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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73화 (473/501)

<473화>

473. 화난 여인

눈이 퉁퉁 부은 두 소녀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쪽은 연회색 장발. 한쪽은 까만 단발. 세희는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그 둘을 발견하고 굳어 버렸다.

“……둘이 거기서 뭐해?”

“그냥.”

“모릅니다.”

나빛과 이츠키가 동시에 코를 훌쩍였다.

하기야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긴 했다. 세희는 주머니에서 이어셋 두 개를 꺼내 침대 머리맡에 쭈그려 앉은 은율에게 하나, 이츠키에게 하나를 던져 주었다.

“받아.”

“항상 끼고 다니는 겁니까?”

“아니, 사이렌 울리면 끼면 돼.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항상 준비해. 사이렌이 울리면 복도에 사람들이 막 튀어나오니까 조심하고. 평소에는 전투복 입고 다니고. 잘 때도 바로 전투복 입을 수 있게 간편한 거 입어.”

세희는 그 외에도 주의해야 할 것들을 알려 주었다. 점심과 저녁은 언제 먹는가. 샤워실 사용 시간은 언제인가 등등.

“……그리고 사이렌 울리고 나면 태화는 선생님 따라가고 나랑 언니는 그때그때 다르니까, 너희는 일단 나빛이 따라다니는 걸로 알고 있어.”

“응.”

“알겠습니다.”

은율과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싸다가 울리면 어떻게 합니까?”

“튀어나와야지 뭐.”

“세희는 그런 적 있습니까?”

“없어.”

“있나 봅니다.”

“없다구.”

씻다가 허둥지둥 달려나온 적은 있지만. 세희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쉬고 있어. 쉴 수 있을 때 잘 쉬어놔야 돼.”

“베테랑 다 됐습니다.”

“그러게.”

은율과 이츠키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운 건 언제고 또 장난을 치고 있나. 세희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앉았다.

그들이 그런 장난을 치는 와중에도 나빛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잘도 다시 전화했네요.]

“에이, 사과하려고 걸었죠.”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터벅터벅 기지 뒤를 걸었다.

미진은 화가 많이 났는지 아주 톡톡이 아니라 탕탕 총을 쏘아대는 목소리였다.

[전쟁 지고 있죠? 어차피 뒈져서 못 돌아올 것 같으니까, 나한테 안 죽는다고 장난이나 치고.]

“아니에요. 지긴 뭘 져요.”

[그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목소리가 그래요?]

“뭐가요?”

[다 죽어가는데.]

티가 났나 보다. 상호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화두를 돌렸다.

“애들은 잘 지내요?”

[여기 있는 애들은 잘 지내죠.]

말은 그랬지만 미진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거기 있는 애들이 문제고.]

“학교 분위기는 어떤데요?”

[불안해하죠. 교사들은 아닌 척 하지만……. 오늘도 김 선생님이 옛날 동료 부고가 떴대요.]

“…….”

기지 쪽을 흘끗하는 상호에게 미진이 물었다.

[거기 상황은 어떤데요?]

“잘 막고 있어요. 그냥 막고만 있는 거지만……. 다친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있고. 헌터 일이 다 그렇잖아요. 애들 이야기나 좀 더 해줘 봐요.”

[이야기할 게 뭐 있어요? 그냥 늘 똑같지……. 단비는 언니들 걱정하고, 미래는 로봇을 참전시키겠다고 뭔가 막 하고…….]

“그거 재밌겠는데. 그 이야기나 좀 해 봐요.”

상호는 미진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몇 주째 보지 못한 아이들의 학교생활. 이전과는 환경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의 각자다운 행동들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면 헌터 기지가 아니라 학교가 있을 것 같은 느낌.

“……하하.”

그가 웃자 미진의 화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웃겨요? 내가 고생하는 게?!]

“아니, 아니 그냥…… 재밌어서요. 미진 씨가 이야기를 잘하네.”

얼버무리던 상호의 뇌리에 순간 어떤 사실이 스쳐지나갔다.

“……잠깐만, 미진 씨.”

[뭐요.]

“꾸웅이는 누가 돌보고 있어요?”

나빛도 여기 있고, 지윤도 이쪽 근방에 있고, 이젠 은율과 이츠키도 여기 있는데.

대체 누가 먹여 살리고 있는 걸까.

설마 굶주리다가 탈출해서 사람을 습격했다거나…….

[미래가 잘 돌보고 있다던데요. 사장님이랑.]

“……아하.”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근데 사장님이 누구예요? 강 선배는 알아요? 아니, 애들한테 관심 없으니까 모르겠지, 참.]

“……있어요. 그래서. 미래는 불만 없대요?”

[신났던데요. 학교 끝나면 로봇 타고 달려가서 하루종일 놀아요.]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렇죠. 잠깐만, 왜 말을 돌려요? 내가 고생하는 게 그렇게 웃기냐고요!]

“아니라니까……. 근데 뭐가 그렇게 고생인데요?”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미진이 악에 받혀 소리쳤다.

[양복 입은 사람들이 학교를 막 들쑤시고! 하루에도 전화가 수십 통씩 걸려오고! 이상하다니까! 애들 집은 세 개밖에 없는데…….]

나빛과 은율, 지윤.

양복쟁이들이라면 당연히 나빛이 때문이리라.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학부모들…… 아니, 아직 은율이 부모님은 모를 거 아냐. 나빛이 부모님한텐 뭐라고 말했는데요?”

[저도 모른다고 했죠! 실제로 어딨는지는 모르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하니까 두 분 다 쓰러지셔서……. 그날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요. 강 선배, 강 선배가 한번 와서 직접 말해주면 안 돼요? 시간 안 나요? 은율이 부모님까지 아시게 되면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미진의 목소리에는 간절함마저 묻어났다.

항상 혼자 알아서 스스로 척척 해내던 미진이, 심지어는 자기 일은 진작에 끝내고 상호의 일까지 도맡아 해치우던 그녀가 이제는 상호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호는 그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럴 시간은 없어요.”

다른 중요한 일이 생긴다면 모를까, 당장 언제 몬스터가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자리를 비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미진 씨.”

[……왜요.]

“내가 여기서 맘 놓고 싸우는 건 미진 씨가 거기 있어서 그래요.”

상호는 기지 벽에 등을 기댔다.

“난 그런 일들은 미진 씨가 나보다 훨씬 잘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지금까지 그랬잖아. 미진 씨 우리 학교 온 뒤로 사고 한 번 안 치고. 일 잘하고.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도와주지도 못하는 선배 아래서 잘해왔잖아요.”

[……괜히 치켜세우지 마요.]

“진심이에요.”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진실. 듣기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나빛이는 괜찮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약간 마음고생을 하고는 있지만…… 혼자서 잘 이겨낼 거예요. 은율이도 지금 잘 있으니까, 미진 씨가 학부모들한테 잘 좀 말해줘요.”

[……선배는 안 무서워요?]

미진이 조그맣게 물었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다 애들이 다치면, 부모님들 얼굴을 어떻게 봐요? 난 그게 무서워요. 괜찮다 괜찮다 했다가 안 괜찮다고 말해야 할 때가…….]

“나도 당연히 무섭죠.”

제일 무서운 건 당연히 아이들이 다치는 것이고, 둘째로 무서운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

하지만 상호는 고민하지 않았다.

“근데 난 무서워도 하는 사람이거든.”

[…….]

“그게 내 인간성의 유일한 장점이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회상에 잠긴 상호의 귀에 나직한 목소리가 닿았다.

[강 선배.]

“응?”

[죽지 마요.]

상호는 피식 웃었다.

“누가 죽고 싶어 죽겠어요. 당연히 안 죽으려고 노력…….”

그때 전화 너머에서 누군가가 빽 소리쳤다.

[선생님?! 선생님 전화?!]

[나, 나디아. 잠깐만…….]

[선생님 듣고 있어?! 나 족발이 되어 버리는! 이제 날 이기는 동생들! 진작, 진작 마나로 갈아탔어야! 신앙심이 와르르~ 무너져버려……!]

[……다음에 연락할게요. 씹지 말고 받아요.]

“……예.”

그는 전화를 끊고 진땀을 닦았다.

* * *

그날은 습격이 없었다. 밤이 되어 잘 준비를 할 때까지.

하지만 차라리 습격이 있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상호는 남은 왼쪽 눈을 감은 채 침대에 앉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이츠키가 톡 쏘아붙였다.

“실눈 뜨지 않는 겁니다.”

“……안 떴어.”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는 방에서 내쫓기지 않는 걸로 감사하는 겁니다.”

“여긴 내 생활관이야…….”

“시끄럽습니다. 학생들이랑 동거도 모자라서 옷까지 같은 곳에서 갈아입는 음침한 아저씨.”

“그래서 언제 다 갈아입는…….”

안대가 쭉 당겨졌다가 눈을 향해 튕겨졌다.

“……악!”

“은근슬쩍 말 걸지 마는 겁니다.”

코앞에서 이츠키가 얇은 반바지와 민소매를 입은 채 노려보고 있었다.

낮부터 이런 식이었다. 무시하고 괴롭히고, 매몰차게 굴고. 덕분에 상호의 명치와 눈에는 아직도 얼얼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누워 있던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왜?”

“아니, 그냥.”

좀 눈치껏 도와다오, 이츠키 기분 좀 풀어주게. 상호는 그런 뜻을 담아 아이들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편을 도와주지 않았다.

태화랑 다혜는 그냥 멀뚱히 있고, 나빛은 계속 우중충. 세희와 은율은 아무래도 이츠키 편인 것 같고.

답은 하나.

정면돌파뿐.

“사카시타…… 커헉!”

“어딜 만지는 겁니까?”

이츠키는 상호가 잡았던 손을 휘둘러 상호의 뺨을 찰싹 후려쳤다.

“진짜 기분 나쁜 아저씨입니다. 아무렇게나 모르는 사람 손을 막 만지고.”

“아니…… 사카시타, 손을 막 만지는 것보단 뺨을 치는 게 더…….”

“그럼 아저씨도 쳐 보는 겁니다.”

이츠키가 상호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상호는 이츠키의 마른 몸을 피해 옆으로 슬금슬금 움직였지만, 침대에 앉은 채로는 이츠키가 다가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못 치겠습니까?”

“…….”

“참 양심도 없고 배알도 없는 파렴치한 아저씨입니다.”

이츠키는 그렇게 톡 쏘아붙이고 상호의 침대에 누웠다.

니가 여기 누워버리면 나는 어디서 자냐, 상호는 그런 뜻을 담아 곤란한 눈빛을 보냈지만 이츠키는 가볍게 씹어버리고 누워서 핸드폰을 켰다.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을 듯한 모습. 차라리 벽에게 대답할 때까지 말을 거는 게 나을 듯했다.

‘어떡하면 좋으니…….’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태화가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쌤! 이리와. 나랑 같이 자.”

“……됐어.”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짐을 챙겼다.

“그냥 너희 방 해. 이제 세희랑 다혜도 있으니까……. 세희. 태화 잘 지키고 있어.”

“뭐?!”

태화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안 돼! 야, 이츠키! 빨랑 쌤이랑 화해해!”

“싫습니다.”

“이 쫌생이들아! 찐따같이 굴지 말고 화해해! 아 쌤, 가지 마! 그냥 같이 자면 되잖아! 야, 이츠키 너 진짜 그럴래!”

“난 잘못 없습니다.”

이츠키가 서늘한 눈빛으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약속을 안 지키는 누구씨가 잘못한 거지.”

“……사카시타.”

상호의 손에서 짐이 떨어졌다.

그는 이츠키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가 이츠키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나와봐.”

“자, 잠깐만. 뭐 하시는 거…….”

“잠깐이면 돼.”

“무슨……!”

당황한 이츠키가 상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상호는 아예 이츠키를 안아 들어 문가로 향했다.

상호의 품에 안긴 이츠키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이거 놓는 겁니다! 어딜 만지는……!”

“갔다 올게.”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이츠키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겨진 아이들은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나빛이 코를 훌쩍이며 눈을 깜작였다.

“어디 가시는 거야……?”

“낸들 아냐? 우씨, 설마 홍콩은 아니겠지…….”

입술을 삐쭉 내민 태화의 말에 세희가 핀잔을 날렸다.

“야, 선생님을 뭘로 보는 거야.”

“근데 영화 보면 그런 거 많단 말야. 전쟁하다가 막 머리 훼까닥 돌아갖고 눈만 맞아도 으쌰으쌰 해버리는……. 방금도 쌤 좀 화나 있었잖아? 원래 그런 때 흥분하는 거거든.”

“……선생님은 안 그래.”

“쌤도 민정쌤이랑 하는 거 보면 옛날부터 그랬을걸?”

“…….”

“빼박이다 이거. 이제 내일 아침까지 안 들어온다.”

그 말에 생활관에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점점 어두워지는 아이들의 눈빛과 고요한 살기가, 폭풍전야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상호가 없는 생활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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