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469. 참전
“……끼잉.”
넓적한 강아지 귀가 축 늘어졌다.
초조한 눈빛으로 옆을 흘끗거리는 갈색 눈. 그리고 의자 아래로 축 늘어진 복슬복슬한 꼬리.
그 꼬리가 한 번 까딱이며 털 몇 가닥이 떨어졌다.
“마.”
그 한 마디에 단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멍! 자, 잘못했어…….”
“누가 머라캤노? 가만히 밥이나 묵으래이.”
“멍…….”
단비는 꼬리와 귀를 가만히 두고 눈칫밥을 먹었다.
곁에서는 지윤이 서늘한 눈빛을 지은 채 만두를 빚는 중이었다.
차갑지만, 화약 같기도 한 모습으로. 털 한 올이라도 스치면 폭발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때 주방에서 머리에 두건을 쓴 은율이 걸어 나왔다.
“지윤아, 어머니가 너랑 나랑 교대하래.”
“…….”
지윤은 말없이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단비는 조금은 편하게 꼬리를 살랑이며 주방을 돌아보았다. 안쪽에서는 나디아와 이츠키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버렸다! 육수 다 버렸다! 나는 육수를 버리고 선생은 학생 버린다!”
“여름에는 자루소바가 와따입니다.”
“여긴 밀가루만 쓴단다.”
다들 지윤의 어머니가 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상호가 학생들을 버리고 간 지 일주일이 조금 넘는 날. 어느새 내일이면 개학식.
그러나 담임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단비는 만둣국을 먹으며 은율을 돌아보았다.
“멍, 언니 쌤이랑 연락 돼?”
“아니.”
은율은 만두를 조물조물 빚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쁘신가 보던데.”
“끼잉……. 언니들도 없으니까 기숙사에서 놀 게 없어…….”
“너도 와서 일해.”
“내가 주방에 들어가면 지윤이 언니가 날 삶아서 털을 다 뽑아버릴거야…….”
“그러게. 얼른 먹고 나가.”
“언니까지…….”
단비는 코를 훌쩍이며 다시 주방을 돌아보았다.
은율과 교대한 지윤은 무언가를 식칼로 잘게 다지고 있었다. 도마 위에 있는 게 사람이라도 다져버릴 것처럼 살벌한 표정으로.
단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학교 가기 싫다…….’
오늘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다녀오겠심더.”
지윤은 가방을 어깨에 삐딱하게 둘러메고 트렁크를 질질 끌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안방에 있던 정애가 조용히 문을 열고 지윤을 바라보았다.
“학교 가니?”
“예.”
“조심히 가고.”
정애의 눈빛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담겨 있었다.
“연락 자주 하렴.”
“예.”
지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나섰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오늘따라 버스가 오지 않았다.
‘차라리 뛰어뿔까.’
짐을 들고 경공으로 달리면 되긴 하는데.
그래도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한참을 더 기다려 봤지만 버스는 도통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꼭 연락을 받지 않는 누군가처럼.
‘……쳇.’
지윤은 혀를 차고 땅을 박찼다.
* * *
학교에 도착해 보니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지각을 할 뻔했지만, 지윤은 다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짐을 던져놓기 위해 기숙사로 향할 뿐.
평소에는 하루라도 일찍 상호를 보기 위해 개학식 전날에 기숙사로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윤은 방에 짐을 대충 던지고 전투복만 가방에 챙겨서 다시 기숙사를 나왔다.
그렇게 본관으로 등교하는 길에, 은율과 이츠키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양, 오양.”
“…….”
“아직도 표정이 안 좋습니다.”
이츠키가 지윤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기운 내는 겁니다. 같이 싸우러 가고 싶은 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래도 우리가 약한 걸 어떡합니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게 어른이니까.”
“…….”
“듣고 있습니까?”
“모른디.”
지윤은 툭 뱉듯이 대답하고 본관으로 먼저 걸어갔다.
이츠키는 그런 지윤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은율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우리가 아무리 말해봤자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은율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가고 싶어.”
“그건 다 그렇습니다. 그치만 기분이 다르니까.”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만 화를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니, 좀 달래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저러다 세희나 하양처럼 무작정 쫓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됩니다.”
“그럼 그땐 우리도 가야지.”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둘은 지윤의 뒤를 따라 본관으로 들어갔다.
* * *
교내에는 교사의 수가 조금 줄어 있었다.
징집된 헌터는 모두 S급 상위 헌터들뿐. 덕분에 A급인 미진은 학교에 남을 수 있었지만.
“나도 언제 투입될지 몰라.”
……라는 모양이었다.
“우리 학교는 평가가 가장 좋은 편이라, 전쟁이 일어나도 헌터 양성 기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전황이 안 좋아지면 어쨌든 실력 좋은 헌터들을 꺼내 가야 해.”
미진이 교탁에 손을 얹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언젠가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어도, 놀라지 말고 수업 잘 받아.”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책상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때 지윤이 손을 살짝 들었다.
“쌤예.”
“응.”
“그러믄 쌤 다음으로 오는 사람은 쌤보다 약할 거 아입니꺼.”
“그렇겠지.”
“끽해야 B급, C급일 거 아입니꺼.”
“그렇겠지.”
“그러믄 그 사람헌티 지가 배울 기 있어예?”
“…….”
지윤의 말에 미진은 입을 다물었다.
지윤의 실력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실습 때, 몬스터들이 몰려왔을 때 같이 싸워 봤으니까.
사실, 자신도 지금 지윤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저 선수에게 훈수를 두는 관중처럼 어렴풋하게 조언을 할 뿐.
“……없을 거야.”
“그러믄…….”
지윤이 똑바로 눈을 뜨고 물었다.
“쌤이 보기에, 지가 지금 시험을 보믄 몇 급을 딸 거 같심꺼?”
“글쎄.”
미진은 답을 알았지만, 일부러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대답은 담임선생님만 해줄 수 있을 것 같네.”
“……알겠심더.”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어볼 것은 없는 모양이다. 미진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하려던 말을 마저 이었다.
“선생님이 바뀌든 말든 너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하루빨리 강해져서 지금 싸우는 헌터들의 뒤를 잇는 거. 더 이상 쉴 시간은 없어. 오늘부터는 하루하루가 시험이라고 생각해. 너희 목숨이 달려 있는.”
“네.”
“수업하자.”
미진의 엄지가 운동장 쪽을 가리켰다.
* * *
“전쟁…….”
스탠드에 앉은 미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실감이 잘 안 나.”
“나도 그래, 멍…….”
“너는 바보라서 그래.”
“아르르르……!”
털을 잔뜩 세운 단비의 곁에서 나디아가 꿍얼거렸다.
“선생님이랑 싸우고 싶다.”
“언니,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 잘못 알아들어.”
“선생님을 패고 싶다!”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구나…….”
선생님과 함께 싸우고 싶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미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이서가 한마디 했다.
“언니들은 진짜 참전하고 싶어?”
“응?”
나디아가 눈을 부라렸다.
“나 헌터! 너 헌터! 싸우자!”
“언니,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굳이 싸워야 해?”
이서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려고 강해지는 거잖아. 그럼 살려고 도망치는 것도 욕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난 이해가 안 가네.”
“멍, 이서 나빛이 언니 없다고 신났어.”
“……언니랑은 상관없어, 멍청아.”
“다들 왜 나한테만 그래! 끼잉…….”
단비가 귀를 접고 구석에 처박혔다. 은율은 그런 단비의 등을 토닥이며 이서를 바라보았다.
“넌 도망칠 거야?”
“응.”
이서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참전할지 말지는 결국 그 사람 자유잖아. 난 굳이 사서 죽고 싶지는 않은데. 그리고 언니들도 결국 선생님이 좋아서 가는 거지, 참전하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보여?”
“맞잖아?”
“그럴 수도 있지.”
은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치만 난 선생님이 안 계셨어도 참전은 했을 거야.”
“언니는 그럴지 몰라도 대부분은 안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난 그렇다고.”
그때 가만히 앉아있던 지윤이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지윤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치를 보던 단비는 아주 화들짝 놀라서 경기를 일으켰다.
“깽! 깨르륵…….”
“오양?”
이츠키가 불러도 지윤은 묵묵히 운동장을 벗어났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날카로운 눈빛을 지으며.
남겨진 아이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을 끔뻑였다.
“화났나?”
“몰라, 멍…….”
그런 아이들과 지윤을 먼 곳에서 미진이 지켜보고 있었다.
* * *
종례 시간.
미진과 아이들이 하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가를 향했다.
“……응?”
지윤이 가방을 둘러메고 서 있었다.
하교 시간인데 여전히 전투복. 가방은 뭘 쑤셔 넣었는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지윤의 시선이 미진을 향했다.
“쌤예.”
미진은 지윤이 할 말을 이미 아는 듯싶었다.
“……응.”
“어무이헌티 말하믄 안 됩니더.”
미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윤은 곧바로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은율과 이츠키의 눈이 마주쳤다.
“도양.”
“응.”
둘은 서둘러 뒷문을 열고 나와, 그새 저 멀리를 걸어가는 지윤을 쫓아 달렸다.
“지윤아!”
은율이 부르자 지윤이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율은 지윤의 등을 향해 물었다.
“혼자 갈 거야?”
지윤의 고개가 끄덕였다.
“같이 가자. 나도 부모님한테 인사만 드리고 갈게.”
“같이 가는 겁니다.”
이츠키도 지윤을 붙잡으려 했다.
“같이 가면 선생님도 빨리 찾을 수 있잖습니까.”
“쌤허고는 상관 읎다.”
지윤이 다시 걸음을 떼었다.
“내는 내 혼자 간디. 느덜은 느덜끼리 가라.”
“괜찮겠어?”
은율이 물어도 지윤은 손을 한 번 들어 올릴 뿐이었다. 손등 위 약지에서 금반지가 반짝였다.
그렇게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는 지윤을, 은율과 이츠키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문득 이츠키가 말했다.
“도양.”
“응.”
“부모님한텐 언제 말씀드릴 겁니까?”
“오늘.”
“도양은 나랑 같이 가는 겁니다.”
“그럴게.”
둘은 나란히 걸어 교실로 돌아왔다.
* * *
대악마들과 싸운 지 일주일째가 되는 날.
상호와 아이들은 원래 머물던 기지로 돌아와, 약간은 익숙해진 전쟁 속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선생님~.”
나빛이 상호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쳤다.
“아침이에요~. 밥 먹으러 가요~.”
“으응, 나빛아. 선생님 조금만 쉬고…….”
“아침 먹고 주무세요~.”
“끄응…….”
상호는 몸을 벌떡 일으켜 눈을 비볐다.
지난밤 조금 먼 구역에 악마로 추정되는 무언가의 침입이 있어서 태화를 데리고 출동을 나갔는데, 알고 보니 그냥 조금 특이한 몬스터라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덕분에 옆 침대에서는 태화가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크아…….”
“야, 태화야. 일어나.”
“쿠웅…….”
“들고 가자.”
상호는 태화를 이불로 싸서 들어 올렸다.
방금 막 잠에서 깨서 비척거리는 다혜와, 이미 일찍 일어나 세수까지 마친 세희를 데리고 식당으로 내려가 식판과 수저를 챙기는데.
식탁 쪽에서 헌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엄청나게 강한 여자 헌터가 있대요.”
상호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다.
그 낌새를 알아차렸을까. 세희가 상호를 흘끗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여자 이야기는 절대 안 놓치시네요.”
“아니…….”
이젠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안 되는가.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배식을 받았다.
헌터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이 기지 저 기지 떠돌아다니면서 헌터들이랑 같이 싸운대요. 주먹 한 방에 산이 날아가고 그런다는데……. 강기가 너무 강해서 불타는 것처럼 보인다나, 뭐라나.”
“와, 그거 되는 사람 별로 없는데. 옛날 참전용사인가?”
“그런데 그 헌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대요. 게다가 생긴 걸로 봐서는…… 끽해야 고등학생 정도라던데.”
“엉? 그게 뭔 말이야. 그럼 거기 헌터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애가 돌아다니게 놔둬?”
“나이를 속인 거죠.”
나이를 속인 고등학생. 그 말에 상호와 다혜의 눈이 마주쳤다.
“……므아?”
“…….”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누구일까. 헌터들이 놀랄 정도로 실력이 좋은 어린 여자 헌터라니. 상호는 식판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기웃했다.
‘설마…….’
해련을 고등학생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해련을 모르는 헌터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
그때 이어진 말이 그의 귀를 확 파고들었다.
“근데 예쁘대냐?”
“피부가 좀 까무잡잡하다던데요. 머리도 좀 짧고……. 근데 얼굴은 예쁘장하대요. 머리만 좀 길렀으면 엄청 예뻤을 거라던데.”
“한번 보고 싶네.”
“형하고 열 살은 차이날걸요?”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짜샤!”
헌터들은 그 후로도 무어라고 왁자하게 떠들었지만, 돌처럼 굳어버린 상호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불처럼 타오르는 듯한 강기.
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나이.
그리고 무엇보다, 갈색 피부에 짧은 머리.
‘……!’
상호의 안색이 핼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