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79화 (479/501)

<479화>

479. 단 하나의 거짓

“강 선배.”

복도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기대어 아이스티를 마시던 상호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미진 씨.”

“오면 온다고 얘기를 해야죠.”

미진이 툴툴거리며 다가왔다.

“부담임이 담임 오는 거를 반장 통해서 들어야 해요?”

“에이, 만나서 인사해도 되는 거잖아요. 근데 미진 씨. 우리 애들 영화관 하려고 한 거 알고 있었어요?”

“알죠.”

알면 왜 놔뒀냐, 상호가 그런 뜻을 담아 바라보자 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욕이 나겠어요? 가뜩이나 사람도 없는데……. 분위기도 안 좋아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분위기?”

“어느 선생님이 징집됐네, 누구 아는 사람이 죽었네, 학생도 징집한다네……. 좋을 리가 없죠. 전쟁이 끝이 안 보이는데. 그래도 이렇게 온 거 보니까 전선은 여유 있나 보네요.”

“뭐 당장은 그런 셈이죠.”

상호는 어깨를 으쓱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진의 말과는 달리 학교의 분위기는 밝았다. 정확히는 그가 있는 주변의 분위기가 밝았다. 아마 상호가 멀쩡하게, 태연하게, 전쟁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안심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가 멀쩡해 보이는 이유는, 그는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미 전쟁을 겪어본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을 겪어본 이의 정상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은 나빛이었고.

나빛은 지금 교실 구석에 앉아 말없이 다람의 공연만 보고 있었다.

“설미 선생님은 어딨어요? 교실에 없던데.”

“일찍도 찾네요.”

미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교무실에서 오후 행사 준비하고 있었어요. 이제 거의 다 끝났을걸요.”

“아하…….”

만나러 가봐야겠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튕겨 똑바로 섰다.

“난 설미 선생님 보러 갈게요. 미진 씨도 우리 교실 가봐요. 재밌는 거 하고 있으니까.”

“영화잖아요.”

“더 재밌는 걸로 바꿨어요.”

“뭔데요?”

“비밀.”

낄낄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등 뒤로 미진의 새침한 눈길이 꽂혔다.

상호는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교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걷는 이 길이 퍽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소함이 오히려 처음 이 학교에 왔던 날을 더욱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날 만난 사람을 오늘도 만나러 가고 있었다.

‘계단이 너무 힘들었어.’

그는 멀쩡해진 다리를 휘적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교무실 앞에 도착해 문을 열어보니 선생들이 몇 보였다. 평소보다 그 수가 훨씬 적었다. 축제 중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늘 그랬듯이, 설미는 상호의 자리 옆에 앉아 있었다.

“……아.”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설미가 상호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상호는 눈인사를 하는 선생들에게 고개를 꾸벅이면서 설미를 향해 다가갔다.

“설미 선생님.”

“으, 으응…….”

“아직 바빠요?”

“아니, 이제 끝났어…….”

설미의 당황한 눈빛에 점차 서운함과 궁금함이 차올랐다.

“언제 왔어?”

“오늘 왔어요. 아침에. 애들 먼저 보느라 이제 왔네.”

“왜 온다고 말 안 하구…….”

“깜짝 놀래킬라고 그랬죠.”

상호는 키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요?”

“우리가 무슨 별일이 있겠어……. 상호 너는? 넌 잘 지낸 거야? 애들도 거기 갔다고 들었는데…….”

“별일이 많이 있긴 했죠. 근데 괜찮아요. 아직 다들…… 다는 아니긴 한데, 대체로 무사하고.”

민정이 당하긴 했지만 몸은 건강하니까. 봉인만 풀 수 있다면 무사히 깨어날 것이다.

설미가 한숨을 폭 쉬었다.

“우린 상호 네 소식을 하나도 못 들어서……. 걱정 엄청 했어, 너희 반 애들이랑 미진이랑…….”

“미진 씨는 별로 안 했을 것 같은데…….”

“효은이한테 물어봐도 모른다 그러구……. 근데 상호 너 효은이랑 연락 안 해? 효은이 엄청 화내던데…….”

“……전투가 좀 잦았거든요.”

연락 안 한 이유는 전투 때문이 아니지만. 상호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설미의 시선을 피했다.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도 애인인데 너무한 거 아니야? 올 때 같이 오지 그랬어. 아니면 전화해서 오라고 하던가…….”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거?”

의아해하는 설미에게 상호는 그저 씩 웃어 보이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걔는 절 너무 잘 알아서.’

대화를 하면 속마음을 금방 들켜 버리니까. 마주 볼 때는 더더욱.

더 말했다간 설미에게도 의심받겠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설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축제 보러 가죠. 누나네 반은 뭐 한대요?”

“우, 우리 반은 카페가 전통이 됐어…….”

“과자 애들 거 사가야 하는데.”

“많이 있어, 내가 따로 챙겨 줄게…….”

둘은 교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 * *

“언제 돌아가?”

쿠키를 골라 담는 상호에게 설미가 물었다.

상호는 쿠키가 든 봉투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교장선생님이 저녁에 뭐 한다던데. 그거 보고 가려고요.”

“잠은…….”

“잠은 돌아가서 자야죠.”

“……그렇구나.”

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는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어떻게든 잡아내려는 시선이 다닥다닥 달라붙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설미네 반 아이들. 일부는 다른 반에서 온 손님 아이들.

상호는 좀 더 여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귀가 너무 많아서 여의치 않을 듯싶었다.

‘이만큼 챙겼으면 충분하려나. ……응?’

상호는 설미네 교실로 들어오는 나빛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빛아?”

“선생님…….”

나빛이 힘없이 걸어와 상호의 등에 축 늘어졌다.

동생들과 있으면 그래도 좀 즐겁게 지낼 줄 알았더니, 영 아닌 모양이었다. 전장에 있는 친구들이 걱정되어서일까.

그는 습관적으로 나빛을 안아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어째 교실 공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진 느낌이 들었다.

설미와 둘만 있을 때는 뭔가 훈훈한 분위기였는데. 나빛을 무릎에 앉히자마자 아이들의 눈빛이 경계와 질시의 색으로 바뀌었다.

“쟤 뭐야?”

“자기 담임쌤이란 거지…….”

“일부러 우리 쌤 앞에서 보란 듯이…….”

“강쌤도 참 눈치 없어.”

“…….”

상호는 나빛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진땀을 흘렸다.

나빛이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다. 그냥 축제를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을 뿐. 그래서 아이들과 섞이질 못하고 함께 전장에서 싸운 상호를 찾아온 것이다.

그 기분을 상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빛이 왜?”

“그냥, 선생님 보고 싶어서요……. 저희 언제 돌아가요?”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설미와 설미네 반 아이들의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나빛이 기운을 내는 게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상호는 나빛을 데리고 문가로 걸어가며 설미를 돌아보았다.

“갈게요. 나중에 봐요.”

“응, 재밌게 놀아…….”

설미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닫히는 교실 문 사이로 학생들의 맹렬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호는 모른 척 문을 닫아버리고 나빛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출출하지? 과자 먹을까?”

“과자요……?”

“응. 설미 선생님이랑 애들이 구운 거.”

“……괜찮아요.”

역시 입맛이 돋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빛이 아침을 먹지 않았단 걸 빤히 알고 있는 터라, 상호는 일부러 보란 듯이 봉투를 나빛의 눈앞에 열어 보였다.

나빛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응?”

“……선생님.”

“응.”

상호는 쿠키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다.

“왜,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이상해요.”

“뭐가?”

“선생님이요.”

나빛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자세히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만큼.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실 수 있어요?”

“응?”

“선생님은 훨씬 많이 잃었는데…….”

나빛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안 무서우세요? 또 잃을지도 모른다는 게……. 오늘 만나 웃은 사람이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선생님은 안 그러세요? 너무 많이 잃으신 건가요? 너무 잃으면 무뎌지나요?”

“글쎄. 내가 이상해 보여?”

“네.”

그의 품에 나빛의 이마가 박혔다.

“선생님 너무 이상해요…….”

상호는 씩 웃으며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빛의 앞에서는 화낸 적이 없으니까. 나빛은 모를 것이다. 그가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왔는지.

“나도 많은 걸 외면하면서 살아.”

지금도 누구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처럼.

그 말에 나빛이 맑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생각보다 더, 많은 걸 겁내고 무시하려고 애써. 그래도 그걸 일일이 티 내지 않는 이유는…… 내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야. 나빛아, 잘 생각해 봐.”

“네.”

“두려워도 해야 하고, 두렵지 않아도 해야 한다면, 굳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무시하냐구요……. 말이 안 돼요, 선생님이 이상한 거예요…….”

“살아보면 알게 돼.”

상호는 씩 웃으며 나빛의 등을 토닥였다.

“너도 언젠간 받아들여야 하는 날이 올 거야.”

나빛은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상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안 왔으면 좋겠어요.”

둘은 한동안 인적 없는 복도 구석에서 그렇게 안고 안겨 있었다.

* * *

저녁.

조촐했던 예현제가 끝나고, 평소대로라면 반마다 모여 피자나 치킨 따위로 뒤풀이를 했을 시간.

짧아진 가을의 해는 이미 졌고, 거의 다 차오른 달이 하늘에 휘영청 떠 있었다.

상호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는 오늘 떠나요.”

모여있는 학생들에게 해련이 말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곧 따라올 거예요. 선생이 학생보다 학교를 먼저 떠나는 게 참 쉽지 않은 경험인데…… 그래도 다시 못 볼 건 아니니까.”

그 말의 진위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다시 볼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시는 못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어느 한쪽이 아예 없을지도 모르고.

“얼마나 오랫동안 못 보게 될지 모르니…… 평소에 하고 싶었는데 못 한 말이 있다면 지금 나누고, 잘 갔다오시라고 인사도 해요. 쑥스럽다고 내일로 미루지 말고.”

해련은 그렇게 말하고 상호와 상호네 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선생과 학생 간의 석별의 정을 나누라 했으면서 그 사이에 교장이 끼면 어떻게 하는가. 상호는 해련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한마디 했다.

“저도 우리 애들이랑 인사해야 하는데…….”

“응?”

해련이 동그란 눈을 깜작였다.

“난 우리 손녀 보러 왔는데?”

“……아하.”

“내가 강 선생이랑 인사를 왜 해? 강 선생이랑 나는 이제 한 침대에서 자야 하잖아?”

“…….”

그는 헛기침을 하고 돌아섰다.

뒤에서는 아이들이 성력으로 만든 간이 벤치에 앉아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딱 한 아이만 빼고.

아리가 황급히 시선을 비꼈다.

“아리야.”

“네, 네?”

“하고 싶은 말 있나 본데.”

“아……, 으……. 어…….”

갑자기 다혜가 되어 버렸다.

상호는 떠듬거리는 아리에게 곤란한 듯 웃어보이다가, 2학년 아이들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 반은 뭐, 따로 인사 안 해도 되잖아?”

“선생님.”

미래와 단비가 아리의 등을 확 떠밀었다.

“아리랑 어디 멀리 좀 갔다오세요.”

“……으?!”

당황한 아리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상호도 말해두고 싶은 게 있었던 터라, 자신을 가만히 주시하는 가은의 시선을 모른 척 흘리며, 씩 웃고 아리를 향해 손짓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네.”

아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따랐다.

운동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 본관 건물의 왼쪽 현관 옆 외진 구석. 상호는 아리를 데리고 가다가 그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아리야.”

“네.”

“하고 싶었던 말 있어?”

파란 꼬리가 부끄러운 듯 다리 뒤로 모습을 숨겼다.

“……좋아하던 사람한테 차였는데요.”

아리는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잊질 못해서…… 다시 한번 고백하고 싶어서.”

“응.”

“말하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나요.”

노란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그래서 말인데…….”

“응.”

“다 끝낸 후에 돌아오시면…… 제가 그 사람한테 고백하는 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상호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아주 깊은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침묵을 지킬 뿐. 자신을 힐끔거리는 아리를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그런데도 말할 수 없는 듯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허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그는 씩 웃었다.

“돌아오면 도와줄게.”

“정말……요?”

“응.”

그의 말에 아리가 살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쥔 채로 새끼손가락만 세워서.

“약속해 주실 수 있으세요?”

“…….”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 그는 곧 손을 들어 아리의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입으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아리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감사합니다.”

둘은 새끼손가락을 풀고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다녀오고 난 후에도 나빛은 멍하니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호는 나빛의 곁에 다가서며 연회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오늘 잘 놀았어?”

“……네.”

나빛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응?”

“저희 첫 수련회 기억나세요?”

수련회라. 기억을 더듬던 상호는 아 하고 탄성을 냈다.

“아아, 그래. 그때도 캠프파이어 했었지.”

“네.”

“왜, 그냥 생각났어?”

“……네.”

장소는 달라도 불을 보니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때는 수련원 교관이 부모님 이야기를 해서 나빛만 빼놓고 세희, 태화, 지윤과 넷이서만 부둥켜안았었다.

나빛도 그 일이 떠올랐을까. 조금은 생기가 돌아온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며 작은 주먹으로 상호를 투덕거렸다.

“나빴어요, 저만 떼놓고…….”

“미안, 미안. 그치만 나빛이는 괴롭힐 때가 너무 귀여운걸.”

“나빠요…….”

나빛은 양손으로 상호를 두드리다가 축 늘어져서 모닥불을 보았다.

상호는 나빛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빛아.”

“네.”

“부모님 뵙고 싶어?”

고민하던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어디선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두 개. 하나는 무겁고, 하나는 가볍고. 그러나 둘 다 다급하기는 매한가지.

상호는 달려오는 봉진과 유연을 발견하고 나빛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빛아!”

봉진이 나빛을 덥석 끌어안았다.

나빛은 갑자기 나타난 부모를 보고 깜짝 놀라 토끼눈이 되었다가, 영문을 몰라 흔들리는 눈빛으로 상호를 쳐다보더니, 곧 눈물을 흘리며 봉진을 마주 끌어안았다.

“아빠…….”

유연도 말없이 나빛을 안았다.

상호는 유연의 원망 가득한 눈길을 받아넘기고 나빛의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봉진이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봉진은 약속을 1초도 지키지 않았다.

“나빛아.”

봉진이 나빛의 양 뺨을 두 손으로 잡았다.

“집으로 가자. 응? 집으로 돌아가자…….”

“……아빠?”

“너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전쟁을 하니……. 밥은 제대로 먹어? 어떻게 이렇게 홀쭉해져서……. 어떻게…….”

나빛이 홀쭉해진 건 봉진의 엄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요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

상호는 계속 가만히 서서 봉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가자. 엄마랑 같이 가자. 네가 좋아하는 반찬 다 해줄게…….”

봉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빌듯이 말했다.

그러나 나빛은 대답하지 않고, 봉진을 안은 팔을 스르륵 내리며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걸 알아차린 봉진은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제발, 나빛아……. 집에 들어가서 얘기해 보자. 응? 네 이야기 다 들어줄 테니까 일단 집에 가자. 가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

나빛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운동장에 피운 모닥불 주변에서는 각 반마다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서.

어느 반은 애써 웃었고, 어느 반은 소리 죽여 훌쩍거리거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나빛은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못 가요.”

“응?”

“못 돌아가요.”

봉진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잠시 비틀거렸다.

답답해서 숨을 몰아쉬는 봉진 대신 유연이 나빛의 어깨를 붙들었다.

“충분히 생각했니?”

“네.”

“그럼 충분히 생각했는지는 누구한테 확인받았니?”

“저요.”

나빛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유연을 바라보았다.

“전 이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아요. 제 결정에 엄마 아빠 뜻은 중요하지 않아요.”

“……너.”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돼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제 능력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나빛의 말에 유연의 몸이 조금 기울었다. 멍해서 잠시 넋을 놓았던 듯이.

그래도 금방 다시 자세를 다잡았다.

“분명히 알고 있다는 건 어떻게 확인해? 나빛이. 넌 아직 애야. 네가 옳은지 틀린지는 너 혼자서는 알 수가 없어. 어떻게 네가 맞다는 걸 확신하니? 그러다 틀리면?”

“사람을 구하는 건 언제나 옳아요.”

나빛이 눈을 감았다.

“거기에 다른 사람 생각은 필요 없어요. 이게 옳으니까. 제가 맞으니까…….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나빛아.”

“나는 할 수 있어서 해야만 해요.”

그 확고한 대답에 유연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봉진은 이제 목표를 바꾸기로 한 모양이었다.

“강 선생…….”

봉진이 상호의 손을 잡았다.

“도와줘. 응? 제발 도와줘, 우리 딸 좀 어떻게 해봐…….”

“약속 어기셨잖아요.”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못 도와드립니다.”

“제발…….”

봉진이 무릎을 꿇었지만, 상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봉진이 약속을 어기리란 것을. 그래서 화가 나진 않았다. 부모라면 당연하다 생각해서.

가장 강한 인간을 눈앞에 두고도, 막상 딸을 만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어기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거짓말을 상호는 이해했다.

그도 오늘 거짓말을 했기에.

“나빛인 이제 제 말도 안 들을 거예요.”

상호는 봉진의 손을 떼어냈다.

“받아들이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발…….”

다시 상호의 손을 부여잡는 봉진의 옆으로 나빛이 다가왔다.

나빛은 조용히 봉진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어른이 아이를 달래듯이. 상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녁 정도는 같이 먹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등을 돌려 걸었다.

몇 걸음 지나고 나니 뒤에서 나빛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저 배고파요. 밥 먹으러 가요.”

“……그래.”

“아빠, 일어나요. 그만 울고…….”

“나빛아, 응? 제발…….”

“그 이야기 계속할 거면 나 그냥 밥 안 먹을래요.”

“알았어…….”

터덜거리는 두 발소리와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밥을 먹으면서 분명히 또 잡아두려고 하겠지만, 이제 나빛이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집에 붙잡혀서 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던 시절과는 다르게.

그는 운동장을 떠나는 가족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 * *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제는 선생과 학생의 작별도 막바지. 다 타고 남은 잉걸불이 붉은 보랏빛을 제 몸 안쪽으로 머금을 때.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상호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상호야.”

“아, 누나.”

상호는 설미를 돌아보았다.

“누나도 참전해요?”

“응. 내일 부대 찾아 가야지.”

“어디로?”

“동해 쪽에, 해안 경계…….”

“아하.”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설미가 물었다.

“상호 너는 부대 생활 많이 해 봤지?”

“다른 사람들만큼 길지는 않은데요. 저승부대는 침투부대였으니까…….”

“그래도 나보단 잘 알잖아.”

“그거야 그렇겠죠.”

설미는 참전 경험이 없으니까. 교사들도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뭐 궁금한 게 있는 거예요?”

“으응, 그게…… 뭔가 준비물이라든가, 팁 같은 게 있을까 싶어서.”

“글쎄요. 그런 건…… 나보단 여자인 효은이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텐데.”

“효은이한텐 이미 물어봤지.”

설미가 쓰게 웃었다.

“그냥 너한테 듣고 싶었어.”

“……아하.”

둘은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상호야.”

“네.”

“언제 가?”

상호는 자리를 뜨기 시작한 선생과 학생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곧 떠나야죠.”

자기 자신의 귀에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 말을 듣지 못한 설미는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우리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그럼요.”

“그치?”

설미의 고개가 조금 기울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상한 느낌이라.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어떤 느낌이요?”

“말로는 설명 못하는데…….”

설미가 멋쩍게 웃었다.

“그치만 뭐…… 나는 그런 주술사는 아니니까. 정령만 다룰 줄 알지 주적 계산을 잘하거나 영적인 감각이 예민한 건 아니니까……. 내가 한 말도, 그냥 헛소리일 거야.”

“…….”

상호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주술사의 영감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상호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다른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져서.

‘여자의 감이란…….’

효은과 통화하지 않기를 잘했다. 설미에게도 느껴질 정도면.

상호는 일부러 씩 웃었다.

“그렇겠죠.”

누구나 거짓말을 하며 산다.

선생에게. 제자에게. 친구에게.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또 많은 것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애인을, 운명을, 자기 자신을.

그러나 그는 도망친 적은 없었다.

“금방 다시 만날 거예요.”

상호는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듣고 말했다.

“이제 진짜 가야겠어요.”

“으응.”

“아마 연락 못 할 거예요. 너무 바빠서……. 그치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니까, 이해해 줘요.”

“응.”

설미가 살짝 웃었다.

“알아.”

“갈게요.”

상호는 교문을 향해 걸어가며 설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교문에서는 봉진과 유연이 나빛의 손을 잡고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호가 다가오는 것을 본 봉진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 찼다.

“강 선생.”

“예.”

“……언젠간 이 빚을 갚을 날이 올 거야.”

나빛이 떠나는 것을 받아들였기에 원망하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계속 애걸했을 테니.

상호는 봉진이 나름대로 인정했다는 것을 깨닫고 빙긋 웃었다.

“아마 잘 안 될 겁니다.”

“흥…….”

봉진은 콧방귀를 뀌면서도 나빛의 손은 놓지 못했다.

그런 부모의 손을 나빛은 조금씩 밀어내고 상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 엄마.”

나빛이 방긋 웃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봉진은 느릿하게 손을 흔들었고, 유연은 나빛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상호는 둘의 미련을 끊어내 주기 위해 나빛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가자.”

“네.”

나빛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전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해련을 먼저 찾아야 했다. 오늘 그들과 함께 가기로 해서. 지금쯤이면 하솔과 인사를 마치고 준비가 끝났을 것이다. 또 상호가 챙겨갈 과자도 교무실에 있었다.

상호는 본관 현관으로 향하며 나빛을 돌아보았다.

“밥 맛있게 먹었어?”

나빛이 밝게 웃었다.

“네.”

“뭐 먹었어?”

“그냥 집밥이요.”

“맛있었겠네.”

“네.”

봉진과 유연을 부르길 잘했다. 상호의 발도 조금은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관으로 들어와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나빛이 그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나빛아?”

“헤헤…….”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럴까. 피식 웃는 상호의 귀에 나빛이 속삭였다.

“선생님.”

“응.”

“저 선생님 좋아요.”

나빛의 팔이 상호의 목에 둘러졌다.

“선생님은 저랑 함께 있으셔야 해요…….”

“응.”

부모에게서 떼어놨으니 그 정도 책임은 진다. 상호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빛의 이어진 말이 그에게 거짓말을 강요했다.

“항상.”

“……항상.”

두 번 하고 나니 세 번째는 쉬웠다.

“그래, 항상.”

사람은 사실을 말할 수 없다던 악마의 궤변이, 사실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호는 마음을 얼굴 밑에 숨기고 그저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나빛과 눈을 마주치고 복도를 걸었다.

키는 1학년 때와 별 차이가 없는데.

‘부쩍 컸네.’

어쩌면 그가 보는 것보다도 더.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다가 양옆에 난 창들을 돌아보았다. 왼쪽은 운동장, 오른쪽은 교문.

한쪽에선 선생이 학생과 이별하고 있었고.

한쪽에선 부모가 딸과 이별하고 있었다.

‘……더는 늦출 수가 없구나.’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때.

그는 나빛의 손을 꼭 잡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복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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