚아챘다.
“야, 침대에서 뭐 먹지 말랬지.”
“귀차낭.”
“앉아서 먹어.”
“귀찮아!”
오독오독. 다람쥐 호두 까먹는 소리가 들렸다.
왜 저렇게 말을 안 들을까. 상호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득 꿈 생각이 나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꿈을 왜…….’
딱히 특별한 기억도 아니었는데.
애초에 기억해둘 이유도 없어서 잊고 살았던, 특별할 것 없었던 하루.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꿈으로 떠오른 건지.
게다가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뭐.’
그는 고개를 젓고 일어났다.
‘결국 꿈일 뿐이니까…….’
꿈이 현실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밥이나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갈 준비를 했다.
* * *
“……쯧.”
흙 씹은 표정. 혀 차는 소리.
숟가락을 들던 예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왜? 맛없어?”
“아뇨. 그게 아니라.”
상호는 건너편 식탁에 앉아 있는 하얀 머리 소녀를 흘겨보았다.
“여기 있을 줄은 몰라서.”
“어머.”
소녀를 발견한 예경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상호를 돌아보았다.
“관심 있는 거야?”
“농담하지 마요.”
“그치만 저 애, 항상 네가 나보다 먼저 찾아내는걸.”
“저건 못 찾으면 이상한…… 끄응.”
저 흰머리를 대체 어떻게 하면 시야에서 지울 수 있단 말인가. 말하는 게 예경만 아니었다면 눈깔이 삐었냐고 한마디 했을 텐데.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들었다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뭘 꼬라봐. 팍씨…….’
뭐 볼 게 있다고 저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지.
상호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자 소녀가 한쪽 눈썹을 치켰다. 마치 ‘뭐?’ 라고 말하는 듯이.
‘X년.’
둘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눈이 마르고 아파도, 지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렇게 예뻐?”
“……네?”
상호는 무심코 눈을 깜빡여 버렸다.
그러자 하얀 머리 소녀가 코웃음을 치며 새침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상호는 뒤늦게 그 꼴을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예경을 돌아보았다.
“아잇, 진짜……. 장난치지 마요!”
“그치만 엄~청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걸.”
예경이 빙긋 웃었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한번 친해져 봐.”
“쟤랑요? 제가 왜요. 저런 싸가지 없는 년이랑…….”
“그치만 저 애는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들어왔을 때 저 애가 널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알아?”
“어떻게요?”
“잘생겼다아…….”
예경의 헤벌쭉한 표정을 본 상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생명의 은인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못 본 척 하고 있었구만, 먼저 찾아내기는…….’
당연히 저 하얀 머리를 못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상호를 놀리기 위해 가만히 있었던 것이고.
그런 예경이 싫은 건 아니지만, 가끔은 곤란할 때가 있었다.
“밥이나 먹어요.”
“그럴까?”
예경은 키득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 * *
“아~.”
예경이 침대에 널브러졌다.
“이 넓은 방을 둘이서 쓰네~. 역시 남매라고 하길 잘했어, 그치?”
“그러게요.”
“조금은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뭐 어때요.”
목숨 바쳐 싸우는데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지.
게다가 상호 자신은 몰라도 예경은 제일 강한 헌터. 겨우 생활관 하나를 둘이서 쓰게 해 주는 정도로는 특별대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기지장은 아직 예경의 실력을 모르는 모양이지만.
상호가 탁자 앞 의자에 앉자 예경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톡
예경의 손끝이 그녀의 옆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뜻을 알아차린 상호는 뺨이 조금 뜨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예경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가 예경이 두드린 바로 그 자리에 누웠다.
예경은 빙긋 웃고는 상호의 머리 아래에 팔을 놓았다.
“상호야.”
“네.”
“우리 이러는 거,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좀 특이한 남매라고 생각하겠죠.”
밥을 먹고 누워있으니 나른하게 눈이 감겼다.
언제 몬스터가 쳐들어올지 모르니 잘 수 있을 때 자두는 것이 좋다. 상호는 고개를 예경을 향해 기울이며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정중함이 느껴지지 않는, 어딘가 신경질적인 데가 있는 소리.
상호와 예경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연 것은 하얀 머리 소녀였다.
소녀를 본 상호의 얼굴이 확 찌그러졌다. 예경과 오붓하게 있다가 불청객이 온 것도 짜증나는데 하필 그게 저 싸가지 없는 년이라니.
그는 욕이 한 사발 튀어나오려는 것을 삼키고 물었다.
“뭔데.”
“너 잠깐 나와 봐.”
소녀가 검지를 까딱였다.
지가 뭔데 오라 가라 할까. 그렇지만 어린애처럼 예경의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예경에게도, 소녀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상호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문가로 걸어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소녀가 문을 닫았다.
“야.”
“뭐.”
“너 몇 살이야?”
“나 열…….”
상호는 대답하려다가 빠르게 입을 닫았다.
소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상호와 동갑. 혹은 한두 살 아래. 아무리 봐도 상호보다 많을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먼저 까봐.”
“내가 물었잖아, 새끼야. 너 몇 살이냐고.”
“그걸 왜 내가 말해줘야 되는데? 니가 궁금하면 니가 먼저 까보라고. 자신 없어?”
소녀는 상호를 노려보더니 툭 내뱉듯 말했다.
“열일곱.”
“동갑이네.”
태연하게 구라를 쳤지만,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열이라고 운을 떼어서 망정이지 중 3이라고 말하려 했다가는 ‘중’이라고 말하자마자 연하인 게 들통났을 것이다.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소녀를 째려보았다.
“근데 너가 열일곱이라고?”
“뭐, 등신아. 까라고 해서 깠더니 그따구로 의심하면 뭐 어쩌라는 거야?”
“물어본 건 너잖아? 나이는 왜 물었는데?”
“니 하는 짓 보니까 개초딩같아서.”
그 X랄 하려고 나이를 물은 건가.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열일곱이라니. 식당에서 새치기나 해대는 개념 없는 인간이 상호 자신보다 한 살 많은 누나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봐도.
‘고딩 아닌 것 같은데…….’
상호의 시선이 소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을 뭐라고 생각한 건지, 소녀는 몸을 움찔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야.”
“뭐?”
“너 어디 보는 거야?”
“……뭐?”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상호는 멍청히 눈을 끔뻑이다가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참나, 개껌딱지 볼 게 뭐 있다고…….”
그 순간 상호의 뺨에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 * *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얼굴을 쓸었다.
어째 뺨이 얼얼하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잠에서 깬 상호는 슬그머니 눈을 떠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머리 소녀가 방긋 웃었다.
“일어나셨어요?”
“…….”
그는 뚱한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이 싸가지 없는 년이 이렇게 귀여웠었던가.
“……아, 나빛이구나.”
“네?”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씩 웃었다.
“뭔가 꿈이라도 꾸셨어요?”
“으응, 조금…… 어릴 때 꿈.”
밥 먹고 나른해서 잠깐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고 만 모양이었다.
상호는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 멍하니 나빛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아직 나빛의 다리를 베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미안.”
“괜찮아요. 더 누워 있으셔도 돼요.”
“아냐, 아냐…….”
그는 손사래를 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직도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머릿속이 몽롱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또 그 시절로 돌아갈 것 같았다. 예경의 곁에서 잠을 청하고, 이름도 몰랐던 하얀 머리 소녀와 싸우던 그때로.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는 그에게 나빛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응.”
“더 주무세요, 피곤하신 것 같아요.”
“괜찮아.”
해야 할 일이 있다. 언제까지고 한가롭게 상념에 잠겨 있을 순 없었다.
상호는 벤치에서 일어나 막사 현관을 향했다.
* * *
“……후우.”
상호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었다.
피에 젖은 칼의 끝은 괴수의 머리에 꽂혀 있었다. 상호가 밟고 서 있는 머리통만 해도 웬만한 주택만큼 컸다.
‘죽는 줄 알았네.’
덩치만 무식하게 큰 줄 알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상호를 피떡이 되도록 두들기기는 충분했다. 그는 입에 고인 피를 모아 괴수의 머리에 탁 뱉었다.
산만 한 거대괴수의 등에서 무언가가 가죽을 찢고 튀어나왔다.
“……푸하!”
온몸이 피로 젖은 여자 검사.
예경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숨막혀 죽는 줄 알았네……. 상호야, 죽인 거 맞지?”
“네. 확실히.”
“어휴……. 이거, 이 큰 놈이 몇 번째더라? 열세 번째?”
“그럴걸요. GB 13인가.”
상호는 검을 휘둘러 피를 털고 납도했다.
아르게스의 경계를 넘은 거대괴수 중 13번째. 그리고 상호와 예경이 잡은 거대괴수로는 세 번째. 요 근래 싸운 놈들 중에는 가장 강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을 만큼.
그래도 당장 죽지만 않으면 치료받을 수 있었다.
“상호 다친 데 없지?”
“네. 조금 쓰러질 것 같긴 한데.”
“그래? ……에잇!”
예경이 상호를 향해 뛰어들었다. 온몸에 시뻘건 피와 끈적한 체액을 듬뿍 묻힌 채로.
상호는 기겁하며 예경을 피했다.
“아잇, 하지 마요! 아 진짜!”
“상호야, 뽀뽀~. 뽀뽀~.”
“아익…… 커헉!”
예경을 피하던 상호의 입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아까 괴수의 어깨빵을 정통으로 맞았더니 내상이 난 모양이었다. 상호는 숨을 헐떡이며 비틀비틀 쓰러졌다.
예경이 다급히 그를 안았다.
“뭐야, 상호야! 괜찮아? 괜찮다매!”
“아이씨, 누나가 장난쳐서 터진…….”
“어머, 어머! 어떡해! 신앙인! 신앙인 어딨어!”
“X……팔…….”
드럽게 아프네.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었다.
* * *
“아오 X바…….”
상호는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기지의 의무실은 다친 헌터들이 내는 신음과 응급처치용 소독약 냄새, 그리고 성력의 빛으로 꽉 찬 채였다. 청각, 후각, 그리고 시각까지. 세 가지 모두 환자가 안정을 취하는 것을 완벽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상호가 누워있는 침대 주변에서는 물의 정령이 날아다니며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중이었다.
“으으…….”
“야, 상호야.”
주변을 돌아다니던 낯익은 남자 의무병이 그의 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진통제 더 줄까?”
“신앙인 좀 빨리 오라 그래, 끄응…….”
“잠깐만 기다려. 효은이 불러올게.”
“아니 그 X팔년 말고…….”
하지만 고통에 겨운 목소리는 기어들고 있었고, 의무병은 이미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상호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 X년이 절대 곱게 치료하지 않을 텐데……, 커헉!’
입에서 피가 또 줄줄 흘렀다.
이젠 누가 치료하든 상관없었다. 진짜 뒈질 것 같아서.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키며 속으로 애꿎은 효은을 씹어댔다.
‘X발, 진짜…… 언제 오는 거야.’
아까는 오지 말았으면 했는데. 생각이 바뀌는 데에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란 어찌 이리도 간사한 생물인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졌다.
“야, 상호야.”
“뭐…….”
“효은이한테 말했는데…… 너 기절하고 나면 부르라는데?”
“……뭐?”
상호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아파 죽겠는데 이게 뭔 소리인가. 기절하기 전에는 치료하지 않겠다니. 상호는 벌떡 일어나 효은의 머리채를 잡으러 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 이 X바…….”
“다른 급한 환자가 많댄다. 진통제나 하나 더 먹어둬.”
의무병이 알약을 내밀었다.
대체 피를 토하는 환자보다 급한 환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는지. 상호는 끙끙거리며 알약을 받아 목구멍으로 넘겼다.
의무병이 떠나자 고통이 다시 엄습했다.
“아이고…….”
그렇게 참고 참다가 꼴까닥하기 직전.
감겨 가는 눈앞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기웃거렸다.
“흠.”
그년이었다.
“아직 살만한가 보네.”
“…….”
“어라, 씹어?”
“…….”
상호는 말없이 효은을 째려보았다.
다른 신앙인들처럼 수녀복을 입은 효은이 상호가 누운 침상 주변에 커튼을 쳤다.
“괜찮겠어? 널 치료할 사람 말을 씹어도?”
“…….”
대체 왜 커튼을 치는 걸까. 지금이라도 살려달라고 소리를 쳐야 하는 건 아닐까. 그는 그런 고민을 하며 효은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커튼을 다 치자 효은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야.”
“……뭐.”
“사과할 거 없어?”
“사과는 무슨 씨X랄 놈의 사과…….”
맨 처음 잘못한 건 지면서. 상호는 아직 뻔뻔하게 새치기를 하던 효은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10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치료 안 할 거면 꺼져, 개수작 부리지 말고.”
“누가 안 한대? 근데 너, 나한테 할 말 없냐고.”
“없어 개새꺄. 제발 꺼져 그냥. 다른 사람 불러…….”
“병X.”
효은이 손에 성력을 둘렀다.
“옷이나 벗어.”
“……옷은 왜.”
“뱃속이 다쳤다며. 깊이 들어가야 하니까 벗으라면 벗어 이 새끼야.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
상호는 조그맣게 궁시렁거리며 옷을 벗으려 했다.
하지만 팔을 움직이자마자 통증이 흉부를 찔렀다. 예고 없이 찾아든 흉통에 그는 급히 숨을 들이키며 몸을 움찔했다.
“……윽.”
“옷도 못 벗냐?”
효은이 그의 윗도리를 잡았다.
상호는 효은이 옷을 벗기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의료인, 신앙인 앞에서는 벗어도 아무렇지 않은데. 왠지 이 인간 앞에서는 벗기가 싫었다.
“자.”
벗긴 윗도리가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앉아서 돌아.”
“끄응…….”
“앉지도 못하냐?”
“…….”
“그냥 돌아누워.”
“…….”
“돌지도 못하냐?”
“…….”
“무능한 새끼…….”
효은이 상호의 어깨를 찰싹 후렸다.
아픈 환자를 때려도 되는 건가. 상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잘 되지가 않았다.
“……도와줘.”
“내가? 왜?”
“X팔 앉게 좀 도와달라고!”
“흥.”
효은은 그를 부축해 앉혔다.
상호가 등을 보이고 돌아앉자 효은이 성력을 두른 손을 상호의 등에 얹었다.
“……으.”
무언가 따뜻한 것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뜨듯한 성력이 몸을 치료하기 시작하자 억눌려 있던 피로가 마구 몰아쳤다. 거대괴수를 잡느라 수천 번씩 검을 휘둘렀던 근육들이 욱신욱신 신음을 흘렸다.
지칠 대로 지친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효은의 손이 애먼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야.”
“뭐.”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효은이 태연하게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여기잖아.”
“누르지 마, 미친년아! 아파 뒤지겠는데…….”
“성력을 안까지 넣어야 될 거 아냐. 모르면 좀 가만히 있어. 야, 가만히 있으라고.”
“X바…….”
상호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인간과 웃통 벗고 껴안고 있으려니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어색하고, 민망해서.
그때 효은이 말을 걸었다.
“야.”
“뭐.”
“너 학교 어디야?”
“영설중…….”
상호는 급히 말을 고쳤다.
“영설중앙고등학교.”
“공부 잘했냐? 아니지, 하긴 했냐? 절대 안 하게 생겼는데.”
“니가 할 소린 아닌데.”
“모평 몇 등급인데?”
“1등급.”
효은이 상호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와 함께.
“니가?”
“……뭐. 안 믿을 거면 쳐 묻지를 말든가.”
“과목 뭐뭐 봤는데?”
“…….”
상호는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하필이면 심장 위에 효은의 손이 얹혀 있었다.
그래도 중요한 과목이라면.
“국어.”
“국어.”
“영어.”
“영어.”
“수학.”
“수학.”
“여……역사.”
“국사.”
“과……학.”
이번엔 효은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들킨 걸까. 조마조마해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효은이 움켜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효은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
“너 그 면상으로 중딩이냐?”
“…….”
상호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범죄야, 임마. 어린놈의 새끼가 얼굴로 사기치고 다니네.”
효은이 코웃음을 쳤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니 대가리가 절대 그렇게 좋을 리 없거든.”
“……X까.”
“뭘 발악하고 있어, 새꺄. 야, 니가 1등급이라고? 이과라고? 어디 X만한 새끼가 고딩 행세를……. 누나라고 불러, 이 새꺄.”
“X랄…….”
고통은 다 없어졌다. 나이를 들킨 상호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효은의 팔을 떨쳐냈다.
“꺼져. 이제 필요 없어.”
“개웃기네. 야, X만아. X만아. 진짜 중딩이냐? 세상 미쳤네, 저 얼굴로 중딩이래, 낄낄낄…….”
“……꺼지라고!”
달랑 한 살 차이 가지고 유세는 있는 대로 부린다. 상호는 이를 갈며 효은을 발로 밀어냈다.
“꺼져! 좀 꺼져!”
“족발 치워, X새꺄. X랄 안 해도 갈 거야. 와, 하는 짓이 애새끼 같긴 했어도 진짜 애새끼일 줄은 몰랐네.”
“좀…….”
침대에서 일어나는 효은의 뒤통수에 상호의 윗도리가 날아들었다.
“꺼지라고!”
“흥.”
효은은 콧방귀를 뀌고는 새침하게 커튼을 걷고 나갔다.
정말 환자의 안정에 파멸적으로 좋지 않다. 상호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병상에 누워 이불을 윗몸까지 끌어올렸다.
‘X팔, 과학이 아니면 뭔데……. 도덕은 아닐 거 아냐. 사회? 아 X발, 사회인가 보다. 씨…….’
기회가 될 때 예경에게 물어볼걸. 상호는 철저하게 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잠에 들었다.
* * *
“상호야.”
“……아.”
상호의 몸이 움찔했다.
“미안, 잠깐 졸았나 봐.”
“선 채로?”
도현이 헛웃음을 쳤다.
“밤새 뭘 했길래? 효은이도 없는데.”
“그런 거 아냐.”
“농담이지, 임마.”
상호는 침음하며 눈을 비볐다.
“그냥…… 요즘 잠이 많네. 자꾸…… 옛날 꿈을 꿔.”
“꿈?”
“형 처음 보기 직전에, 기지에서 누나랑 지낼 때…….”
“……아아.”
도현의 웃음이 흐려졌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상호는 고개를 저어 잠을 쫓아내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형.”
“응.”
“이제 가야겠어.”
도현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준비는 다 됐냐?”
“안 됐어도 가야지.”
민정은 쓰러져 있고, 헌터들도 많이 죽었다. 사회에 남은 헌터들을 끌어모으긴 했지만, 그것도 이번 한 번이 마지막.
다음번은 학생을 끌어다 써야 했고, 그다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번 어려지고 난 다음에 출발할 거야.”
“주기는 알아냈어?”
“일주일.”
정확히는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지만.
“일주일 안에 끝내면 돼.”
왕복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 한 번. 단 한 번의 돌파를 일주일 만에 끝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상호는 자신의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는 진짜로…….”
죽이지 못한 것을 죽이고, 끝내지 못한 것을 끝낸다. 임무는 오직 그것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누구랑 같이 가?”
“태화랑 나빛이는 고정이고.”
악마의 눈. 그리고 전투가 가능한 신앙인. 이 둘은 대체가 불가능해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상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나 혼자서 둘을 지키기는 힘들 수도 있으니까…… 무예가 두셋 정도는 더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가면. 둘만 구하면 되겠네?”
“……글쎄.”
도현을 데려가는 게 맞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임무는 지난번보다 위험해졌다. 악마가 깨어나고, 실력자는 줄었고. 그런 상황에서 배우자가 있는, 그리고 아마 자식도 있을 도현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남은 사람이 떠난 사람을 얼마나 원망하는지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윤의 경우를 통해서.
“형이 안 가도 될지도 모르지. 셋을 찾으면……. 형은 지휘를 해야 하잖아.”
“셋? 나만큼 강한 사람이면 뭐……. 세희? 교장선생님? 더 있나? 뭐 일단은 그 둘 정도겠네. 세희랑 교장선생님은 어때? 데려갈 거야?”
“……조금 더 생각해봐야지.”
일단은 그렇게 얼버무리기로 했다.
상호는 문가를 향해 돌아섰다.
“정하면 말할 테니까, 형은 그렇게 알고만 있어.”
“그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피곤한 것 같은데. 가서 좀 더 자.”
“……그래야겠네.”
또 눈꺼풀이 무겁다. 잠을 그렇게 잤는데도.
상호는 도현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 * *
“예경.”
“네.”
이마에 붕대를 감은 대대장이 눈을 빛냈다.
“오늘 보여준 실력……. 말이 안 될 정도로 강하더군.”
“다 상호가 옆에 있어서…….”
“아니, 알아, 알아. 떼어놓으려는 게 아니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소리. 대대장은 뒷짐을 진 예경에게 손사래를 쳤다.
“어딜 가든 동생과 같이. 알아. 잘 알고 있어. 그냥 제안을 하나 하려고 그래.”
“제안이요?”
“상부에서 내려온 거야.”
대대장이 책상에 놓인 서류를 집었다.
“강한 헌터들을 모아서 부대를 만든다는데…… 아르게스에 침투해서 정보를 모아오는 거야. 처음엔 이만큼 갔다가 돌아오고. 또 이만큼 더 갔다가 돌아오고. 그러면서 몬스터가 오고 있는지, 그 땅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오는 거지.”
“부대가 몇 명인데요?”
“아직 정해지진 않았어. 그래도 침투부대니까, 최대한 강한 사람을 최소한으로 뽑겠지.”
“……흠.”
예경은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다가 끄덕였다.
“저보고 그 부대에 들어가 달라?”
“맞아.”
대대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예경을 바라보았다.
“임무의 정확한 내용은 나도 몰라.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라는 거지. 어떤 몬스터가 있을지 모르고, 어떤 벌레가 어떤 독을 품고 있을지 모르고,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할 수도 있지. 이 모든 게 동시에, 더 안 좋게 닥칠 수도 있고.”
“그렇겠죠.”
“평범한 헌터는 백 퍼센트 죽는다.”
대대장의 검지가 예경을 가리켰다.
“비범한 헌터도 백 퍼센트 죽을지도 모르지.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아.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백예경 자네는…… 자신이 있을 것 같았어.”
“……아하.”
예경이 피식 웃었다.
“그렇긴 하죠.”
“어때. 신청할 건가?”
“글쎄요.”
한 발 물러선 대답에 대대장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안 해? 뭐,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음……. 그거. 그 부대. 어차피 누군가는 뽑혀서 가는 건가요?”
“그렇지.”
“중요한 임무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중요하지. 사람을 살리고 전쟁을 끝내려면, 누군가는 해야지.”
“알겠어요.”
예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요. 그 부대.”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대대장은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신청서를 찾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예경을 바라보았다.
“아, 동생도 같이 가는 거지? 추천사에 동생이 함께여야 한다고 적으면 되겠나? 상호도 실력이 괜찮으니까 딱히 문제는…….”
“아니요.”
“……응?”
그동안 쭉 무조건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면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대대장을 향해, 예경은 씩 웃으며 재차 말했다.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상호는 넣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