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475. 다가오는 함정
“조금 이상하지?”
곁에서 날던 민정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가?”
“오크들이 한곳에 모인 거.”
민정의 시선은 멀리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부족끼리 엄청 싫어하잖아. 그런 녀석들이 한날 한시에…….”
“지도자가 있겠지. 놈들 방식대로 치고받고 해서 뽑았을지도.”
“그래도 이상해.”
“고민해도 의미 없어.”
오크 군단을 이끄는 자가 누구든,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서로 죽기를 각오했으니 남은 것은 전투뿐.
상호는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좀 더 올라가자.”
둘의 몸이 상공으로 치솟았다.
멀리 지평선, 아침의 여명 아래 초록색 물결이 풀잎보다는 어두운 빛깔로 산과 들을 뒤덮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곧 가을인가.’
이제 저 초록빛이 모두 붉게 물들 것이다.
상호는 내공을 꺼내 주변에 펼쳤다.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암습을 탐지하기 위해서. 오크들과의 거리는 한참 남았지만, 주변에 악마들이 대기하고 있을지 몰랐다.
“시작해, 누나.”
“응.”
민정이 눈을 감았다.
목표는 놈들의 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한 마법이 필요했고, 또 거대한 마나가 필요했다. 집중하는 민정의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상호의 내공과 민정이 끌어모은 마나가 뭉치자 공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때.
“……응?”
상호는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가 내륙 쪽에서부터 대기를 찢으며 아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일정해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속도와 무게감을 보아하니.
“미사일이 오는가 본데.”
“높으신 분들이 뭘 알겠니.”
둘은 미사일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각자의 할 일에 집중했다.
미사일은 어느새 상호의 머리 위를 넘었다가 오크들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둘레는 아름드리나무보다 굵고, 크기는 사람의 6배쯤. 산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일 터.
하지만 상호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누나가 덜 방해받긴 하겠네.’
태평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서 미사일이 쏜살같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시야를 가득 메우는 홍염과 흑연.
상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화력이 훨씬 강했다. 평범한 재래식 화약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풍경은 미사일이 터지기 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역시나.’
상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진격해오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미사일이 터진 곳은 오크들의 머리보다 한참 위인 허공. 오크 마법사가 펼친 방어막에 미사일이 폭발한 것이다. 그리 단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방어막에 부딪혀서.
후폭풍 또한 이중, 삼중으로 펼친 방어막에 가로막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러게 재래식은 소용이 없다니까.’
직격만 했다면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있었을 것이다. 오크는 절대다수가 호신강기를 쓰지 못하니까. 그러나 미사일만으로 오크들을 요격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호가 직접 나섰다면 방어막을 깨부수고 미사일을 오크들의 코앞까지 배달시켜 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민정을 기습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굳이 미사일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그는 민정을 돌아보았다.
“많이 남았어?”
“거의…….”
민정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주변에 모인 마나는 위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상호는 그 마나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게 무슨 마법인지는 알고 있었다.
수많은 마법 중에서도 오직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가장 단순하고 물리적인 마법.
“……다 됐어.”
민정의 말과 함께 하늘에서 빛이 반짝였다.
아주 작은 빛. 창공 저 멀리에 별처럼 명멸하던 빛이 서서히 궤적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소리는 작지도, 멀지도 않았다.
쿠우우우……
제트기 천 대가 지나가면 이런 소리가 날까.
소리만으로 땅을 진동하게 하는 빛. 그 빛의 정체를 알기 위해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크들도, 오크들이 데려온 몬스터들도, 민정의 곁에 선 상호도.
빛은 이제 누가 봐도 그 정체를 알 수 있게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 외치고 있었다.
쿠구구구……
거대한 운석.
방금 터졌던 미사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운석이, 빛과 불꽃을 두른 채 오크들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크아아아
끼아아악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오크들 사이로 조금 다른 생김새의 오크들이 모여들었다. 해골과 깃털로 치장한 구부정한 자세의 오크들.
상호는 그 오크들이 주술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을 셈인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심지어 마법사도 아닌 주술사들이.
하지만 상호는 주술사들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자신이 있으니 나선 거겠지.’
그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일까.
저렇게 많은 오크를 저렇게 큰 운석으로부터 보호하기는 상호에게도, 민정 자신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막는다 해도 주변 사람들만 무사할 뿐, 쏟아지는 파편들을 전부 막아낼 순 없었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인가. 상호가 약간의 흥미가 깃든 눈으로 오크 주술사들을 관찰하는데.
한 주술사의 몸에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
상호의 몸이 움찔했다.
오크 주술사의 모습 그대로 유령처럼 솟아오르는 보랏빛 구름. 상호는 그 구름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마나를 잡아먹는 마나.
‘오르커드……!’
다른 주술사들의 몸에서도 오르커드가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보랏빛 연기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흐릿한 거인의 형상이 되었다. 산보다 훨씬 거대한 거인은 떨어지는 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형체 없는 손이 타오르는 운석에 닿자 운석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젠장.’
상호는 당황하며 검을 꺼냈다.
민정의 마법이 실패할 줄은 몰랐다. 지금 놈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 놔야 하는데.
“누나.”
“저거…….”
민정이 얼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오르커드야? 저거…… 만들 수 있는 거였어?”
“누나, 정신차려. 일단 누나는 돌아가. 나 혼자라도 싸워보다가…….”
그때 아래에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또 다른 오르커드가 그들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주변에 펼친 마나를 빠른 속도로 잡아먹으며.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빼는 순간.
“앗……!”
민정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오르커드가 비행 마법을 잡아먹은 것이다. 상호는 오르커드를 향해 추락하는 민정에게 손을 뻗었다. 마법사는 오르커드에 갇히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다행히도 민정을 붙잡는 데엔 간신히 성공했지만, 그 자신 또한 오르커드에 갇히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쳇.’
상호는 민정을 끌어안은 채로 땅에 착지했다.
오르커드 속에서는 경공도 힘을 잃는다. 몸의 외부와 작용하는 일체의 마나가 오르커드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초강기뿐.
‘벗어나야 해.’
오르커드 속에 발을 묶인 채, 아무런 힘도 없는 민정을 지키면서 싸우기는 무리였다. 상호는 오크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오르커드만 벗어나면 도망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처음 운석을 막아냈던 오르커드가 다가왔다.
쿠우우우……
거대한 마법을 잡아먹은 오르커드는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기가 불어나 있었다. 상호는 하늘을 가득 뒤덮으며 다가오는 오르커드의 손바닥을 올려다보며 욕을 내뱉었다.
‘망할, 망할…….’
그래도 오크들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상호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 오르커드가 무엇을 위해 안배된 함정인지. 곧 그들의 앞에 무엇이 나타날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땅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파악
흙을 비산시키며 솟아난 검은 손.
상호가 검을 휘둘러 그 손을 베자 악마가 땅을 헤치고 올라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말했지요?”
잘린 팔목의 단면이 뻐끔거리며 목소리를 내었다.
“다음번엔 다를 거라고.”
상호는 대꾸 없이 악마를 세로로 양단했다.
달리는 길목마다 악마들의 손이 수없이 솟아났다. 그는 다리에 칼날처럼 호신강기를 세워 악마들의 손을 베어냈으나, 달리는 속도가 줄어드는 것은 어찌하지 못했다.
그의 품에서 민정이 중얼거렸다.
“상호야.”
“지금 대답 못해, 누나. 나중에…….”
“버려야 하면 버리고 가.”
상호는 대답 대신 민정을 꽉 끌어안았다.
다행히 악마들도 오르커드 속에서는 육탄전밖에 시도하지 못했다. 멀리서 마법이 날아들지도, 시체들이 합체해 달려들지도 않는다는 것이 지금의 상호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X벌.’
그는 가쁜 숨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하지만 품에 안긴 민정에게는 숨길 수가 없었다. 악문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날뛰는 심장의 박동을.
민정이 그에게 속삭였다.
“놓고 가도 돼, 상호야. 난 괜찮아…….”
“조용히 해!”
상호는 눈을 부릅뜨고 버럭 소리쳤다.
그렇게 윽박질러도 민정은 그의 품을 밀어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악마들을 베어내느라 급한데 민정까지 이러니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누나.”
그의 이가 부드득 갈렸다.
“제발 가만히 있어. 팔다리 부러뜨리기 전에.”
“상호야…….”
“말하지 마.”
실랑이를 벌이는 그들의 앞에서 나무들이 와르르 꺾여 무너졌다.
나무를 부수고 나타난 것은 검은 피부에 붉은 갈기를 가진 사자 인간.
야성의 악마가 어깨를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드디어 당첨이군.”
상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앞에는 대악마, 등 뒤에는 악마들과 오크 군단.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검이 검푸른 강기를 두르고 야성의 악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직
야성의 악마가 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
상호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검을 비틀어 빼냈다.
베지 못했다.
초혼강기였는데.
‘……힘을 회복한 건가.’
입술을 잘근거리는 그에게 야성의 악마가 다가왔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속에서는 투지와 광기가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내려놔라.”
야성의 악마가 검지를 까딱였다.
“어차피 둘 다 죽을 거라면 제대로 싸워나 봐야 할 것 아니냐. 여자는 내려놔라.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
“X까.”
상호는 단칼에 거절하고 검을 휘둘렀다.
검이 채찍처럼 기묘하게 휘어지며 여덟 갈래로 나뉘었다. 각각의 칼끝은 뱀처럼 대가리를 흔들며 야성의 악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노리는 곳은 두 눈과 정수리, 양 옆구리와 심장. 두 무릎과 하복부.
악마가 재빨리 팔을 들어 급소들을 가렸다.
퍼버벅
한쪽 팔은 심장과 옆구리.
또 한쪽 팔은 오른쪽 눈과 정수리.
그러나 왼쪽 눈과 무릎, 하복부는 채 가리지 못했다.
“크으……!”
눈을 꿰뚫린 악마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포효했다.
급소를 노리는 것이 주효하다. 놈의 몸을 보호하는 방식도 호신강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대등한 상대의 공격을 막으려면 몸의 일부에만 마나를 집중시켜야 하는 것이.
‘이판사판이다.’
상호가 모든 힘을 검에 끌어모으는 찰나.
촤악
땅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손톱이 민정의 발목을 긁었다.
“윽…….”
품에 안긴 민정이 몸을 떨었다.
호신강기가 약해진 틈을 노린 것이다. 상호는 이를 갈며 민정의 긁힌 다리를 검으로 내리쳤다.
빙의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아……!”
“조금만 참아.”
상호는 민정을 힘껏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의 검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민정의 잘린 발목을 지졌다. 연이은 고통에 민정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아……악……!”
“참아, 참아…….”
살아 돌아가면 치료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는 다시 민정에게 호신강기를 두르고 야성의 악마의 공격을 검으로 쳐냈다.
이번에도 야성의 악마에겐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크르……!”
눈을 잃은 분노 때문일까. 야성의 악마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이제는 상호가 놈의 공격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놈이 상호의 수비를 쳐내고 있었다.
크아아아
악마의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숲을 울렸다.
나무 사이로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곧 오크들도 도착할 터였다. 상호는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퇴로가 보이지 않았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럴수록 그의 손은 더욱 강하게 민정을 끌어안았다.
무심코 내려다본 민정의 얼굴에선 비 오듯 식은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고통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상호는 결단을 내리고 검을 들었다.
쿠구구……
오르커드의 보랏빛 연기 속에 검푸른 기둥이 솟았다.
호신도 포기하고 모든 내공을 모아 만든 초혼강기. 비상식적으로 거대한 검을 마주한 몬스터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반대로 악마들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후우.”
상호는 심호흡을 하고 검을 휘둘렀다.
정확하게 한 바퀴, 정확하게 수평으로.
처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끼이……
어느 한 몬스터의 새된 비명을 시작으로.
수천 겹의 포효와 비명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모든 것이 평등하게 쓰러졌다.
상호보다 키가 큰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무도, 몬스터들도. 모든 것이 정확히 상호의 가슴께 높이에서 평등하게 잘려나간 채였다.
야성의 악마 또한 팔이 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크르……!”
겨드랑이쯤에서 칼을 맞고 버티다가, 끝내는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지면서 팔을 베여버린 듯했다.
상호는 날뛰는 기혈을 진정시키며 내공을 거뒀다.
‘빨리 도망쳐야 돼…….’
더 이상은 싸울 기력이 없었다.
그때 바닥을 기던 악마 중 한 마리가 몸을 벌떡 일으켜 달려들었다. 상호의 등을 향해서, 손가락보다 긴 손톱을 세우고.
상호는 놈을 칼자루로 후려치려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젠장.’
등을 베일 각오를 하려는 때.
그에게 안겨있던 민정이 그의 팔 아래로 손을 내질렀다.
푸욱
“윽……!”
악마의 손톱이 민정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민정의 손과 팔을 난자했다. 그럼에도 민정은 팔을 빼지 않았다. 상호의 등이 베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상호는 숨을 들이켰다.
“흐읍……!”
그런 후 악마의 머리통을 칼자루로 박살내버리고, 품에 안긴 민정을 내려다보았다.
“……누나.”
“상호야, 나 팔, 팔…….”
자르기엔 늦어버렸다.
상호는 몰려드는 악마를 걷어차며 재빨리 민정의 목에 있는 혈을 눌렀다. 뇌로 가는 혈관이 있는 자리였다.
민정의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으.”
작은 신음을 흘리고 픽 쓰러졌다.
이제 악마가 빙의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오르커드 속이니 마법을 쓰지는 못했겠지만. 악마가 민정을 조종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면 곤란해지니까.
상호는 축 늘어진 민정을 안고 달렸다.
“이 정도로 끝낼 생각 없습니다.”
보랏빛 안개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겹쳐졌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귀하를…….”
그때 어디선가 조그만 소리가 들렸다.
낯설고도 익숙한, 해골의 턱이 맞부딪히는 소리.
달그락……
“……!”
그 소리에 홀려 모두가 멈칫했다. 악마들도, 상호도.
정신을 먼저 차린 쪽은 상호였다.
파악
상호의 발이 땅을 박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악마들이 상호를 쫓았지만,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상호를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보랏빛 안개 너머로 사내의 뒷모습이 사라져 갔다.
‘이…….’
악마들의 몸에서 살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이 쓰레기 같은……!’
지배의 악마는 결국 분을 참지 못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지배 중인 악마들의 입을 빌어서.
수백 겹의 귀곡성이 하늘 멀리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