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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71화 (471/501)

<471화>

471. 자책

그 후로 며칠이 지났을까.

“쌤, 쌤.”

태화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그거 들었어?”

“뭐.”

“졸라 쎈 떠돌이 헌터가 있대.”

상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

“웅. 쎄기도 쎈데 나이도 어리구 얼굴도 예쁘다던데. 여자애래.”

태화의 빨갛고 까만 눈동자가 상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관심 있지?”

“아니야, 임마.”

“그래? 그럼 말구.”

“…….”

그게 제 친구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상호는 지윤이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안 다치고 잘 지내고 있을까.

‘소식은 들려줬으면 좋으련만…….’

남의 입을 빌려야 알 수 있으니. 답답하긴 한데 한편으로는 뭔가 뿌듯한 느낌도 들었다. 제자가 자립해서 어엿한 헌터가 됐으니까.

그래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코앞에 태화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어?”

“……뭐가.”

“꼭 여자 생각할 때 짓는 표정인데…….”

태화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상호의 가슴팍에 툭툭 주먹을 내질렀다.

“하여튼 쌤! 나 맛있는 거 먹고 싶어.”

“뭐 먹고 싶은데.”

“짜장면.”

“야이…….”

상호는 혀를 차며 태화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짜장면 말고. 딴 거.”

“왜?”

“여기까지 배달이 어떻게 와!”

“헌터 배달부가 있을 수도 있지. 칼 들고 오도방구 타고 몬스터들을 썰어넘기면서 배달하는 거야.”

“오다가 다 불어터지지, 임마…….”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짜장면!”

“으, 응?!”

“짜장면 만들어 주세요!”

나빛이 문가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재료만 구해 온다면야 못 만들 건 없겠지만.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건 그만의 착각일까. 상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나빛을 달랬다.

“짜카로니로 어떻게…… 안 될까?”

“짜장면!”

“그럼 짜짜게티…….”

“짜장면!”

“므아…….”

나빛의 옆에서 다혜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쯔아쯔아므아…….”

“보세요! 언니도 먹고 싶대요!”

“므아!”

“만들어!”

나빛의 눈이 반짝였다.

어째 시퍼렇게 번득이는 듯도 했다.

“주세요!”

“…….”

상호는 조용히 지갑을 챙겼다.

* * *

냄비에 기름이 꼴꼴꼴 둘러졌다.

살다살다 짜장을 제 손으로 만들게 될 줄이야. 짬밥은 몇 번 만들어 봤지만.

상호는 한숨을 쉬며 기름에 춘장을 넣었다.

‘내 팔자야…….’

옆의 도마에서는 식칼이 저 혼자 양파를 썰고 있었다.

춘장을 볶다 보니 짜장 냄새가 주방을 넘어 퍼지기 시작했다. 상호는 계속 춘장을 볶다가 건져내고 기름을 조금 남겨 나머지 재료를 볶았다.

조금 불 맛이 나게 볶고, 짜장을 넣어 다시 볶고.

그러는 와중에 주방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강 헌터님?”

젊은 남자 조리사가 눈을 끔뻑였다.

“뭐 만드세요?”

“짜장면이요.”

상호는 급히 덧붙였다.

“애들이 먹고 싶대서.”

“아…….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뇨, 괜찮아요.”

상호가 손사래를 치자 조리사는 주방 옆방으로 들어갔다.

짜장이 착실하게 볶아져 갔다. 냄비에 담긴 양은 대략 8인분. 그러나 다혜가 끼면 마법처럼 5인분이 될 것이다. 혹은 4.5인분.

‘부족한가?’

고개를 기웃거리는데 주방으로 또 누군가 들어왔다.

“뭐해?”

도현이었다.

보면 알지 않느냐. 상호는 그런 뜻으로 냄비를 슬쩍 기울여 짜장을 보여주었다.

“짜장이야? 나도 한그릇 줘봐.”

“안돼. 애들 먹기도 부족해. 한 입만 먹어보던가.”

“짜식…….”

도현이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근데 먹고 싶긴 하다.”

“사령부 하나 삐까뻔쩍하게 짓고 뷔페 하나 차려놓지 그래. 옛날 늙은이들 그랬던 것처럼.”

“니가 그런 말을 하냐. 제일 많이 욕하던 짜식이…….”

“흐흐.”

상호는 쓰게 웃고 가스불을 끄려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뭐여.’

그는 눈을 끔뻑이며 주방 문가를 돌아보았다.

어째 사람이 많았다. 열렬한 눈빛으로 냄비를 바라보는 헌터들.

다들 냄새를 맡고 몰려든 하이에나처럼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강 헌터님.”

“……예.”

“그거 한 입만…… 안되겠습니까?”

“…….”

상호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재료들 쪽을 향했다.

“……더 만들어 줄게요.”

“감사합니다!”

헌터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잔뜩 신이 난 헌터들은 사람들을 더 불러모으러 달려갔고, 상호는 그런 헌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형.”

“응?”

“도와줘.”

그러자 도현이 핸드폰을 꺼내며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이게 뭐야. 협회장님한테 부재중이…….”

“줘봐.”

“나 갈게!”

“줘보라고!”

상호가 일갈해도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을 쳤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꼭 맞다. 상호는 이를 갈며 재료를 더 꺼내 썰기 시작했다.

양파를 썰기 시작하려는데 문가에서 하얀 머리카락이 빼꼼 튀어나왔다.

“선생님~.”

“아, 응. 나빛아.”

“도와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그래도 나빛은 쪼르르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뭐라도 할게요…….”

“아냐, 아냐. 괜찮아. 금방 되니까 저기 앉아 있어.”

주방에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상호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양파를 썰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빛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

“응?”

“이게 면이에요?”

나빛의 검지는 상호가 사온 인스턴트 생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그게 면이지 뭐냐. 상호는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응, 면이지.”

“아…….”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요…….”

“…….”

“맛있게 만들어 주세요…….”

짜장을 보고 기뻐하다가 순식간에 어두워진 안색. 터덜터덜 돌아서는 발걸음.

상호는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수타로 만들어 줄게.”

“네? 정말요? 진짜요?”

“그럼, 나빛이 먹고 싶은 거 다 만들어 줘야지…….”

“헤헤헤…….”

나빛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양파가 외국산이던가. 분명 국산으로 샀는데 왜 이렇게 매운가. 상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양파를 하나 더 썰기 시작했다.

‘다음부턴 불어터지든 말든 그냥 배달시켜야지…….’

* * *

“아~.”

태화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의자에 늘어졌다.

“역시 믿고 먹는 강상호 셰프.”

“난 헌터야, 임마.”

“요리보다 요리사가 더 맛있는 셰프가 있다?”

“얌마…….”

“셰프가 맛있고 요리가 친절해요~.”

배를 두드리는 태화의 옆에서는 세희가 조용하면서도 열심히 면을 흡입하는 중이었다.

다혜도 네 그릇째를 해치우고 있었다.

“웅냠냠.”

“다혜야. 맛있어?”

“아으.”

“다행이네.”

상호는 살짝 웃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에서는 헌터들이 그가 만든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꽤나 흡족한 표정으로.

조리사가 만드는 밥이 맛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곳은 결국 최전방 전투기지. 언제 후퇴할지 모르는데 헌터도 아닌 조리사를 많이 둘 수는 없었고,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꿈도 꾸지 못했다.

‘끝내고 나니 기분은 좋네.’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헌터들과 식사를 하던 도현이 다가와 상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방금 막 식사를 마친 듯했다.

“야, 야. 상호야.”

“엉?”

“뭐 디저트 같은 거 없냐?”

“어디까지 부려먹으려는 거야?”

상호는 혀를 찼다.

“볼일 다 끝났으면 가서 설거지나 하지 그래.”

“이야, 또 전화가…….”

웃음을 참으며 핸드폰을 꺼내던 도현이 갑자기 멈칫했다. 상호는 도현의 굳어가는 표정을 보고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10년을 넘게 봐 왔기에 장난인지 아닌지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뭐야.”

“습격이랜다.”

도현이 벌떡 일어나자마자 사이렌이 울렸다. 아직 식사 중이던 헌터들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아이 X발…….”

“이래서 빨리 처먹어야 된다니까. 야, 2조 나와!”

“재수 드럽게 없네, X팔…….”

헌터들은 젓가락질 한 번 더 할 시간도 없이 식당에서 달려나갔다. 상호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빛아, 이어셋 끼고.”

“아, 네…….”

“세희. 다혜. 나빛이랑 같이 움직여.”

“네.”

“아으.”

그렇게 바람처럼 헌터들이 사라지고.

빈 식당엔 채 비우지 못한 식판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 * *

[악마는?]

“없었어.”

상호는 태화의 곁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발적이고 광범위하게 펼쳐진 습격. 공세 하나하나는 별 볼 일 없었지만, 한 방에 쓸어버릴 수가 없는데다가 상호와 태화가 일일이 확인하러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도 이젠 거의 다 정리가 된 듯싶었다.

“복귀할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순간, 이어셋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앙인, 신앙인 없어요?]

다른 조에서 들려오는 무전이었다.

[부상자야. 신앙인! 신앙인!]

[침착해.]

도현이 당황한 헌터를 진정시키려 했다.

[어느 조야?]

[2조입니다. 조장이 목을 찔렸어요. 피가, 피가 너무…….]

[하늘에 뭐든 날려 봐.]

산봉우리 건너편에서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상호는 태화에게 눈짓하고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어셋에서 무전이 바쁘게 이어졌다.

[나빛이. 확인했니? 지금 어디야?]

[확인했어요. 지금 가고 있어요…….]

황금빛 날개를 펼친 소녀가 불덩이가 솟아올랐던 땅으로 착지하는 게 보였다. 상호와 태화는 그곳으로 날아갔다.

둘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나빛이 누워있는 헌터의 목에 성력을 쬐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나빛은 성력을 더 강하게 모으며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목을 꿰뚫린 헌터의 숨은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그걸 알아본 상호는 나빛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빛아.”

“조금만…….”

“나빛아.”

그는 헌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빛의 손을 떼어냈다.

“할 만큼 했어.”

나빛이 고개를 내저으며 상호의 손을 뿌리쳤다.

작고 하얀 손에 다시 성력이 맺혔다. 하지만 성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이미 명을 다한 헌터는 눈꺼풀 한 번 움직이지 않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장막처럼 드리워지고.

“아…….”

그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 한 방울 떨어졌다.

상호는 다시 나빛의 손을 붙잡고 헌터에게서 떼어냈다.

“생각하지 마. 지금은 다른 다친 사람 먼저 치료하자.”

“…….”

하지만 나빛은 헌터의 곁을 뜨지 않았다.

그 후로 한참 동안, 나빛은 헌터의 곁에서, 상호는 나빛의 곁에서. 상대의 손을 부여잡고 일어나지 못했다.

연회색 눈동자 아래로 투명한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 * *

생활관에서 나오는 상호의 앞에 도현이 다가섰다.

“재웠어?”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으로 향했다.

“잠든 건지, 울다 지친 건지…….”

“치료사는 효은이처럼 독한 게 나은데.”

“걔랑 우리는 익힌 거지. 최선을 다하고 나서 자책하지 않는 방법을……. 나빛이는 아직 미숙한 거고.”

둘은 조용히 식당 문을 열었다.

구석에 놓인 식탁에 짜장면이 반쯤 남은 식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삿밥이라고 남겨 놨나.”

도현은 숟가락을 들어 짜장면에 꽂았다.

“하여간 헌터들 미신 믿는 건 나라 제일이야.”

“주술사가 있으니까 당연하지.”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걸어가 상태를 살폈다. 주방은 조리사가 치웠는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주방에서 나와 벽에 등을 기댔다.

“누구였는지 알아?”

“아니.”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기혼자라는 것 정도만.”

“…….”

또 누군가 과부가 되었다. 상호는 지윤을 떠올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헌터의 자식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반복되는군.’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운명의 연속. 언제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는 식판에 꽂힌 숟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잉──

도현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도현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어. 뭐야.”

[부협회장님. 혹시 강 헌터님 직업이 고등학교 선생님 맞습니까?]

상호는 그를 보는 도현을 마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무슨 일로 그의 직업을 묻는가.

도현이 핸드폰 너머의 상대에게 대답했다.

“어, 맞아. 왜?”

[그게, 강 헌터님 제자라는 학생들이 기지 앞에 찾아와서…….]

“……뭐?”

상호와 도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불거졌다. 학생도 아니고 학생‘들’이라니.

상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단체로 찾아온 건 아니겠지…….’

제발 그것만은 아니기를 빈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손을 초조하게 꼼지락거렸다.

어안이 벙벙해하던 도현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몇 명인데?”

[두 명입니다.]

“누구야? 이름이 뭐야?”

[그게……. 저기 학생, 이름이 뭐랬지?]

[이름은 아닙니다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카시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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