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78화 (478/501)

<478화>

478. 귀향

“깨지 않게 잘 데려다 줘.”

“네.”

그의 등에 업힌 나빛을 세희가 넘겨받았다.

울다 지쳐 잠든 나빛의 뺨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상호는 나빛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장을 정리하고 돌아온 기지. 힘겨운 전투를 끝낸 헌터들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아이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은 누나한테 갈게.”

그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한나절은 자고 올 거야. 그동안 무슨 일 있으면 너희가 알아서 잘 해야 해.”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선 다혜와 은율, 지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웃어 보이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 * *

그렇게 후방 기지에 도착해, 병상에 누워 있는 민정의 곁에 누워 잠을 잤는데.

눈을 떠 보니 잠들기 전의 풍경 그대로였다.

‘……뭐야.’

상호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왜 안 됐지?’

심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 보니 무엇 때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민정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은 정상인데…….’

그때 머릿속에 익숙한 광경이 떠올랐다. 침대에 누워 있는 예경, 병상에 누워 있는 태화.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

‘……봉인인가.’

악마가 민정의 영혼을 봉인시킨 것이다. 영주가 마신의 영혼을 그리했던 것처럼.

봉인을 푸는 방법은.

‘술자를 죽이는 것…….’

상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술자는 필시 지배의 악마. 민정이 다칠 땐 그놈이 있었지만, 오크들과 전투했을 때는 오지 않았다. 아마 그놈의 짓이 확실할 텐데.

문제는 지배의 악마의 본체를 본 적이 없다는 것.

아니, 애초에 육체가 있긴 한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찾아서 죽여야 한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상호는 눈을 감은 민정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봉인이 맞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다시 시도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 언제 또 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르기에.

그는 다시 한번 민정의 맥을 짚고 병상에서 일어나서.

‘금방 깨워줄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 * *

격전의 다음 날.

전투의 후유증을 채 벗어나지 못한 헌터들이 좀비처럼 복도를 돌아다니고,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옥상에서 담배를 피고, 가족과 친지에게 전화해 한탄을 늘어놓고.

또 이유 없이 밖을 돌아다니거나, 무기를 손질하고, 신앙인들이 바쁜 탓에 치료받지 못한 작은 상처들을 치료하고, 그러고도 할 일이 없으면 TV를 보거나,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잠을 청하는 사이에.

한 무리의 소녀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피곤합니다.”

이츠키가 육포를 질겅거리며 중얼거렸다.

“우리 부모님은 딸이 이런 곳에서 전쟁 중인 걸 아실지…….”

세희는 이츠키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말 안 했어?”

“굳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츠키는 육포를 몇 번 더 질겅이다가 대답했다.

“슬슬 말은 해둘까, 고민 중입니다.”

“그게 맞지. 말씀은 드려야지.”

“그치만 그랬다간 한국으로 찾아올까봐……. 도양.”

“응?”

“도양은 말 했습니까?”

“아니.”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우리는 말 안 한 시점에서 들켰지, 이미. 아마 학교에 찾아오셨을걸.”

“오양은?”

“똑같제 머. 다 알끼다.”

“하양은?”

나빛은 자리에 없었다.

밥도 안 먹고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자거나 울고, 화장실을 갈 때만 슬그머니 기어 나와 말없이 다녀오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갈 뿐. 밥도 먹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이츠키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 없습니까?”

“안 했을걸. 통화하는 걸 한 번도 못 봤는데.”

세희는 혀를 차고 벤치에 늘어졌다.

“쟤는 부모님한테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원래도 잘 못 푸는 애가 더 꽁꽁 싸매고 있으니…….”

세희의 바로 옆에서는 태화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태화는 이츠키의 손에 들린 육포를 쏙 빼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냅둬. 저러다 알아서 말겠지.”

“넌 걱정 안 돼?”

“난 내가 제일 걱정되는데? 넌 아냐?”

“내가 왜 널 걱정해?”

“또또또 시작했고마.”

지윤은 질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하늘에서 날아오는 상호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쌤예~.”

“오양이 초기화가 됐습니다. 분명 자기만 빼고 다 데려갔다고 삐져 있었는데.”

“그러게.”

“……끄지라.”

짜증을 내는 지윤의 옆으로 상호가 착지했다.

하늘에서 볼 때부터 이미 나빛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나빛이는?”

“생활관에요.”

“아직 울어?”

“그럴걸요.”

“쌤, 쌤.”

태화가 눈을 깜작였다.

“민정쌤은?”

“……아직 못 깨웠어.”

상호는 정확하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기실은 그도 모르는 게 맞았다.

“좀 두고 봐야 될 것 같아. 너희 밥은 먹었어?”

“응.”

“나빛이는?”

“안 먹었어.”

“그래.”

이미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기지 현관을 향하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쉬고 있어. 나빛이랑 생활관에서 이야기하고 있을게.”

“응.”

“네.”

당분간 둘만 있게 들어오지 말라는 뜻.

아이들은 기지로 들어가는 상호를 바라보다가, 엷은 한숨을 쉬거나 입맛을 다시며 풍경을 돌아보았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 한가로움을 최대한으로 누리기 위해.

* * *

“나빛아.”

이불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빛은 손을 들어 이불을 살짝 걷어냈다.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털썩, 침대가 흔들림과 함께 담임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 안 고파?”

상호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나빛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 말을 하면 우스꽝스럽게 음이 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상호가 자꾸 말을 걸었다.

“뭐라도 먹어야지. 배고프잖아.”

도리도리.

“가져다 줄게. 응?”

절레절레.

어리광을 부리기는 싫었지만, 지금은 상호가 학을 떼고 얼른 멀어져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그 누구의 상냥함도 필요치 않았다.

‘그냥 가주세요…….’

나빛은 이불을 다시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하늘이 그 바람을 들었을까. 마침 상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잠깐 전화 받고 올게.”

침대에서 무게가 사라졌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걸음이 멀어지자 나빛은 이불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옆으로 무언가가 포르르 날아들었다.

‘응……?’

금색으로 빛나는 조그만 아기새.

나빛은 손을 뻗어 혁구를 검지에 앉혔다.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니 혁구가 조그만 날개를 홰쳤다.

“뺙.”

“꾸꾸야…….”

나빛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가 관물대에 있으랬잖아……. 어디 갔다 왔어……?”

“뺙.”

“밖은 위험하다니까……. 밥은 먹었어……?”

“뺙뺙.”

혁구는 그저 삐약삐약 울기만 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듯. 무심하게.

나빛은 혁구에게 뺨을 비비다가 문득 슬픈 눈빛을 지었다.

“꾸꾸야…….”

“뺙.”

“엄마 너무 힘들어…….”

혁구가 날개를 접고 나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는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럴 순 없다 해도……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나봐…….”

마주한 눈들이 소리 없이 깜작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착한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도 어려울까?”

“…….”

“그래도 역시…….”

나빛은 코를 훌쩍이며 혁구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손에 앉은 혁구가 가만히 나빛을 바라보았다.

나빛의 입에서 엷은 헛웃음이 스미어 나왔다. 새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데.

혁구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것이 꼭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해 버렸다.

“꾸꾸는 몰라도 돼…….”

나빛은 손을 둥글게 놓아 혁구를 이불처럼 감쌌다.

“다 엄마가 약해서 그래. 꾸꾸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이렇게, 엄마 힘들 때 곁에 있어줘…….”

“뺙.”

혁구는 그저 동그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 * *

[그런가…….]

핸드폰 너머에서 해련의 한숨이 쏟아졌다.

[애들은 괜찮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아니, 다행이라고 하기도 뭐한가. 얼마나 전사했다고요?]

“쉰하고 여섯이요.”

상호는 창가에 기대어 대답했다.

“규모에 비하면 적죠. 나빛이 덕분에 많이들 살았어요.”

[제자 자랑하는 거야?]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에요.”

전장의 모든 헌터들을 치료한 것도 모자라 전투를 끝내 버리기까지 했다. 나빛이 없었다면 피해는 절대 56명으로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56이란 숫자는 마냥 작진 않았다.

[강 선생.]

“네.”

[거기 분위기가 어때? 징병을 더 할 것 같아?]

“아마도요.”

숫자로는 수천 수백 중의 56이지만, 그 56의 절대다수는 최전선에서 총 대신 칼을 들고 싸우던 S급 헌터들.

사회에 남아있는 헌터를 긁어모아도 그들의 빈자리를 채울 순 없었다.

[학생도?]

“……그건 글쎄요.”

[뭐 어찌됐든 나는 무조건 가게 되겠네. 교사들도 갈 거고……. 참 계륵이야. 전시에도 헌터를 양성하는 곳은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강한 헌터가 되려면 강한 헌터한테 배워야 하는데, 그 강한 헌터들은 다 싸우러 가야 하니…….]

해련이 또 한숨을 쉬었다.

[강 선생은 괜찮고?]

“네.”

[다른 별일은 없어?]

민정이 당해서 못 일어나고 있다. 상호는 그 말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안 그래도 우중충한 상황에 대화까지 어둡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네.”

[알았어요.]

핸드폰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강 선생.]

“네.”

[애들 데리고 잠깐 오는 건…… 역시 힘들겠지?]

“학교를요?”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해련이 전장의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무슨 일 있어요?”

[축제. 애들한텐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아하…….”

당연히 못 간다.

민정도 없는데다 헌터의 수도 줄어든 상태. 상호도 세희도 태화도 전선을 함부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힘들죠, 저흰.”

[그렇겠지?]

해련이 쓰게 웃었다.

[강 선생 오면 학생들도 좋아할 텐데……. 강 선생도 좀 쉬고 말이야. 그치만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려나.]

“어쩔 수 없으니까요. 축제는 언젠데요?”

[내일 모레.]

“그럼 오시는 건 그 후겠네요?”

[그렇게 되겠죠.]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알았어요. 그럼 그때 뵙죠.”

[응, 쉬어요.]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축제. 상호는 딱히 가고픈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좋아할 것 같았다. 다들 오랫동안 고생했으니까.

그래서 갈 수만 있다면 갈 텐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잠깐만.’

핸드폰을 집어넣고 생활관 문을 향해 돌아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빛이만이라도…….’

힘들어하고 있으니까, 둘만이라도 잠깐 갔다 온다면.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은 놓고 가게 될 텐데. 그러기에는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빛도 친구들을 떼놓고 가는 건 싫어할 것이고.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나빛이도 가족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

그의 손은 이미 연락처를 뒤적이고 있었다.

유연에게 전화를 걸긴 무섭고. 봉진도 지금 상황에선 좀 껄끄럽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명.

짧은 연결음이 끝나자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너…….]

당황한 청년의 목소리. 상호는 그 말을 자르고 먼저 말했다.

“나로. 잘 지내냐?”

[잘 지내겠지? 너보다야……. 근데 야, 나빛이 어딨어?]

나로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마 나빛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연락이 온 줄로 착각하는 듯했다. 상호는 나로의 두려움을 풀어주기 위해 얼른 대답했다.

“잘 있어. 건강해.”

[아니 어디 있냐고……. 야, 너가 나빛이한테 우리 부모님 전화 받지 말라고 한 거야? 애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나빛이가 선택한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바람도 안 넣었고. 근데 나로.”

[응.]

“지금 집에 있냐? 부모님이랑?”

[응.]

“분위기 어때? 나랑 통화해도 괜찮으시겠어?”

[아버지? 어머니?]

“누구든 괜찮으신 쪽으로.”

[비슷한데…….]

“……으음.”

둘 다 똑같다니. 봉진은 조금 상태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침음하는 상호에게 나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나한테 말해, 임마. 내가 최대한 잘 전해볼게……. 근데 너, 진짜 나빛이한테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지?]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냥…… 나빛이가 기운이 없어서, 잠깐 가족들 보게 할까 생각 중이야.”

[진짜?]

“내가 너 속인 적 있냐? 말을 안 해준 적은 있어도 속인 적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속은 사람은 속은 줄 모르잖아.]

나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이래서야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데려가야 할 듯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정도로 신망이 없었나, 아니면 그만큼 부모에게 못할 짓을 한 건가, 싶기도 했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나빛이 건강해. 이건 진짜야. 만약 아니었다면 내가 너한테 전화를 할 수 있었을 것 같냐? 무서워서 하지도 못하지.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그런가……?]

영상통화도 아닌데 고개를 기웃거리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일단 알겠어. 근데 굳이 우리 부모님이랑 통화를 해야겠어?]

“말씀은 드리고 찾아가야지.”

말도 없이 불쑥 찾아갔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또 한 가지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로는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좋은 소리 못 들을걸.]

“상관없어.”

지금은 교사가 아니라 헌터니까.

학교에 있을 때처럼 쩔쩔매고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남의 딸을 홀랑 데려온 건 좀 미안한 일이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걸로 끝내면 될 뿐, 책임을 질 필요는 없었다.

교사는 학생을 돌보는 게 일이지만, 헌터는 사람을 구하는 게 일이었다.

“바꿔줘.”

[……그래.]

엷은 한숨과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터벅터벅 걷는 소리도.

[아버지.]

[응?]

[상호요.]

덥석, 무언가가 핸드폰을 덮치는 소리.

뒤이어 봉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강 선생? 강 선생이야?]

“예.”

상호는 생활관 문을 흘끗했다. 나빛이 이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기척을 읽어보니 들리지는 않을 듯했다.

“접니다.”

[강 선생……!]

태반은 분노. 반 이하는 애원.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다소의 안도. 상호는 봉진의 목소리에서 수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던 이를 봐 왔던 상호에게는 그런 봉진의 모습이 썩 싫지 않았다.

“늦었지만 염치불구하고 연락드렸습니다.”

[나빛이는? 나빛이 옆에 있나? 우리 애, 애 좀 데려와 주게…….]

“지금 자고 있습니다. 나빛이는 별 탈 없어요.”

상호는 본론을 꺼냈다.

“아버님. 나빛이가 요즘 좀 힘들어해요.”

[당연하지! 그 어린애를 데려가놓고는……. 자네 지금 어딘데?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거기 가만히…….]

“안 그래도 데리고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응?]

그런데라는 말이 붙자 봉진이 당황했다.

[그런……데?]

“빠른 시일 내에 시간을 내서 한번 뵈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님이 나빛이를 보려면…… 약속을 하나 해 주셔야 해요.”

[약속?]

“예.”

상호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나빛이를 만나셨을 때, 어떤 이유로든, 설령 나빛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해도…… 헌터 일을 그만두라거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하지 않는 것. 그게 제가 나빛이를 만나게 해드리는 조건입니다.”

[아니…….]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딸도 내가 마음대로 못 봐?! 이게 말이 돼!]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볼모를 잡았다고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고…… 나빛이한테 정말 많은 게 달려 있기 때문에, 이걸 받아주시지 않으면 저도 나빛이 못 데려갑니다.”

[제발…….]

봉진이 아무리 애원해도 상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정하세요. 지금도 언제 또 전투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다음 통화가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어요.”

[……알았어.]

결국은 항복을 받아냈다.

[자네 좋을 대로 해. 그치만…… 자네도 약속 지켜야 해.]

“그럼요. 그러면…… 이틀 뒤에, 제가 데려갈 때 다시 연락을 드리죠.”

상호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말을 덧붙였다.

“아버님.”

[응?]

“아버님은 좋은 아버지십니다.”

[…….]

“그렇지만 좋은 아버지라고 해서 헌터의 일을 방해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버님이 아무리 나빛이를 사랑하고, 또 위한다고 해도…… 나빛이가 헌터 일을 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면, 그때는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봉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음은 알아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짐작한 상호는 작별 인사를 했다.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통화를 끊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틀 후에 전투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생활관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이불이 둥그런 보따리를 만들고 있었다.

“나빛아, 자?”

“…….”

“자는가 보구나.”

그렇게 여겨주길 바랄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잠에 든 사람의 숨소리가 아니었지만, 상호는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결심은 혼자 내려야 굳은 법이기에.

그가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도, 나빛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 * *

이틀 후.

“뭐어?”

상호의 티셔츠와 트렁크를 입은 태화가 배를 벅벅 긁으며 눈을 부라렸다.

“어딜 간다고?!”

“너 내 옷 꺼내입지 말랬지.”

“둘이 어딜 간다고?!”

“하…….”

상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모여 앉은 아이들이 또랑또랑한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세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응.”

“나빛이랑 둘이서만 갔다오시겠다구요?”

“응.”

나빛은 지금 방음 결계 속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나빛에게는 아직 어딜 간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친구들을 떼놓고 혼자만 데려간다고 하면 안 간다고 할 게 뻔하니, 학교로 데려가는 도중에 슬쩍 알려줄 생각이었다. 친구들이 허락해줬다는 말과 함께.

지금 그 허락을 구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다 같이 안 갈 생각이었는데…… 너희도 알잖아, 나빛이 요즘 힘들어하는 거……. 그래서 둘이서 갔다 오려구.”

“므아…….”

다혜가 군침을 꼴깍 삼켰다.

“아으아으.”

“올 때 축제 음식 하나씩 다 사오래요.”

“……으응.”

다혜는 이미 허락했나 보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뭔가 입술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려는 게 불만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불만의 종류는 아마도 하나.

“나도 갈래!”

태화가 눈을 부라렸다.

“나도 고생 많이 했잖아! 갈만하잖아!”

“굳이 따지자면 넌 덜 한 편이지.”

“우씨, 편애하지 마! 3학년 축제를 누구는 즐기고 누구는 못 즐겨? 안돼! 다 때려 쳐!”

침대 위에서 인간 풍차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속마음은 같을 터였다. 내년이면 졸업을 하게 되는 아이들의 마지막 축제.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을 전쟁에 빼앗긴 상황에서, 학교 축제는 아이들에게는 무시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는 다른 아이들의 눈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해?”

“……맘에는 안 드는디.”

지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툴툴거렸다.

“쌤이 그래야겄다 생각하믄 말릴 생각은 없습니더. 대신에…….”

“대신?”

“나중에라도 우덜헌티 오는 기 있어야지예. 나빛이 띠놓고 으데 여행이라도 가뿔든가…….”

그때 지윤의 옆에서 혁구가 고개를 들었다.

“뺙?”

“아이고, 꾸꾸 들었나. 너그 어무이헌티 말하믄 안 된디.”

상호는 혁구를 쓰다듬는 지윤에게서 눈을 돌려 은율과 이츠키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상관없습니다.”

“저도…….”

은율이 눈을 내리깔았다.

“선생님이 보답해줄 생각만 있으시면 괜찮아요.”

“……그래.”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답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생각만 있어도 괜찮다면야.

시계를 보니 시침이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생님 없는 동안 조심하고.”

그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심상치 않다 싶으면 연락하고, 너희끼리 싸우지 말고.”

“아잇, 잔소리는…….”

“나빛인 어차피 밥 안 먹을 거야. 너희끼리 먹으러 가면 데리고 갈게.”

“네.”

아이들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응.”

곧 아이들이 방을 나서고 문이 닫혔다.

상호는 곤히 잠든 나빛을 깨우기 위해 어깨를 흔들려다가, 조금은 더 자도 괜찮을 거란 생각에 손을 거뒀다.

‘준비는 천천히 해도 되겠지…….’

그는 관물대에서 평상복을 꺼냈다.

* * *

“으으…….”

나빛이 눈을 비비며 침음했다.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그냥, 도시에.”

“왜요……?”

“그냥?”

“아이…….”

나빛의 고운 손이 상호의 어깨를 투덕거렸다.

상호는 등에 나빛을 업은 채로 하늘을 날아가는 중이었다. 언제든 전속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힘을 아끼며 경공을 펼치는데, 귓가를 스치는 바람 사이로 따뜻한 하품이 새어 들어왔다.

“졸려?”

“아니요…….”

졸린 목소리.

정신을 차리면 또 이불 속에 틀어박힐까봐 얼른 데리고 나왔다. 덕분에 나빛의 눈에는 채 떼어내지 못한 눈곱이 남아 있었다.

출발한 지는 꽤 시간이 지나서, 이제 막 시야에 도시가 들어오기 시작한 참. 예현여고까지는 여유롭게 이십 분 정도 잡으면 될 듯싶었다.

“나빛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침도 안 먹었잖아.”

“……괜찮아요.”

나빛은 상호의 등이 이불이라도 되는 것마냥 얼굴을 숨겼다.

“안 먹어도 돼요.”

“그래.”

어차피 학교에 가면 군것질거리가 많을 것이다. 상호는 더 묻지 않고 하늘을 날았다.

한참이 지나자 저 멀리 예현여고가 보였지만, 나빛에게서는 유난한 움직임이나 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등에 얼굴을 파묻어서 주변을 못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장난기가 동한 상호는 아무 말도 않고 예현여고 상공까지 날아가 본관 옥상에 살며시 착지했다.

나빛은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조심조심…….’

그는 살그머니 발끝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옥상과 실내를 구분하는 문을 열자 아주 익숙한 소리가 났다. 슬리퍼 끄는 소리, 학생들 떠드는 소리. 둘 다 평소보다 큰 것이 축제 준비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시간은 오전 8시.

‘우리 애들은 뭘 하기로 했으려나.’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들어서니 마주치는 아이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상호는 얼른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 쉿 소리를 내었다.

상호를 마주친 아이들이 신난 걸음으로 뛰어 각자의 반으로 돌아갔다.

‘우리 반 애들만 모르고 있겠군.’

교실로 가보니 문은 닫혀있고, 창에는 암막이 쳐져 있었다.

대체 뭘 하고 있나. 상호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뒷문에 귀를 붙였다.

‘……영화 소리인데?’

다른 반은 한창 바쁜데 왜 여긴 영화나 보고 있을까. 그는 진땀을 흘리며 뒷문을 슬금슬금 열어 보았다.

소파에 드러누운 아이들이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

아무리 봐도 영화관이랍시고 영화만 틀어놓고 농땡이나 부리는 것 같은데.

상호가 조용히 들어설 때까지도 아이들은 멍하니 영화만 보고 있었다.

“멍, 나 팝콘.”

단비가 손을 뻗자 미래가 핀잔을 주었다.

“니가 갖다 먹어.”

“우씨……, 네 옆에 있잖아.”

“이건 내 커스텀이라고. 소금이랑 카라멜이랑 황금 비율로 섞어서 만든……. 넌 네가 만들어 먹어. 기계까지 만들어 줬구만.”

“씨이…….”

단비는 입술을 삐죽이며 일어났다가, 소파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상호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상호가 검지를 들 새도 없이 단비가 딸꾹질을 했다.

“……멍끅!”

아이들은 처음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단비가 소파에서 일어서다 만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있자, 하나둘씩 눈을 끔뻑이며 단비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단비의 시선을 따라가던 미래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어라?”

그리고 아리도, 하솔도, 하나둘씩 뒤를 돌아보았다.

시큰둥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귀신을 본 듯이.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선생님!”

아리가 구르듯이 소파에서 튕겨나와 상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호는 가슴팍을 들이받는 아리의 뿔을 잽싸게 손으로 막아내고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등에서 자고 있는 나빛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뒤이어 달려든 다른 아이들이 상호를 와락 덮쳤다.

“선생님? 뭐예요? 전쟁 끝났어요?”

“멍, 언니들도 온 거예요? 다 왔어요? 어디 있어요?”

“이겼죠? 이긴 거죠?”

“얘들아, 잠깐만…….”

“……우웅.”

그 소리에 나빛이 고개를 부스스 들었다.

나빛은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상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다가,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아채지 못한 듯 다시 고개를 숙여 상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쿠울…….”

“멍, 언니 우리 못 봤어.”

“언니! 언니!”

미래가 나빛의 어깨를 흔들었다.

“언니, 눈 떠봐. 언니!”

“우웅……?”

나빛이 다시 눈을 떴다.

방금과 똑같이 부스스 고개를 든 나빛은 이번에도 맹한 눈으로 교실과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또 잘못된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 빠지려는 듯싶더니.

그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이제서야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상호는 당황한 나빛을 땅에 내리고 어깨를 품에 안았다.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를 한 입 베어 물고서.

“짠.”

“짠이 아니잖아요! 왜 학교에…….”

나빛이 혼란스런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다른 애들은요?”

“너만 오기로 했어. 다들 알고 있어.”

“네……? 그, 그럼 왜 저한텐 말을 안…….”

“글쎄. 왜 그랬을까.”

상호는 대충 흘려 넘기며 나빛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누군가가 음모를 꾸몄을지도 모르겠네. 그럼 뭐 어때. 기왕 온 김에 좀 쉬다 가지 뭐.”

“저, 저희 빨리 돌아가야 해요…….”

초조하다 못해 덜덜 떨리는 목소리.

나빛은 간절한 눈빛으로 상호를 바라보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희 없는 동안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요……. 얼른 돌아가요…….”

“지금은 괜찮아. 좀 놀아도 돼.”

“어떻게 저만 놀아요…….”

“나도 있잖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호는 그걸 알아채고 나빛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말머리를 돌렸다.

“그놈들도 피해가 크니까 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그 얘기는 그만 하고……. 그런데 너희.”

“네.”

“축제 준비…… 다 한 거야?”

상호의 말에 아이들의 입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억울한 일을 당한 아이가 하소연하기 직전에 그러듯이.

“그치만 사람이 반의 반밖에 없잖아요!”

“아니 난 다 했냐고만 물었는데…….”

“언니들도 없고! 우린 축제 준비 한 번밖에 안해봤는데! 멍!”

“언니들은…… 끄응.”

그러고 보면 첫 예현제 때는 설미의 반에 꼽사리를 꼈다. 학생이 넷밖에 없어서.

그래도 영화관은 조금.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니?”

“선생님도 없고!”

“알았어, 알았어.”

상호는 한숨을 쉬고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래도 이제 있잖아. 지금부터라도 뭔가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영화관을 하더라도 좀 더 특별한…….”

“칫…….”

뭔가를 더 하라는 말에 이서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툴툴거렸지만.

“이서야……?”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을 동그랗게 뜬 나빛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뭘 하든 간에 빨리 마쳐야 했다. 상호는 시계를 흘끗하고 교실을 쓱 둘러보다가, 마땅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뭐 좋은 거 없을까? 사람이 적어도 할 수 있을 만한 게…….”

“멍!”

그때 단비가 꼬리와 귀를 동시에 쫑긋 세웠다.

“선생님! 선생님!”

“응?”

“이거, 이거 어때요?”

“……뭐가?”

어리둥절해하는 상호와 아이들의 앞에 단비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펼친 손바닥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 * *

“찍!”

같잖은 기합.

또각

부러지는 나무젓가락.

다람이 부러진 젓가락을 던지자 교실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우와아앗!”

“꺄악! 팬이에요 오빠!”

“근데 수컷이야? 암컷이야?”

“몰라! 뭐 어때!”

“…….”

객석 뒤에 선 상호는 조악한 무대를 바라보며 진땀을 흘렸다.

‘결국 너희가 일하긴 싫었던 거구나…….’

이러라고 키우게 해준 게 아니었는데.

책상으로 만든 조그만 무대 뒤에서는 단비가 껍데기를 까지 않은 호두를 들고 서 있었다. 차력쇼를 마친 다람이 뒤를 돌아보며 코를 킁킁거리자 단비가 호두 두 알을 던졌다.

다람이 그걸 받아 저글링을 시작하자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밥 먹고 조련만 시켰나…….’

언니들이 없어서 심심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대 옆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미래가 웬 통을 들고 서 있었다.

“자! 이 대단한 다람쥐에게 상으로 간식을 주고 싶다면! 해바라기 씨가 2천 원! 아몬드가 3천 원! 다람쥐가 환장하는 잣이 4천 원!”

“몇 개씩이에요?”

“개당!”

“…….”

그걸 누가 사겠니.

폭리도 이런 폭리가 없다. 아무리 고물가 시대라지만. 한 줌도 아니고 견과류 한 톨이 몇천 원이라니. 상호는 절대 팔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비가 다람의 호두를 덥석 잡았다.

“찍?”

“응?”

쇼가 멈추자 관객들이 눈을 깜작였다.

모두가 의아해하며 단비만 바라보는 그때, 단비가 껄렁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호두를 허공에 던졌다가 잡았다.

“멍, 다람이가 배고파서 더 못하겠대요.”

“……응?”

“먹이를 주면 더 열심히 할 텐데……. 멍.”

단비의 손에는 어느새 얇은 밧줄이 들려 있었다.

“개쩌는 외줄타기 쇼랑 불쇼도 남았는데…….”

“응……?”

“어쩔 수 없죠, 멍. 다람이가 배고파서 못하겠다는데.”

“……!”

상호와 학생들은 이미 홀린 듯이 지갑을 열고 있었다.

“주세요!”

“나, 나도…….”

“불쇼! 불쇼 보여주세요!”

“자자~. 잠시만요, 잠시만~.”

미래는 쏟아지는 돈다발에 쾌재를 부르며 들고 있던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흐뭇하게 웃던 것도 잠시.

“……어라?”

“뺙?”

텅텅 빈 통 속에서 혁구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고, 배가 빵빵하게 부푼 채.

“…….”

“…….”

“뺙.”

미래와 단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오, 오늘만 특별 이벤트!”

“응? 그치만 축제는 오늘만인데…….”

“배고파도 쇼는 계속됩니다! 그게 프로페셔널! 바, 바로 외줄타기 경공쇼 시작하겠습니다, 멍…….”

“꺄아아아!”

“다람 오빠~!”

“…….”

상호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교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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