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474. 입으로 전하는 마음
“정말…….”
이츠키가 그를 흘겨보았다.
“이런 으슥한 곳에 모르는 여자애를 데려오십니까?”
둘은 계단 밑,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에 들어와 있었다.
굳이 이런 곳에 들어온 이유는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밖에 나가면 이츠키가 모기에 뜯길까봐. 상호는 이츠키의 얇은 차림새를 흘끗하며 입을 열었다.
“사카시타.”
“뭡니까, 아저씨.”
“내가 약속을 안 지키려고 이러는 것 같아?”
“이미 깼잖습니까.”
좁아서 팔도 제대로 못 뻗을 공간에, 그와 이츠키는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 서 있었다.
상호는 이츠키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가 네 생각 안 하고 내 마음대로만 하는 것 같아?”
“그렇잖습니까?”
“내가 진짜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
이츠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해보는 겁니다.”
“널 기절시켜서 학교에 데려갈 거야.”
상호의 손이 이츠키의 뒷목을 살짝 잡았다. 얇고 하얀 목에는 부슬부슬한 솜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한 시간도 안 걸려. 그러고도 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팔다리를 묶어서 협회에 감금시킬 거야.”
“그게 진심입니까?”
이츠키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물건 취급 하고 싶었다, 그 말이십니까?”
“네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야.”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서로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어차피 이 좁은 창고에서는 물러날 자리도 없었겠지만, 눈 한 번 깜작이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카시타.”
“자꾸 부르지 말고 할 말을 하는 겁니다, 아저씨. 아저씨가 떳떳하다면.”
“세희는 혼자서도 한 부대를 상대할 수 있어. 태화는 필요해서 데리고 있는 거고. 다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빛이는 다대다 전투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가 불가능한 전력이야. 그런데 너희는? 아니란 말이야.”
상호는 검지로 이츠키를 가리켰다.
“너 여기서 작전 나가다가 길 잃어서 몬스터들 무더기로 마주치면 살아나올 자신 있어? 네가 세희나 다혜보다 전투 경험이 많아? 아니잖아. 전투는 머리로 하는 거야, 사카시타. 가슴이 아니라.”
“싸우고 싶은데 싸울 수 없다면…….”
이츠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뭘 위해 배워온 겁니까?”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배운 거지. 그런데 이곳은 너한텐 위험…….”
“역시 저는 헌터가 아니라 그저 눈이 특이한 아이였던 겁니까?”
“……그게 아니라.”
그가 무어라 변명하려는 순간, 이츠키가 그의 팔을 쳐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상호는 깜짝 놀라 이츠키의 팔을 잡았다.
“사카시타, 내 말 들어 봐.”
“이거 놔!”
이츠키는 상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놓으라고! 이제, 이제 당신 말대로 할 이유 하나도 없어!”
“이츠키!”
상호는 강하게 소리치며 이츠키의 어깨를 잡고 문에 몰아붙였다.
손아귀 속 작은 어깨가 분노로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츠키의 까만 눈동자 속에 상호의 착잡한 얼굴이 담겼다.
“이거 놓지 않으면 비명 지를 겁니다.”
“이츠키.”
“이름 부르지 마는 겁니다. 아, 왜 이런 곳으로 데려왔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비명을 질러도 안 들릴 테니까.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이츠키.”
“끝까지 제 말은 안 듣는 겁니다.”
이츠키는 자신의 어깨에 놓인 상호의 손을 흘끗했다.
“잡고 싶으면 잡고,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놓으라는 말은 은근슬쩍 무시하면서, 이렇게 비명 질러도 들리지 않는 곳에 데려오기까지……. 당신 참, 음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라고.”
“저는 그런 사람을 믿고 여기까지 와버린 겁니다.”
이츠키가 상호의 손목을 잡아 조금씩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아래로, 아래로.
“한번 마음대로 해보시는 겁니다.”
“이츠키.”
“어차피 처음부터 제 몸이 목적이었잖습니까.”
손끝이 가슴팍에 닿았다.
“아니면 비명을 지르는 쪽이 취향이십니까?”
이츠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숨을 스읍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토해낼 듯 폐를 부풀리며.
상호는 그 순간 양손으로 이츠키의 얼굴을 잡았다.
“……읍.”
비명이 입술에 가로막혔다.
관리를 하지 않아 가칠가칠한, 그러나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촉촉하게 젖어 있는. 두 덩이의 살점.
이츠키의 몸이 움찔했다.
“……!”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 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약속을 저버린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츠키는 주먹을 꽉 쥐어 상호의 가슴팍을 두들겼다. 가증스런 입술을 떼어낼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러나 상호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이츠키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
이츠키의 팔이 축 늘어뜨려졌다.
분노로 떨리던 몸도 점차 잦아들고. 이따금씩 움찔거리던 어깨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상호를 받아들일 뿐.
코로 쉬는 숨이 스무 번쯤 되었을 즈음, 상호는 입술을 떼었다.
“네 눈이랑은 상관없어.”
이츠키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뜬 숨이 새어 나왔다.
“그냥 네가 소중한 거야.”
그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상호는 다시 이츠키에게 입을 맞췄다. 이츠키가 이해할 때까지 계속, 계속. 이츠키가 그를 밀어내고 문을 닫으려 하면 붙잡고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가 입을 떼자 이츠키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쪽.
“그러면…….”
쪽.
“……알겠습니다.”
네 번의 입맞춤만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린 얼음성.
이츠키는 감촉을 되새기는 듯 눈을 감고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상호의 손을 잡고 조그맣게 말했다.
“마음대로 하신 겁니까?”
“응.”
상호는 검지와 엄지로 이츠키의 뺨을 집었다.
“이제 알겠어?”
“……조금.”
“조금이면 더 해야 돼?”
“그럴지도.”
이번엔 이츠키가 그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좀 더 해보다 들어가시겠습니까?”
* * *
생활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불이 꺼져 있었다.
상호는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서며 이츠키에게 속삭였다.
“애들 깰라. 같이 자자.”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상호의 침대에 같이 누워 한 이불을 덮었다. 질기고 투박한 보급 모포라 부드러운 살결이 더욱 생경하게 다가왔다.
상호는 이츠키의 허리를 끌어당겨 침대의 가운데로 오게 했다.
“자다가 굴러떨어지겠네. 꼭 붙어 있어.”
“이렇게 붙어 있다가 저도 모르게……. 아, 또 속을 뻔했습니다.”
“응?”
“임신시켜서 후방으로 보내버릴 생각이시잖습니까.”
“…….”
“다 알고 있습니다.”
이츠키가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근데 진짜 맞지 않습니까?”
“뭘 진짜야. 아니야. 잠이나 자…….”
상호는 이츠키의 머리 아래에 팔을 내어주고 한숨을 폭 쉬었다.
그 순간 조그만 마나 한 줄기가 쏜살같이 허공을 갈랐다. 세희의 침대에서 형광등 스위치까지로.
번쩍이는 빛이 눈을 때렸다.
“……어?”
상호의 몸이 굳었다.
온통 하얗던 시야가 점차 돌아오며 생활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누워있었던 아이들이 모두 일어나 앉아서 상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응.”
“다 들었어요.”
세희의 눈이 번득였다.
“둘이서 뭐 했죠?”
“딱히 아무것도…….”
“왜 저랑은 안 해요?”
너랑도 몇 번 한 건데. 상호는 차마 그 말을 아이들 앞에서 하지 못해 진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세희의 옆 침대에서 태화가 빽 소리쳤다.
“맞아! 왜 열심히 싸우는 우리는 버려두고 쟤랑은 꼴랑 하루 만에 선 넘는데!”
“뭘 넘어, 임마! 너희한테 해준 것보다 더 하진 않았어…….”
“엉? 나 한 적 있어? 자다가 당한 거야?”
“그거 말고! 아니 잠깐만 얘들아, 너희 왜 다 깨어있는…….”
당황한 그의 곁에 아이들이 좀비 떼처럼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꼭 붙어 있는 상호와 이츠키를 보고는 둘을 덮은 이불을 덥석 붙잡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상호는 식겁하며 반사적으로 이불을 잡았다.
“얘, 얘들아……?”
“왜 가리세요?”
“너희가 갑자기 그러니까 무서워서…….”
열 개의 가느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이불을 잡아당겼다.
“떳떳하면 까보든가! 왜 숨는데!”
“므아!”
“아니 얘들아, 잠깐만! 잠깐만!”
상호는 필사적으로 이불을 잡았다. 이불 속에서 이츠키가 그의 팬티를 슬금슬금 끌어 내리며 암살을 시도하고 있었기에.
“장난치지 마, 사카시타! 세희야, 진짜, 진짜 지금은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지금, 지금은 상태가 안 좋아. 10초만! 아니 3초만!”
“선생님.”
세희의 두 손 사이에서 모포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끄트머리에서부터 조금씩 찢어져가는 모포의 크레바스가, 상호의 가랑이가 있는 위치를 향해 빠르게 마수를 뻗었다.
“딱 1초 드릴게요.”
“세희야……?”
상호는 어떻게든 한 손으로 이불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이츠키가 내려버린 팬티를 올려보려 했지만, 아이들이 이불을 당기는 힘도 강했고 이츠키도 끈덕지게 그의 팬티를 내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어! 1초만 이거 놔줘!”
“지났는데요.”
경고를 마친 세희는 모포를 두 갈래로 확 찢어버렸고.
“세희야아아아악!”
상호의 정신도 갈가리 찢어져버리고 말았다.
* * *
“했잖아!”
태화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빨딱 세워놓구선! 우리가 다 봤어! 여섯 명이 봤는데 잡아뗄 거야?!”
“…….”
상호는 새빨개진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지난밤에 치부가 드러난 순간부터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 깨어있는 동안에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매도를 당하고 있었다. 학생을 건드렸다느니, 일본 여자가 그렇게 좋냐느니, 왜 나는 안 해 주냐느니.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또 며칠 가겠구만…….’
한숨을 쉬는 상호의 시야에 나빛이 들어왔다.
나빛은 어제부터 계속 그 얼굴 그대로였다. 우중충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표정.
‘너도 며칠을 가는구나…….’
상호는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집어 나빛의 식판 옆에 놓았다.
그걸 본 나빛이 살짝 웃었지만,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친 햇살처럼.
그때 상호의 곁에 민정이 앉았다.
“상호야.”
“아, 어. 누나. 언제 왔어?”
“이거 봐봐. ……잠깐만, 너희 언제 왔니?”
민정의 당황한 눈빛이 은율과 이츠키를 향했지만, 상호는 민정의 눈앞에 손사래를 쳤다.
“나중에 말해. 무슨 일인데?”
“이거.”
민정이 내민 태블릿에는 어떤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숲 위를 날아가는 시점. 움직임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드론인가?”
“응.”
민정이 영상을 뒤로 조금씩 넘겼다.
“부서지기 직전에 찍힌 영상이야. 이거 봐.”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화면 속 저 먼 곳, 숲과 숲 사이. 야트막한 틈 사이로 초록색 인간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상호의 눈 밑이 꿈틀했다.
“……결국 오는구나.”
그 말에 아이들이 눈을 끔뻑였다.
“뭐가 와요?”
“오크.”
민정이 대답을 이었다.
“전쟁을 할 줄 아는 놈들이야.”
무기를 사용하고, 전략을 짤 수 있으며, 소리와 모습을 숨길 줄 알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야말로 전투를 위해 태어난 종족이었다.
“누나, 이놈들 어디까지 왔어?”
“한반도 코앞까지. 여기서는 200km가 좀 안 되려나.”
“……으음.”
상호는 침음하며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림잡아 수백 개 부족. 이만한 규모에 다른 몬스터까지 합세하면 지평선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진격해올 것이다. 헌터들이 전선을 아무리 넓게 펼쳐도 옆으로 줄줄 새게 될 터.
화면에 화살이 날아들며 영상이 끝났다.
“아마 악마들도 오겠지.”
민정이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둘이서 갔다 올까?”
“응.”
규모는 크지만, 그렇기에 일찍 알아냈다. 상호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알아냈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
다가오는 적을 선제타격해, 그 수를 최대한 줄여 놓는 것.
“세희, 태화. 잘 붙어 있어.”
“어디 가세요?”
세희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같이 가요.”
“안 돼.”
단호한 대답이 재빠르게 세희를 막았다. 엉거주춤하게 멈칫한 세희를 상호의 검지가 가리켰다.
“너흰 여기 있어. 둘만 갈 거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잘 지키고 있어. 도현이 형 말 잘 듣고.”
“아으!”
“안 돼. 너도 여기 있어.”
“므아…….”
“금방 갔다 올게.”
돌아서는 그를 향해 나빛이 조그맣게 말했다.
“다녀오세요…….”
“으응.”
그는 나빛을 돌아보며 살짝 웃어 보이고는, 민정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아이들의 걱정 가득한 눈빛을 뒤로한 채.
태화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예감이 안 좋은데.”
그 말을 들은 세희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재수없는 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아니, 예감이 느껴지는 걸 어떡해. 야, 이츠키. 너는? 너는 어떤데?”
“딱히 못 느꼈습니다.”
“돌팔이 선무당뇬…….”
태화가 혀를 차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 태화를 째려보던 세희도 곧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츠키는 젓가락을 허공에 짤각일 뿐, 모두의 식사가 끝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했다.
태화가 말한 그 불길한 예감을, 그녀 자신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