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476. 총력전
“나빛아!”
바깥에서 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고, 절박한 목소리. 침대에 앉아 있던 나빛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가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주변에서 쉬고 있던 아이들이 나빛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뭐야, 무슨 일 있나 본데.”
“어디야?”
“일단 내려가! 빨리.”
나빛은 보호막으로 발판을 만들어 아래로 내려갔다.
나빛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상호가 먼저 내려섰다. 쏜살같이, 바닥을 부술 듯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상호의 품에는 축 늘어진 민정이 안겨 있었다.
“나빛아, 어서.”
상호는 민정을 바닥에 눕히며 손짓했다.
민정의 팔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나빛은 그 새빨간 선혈을 보고 솜털이 쭈뼛 솟았다.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없는 색깔이라.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손에 성력을 모아 민정에게 가져갔다.
“팔만 다치신 거예요? 다른 곳은……?”
“다리, 다리도 있어.”
상호가 민정의 잘린 다리를 가리켰다. 피부가 일그러진 걸 보니 무언가 뜨거운 것으로 지진 듯했다.
‘……으.’
나빛은 성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치료를 하는데도 민정은 미동 한 번 없었다. 민정의 눈이 계속 감겨 있자 나빛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톰한 입술이 떠듬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다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왜 안 일어나세요……?”
“내가 재웠어. 맥박엔 문제없어. 피만 멎으면 돼.”
“아아, 네…….”
그 후로는 침착하게 치료를 끝냈다.
이마의 땀을 닦고 주변을 둘러보니 곁에는 나빛의 친구들, 그리고 상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도현이 다가와 있었다.
“뭐야.”
도현이 기절한 민정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당했어?”
“어.”
상호는 민정을 안아 들며 대답했다.
“오르커드가 있었어. 오크들이 만든.”
“오크들이?”
“주술로 만드는 것 같은데, 정확힌 모르겠어. 어쨌든 지금 오크들이 오르커드를 끌고 몰려오는 중이야. 대악마들도 같이.”
“…….”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도현과 입술을 깨문 상호. 평소와 다른 모습에 아이들이 둘보다 더욱 당황해했다.
이츠키와 은율이 특히 그랬다.
“오르커드가 뭐예요?”
“몬스터입니까? 얼마나 강하기에 선생님들이…….”
“마나를 침식하는 안개야.”
상호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 안에서는 강기도 못 쓰고, 마법도 못 써. 초강기나 성력을 쓰는 사람이 아니면…… 마나 없이 맨몸으로 싸워야 해.”
“주술은?”
이츠키가 눈을 빛냈다.
“주술은 어떻습니까?”
“정확히는 몰라.”
“거짓말 같습니다.”
“……아냐.”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다. 오르커드 속에서 주술로 싸우고 싶어서.
물론 상호도 그럴 줄 알고 애매모호한 말로 막으려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정말로 모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술이 마법이 아닌 건 분명하나 성력과 같지는 않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세희랑 다혜 빼고. 너희들은 후방으로 가. 태화 데리고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빠져 있어. 그게 너희 임무야. 사카시타, 은율이, 나빛이.”
“저도 싸울 수…….”
이츠키의 이마에 혈관이 솟는 순간, 도현이 손사래를 치며 끼어들었다.
“잠깐만, 잠깐만. 나빛이는 왜 보내?”
“악마가 있다니까?”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세희와 다혜를 가리켰다.
“초혼강기를 쓸 수 있는 게 여기 셋밖에 없잖아. 다른 헌터들이 가봤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고. 오르커드까지 있는데…….”
“야, 그렇다고 셋이서 그놈들을 다 상대한다고? 안 돼 임마.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줄줄 새다가 너희도 지쳐서 죽을걸?”
“그럼 어떡해?”
“다 같이 싸워야지.”
도현이 엄지로 등 뒤를 가리켰다.
“강기가 없어도 헌터는 헌터야. 그리고 내공은 쓸 수 있잖아. 오크놈들이 잘 싸운다고 해도 내공이 있는 건 아니고. 악마놈들도 잔챙이들은 오르커드 속에서 마나 못 쓸 거고……. 헌터들도 충분히 싸울 수 있어. 마법사들은 완전히 빠져야겠다만. 어쨌든 싸우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야.”
“그 많은 오크들이랑 칼 부딪히면서 싸우겠다고?”
“뭐 어떡하냐. 안 그러면 줄줄 새어서 도시로 갈 텐데.”
“대악마들은 어떡하고? 그놈들은 오르커드 속에서도 강기 쓰고 주술 쓸 텐데.”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아이고…….”
상호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그놈들이 우리 맘대로 움직여준대? 악마들을 무슨 수로 끌어내라는 거야?”
“한 놈씩 맡아서 싸우든가…….”
도현의 눈빛이 태화를 향했다.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지던가.”
“……엥.”
상호와 도현의 시선이 집중되자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저용?”
“응.”
“절 던진다구용?”
“아니,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도현이 상호를 돌아보았을 때는 상호도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계획을 세워나가는 듯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도현의 생각에 동의한 모양이었다.
“……그래.”
한참 후에야 상호의 입이 열렸다.
“전부 잃거나, 전부 지키거나. 그래. 다 같이 싸울 수밖에 없겠지.”
“좋아.”
도현은 곧바로 돌아섰다.
“한번 해보자고. 너희도 준비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전투를 하게 될 테니까.”
“네.”
아이들은 이어셋을 꺼내 귀에 달았고, 상호는 민정을 안고 후방으로 후송할 운전병을 찾아 달려갔다.
이미 울리기 시작한 사이렌이 시끄럽게 귀청을 울려도, 상호의 품에 안긴 민정은 힘없이 흔들리며 눈을 감고만 있었다.
* * *
“……확실히.”
이츠키는 소총에 탄창을 끼우며 중얼거렸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전투입니다.”
곁에 선 은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는 총을 든 헌터들이 늘어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비교적 등급이 낮은 무예가들과 마법사들. 등급이 높은 무예가들은 냉병기를 들고 더 앞쪽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전선은 능선을 타고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도양.”
“응.”
“총 쏴본 적 있습니까?”
“아니. 너는?”
“전 맞아본 적은 있습니다.”
“…….”
은율은 괜스레 총을 흘끗하며 상태를 점검했다.
쏴본 적은 없지만 검술에 비하면 간단하기 짝이 없다. 가늠쇠로 겨누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니까. 조준과 발사 사이에 숨을 참는 것도, 근육을 적당히 긴장시키는 것도 그녀에겐 쉬운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친구.”
갑자기 옆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곁에 다가온 도현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이름이 뭐지?”
“도, 도…….”
은율은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도은율……이요.”
“많이 긴장했나 본데.”
“도양은 키 큰 남자 보면 무서워합니다. 선생님만 빼고.”
이츠키가 은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긴장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으응.”
“아아, 그러고 보니 너희는 오늘이 첫 전투구나. 그래서야?”
“그게…….”
은율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에 들린 총을 향해서.
“잘못 쏘면…… 어떡해요?”
“아아.”
도현이 입맛을 다셨다.
“걱정 마. 너희가 사람을 쏠 일은 없을 거니까. 조준만 잘 하면 그럴 일 없어.”
“그치만, 제가 조준을 잘 하더라도…….”
“아니, 그 말이 아냐.”
도현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냉병기를 든 무예가들보다 한참 더 앞쪽을.
산과 산 사이에 작은 평야가 트여 있었다.
“너희가 쏠 곳은 저기야. 헌터랑 몬스터가 뒤엉켜 싸우는 곳이 아니라.”
“저렇게…… 멀리요?”
“응. 저기에 항상 있을 거거든. 너희가 쏠 만한 무언가가.”
그 말을 알아들은 은율의 얼굴이 굳었다.
이 넓은 헌터 전선에 맞부딪히고도 저 멀리까지 뻗어 있을 만큼, 적군의 규모가 은율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뜻.
도현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가 걱정해야 할 건 사람을 쏘는 게 아냐. 몬스터를 쐈는데도 안 죽고 달려오는 거지. 총이 안 듣는 몬스터들도 있고, 총을 맞았는데도 멀쩡한 놈들도 있고…….”
“그래도 오크는 총 맞으면 죽지 않습니까?”
“오크도 머리에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안 죽어. 오히려 화나서 달려오지. 아니면 약을 해서 고통을 모르거나……. 별의별 놈들이 많거든. 부족이 워낙 많아서.”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니.
그 말이 두렵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바로 그런 몬스터들을 잡기 위해 강기를 쓰는 법을 배웠는데도.
은율은 조그맣게 침음했다.
“조준을…… 잘해야겠네요.”
도현이 어깨를 들썩였다.
“아, 내가 말한 건 좀 특이한 놈들도 있단 거고……. 다 그런 건 아니야. 총을 계속 쏘면 어쨌든 저지력은 나와. 개벽 초기에는 다 총으로 잡기도 했고. 물론 마나를 쓰는 놈들한텐 안 먹혀서 많이들 죽기도 했다만……. 그러니까, 머리를 노리되 못 맞춰도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네.”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평선을 가린 산 너머에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
해는 아직 지지 않았지만, 동쪽 산에서는 그늘이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올라오는 보랏빛 연기가 태양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마치 산에 보라색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저거예요?”
“응.”
도현이 창을 한 바퀴 돌렸다.
“시작이다.”
“네.”
“머리 조심해, 총구만 보지 말고.”
“네?”
은율이 흠칫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거대한 돌덩이가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투석기……?”
세희는 저 멀리 뒤쪽, 헌터들이 있는 산에 떨어진 바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저렇게 느려터진 바위를 피하지 못할 헌터는 없었기에.
세희의 곁에서 상호가 말했다.
“저런 거 좋아하는 부족이 있거든.”
“꽤 멀리 날리긴 하네요.”
그러나 맞추지를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세희는 바위에게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해 시선을 거뒀다.
그러나 상호는 바위를 계속 보고 있었다.
“맞추는 게 목적이 아니야.”
그 말과 동시에 바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렘. 세희는 바위의 정체를 깨닫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십 개의 바위가 하늘을 가르며 헌터들이 있는 산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
골렘들이 일어나 헌터들을 공격하자 세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떨어진 골렘의 옆에서 은율과 이츠키가 검을 꺼내는 게 보였다.
지켜보고 싶었지만, 상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약한 골렘이야. 주변 마나를 빨아들여서 잠깐만 기동하는……. 너는 앞쪽에 집중해.”
“……네.”
세희는 동쪽을 향해 돌아섰다.
앞에서는 오르커드가 산을 타고 서서히 흘러들고 있었다. 짐승 떼의 형태를 갖추고 몰려오는 보랏빛 구름.
그 모습을 노려보는 세희의 손에 돌연 따듯한 감촉이 닿았다.
“너무 큰 전투는 예측할 수가 없어.”
내공이 폭포처럼 세희의 체내로 쏟아졌다.
예전이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겠지만, 그릇이 커진 지금은 눈 하나 꿈쩍 않고 받아낼 수 있었다.
“수많은 상황이 생길 거야. 그 모든 상황에 적응해야 해. 그렇지만 네 임무만은 변하지 않아. 그게 뭐지?”
“소중한 사람들을…….”
세희는 검을 뽑았다.
“목숨 걸고 지키는 거요.”
“……그래.”
상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떼었다. 세희에게만 말하지 않았던 것을 세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오르커드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스라이 치솟기 시작한 전투의 함성과 함께.
그는 능선에 솟은 그림자들을 돌아보며 발걸음을 떼었다. 오르커드가 있는 동쪽도, 헌터가 있는 서쪽도 아닌 그 중간의 방향. 남쪽으로.
“이제 가야겠다.”
“네.”
이제는 싸워야 할 때.
피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전란의 소용돌이. 애초에 이 전장을 찾아온 것도 그녀 자신의 의지. 마음에도, 걸음에도, 망설이거나 흔들리는 기색 한 점 없이. 오로지 나아갈 뿐.
세희는 검을 옆으로 늘어뜨리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맡겨 두세요.”
온몸에 푸른 불길을 두르며, 보랏빛 안개에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 * *
쿠르르……
골렘의 몸이 두부처럼 갈라졌다.
도현은 휘두른 창을 거두다가 오크들이 산을 넘어오기 시작한 것을 발견하고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온다.”
짧은 한마디가 전파를 타고 퍼지자 헌터들이 동시에 무기를 들었다.
도현의 곁에 선 은율과 이츠키도 검을 집어넣고 총을 잡았다.
“준비해.”
도현의 명령에 총을 든 헌터들이 오크들을 조준했다.
은율은 가늠자를 들여다보았다. 바늘구멍처럼 좁은 가늠자 너머에는 또 손톱만큼 조그만 가늠쇠의 동그라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 너머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빼곡하게 들어찬 오크들.
‘…….’
은율은 다가오는 초록색 물결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시퍼런 날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투기. 인상을 찌푸린 주름의 골 사이사이마다 배인 살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도구를 쓸 줄 아는. 인간과 너무나도 닮은 초록색 피부의 영장류.
그 몇만의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한다는 것이, 은율에게는 너무도 큰 압박이었다.
‘숨이…….’
총을 든 손이 떨렸다.
쉽다고 생각했던 일이 버거워지고, 늘 쉬던 숨이 가빠지고. 이 손에 달린 책임감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그래서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데.
‘……언제 쏘지?’
은율은 초조하게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 저 멀리 앞에서 누군가가 달려나갔다. 검을 들고 푸른 불꽃을 두른, 개미만큼 작게 보이는 소녀. 소녀는 오르커드 속으로, 오크들을 향해 돌진했다.
느리게 전진해오던 오크들이 세희를 보고 주춤했다. 많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저 미친 인간이 대체 뭔 생각으로 혼자 달려오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크들은 곧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수많은 발이 구르자 땅이 흔들렸다.
드넓은 초록색 파도 앞에 까만 개미 한 마리. 은율은 그 개미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개미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파도의 크기가 너무 커 보였다.
그리고 걱정해야 할 것은 개미뿐이 아니었다.
“쏴!”
도현이 명령하며 몸을 날렸다.
은율은 그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과 함께 총구에서 화염이 뿜어졌다. 평범한 사람은 보지 못했겠지만, 은율은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오크들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은율의 눈에 비친 오크는 세 갈래였다. 개미를 무시하고 오른쪽으로 다가오는 오크. 역시 개미를 무시하고 왼쪽으로 다가오는 오크. 그리고 개미를 향해 둥글게 몰려드는 오크.
은율은 반사적으로 세희의 주변에 있는 오크를 쏘려 했으나, 곧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옆으로 총구를 돌렸다.
타앙
빗나가기가 더 힘들었다. 오크의 수가 너무 많아서.
총을 맞은 오크들이 몇몇 쓰러졌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괴성과 함께 헌터들을 향해 달려왔다. 뜨겁고 붉은 피를 허공에 흩뿌리며.
오크의 첫 물결과 냉병기를 든 헌터들이 충돌하자, 은율은 그때서야 오크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초록 피부 아래 꿈틀거리는 밧줄 같은 근육.
그 자체를 방패로 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도끼.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엄니와, 때가 탄 얼굴에 빛나는 형형한 눈빛.
철컥
은율은 침착하게 탄창을 갈았다.
전열의 헌터들은 유연하고 재빠른 움직임으로 오크를 베어 넘겼다. 비록 강기는 쓰지 못했으나 내공은 쓸 수 있었고, 한 명 한 명이 강기가 없던 시절부터 몬스터를 상대해온 최고의 베테랑들이었기에.
그런 헌터들을 향해 무언가 육중한 것이 달려들었다.
쿠우웅
온몸에 뿔이 달린, 단단한 각질과 질긴 피부를 가진 이족보행 몬스터.
수많은 뿔 중에서도 단연코 큰 것은 배에 달린 것으로, 마치 성문을 부수는 공성추처럼 앞을 향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딱 봐도 평범한 칼은 들지 않을 성싶었다.
은율은 그 몬스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알이 놈의 머리를 맞히고 튕겨나갔다.
뿔이 난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으나, 다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몬스터는 앞에서 싸우던 오크들마저 마구잡이로 쳐내고 헌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은율은 숨을 멈추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두 번째 총알이 놈의 눈에 맞았다.
그럼에도 몬스터를 멈출 순 없었다. 오크보다 배는 큰 몬스터를 막기에는 총알도 검도 너무 작았다.
고통에 괴성을 지르던 몬스터가 헌터들을 덮치려는 때.
촤아악
누런 강기가 몬스터의 두개골을 꿰뚫었다.
질주하던 거대한 몸뚱이는 지휘체계를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기를 맞붙이던 헌터와 오크가 몬스터를 피해 황급히 옆으로 뛰었다.
누런 빛이 번쩍하자 또 다른 몬스터가 쓰러졌다.
‘……강해.’
은율은 창을 든 사내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도현은 오크들의 머리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총칼이 들지 않는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키보다 기다란 장창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그 너머에선 또 푸른 불꽃이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콰아아아……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보라가 일었다.
산과 산 사이, 오크와 몬스터들이 몰려든 평야 한복판에서.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무언가가 주변에 다가오는 것을 닥치는 대로 썰어 넘기고 있었다.
‘너무 강해.’
은율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수백의 오크와 몬스터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소녀. 은율이 오래전 상대했던 그 소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저 소녀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은율은 알 것 같으면서도 그 깊이를 가늠하진 못했다.
철컥……
빈 탄창이 땅에 떨어졌다.
창을 휘두르는 괴물, 검을 휘두르는 괴물, 그리고 양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전장 곳곳에서 비슷한 광경을 자아내는 수호부대원들. 은율은 저들이 있는 한 이 전투에서 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어억!”
짧은 단말마가 귀를 파고들었다.
검을 든 헌터가 오크의 도끼를 맞고 쓰러지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기회를 포착한 오크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도끼들이 내리쳐지고, 피가 튀었다.
‘……!’
수가 너무 많았다.
비록 헌터들이 잘 싸우고는 있으나 오크는 너무 많았고, 오크가 무기를 휘두르는 횟수는 더더욱 많았다.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시행이 많아지면 예외가 생기는 법.
그리고 전쟁에서는 피해가 쌓이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막아야 해.’
한 명을 잃을 때마다 패배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헌터들을 지켜야 했다.
그때 은율의 머리 옆을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퓽
한 발 더.
총을 든 헌터들을 향해 후열의 오크들이 활을 쏘았다. 사람 엄지보다도 더 굵은 화살을 메겨서. 은율은 재빨리 검을 들어 이츠키에게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가늠자에 눈을 대고 있던 이츠키가 움찔했다.
“뭐였습니까?”
“화살.”
사거리가 총과 맞먹는다니. 은율은 희미한 안개 너머 건너편 산에 진을 친 오크 궁수부대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사람보다 큰 오크들이 자기들보다 더 큰 대궁을 들고 서 있었다.
‘총으론 안 되겠는데…….’
안 그래도 피부가 질긴데, 저만큼 멀리 있는 오크를 평범한 소총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맞출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적어도 저격소총. 혹은 다른 무언가.
그때 은율의 뒤에서 폭음이 울렸다.
꽈앙
무언가가 오크 궁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 무언가가 착탄하자 흙이 비산하며 궁수들의 모습을 가렸다. 비록 착탄음은 전투의 소음에 가려 들리지 않았지만, 날아간 것이 박격포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뒤를 돌아보니 포병들이 포를 쏘고 있었다.
‘저거라면…….’
은율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땅에는 둥근 흉터가 남아 있었다. 파헤쳐진 땅의 주변에서 아직 살아있는 오크들이 꿈틀거렸다.
죽은 것은 정확히 직격당한 두세 놈뿐.
질기다는 단어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맷집이었다.
‘그렇지만 포탄이 먹힌다는 건…….’
은율의 생각과 동시에 하늘에서 무언가가 쏜살같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허공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투명한 장벽에 가로막힌 화염이 온 땅을 환하게 비췄다. 산과 산 사이의 그늘진 곳 구석구석까지. 은율은 눈을 찌르는 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미사일.
무언가에 막혔다.
‘보호막…….’
마법의 보호막.
오르커드 내부로 날아가는 박격포는 보호막으로 막을 수 없지만, 외부에서 날아드는 미사일은 보호막으로 막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은율은 사그라지는 화염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츠키.”
“말하는 겁니다.”
“저 안개 속에서는 마법 못 쓴댔지?”
“그런 줄로 압니다.”
“그럼 방금 저 보호막은 뭐야?”
하늘을 흘끗한 이츠키가 다시 가늠자에 눈을 가져갔다.
“오르커드 바깥에 마법사가 있는 걸지도.”
“……역시 그런 거겠지.”
은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장을 둘러보았다.
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찾아서 제거한다면, 하다못해 정확한 순간에 방해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미사일이 날아왔을 때 오크들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터였다.
‘어디에…….’
오르커드가 너무 넓고 짙어서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보라색 안개는 이제 은율과 이츠키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움직임은 굼떴지만 규모가 너무 커서 피할 수가 없었다. 안개가 몸을 휩싸자 서늘한 감각이 은율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손가락에 슬쩍 꺼내본 내공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윽.’
마치 팔다리를 잘린 채 내던져진 느낌.
은율은 몸을 부르르 떨어 그 기분 나쁜 느낌을 떨쳐냈다. 지금은 팔다리가 없으면 없는 대로 싸워야 했다.
안개는 짙고, 총은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츠키!”
은율이 소리치자 이츠키가 끄응 신음했다.
“또 뭡니까? 나도 정신없습니다.”
“오크 마법사를 찾아야 해. 따라와!”
은율은 그렇게 통보하고는 냅다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커드의 외곽선을 따라서.
이츠키는 은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도 모릅니다, 이제…….”
작은 발이 땅을 박찼다.
* * *
검의 궤적이 온통 붉었다.
“아으!”
다혜는 검을 힘차게 움켜쥐며 기합을 내질렀다.
자신이 맡은 임무는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유인하고 제거하는 것. 까마득히 먼 저편에서는 똑같은 임무를 받은 세희가 몬스터 사이를 질주하며 선혈과 육편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악귀 같은 모습에 다혜마저도 기가 죽을 뻔했으나.
“……므아!”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검을 휘둘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초강기만 쓸 수 있다면야. 오크들의 무기도, 몬스터들의 이빨과 발톱도 그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으니까.
다만 이렇게 마음 놓고 몬스터들을 썰어댈 수 있는 이유는, 악마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 어디 갔지?’
왔다면 엄청 곤란했을 텐데.
어쨌든 없으니 다행인 일이다. 다혜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적들을 마구 베어 넘겼다. 다가오는 놈이든, 도망치는 놈이든.
까마득히 먼 저편에서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소중한 것들을…….’
검이 오크를 반으로 갈랐다.
‘목숨 걸고 지켜야해.’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흘렀다.
세희는 자신이 죽일 오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로지 인간에 대한 적의와 투지만 가득할 뿐. 덕분에 세희도 거리낌 없이 놈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똑똑히 느껴지는 것은, 이들 또한 인간처럼 지성을 갖추고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
‘그래도 상관없어.’
피차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설령 상대가 인간이었더라도 검을 멈추진 않았을 것이다. 세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도륙해 나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전선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밀린다.’
몬스터들이 헌터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강기 없이도 오크를 상대할 수 있는 게 S급 헌터. 인간을 벗어난 초인들이니만큼 한 번에 오크 열 마리도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게 열 번, 스무 번이 되면 근육이 지치고 칼날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오크의 도끼를 유려하게 피해내던 헌터가 발을 삐끗하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그 헌터는 금방 자세를 되잡았으나, 세희에게는 이 전투의 향방을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아직도 오크가 너무 많았다.
‘선생님이 계셨더라도…….’
이 보라색 안개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날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짙은 오르커드 속이 흐릿한 어둠으로 가득 찼다. 주변을 분간할 방법은 세희의 검에서 뿜어지는 하늘색 빛뿐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변 사물의 윤곽이 시야에 스쳤다.
날아드는 도끼.
일그러진 얼굴과 번득이는 이빨.
빛이 비칠 때마다 정지된 화면처럼 잔상이 남아, 눈을 감아도 눈꺼풀 속에 잠시 붙박여 있었다.
‘……어?’
세희의 몸이 움찔했다.
분명 방금 베었던 놈인데. 검을 휘둘러도 모습이 다시 보였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도 시퍼런 잔상은 여전히 그녀를 따라왔다.
일그러진 얼굴이 느릿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친 거구나.’
귀신이 다 보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미쳐 주겠다. 그래야만 싸울 수 있다면 기꺼이. 세희는 더욱 독한 살기를 뿜으며 잔상을 무시하고 오크들을 베었다.
검이 점점 빨라지고.
비명과 고함이 귀곡성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취한 듯, 혹은 미친 듯. 세희는 붉은 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 칼과 춤을 추었다.
크르아악……
땅을 구르는 오크의 머리통을 밟고, 달려드는 몬스터의 어깨를 걷어차 공중제비를 돌면서.
피와 살점으로 가득 찬 공간을 헤엄쳐, 디딘 땅이 질척해지도록 몬스터들을 도살해 나아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끝이 없어.’
세희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헌터들이 있는 서쪽도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밝은 것이 필요한데.
‘나빛이는…….’
다른 곳에서 다른 임무를 맡고 있고.
오크 놈들은 전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는 있을까. 아마 모르면서 무작정 서쪽으로 전진하는 것일 테다. 세희는 답답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퍼엉
주황색 조명탄.
똑바로 봤다가는 눈이 멀 것처럼 밝았다. 마치 태양과도 같았지만, 하늘은 여전히 검어서 생경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잠시 당황하던 오크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방법이 필요해.’
빛이 생겼다고 전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세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검으로 적들을 베어 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야.’
여긴 오르커드 속인데.
안개 저편에서 상호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누구와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상호가 있는 곳도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쳇.’
누군가는 상황을 만들어야 할 텐데.
당장은 몬스터들을 더 죽이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세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검을 더욱 세차게 내리쳤다.
* * *
“우씨……!”
태화는 보랏빛 광선을 마구잡이로 내쏘며 빽 소리쳤다.
“쌤! 왜 나는 안 돼? 분명히 맞췄는데!”
“좀 더 진심을 담아 봐.”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태화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가 태화를 데리고 몸을 빼자마자 태화가 있었던 자리에 악마들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태화가 다시 양손에 마법진을 펼쳤다.
“억울해!”
“노력해.”
둘은 오르커드 밖으로 나와 악마들과 대치중이었다.
악마들이 최우선으로 노리는 것은 상호. 그다음이 태화. 그 둘이 오롯이 밥상에 차려져 있으니 악마들로서는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였다.
달려들던 악마 하나가 상호의 강기에 얽매였다. 태화는 그 즉시 악마를 향해 콩알만 한 마나를 날렸다.
“여기!”
마나의 바로 뒤에 강검이 딱 붙어 날아갔다.
강검이 악마의 배에 틀어박히자 악마에게서 찢어지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불에 탄 시체처럼 사지가 오그라지더니 재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다른 악마를 베던 상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놈이 없다.’
악마들은 사람의 말을 하지 않았다.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지배의 악마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그게 무엇인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아는 건가…….’
몰려드는 악마의 수를 보니 그건 확실한 듯했다.
상호가 다시 다른 악마를 붙잡아 죽이려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태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동안 봐왔던 그 어떤 악마보다도 빠르게.
상호는 태화와 그 무언가의 사이에 끼어들어 돌려차기를 날렸다.
꽈아앙
육중한 거구가 땅에 처박혔다.
비산하는 흙 사이로 굽이치는 붉은 갈기. 그리고 갈기 속에서 번득이는 붉은 눈동자. 상호는 지체없이 그 눈동자를 향해 강기를 날렸다.
검고 긴 발톱이 그의 강기를 쳐냈다.
“크흐…….”
갈기 사이에서 비릿한 그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눈을 가만히 두질 않는군.”
“…….”
네 친구한테 배운 건데. 상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지금은 느긋하게 입을 열 시간이 아니라서.
그건 야성의 악마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악마는 곧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몸을 낮췄다.
콰득……
악마가 밟은 땅이 움푹 파였다.
근육으로 꽉 찬 사자의 발이 땅을 힘차게 박찼다. 상호,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태화를 향해서. 상호는 귀찮게 달라붙는 잡졸들을 세로로 양단해버리고 야성의 악마에게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옆구리.
허나 닿은 곳은 팔뚝이었다.
‘쳇…….’
눈앞으로 악마의 앞발이 날아왔다. 사람 얼굴보다 더 큰 앞발이.
피하면 태화가 위험해진다. 상호는 악마의 팔뚝에 가로막힌 검을 놓아버리고 손등으로 악마의 앞발을 쳐냈다.
남은 손이 악마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앙
“……크륵.”
뒤로 튕겨나간 악마가 손등으로 주둥이를 훔쳤다.
야성의 악마는 그렇게 한숨 돌렸지만, 상호에겐 그럴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 태화에게 검은 액체가 날아들고 있었기에.
그는 장력을 쏘아 그 액체를 날려버렸다.
스으으……
태화의 뒤편에 백의를 입은 악마가 내려섰다.
앞뒤를 둘러싼 두 대악마. 상호는 주변으로 몰려드는 졸개들을 노려보며 턱에 힘을 주었다.
차라리 대화로 시간을 끄는 게 나을 성싶었다.
“니들 친구놈은?”
악마들은 말없이 포위망을 좁혀 왔다.
아까 말을 씹었던 것에 대한 복수일까. 참으로 쪼잔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상호는 혀를 차고 태화를 곁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태화.”
“응.”
“내가 다시 부를 땐 바로 순간이동하는 거야. 최대한 멀리.”
태화가 그에게 등을 기댔다.
“난 도망 안 쳐.”
“후퇴도 전략이야, 임마.”
“그치만 쌤한텐 내가 필요한걸. 그리고 내가 여기 있어야 이놈들이 저 안개 속으로 안 들어가는 거잖아.”
태화의 손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내가 다 지킬 거야. 그러니까 쌤이 날 지켜.”
“……그래.”
상호는 검을 치켜세웠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대답하며, 주변에 펼친 강검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악마들이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허억, 헉…….”
엷은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쏟아졌다.
“헉, 헉……, 도양.”
“응?”
은율이 뜀박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츠키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안개 밖.”
“너무 멀지 않습니까. 이 안개, 너무 큰…….”
오르커드는 너무 크고 빨랐다. 뒤로 빠져나가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정도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말을 끊었다. 이츠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말을 이었다.
“무작정 나간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반대편에 있으면 어떻게 할 작정인…….”
“그래도 나가야 탐지가 되잖아.”
오르커드 속에서는 마나를 느낄 수가 없다. 폭격을 막는 오크 마법사들을 찾아내려면 좋든 싫든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은율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이츠키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말도 안 됩니다. 어디가 밖인지는 알고 있는 겁니까?”
“그럼 어떡해?”
은율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냥 생각 없이 싸우기만 하라는 소리야?”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합니다.”
이츠키가 안개 속을 가리켰다.
“오크들 중에 움직이지 않는 놈들이 있습니다. 그 방향으로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크도 실이 보여?”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 자리에 눌러앉은 놈들이 마법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츠키의 말대로 해도 눈앞이 캄캄한 건 마찬가지. 오르커드를 빙 돌아가든가, 적진을 꿰뚫고 가든가인데. 하나는 너무 오래 걸리고, 하나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은율은 보라색 안개를 돌아보았다.
밤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쇳소리와 함성이 아주 먼 곳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길을 뚫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다 한복판에서 전투 중이었다. 은율과 이츠키 둘이서는 그들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답은 어쩔 수 없이 하나.
“그냥 빨리 달려, 이츠키. 좋은 방법이 있더라도 찾는 게 늦어버리면 소용이…….”
“잠깐만, 도양.”
이츠키가 다급히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양이 맡은 곳이 어느 쪽이었습니까? 북쪽? 남쪽?”
“북쪽으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지금 남쪽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치? 오른쪽으로 달렸으니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은율도 덩달아 당황하며 괜스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츠키는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옆과 은율의 옆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켰다.
“그럼 이쪽에 있는 건 누굽니까?”
그 순간 무언가 거대하고 시커먼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
안개가 짙어 발견이 늦었다. 은율은 반사적으로 이츠키를 밀치고 뒤로 굴렀다.
그림자는 둘의 사이를 가르고 쏜살같이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퍼억……
‘……응?’
어째 속도가 빠른 것치고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맥없이 흐늘흐늘 넘어지는 것이.
은율은 그 무언가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다가 어안이 벙벙했다.
‘……오크?’
오크가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원래도 좀 찌그러진 듯 생기긴 했지만, 이놈은 유난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입술은 터지고, 얼굴은 박살 났고, 몸엔 멍이 그득한 것이.
꼭 둔기로 구타당한 것 같았다.
‘뭐지……?’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뻑이는데, 이츠키가 끙끙거리며 일어나 엉덩이를 문질렀다.
“끄응……, 오크? 이거 뭡니까? 죽은 겁니까?”
“응.”
은율은 오크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오크가 날아왔던 방향을 쳐다보았다.
“누가 던진 것 같은데…….”
그때 안개 속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오크라기에는 너무 작은 형체. 필시 인간. 아마도 여자. 그것도 아직 소녀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나이대.
허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은 세상 어디보다도 악마와 괴물이 많은 지역이었기에. 저 그림자가 오크를 피떡으로 만든 장본인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은율은 경계를 완전히 풀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누구……세요?”
사람이라면 대답할 것이다.
아니, 악마라도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정보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은율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츠키가 은율의 손에 손을 얹었다.
“도양.”
“……응?”
“괜찮습니다.”
안개 속 그림자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은율과 이츠키를 향해 다가오던 그림자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소리를 내었다.
“머꼬.”
익숙한 사투리.
은율은 그제서야 이츠키가 왜 괜찮다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
실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은율 자신의 실과 이츠키의 실이.
멍하니 서 있는 은율의 앞에 그림자가 불쑥 다가섰다.
“너거 여서 머하노?”
지윤이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