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477. 신
“……긍께.”
지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크 마법사를 조지뿔믄 미사일이 날라와가…… 다 뽀사뿐다 이 말이제?”
“응.”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막을 못 치게 방해해야 해.”
“그놈덜은 쩌그 안짝에 있고? 근디 마.”
지윤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니 말대로믄 우덜이 미사일에 맞아뿔지도 몬다는 말 아이가?”
“……그럴지도.”
“우짤라고 너거끼리 그래 갈라고 했노?”
“그렇게 안 하면 다 죽게 생겼으니까.”
“……하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지윤의 몸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사람의 것보다 조금 더 검고, 조금 더 끈적이는 피가.
은율은 지윤의 손과 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다쳤어?”
“아이다. 내는 괘안티. 호신강기 쓰믄 안 다친다 아이가.”
그 말에 은율과 이츠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강기 쓸 수 있어?”
“오양이? 정말입니까?”
“새삼스럽기 먼 소리고? 강기야 다 쓰는 긴데……. 너거도 쓰는 기를 가꼬 갑자기 와 그라는데?”
지윤도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멍청히 눈만 깜빡이는 꼴을 보니 오르커드에 대해 모르는 듯싶었다. 은율은 입맛을 다시고 검지를 빙글 돌렸다.
“이 안개 속에선 마나를 못 써. 마법도 강기도……. 그래서 우리도 지금 몸 안에 있는 내공만 쓰고 있어.”
“그라믄 내는 머고?”
“강기가 엄청 강한 사람은 쓸 수 있대.”
“……아아.”
지윤이 들어 올린 손에서 하얀 강기가 타올랐다.
“이거 말하는 기가?”
“아마도.”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윤이 합류했으니 이제 오르커드를 꿰뚫고 가는 선택지가 조금 더 힘을 얻었다. 고작 0%에서 1%로 올라온 것일지도 모르지만.
선택은 빠를수록 좋았다.
“시간 없어. 출발해야 돼. 이츠키 네가 말한 대로 한번 해보자.”
“뚫고 가자는 말입니까? 좋습니다.”
“아니 마, 느그들 미사일은 우짜냐꼬. 이 마나 못 쓰는 안개에 들어가믄 너거가 미사일을 우째 막냐니까? 내헌티 방향만 알리 도.”
“안개 낀 밤에 어떻게 방향을 찾습니까? 불빛도 없는데. 이건 내 눈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아니 글타고……, 응?”
옥신각신,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우기던 세 소녀는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기척을 느끼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지윤이 주먹을 말아 쥐고 자세를 잡았다.
“거 누굽니꺼?”
멈춰 선 그림자에게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누군데?”
“헌터지예.”
“목소리가 헌터가 아닌데.”
“지가 아재보다는 셀 깁니더.”
그림자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피로가 쌓여 초췌한 몰골. 하지만 촛불처럼 선명하게 일렁이는 눈빛.
이미 격전을 치렀는지 부러진 검을 칼집도 없이 손에 쥐고 있었다.
“뭐야, 너희.”
헌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학생 아냐?”
“학생이믄 우짤긴데예.”
지윤이 초강기를 두른 주먹을 들어 올리자 헌터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 여깄으면 안 된다고는 못하겠네. 근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오크 마법사들 공격하려고요.”
“마법사? 어디 있는지는 알고?”
“네. 적 진영 후방이요.”
“아니, 그러니까…… 후방까지 가겠다고?”
“네.”
은율의 대답에 헌터의 얼굴이 당황과 황당으로 가득 찼다.
“너희 셋이서?”
“네.”
은율과 이츠키와 지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러는 동안에도 전선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은율은 그냥 헌터를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이츠키와 지윤을 돌아보았다.
“출발하자. 어떻게 살아남을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돌겄구마…….”
지윤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마. 함 가 보자.”
“뭐?”
헌터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지만, 지윤은 이미 은율과 이츠키를 데리고 전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당황한 헌터는 저도 모르게 아이들의 뒤를 쫓아갔다.
“야, 임마들아! 위험하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알믄 와 따라오는디예. 아재는 쩌그 가가꼬 싸우이소!”
“아니 애들끼리만 어떻게……, 아이고……!”
세 소녀와 한 사내가 보랏빛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 * *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적사자는 탈골된 어깨를 앞발로 눌러서 끼워 맞췄다. 그의 팔을 뜯어버리려 했던 장본인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 반편이 악마를 지키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낮은 으르렁 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쓸데없는 걸 신경쓰느라 제대로 싸우질 못하는군.”
“너희도 얘 때문에 온 거잖아.”
상호는 검을 들어 적사자를 겨눴다.
“원한다면 일대일로 싸우지. 몬스터도 악마도 다 물리고.”
“유감이지만 내가 조종하는 게 아니라서.”
적사자는 끼워 맞춘 팔을 빙빙 돌렸다.
“그 꼬마만 죽으면 우리끼리 싸우게 해줄 듯싶은데. 어떠냐?”
대답 대신 강검이 날아왔다. 적사자는 주변으로 날아든 강검을 쳐내며 급히 몸을 뒤로 뺐다.
‘……쳇.’
놈은 지금 악마의 눈을 가진 꼬마와 함께하고 있었다.
자칫 방심하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그 순간 심장을 찔릴 것이다. 방금 강검을 쳐낸 것처럼 구멍도 마나로 보호할 순 있겠지만,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싶진 않았다.
놈의 영혼의 마나는 인간치고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꼭 두 사람분의 것이 합쳐진 것처럼.
‘곤란하군…….’
싸움은 좋지만 죽기는 싫다.
처음엔 꼬마만 죽이면 쉽게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닥쳐 보니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힘을 가진 사내와 눈을 가진 꼬마가 함께하고 있다는 게.
평소에 놈과 싸울 때는 아무렇게나 막 싸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으니.
저렇게 두 명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라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역시…….’
지금 죽여 놔야만 한다.
적사자의 시선이 신비의 악마를 향했다. 그러자 신비의 악마는 말없이 영혼을 엮어 주술을 잣기 시작했다.
상호와 태화가 선 땅바닥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한여름 뙤약볕에 뜨겁게 달궈진 것처럼.
“응?”
상호는 묘한 감각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째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솜이 물이 젖듯이. 아직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으음.’
움직임은 미세하게 굼떠지고 있었다.
주술일까. 안 그래도 싸우기 힘들어 죽겠는데. 느려지는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전투에는 영향이 컸다.
거기에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강검까지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는 것.
‘……!’
상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나에는 무게가 없을 텐데. 꼭 무게추가 달린 것처럼 서서히 아래로 끌어내려진다. 있어서는 안 되는 기사에 상호의 평정이 크게 흔들렸다.
눈동자의 초점이 살짝 풀리는 순간.
야성의 악마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르……!”
적사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앞발에 손톱을 세웠다.
그동안 처맞은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해 주리라. 그렇게 벼르며 앞발을 휘두르는데.
신비의 악마가 그를 불렀다.
‘적사자.’
‘응?’
앞발이 사내의 검에 막혔다.
‘놈보다는 반편이 악마를 노리는 게 낫겠습니다.’
‘닥쳐라, 기껏 좋은 기회를 잡아 놓고는…….’
‘지금 빨리 반편이를 죽이고 나면 놈과 원 없이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실컷 싸울 수 있게 저주도 풀어 드리지요. 이대로 싸워 봤자 재미없지 않습니까.’
적사자의 고개가 기우뚱했다.
‘그렇게 되는 건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적사자는 목표를 바꿔 반편이 꼬마 악마를 노리기로 했다. 그 낌새를 알아차렸을까, 사내는 팔을 뒤로 뻗어 꼬마를 지키며 적사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속도가 느렸다.
검도, 강검도.
‘크흐…….’
적사자는 낙승을 확신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사내의 뒤편에서는 다른 악마들이 꼬마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신비의 악마의 마법까지 더해서.
느린 칼로는 절대 전부를 막아낼 수 없었다.
‘끝이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적사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톱에 힘을 주는 순간, 사내의 발치로 가라앉아 있던 강검들이 갑자기 둥실 떠올랐다.
‘음?’
적사자의 의식이 잠시 멍해졌을 때.
강검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주변에 몰려든 악마들을 쓸어버렸다.
콰아아아……
악마의 육체로 이뤄진 조각들이 둥글게 비산하고, 채 날아가지 못한 조각과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달려들던 적사자는 그 검붉은 꽃의 가장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뭐냐.’
적사자의 시선이 사내의 건너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신비의 악마 또한 당황한 기색으로 굳어 있었다.
적사자는 헛웃음을 쳤다.
‘계산을 틀린 거냐?’
‘이럴 리가…….’
신비의 악마가 중얼거리는 순간.
반편이 꼬마 악마가 콧대를 높이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중력 마법 따윈 1학년 1학기에 이미 마스터해 놨다고.”
“그런 건 또 언제 배웠어?”
“왜 몰라? 쌤 의족 만들 때 말해 줬잖아!”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냐…….”
“나한테 관심이 없지! 흥!”
제법 기세등등해졌는지 농담이나 따먹고 있다. 신비의 악마는 두 인간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아니야.’
방금 쓴 건 중력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계산에 계산을 거듭해 이끌어 낸 고등한 주술. 영혼의 마나를 쓰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도 묶어둘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주술이었는데.
고작 반편이 악마 따위가 풀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른 힘이 있는 건가.’
대악마와 비견될, 혹은 대악마 그 자체의 힘을 어떤 방식으로든 손에 넣은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고민에 빠진 신비의 악마의 앞에 강검이 날아들었다.
‘……윽!’
“뭘 넋놓고 자빠졌냐.”
상호는 강검을 태화의 주변에 펼치고 검을 치켜들었다.
“찌끄레기들 치우니까 이제야 좀 시원하네. 저기 허연 놈만 없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싸워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어때, 일대일. 꼴리지 않아?”
“……크륵.”
적사자는 가만히 상호를 노려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적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호도 먼저 덤벼들 수 없었다. 조무래기는 정리했다 쳐도 아직 뒤에 신비의 악마가 남아있었기에.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상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언제 지배의 악마가 올지 모른다. 놈이 오면 지금 바닥에 굴러다니는 악마의 시체들이 더 이상 시체가 아니게 된다. 놈이 오기 전에 이 전투를 빨리 끝내야 했다.
‘시간 싸움인가.’
세희와 헌터들은 잘 버티고 있을까. 그는 그러기를 바라며 야성의 악마에게 강기를 날렸다.
* * *
“마!”
지윤은 오크를 반탄강기로 날려 버리며 소리쳤다.
“잘 따라오고 있나?!”
“얌마, 소리치지 마! 듣고 오잖아!”
“아재는 와 계속 따라오입니꺼!”
“소리치지 말라고…….”
“달리기나 하는 겁니다.”
이츠키가 핀잔을 날렸다.
은율과 이츠키, 그리고 헌터는 지윤의 뒤를 따라 전장을 달리고 있었다. 짙은 보랏빛 안개 속 마주치는 오크들을 모두 날려 버리면서.
밤이 되어 내려앉은 어둠이 그들의 모습을 가려주는 중이었다.
‘만약 지금이 낮이었다면…….’
아까 보았던, 산을 새까맣게 뒤덮었던 군세가 어둠 대신 그들의 곁을 에워싸고 있었을 것이다. 은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바쁘게 달렸다.
전투가 길어지자 빽빽했던 오크의 전선에도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헌터들이 아직은 잘 버티고 있어서이기도 했고, 어둠 속의 오크들이 피아를 구별하지 못해 서로 짓밟게 되어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도현과 세희 두 사람이 맹위를 떨치며 적진 한복판에서 난리를 치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들이 가는 길에는 오크가 많지 않았다. 은율은 지윤을 따라 달리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쉽게 갈 수 있을지도…….’
그때 무언가가 그들의 머리 위를 가르고 날아갔다.
환하게 빛을 내는 불덩이.
“어?”
지윤이 당황했다.
“저거 머꼬. 마법 못 쓴다카지 않았나?”
“아니, 저건…….”
이츠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화살입니다.”
불화살에 무언가 달려 있었다.
기름을 흩뿌리며 날아간 불화살이 땅에 불을 질렀다. 처음에는 은은하게 파란빛으로 타오르던 불은 낙엽과 풀을 삼키며 점차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보랏빛 안개 속에 빛과 흑연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
모두가 숨을 죽이고 앞을 향해 달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차피 돌아갈 순 없다.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하지 않는단 선택지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땅이 점점 오르막으로 변했다.
‘거의 다 왔나.’
은율은 헐떡이는 이츠키를 다독이며 계속 달리게 했다.
마주치는 오크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오크들은 전선의 전방에 몰려 있을 테니 후방으로 갈수록 한산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택한 경로가 비교적 가장자리이기도 했다.
곧 안개의 끝이 보였다.
“나왔다!”
“아이고…….”
오르커드를 돌파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오르커드를 돌파하는 것은 과정일 뿐, 임무의 성패와는 관계가 없었다. 은율은 짧게 숨을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츠키가 낮은 산을 가리켰다.
“이쪽입니다.”
넷은 또다시 그 방향으로 달렸다.
그런데 그때까지 군말 없이 따라오던 헌터가 갑자기 당황하며 눈을 끔뻑였다.
“잠깐만, 잠깐만. 너희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아이들은 구태여 대답해주지 않았다. 설명하기엔 너무 귀찮아서.
낮은 산의 정상으로 향하려는데 길목에 한 무리의 오크들이 있었다. 대략 열 마리 남짓.
놈들을 제일 먼저 발견한 지윤이 나무 뒤에 모습을 숨겼다.
“저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츠키는 오크의 손에 들린 횃불과 도끼를 힐끔했다.
“보초가 아닌가 싶은데…….”
“그라믄 이 너머가?”
“그럴 겁니다.”
아이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쓰러트리고 지나가는 것은 쉽다. 지윤에게 오크 열 마리 정도 때려눕히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오르커드 밖으로 나왔으니, 은율과 이츠키, 헌터까지 함께한다면 저 정도 오크들은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오르커드 바깥쪽이라는 것.
위치를 함부로 드러냈다가는 주변의 모든 오크들이 몰려올 터였다.
“돌아서 가자.”
은율의 말에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굳이 험한 길을 골라 주변을 빙빙 도는데, 어딜 가도 오크들의 경계가 삼엄했다. 오크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지윤이 난색을 지었다.
“뚫어야겄는디.”
“……으음.”
은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적진 한복판에 고립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곳으로 유인하면 되는 거 아냐?”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본 은율에게 헌터가 말했다.
“한 명이 소리치면서 달리는 거야. 오크들이 몰려오게. 그러면 길이 열리겠지.”
“……가능은 하겠지만.”
그 한 명은 수많은 오크들에게 쫓기게 될 텐데. 누가 그런 역할을 맡는단 말인가.
앞으로 적군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는데, 가장 강한 지윤을 여기서 소모할 순 없고. 이츠키는 길 안내에 필요하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은율과 헌터 둘뿐인데.
‘오르커드 밖이니까…… 도망 정도는 칠 수 있을지도.’
하지만 포위당할 위험이 존재했다.
은율이 고민하는 와중에 헌터가 손을 들었다.
“내가 갈게.”
“……아저씨가요?”
“별수 있나. 셋이 친구인가 본데.”
헌터는 부러진 검을 내려다보다가 은율에게 내밀었다.
“칼만 좀 바꾸자.”
은율은 차고 있던 검을 빼서 헌터와 맞바꿨다.
새 검을 받은 헌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서히 아이들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꼭 성공해라.”
아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저 멀리에 보초를 선 오크들을 향해서.
은율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네.’
곧 헌터의 고함이 들리고, 오크들의 괴성이 겹쳐졌다.
한곳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오크들. 길목이 열린 걸 확인한 아이들은 그 즉시 나무 뒤에서 나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오양! 이쪽! 이쪽입니다.”
“하이고, 하루죙일 뛰기만 하는구마…….”
세 명의 소녀는 바위를 넘으며 산을 타고 올라갔다.
그 헌터는 무사할까. 은율은 미끼로 쓰인 헌터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산을 넘고 나니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큰 오크 무리가 보였다.
“……저거구마.”
지윤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오크 마법사와 호위들. 모두 눈을 감고 마나를 끌어모은 상태. 필시 언제든지 하늘에 방어막을 펼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은율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네.”
목표는 발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방해하느냐.
은율은 지윤과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뭔가 큰 기술 없어?”
“있기는 헌디…….”
지윤이 머리를 긁적였다.
“우짤라고?”
“미사일이 날아올 때 타이밍을 맞추는 거야.”
마법사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굳이 쓸어버리지 않아도 방어막만 방해할 수 있다면 미사일로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준비하고 있어. 미사일 날아오면 신호할게.”
“마, 미사일이 우덜 머리로 떨어지믄 어카노? 내가 기술을 쓰믄 너거는 어케 지키는데?”
“안 그러길 바라야지.”
“하이고…….”
지윤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잘 숨어나 있그래이.”
주먹에 하얀 불꽃이 피었다.
지윤이 내공을 끌어올리는 동안 은율과 이츠키는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아오는 것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
마침 무언가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
거리가 먼데다가 워낙 빨라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바로 그렇기에 미사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은율은 다급히 지윤을 불렀다.
“지윤아!”
“지금이가?”
“날려!”
은율의 외침에 지윤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초강기의 폭발. 그리고 반탄강기의 반탄력. 극한으로 압축된 충격파가 오크 마법사들을 향해 대포알처럼 날아갔다.
비록 거리는 산의 높이만큼 멀었지만.
마법사들의 혼을 빼놓기에는 충분했다.
콰과과광
충격파가 마법사 무리에 정통으로 직격했다.
중심에서 폭발이 일어나자 오크 마법사들이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개미들이 세찬 입김에 날아가듯이. 덕분에 미사일을 발견하고 방어막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은 그러모았던 마나를 놓쳐 버렸다.
오크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크르……!”
하늘을 가르는 불화살들 사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단 한 개의 불화살.
‘성공이다.’
미사일은 오르커드의 중앙보다 약간 뒤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헌터는 없고, 오크는 제일 많은 곳.
은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거라면……!’
그때 하늘에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
“……어?”
은율의 입술 사이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늘에 펼쳐진 거대한 황금빛 보호막. 떨어지던 미사일은 지면에 채 닿지도 못하고 보호막에 가로막혀 폭발하고 말았다.
콰아앙
은율은 멍한 눈으로 폭발을 올려다보았다.
계획은 완벽했는데.
거의 다 성공했는데.
‘대체…….’
어디에 하자가 있었을까.
설마 오크 마법사 부대가 다른 곳에 또 있는 걸까. 하긴 이렇게 큰 군대에 마법사 부대가 하나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은율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이츠키와 지윤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때 지윤이 중얼거렸다.
“잠깐만.”
“응?”
“저거 머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은율은 그곳을 돌아보았다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
“……어?”
황금빛 날개를 펼친 소녀.
온 세상을 뒤덮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날개를 펼친 소녀가, 북쪽 하늘에서 아스라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은율은 방금 미사일을 막았던 황금빛 보호막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나빛……이?”
어째서.
안개 속에서 싸우는 이들은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낮처럼 밝아진 하늘에 무엇이 떠 있는지. 그러나 그들도 곧 머리 위, 안개 너머의 풍경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풀벌레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멈추세요.”
조그만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울렸다.
이 넓디넓은 땅에 퍼지기에는 너무도 작았으나, 이상하게도 나빛의 목소리는 반대쪽에 있는 은율의 귀까지 닿았다.
꼭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그만 싸워요.”
나빛이 성창으로 땅을 겨눴다.
“이제 충분해요. 아니, 지나쳐요. 서로 싸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게 여러분이 죽어야 할 이유가 될 순 없어요.”
나빛의 등 뒤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둥그런 원반. 산보다 큰 나빛의 날개보다도 더 컸다. 그 반투명한 황금빛 막의 너머에는 무언가 자잘한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금색 사슬에 묶여 버둥거리는 오크들.
나빛이 혼자서 맡았던 북쪽 지역에서 잡아온 오크들이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여러분의 땅으로. 그러지 않는다면…… 힘으로, 여러분을 밀어낼 수밖에 없어요.”
“…….”
은율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저렇게 말해도 오크들은 알아듣지 못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일까. 은율에겐 오크들이 나빛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나빛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듣는 것이. 화살도, 괴성도, 그 무엇 하나 하늘로 향하지 않았다.
나빛이 창을 느리게 휘저었다.
쿠구구구……
그러자 나빛의 등 뒤에 있던 원반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오르커드의 동쪽, 오크들이 서 있는 땅을 향해서.
원반 위의 오크들이 땅에 있는 오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크륵?!”
“카아아악!”
그동안 고요하던 전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히려 증원을 받은 오크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헌터들을 향해 진격했다.
당황한 헌터들이 무기를 치켜드는 순간.
“어?”
헌터들의 등 뒤에서 황금색 안개가 흘러들었다.
안개가 헌터들의 몸에 닿자 상처가 아물고 힘이 솟았다. 전투를 시작했을 때보다도 더더욱.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엇……!”
헌터들의 무기에서 강기가 솟았다.
금색 안개가 오르커드를 몰아내자 마나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나가 정상화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헌터들은 저마다 형형색색의 강기를 뽑으며 오크들을 겨눴다.
당황한 오크들이 오르커드와 황금 안개의 경계에서 멈췄다.
“크르…….”
그렇게 대치하던 것도 잠시.
오크들이 황금 안개로 발을 들이고, 헌터들이 오크를 향해 달려들려는 그때.
“멈추세요.”
하늘에서 내려온 목소리가 모두의 뇌리에 천둥처럼 울렸다.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그 말에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싸우라고 하는 신은 없어요. 그 어떤 세상에도 그런 신은 없어요. 그런 신이 있다면 애초에 우리가 이렇게 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싸우라고 하는 신이 있다면…… 적어도 여러분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한 신은 아닐 거예요. 그런 신은 믿을 필요 없으니까…….”
나빛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라리 날 믿고.”
오크와 인간 사이에 금색 장벽이 나타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한 장벽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그리고 하늘로도.
나빛이 심호흡을 했다.
“돌아가!”
힘차게 내지른 손을 따라 장벽이 나아갔다.
세상을 반쪽으로 가른 반투명한 막이 오크만을 동쪽으로 밀어붙였다. 짙은 보랏빛 안개와 함께. 그 안에서 싸우고 있던 사람들은 막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그냥 통과했다.
땅에 붙은 불도, 막이 지나감과 함께 사그라졌다.
“크륵……!”
오크들은 온 힘을 다해 도끼로 막을 내리쳤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질 않았다.
결국은 파도에 휩쓸리듯, 산으로 밀려 올라가고 밀려 내려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밀리고 또 밀려서.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사라져 갔다.
“어…….”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본 헌터들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정녕 사람이 한 일이 맞는가.
그렇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이겼어? 이긴 거지?”
“후아…….”
“하하하하…….”
헌터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워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는 전장의 반대편에 있는 은율과 이츠키, 지윤에게까지 들렸다. 은율은 아직도 넋이 나간 채로 나빛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내려 전장을 보았다.
불에 탄 땅과 나뒹구는 시체들.
이긴 건 확실하지만, 마냥 기뻐해도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돌아가자.”
은율과 아이들은 헌터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 * *
“뭐야.”
태화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지윤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너 뭐야.”
“머긴 머고, 문디 가스나야. 그라는 니는 먼데?”
“너 그동안 어딨었어?”
“니헌티는 안 알려준디. 니는 머했노?”
“나 쌤이랑 방앗간 차렸지.”
“조용히 해, 임마.”
상호는 태화의 등을 찰싹 쳤다.
이미 아이들이 무사하다는 건 확인했다. 반가운 얼굴이 와 있는 것도. 그가 지윤을 바라보자 지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잘 지내셨어예.”
“으응.”
“지만 쏙 빼놓고 참 좋았겠네예.”
“……아니. 잘 못 지냈어.”
지금 만나서 망정이지 다른 때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상호는 살짝 웃어 보이고 지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런 그의 곁으로 피칠갑을 한 세희가 다가왔다.
“선생님.”
“응. ……아이고, 세희는 얼른 가서 씻어야겠다.”
“다 비슷한데요, 뭐.”
모든 헌터에게 피가 묻어 있긴 했지만, 전장 한복판에서 싸운 이들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세희는 태화가 만든 물대포 마법진을 손으로 부숴버리고 상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응. 이쪽은 크게 힘들지 않았어.”
사실은 골로 갈 뻔했지만, 상호는 세희에게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다.
금색 장벽이 오르커드를 밀어내자 악마들도 오크들을 따라 철수했다. 야성의 악마는 그래도 싸워보겠다고 장벽에 구멍을 내고 상호에게 달려들었지만, 곧 다른 대악마에게 한 소리 들었는지 발톱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덕분에 상호는 무사히 태화를 지키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전투를 끝낸 건 단 한 명의 소녀.
그는 나빛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날개를 펼친 나빛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땅에 사뿐히 내려선 나빛이 상호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응.”
상호는 씩 웃으며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잘했다는 칭찬도 함께.
그러나 나빛의 시선은 상호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응?’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움찔했다. 헌터들이 옹기종기 모여 동료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나빛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생님.”
흔들리는 목소리.
상호는 황급히 몸을 움직여 나빛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나빛을 품으로 끌어당겨 주변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나 나빛이 먼저 품으로 뛰어들었다.
“못하겠어요!”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또 이래요, 또…….”
“……나빛아?”
“항상 이래요, 항상 잘 안 돼요…….”
하얀 뺨에 굵직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항상 부족해요……. 제가, 제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살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쵸? 그런데, 저는 나름대로 최대한 빨리 온 건데…….”
“나빛아.”
상호는 나빛의 얼굴을 품에 묻었다.
“자책할 필요 없어. 최선을 다했잖아. 그거면 된 거야…….”
“그치만 살릴 수 있었잖아요, 제가 살릴 수 있었어요, 제가 죽인 거예요…….”
나빛의 이마가 그의 가슴팍을 망치처럼 두드렸다.
나빛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하얗고 뽀얀 얼굴에 연회색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달라붙어 있었다.
“항상 이래요. 바꿀 수가 없어요……. 헌터는 원래 다 이래요? 저 헌터 안 할래요, 너무 힘들어요, 선생님…….”
“…….”
상호는 말없이 나빛의 등을 토닥였다.
나빛의 말은 틀렸다. 나빛이 죽인 게 아니라 나빛이 살린 것이다. 나빛이 늦지 않고 제때 왔기에 저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구나.’
나빛이 그걸 모르고 말하는 게 아닐 거라 믿었기에.
상호는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흔들리는 나빛의 어깨를 양팔로 감싸고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