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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68화 (468/501)

<468화>

468. 편지

“일동 묵념.”

모두가 고개를 떨궜다.

아침의 막사 앞. 몸이 성한 이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어제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상호와 아이들도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나이 지긋한 헌터의 추도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마당에 뉘인 시신은 하나둘씩 관에 담겨 운구되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밥 먹어야지.”

“응.”

대답은 태화만 했다.

식당에 들어가 배식을 받을 때까지도 세희와 나빛, 다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먹는 것도 시원스럽지 못하고.

상호는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

아이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힘들어하면 정말로 힘들 때 더 힘들어진다. 잊을 수 있으면 차라리 잊어버려.”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효은이 그의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너도 못 하는 걸 왜 애들에게 강요하냐고 한소리 했을 것이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런 그의 곁에 해련이 와 앉았다.

“좋은 아침.”

“아, 예.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야 잘 잤지. 다들 잘 잤고?”

“네.”

아이들이 대답하자 해련이 밥을 한 술 뜨며 상호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 있었어요?”

“아니요. 교장선생님은요?”

“나는 뭔가 얼굴이 익숙한 헌터가 있더라고.”

죽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해련은 밥을 입에 넣고 창밖 먼 곳을 돌아보았다.

“내 옛날 부대 앞에서도 많이 하던 거라…… 싱숭생숭하네, 조금.”

그땐 많이도 죽었으니까.

그렇지만 저승부대는 그런 것조차 하지 못했다. 임무 도중인데 죽은 이를 추모하고 운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도 저승부대 무덤들 중 하나는 여전히 가묘였다.

상호는 화제를 돌렸다.

“언제 출발하세요?”

“밥 먹고 좀 있다가.”

“다시 오실 거예요?”

“그래야지. 정리 좀 하고……. 부대원들이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 나만 뒤에 있을 순 없지.”

해련의 시선이 식당 입구를 향했다.

“왔네.”

혁과 예현여고 교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묵묵히 밥을 먹던 다혜가 교사들과 함께 있는 건흠을 발견하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으아~.”

건흠은 살짝 웃고는 배식을 받았다.

상호는 식판을 닥닥 긁어 마지막 술을 떴다. 누가 죽었든 말든 살아서 싸우려면 밥을 잘 먹어둬야 하니까.

그런데 나빛은 그렇지 못했다.

“나빛아.”

그는 거의 비워지지 않은 나빛의 식판을 보았다.

“입맛이 없어?”

“……네.”

나빛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저 좀 쉬고 있을게요…….”

“응.”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빛은 식판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상호와 아이들은 그런 나빛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화야.”

“응.”

“어제 나빛이 밥 잘 먹었어?”

“아니.”

태화가 고개를 저었다.

“잘 안 먹더라고.”

“……그래.”

그는 빈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세희야. 태화랑 같이 다녀.”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빛이 잔반을 비운 후 식당을 나갔고, 상호는 그런 나빛의 뒤를 조용하게 따라갔다.

* * *

나빛은 여자 생활관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다른 헌터들이 쉬고 있을 터. 상호는 눈치가 보이기 전에 나빛의 등 뒤에 다가섰다.

“나빛아.”

“앗, 깜짝아…….”

흠칫하며 뒤로 휘청이던 나빛이 그의 품에 안겼다.

나빛은 고개를 위로 들어 상호를 거꾸로 올려다보았다.

“놀랐잖아요…….”

“미안, 미안.”

딴생각을 하다가 불려서 많이 놀랐나 보다. 상호는 쓰게 웃으며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네.”

“옥상으로 가자.”

둘은 기지의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 높지 않은 3층짜리 건물이라 땅이 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 많은 생활관보다는 이곳이 나았다.

옥상엔 담배를 피러 온 헌터들이 많았지만, 상호와 나빛을 보자 슬금슬금 불을 끄고 돌아서서 기지 안으로 향했다.

“나빛아.”

상호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무슨 걱정 있어?”

“…….”

나빛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고는 싶은데, 뭔가 말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래도 털어놓고는 싶은데, 그러면 괜히 같은 고민에 휘말릴까봐 주저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상호는 나빛을 살짝 끌어안고 허리를 간지럽혔다.

“말 안 해줄 거야?”

“서, 선생님. 간지러워요…….”

“그러라고 하는 거야.”

“아이…….”

나빛은 꼼지락거리며 상호를 밀어내다가, 상호가 조금 더 집요하게 깊숙한 곳을 노리자 뺨을 발갛게 붉히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 정말……!”

“간질간질~. 나빛이 간질간질~.”

“이이익……!”

결국 나빛의 입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웃던 것도 잠시, 나빛의 안색은 금방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상호는 그런 나빛의 볼을 조물거리며 물었다.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비밀이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 말해 줘.”

나빛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알아차린 상호가 뺨을 슬슬 문지를수록, 나빛의 입은 요정이 든 주전자처럼 서서히 열려갔다.

“저희 부모님…… 제가 여기 있는 줄 모르셔요.”

“그렇겠지.”

짐작하고 있었다. 알면 보냈을 리가 없으니까.

그는 나빛을 끌어안고 몸을 옆으로 기우뚱, 기우뚱거렸다.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듯이.

“지금이라도 말씀드릴까?”

“그러면 큰일나요…….”

“그래도 언젠간 알게 되실 텐데.”

“…….”

나빛의 입술이 다시 닫혔다.

어떻게 해야 나빛의 걱정을 없애 줄 수 있을까. 그러려면 고민이 뭔지 좀 더 자세히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한테 혼날까봐 그래?”

“아니요…….”

“그러면?”

“……선생님.”

나빛이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유서 같은 거, 써본 적 있어요?”

“……유서라.”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난 쓸 일이 없었지. 써도 봐줄 사람이 없었어. 딱 한 명 있는 사람은 내 옆에서 항상 같이 싸우고 있었고…….”

그나마도 같이 살아서 돌아가자고 약속한 터라, 유서를 남기겠다는 말은 입 밖에 낼 생각도 못 했다.

그는 나빛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부모님이 걱정됐어?”

“네.”

고개를 끄덕이는 나빛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인사는 드리고 싶은데, 그렇다고 싸우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유서라도 쓰고 싶었어?”

“네.”

“……으음.”

유서를 쓰겠다는 제자를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 같아서는 말리고 싶지만, 나빛은 쓰고 싶어하는 것 같고.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야 맞는 말인데.

그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나빛아.”

“네.”

“한번 생각해 봐.”

“네…….”

“유서를 받으면 기분이 좋을까?”

그 물음에 나빛이 눈을 깜작였다.

“아니요…….”

“아니지? 받으면 마음이 아프겠지?”

“네…….”

“그럼 굳이 그런 유서를 써야 할까?”

“그치만, 인사는 해야 하잖아요…….”

“문자로 하면 되지.”

상호는 나빛의 주머니를 톡톡 쳤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 전하지 못했던 말, 이번 기회에 전부 다 전해드리는 거야. 유서를 따로 쓸 필요도 없게.”

“아…….”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평소처럼 생긋 웃었다.

“그러면 같이 써 주실래요?”

“같이?”

상호의 고개가 기우뚱했다. 보통 문자나 편지에는 사적인 내용을 적지 않나.

그래도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으음, 뭐 도와줄 순 있겠지.”

“헤헤…….”

나빛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는 편지가 좋은 것 같아요.”

“왜?”

“문자랑 전화 다 안 받고 있었거든요…….”

“아아, 그래. 편지로 써서 선생님들 편으로 보내드리자.”

둘은 문을 열고 기지 안으로 돌아갔다.

* * *

“다 썼어요!”

나빛이 환하게 웃으며 편지지를 들었다.

창고로 쓰는 조그만 방. 곁에서 차를 홀짝이며 그동안 밀린 연락을 확인하던 상호는 그 말을 듣고 나빛을 돌아보았다.

“잘 썼어? 한번 봐도 돼?”

“안돼요!”

“……으응.”

같이 써 달라는 것은 내용을 같이 써 달라는 게 아니라 쓰는 동안 같이 있어 달라는 뜻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나빛이 편지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는 것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흘끗했다.

‘……역시나.’

봉진과 유연에게서 연락이 쏟아져 있었다.

둘은 나빛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싶었다. 미진이 감추기 위해 제법 노력한 것 같긴 했지만, 그들이 상호의 실력과 성향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딸과 담임이 쌍으로 연락을 씹으니, 자연히 이 둘이 어디로 갔는지 예상할 수 있을 터였다.

‘다른 셋은 학부모가 없어서 망정이지…….’

세희와 태화와 다혜도 그랬다면 아예 핸드폰을 꺼놔야 했을 것이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눈앞에 편지봉투가 쓱 들이밀어졌다.

“잘 전해주세요…….”

“으응, 뭐 직접 전해주는 건 내가 아니겠지만…….”

교사들이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편지를 맡겨야 한다. 그는 봉투를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에서 나와 생활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헌터들이 원래의 기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친 헌터들의 치료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상호는 복도 중간에 모여있는 예현여고 교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응?’

교사들 건너편에서 다혜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손에 검을 한 자루 든 채.

야성의 악마와 싸우다가 검을 잃어버렸다더니 새로 한 자루 받아온 모양이었다.

“아으아.”

다혜가 교사들 중 한 사람에게 검을 내밀었다.

인원을 점검하던 건흠은 그 검을 발견하고는 다혜를 돌아보며 눈을 끔뻑였다.

“응?”

“므앙.”

다혜가 다시 검을 들이밀었다. 칼자루를 건흠에게 향하며.

건흠은 그제서야 다혜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직 못 외웠어?”

“아으아으~.”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흠은 쓰게 웃으며 다혜에게서 검을 받아들었다.

“김 선생, 대신 체크 좀 해줘.”

“네.”

다른 교사가 인원을 세기 시작했다.

칼자루에 감긴 가죽이 훌훌 풀렸다가 다시 얽히기 시작했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울퉁불퉁하고 복잡하게. 그러나 다혜가 따라올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건흠은 매듭을 하나하나 엮어가며 물었다.

“잘 외우고 있어?”

“아으.”

“이미 다 외웠는데 시키는 거 아니야?”

“……므흐흥.”

다혜는 들켰다는 듯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상호는 그런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깨달았다. 다혜에게도 나빛의 부모님 같은 존재가 있다는 걸.

그리고 아마, 세희와 태화에게도.

자신에게도.

‘……미리미리 적어 둘까.’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혁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항상 양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전투복을 입은 걸 보니 왠지 낯설었다. 전투복이라 해도 마법사인지라 때 하나 타지 않고 반질반질했지만.

“다 왔어요?”

“예, 이사장님.”

“갑시다.”

혁은 그렇게 말하고 교사들을 떠밀며 상호를 돌아보았다.

“죽지 말라고. 돌아오면 광고 찍어야 하니까.”

“……예에.”

상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곧 건흠에게서 검을 받아든 다혜가 그의 옆에 서서 교사들을 배웅했다.

“아으아~.”

“또 보자, 다혜야. 강 선생.”

건흠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잘 부탁해.”

“예. 아, 잠깐만요.”

깜빡할 뻔했다. 이것 때문에 왔는데.

상호는 나빛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거 좀 미진 씨한테 전해주세요.”

“편지야?”

“예. 전해주면 알 거예요. 제가 말해놓을 테니까.”

“그래.”

건흠이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그렇게 예현여고 교사들도 떠나고, 헌터들도 원래 기지로 떠나고. 이제 상호도 슬슬 원래 있던 기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는 다혜를 돌아보았다.

“우리도 기지로 가자.”

“아웅.”

“세희랑 태화 어딨어?”

“으아으──.”

둘은 아이들을 찾아 복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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