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467. 첫 전사자들
퍼억
한 악마의 가슴팍에 검푸른 검이 꽂혔다.
검이 깊숙이 꽂혔는데도 등으로 빠져나온 칼날은 없었다. 가슴을 찔린 악마는 부들부들 떨다가 사지를 마구 휘두르며 타올라 사라졌다.
그 악마의 비명을, 지배의 악마는 영혼으로 들을 수 있었다.
‘살려……!’
‘대의를 위해서다.’
그렇게 간단하게 무시했다.
그러나 피해가 생각보다 컸다. 놈을 붙잡아둘 만큼 팔팔한 놈들을 골라서 백 마리 데려왔는데. 4분지 1이 죽고 남은 놈들도 썰려서 골골거리고 있었다.
지배의 악마는 그 시체들도 모아서 살뜰하게 조종하고 있었지만, 끊어진 근육과 부서진 관절로는 유의미한 위력을 내기 어려웠다.
소녀를 안은 사내의 주변에서 검들이 휘몰아쳤다.
“……하하.”
패배는 기정사실. 악마는 일부러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냈다.
어차피 오늘 죽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놈들이 악마에게 어떻게 대처하는지, 또 대처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하러 온 것뿐.
악마의 눈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배의 악마는 악마들을 뒤로 물렸다.
“뭐야.”
사내가 조금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물었다.
“벌써 끝이냐?”
“목적은 이뤘으니까.”
소득이랄 것은 없지만. 악마는 미련 없이 발길들을 돌렸다.
“다음에 볼 땐…… 누군가는 죽을 겁니다.”
“다음도, 그 다음도, 니들 뜻대로는 안 될걸.”
상호는 태화를 안은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악마의 수를 한 놈이라도 더 줄여 놓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도현과 무전이 되질 않았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
“꺼져.”
악마들은 피식 웃고는 동쪽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이제는 몬스터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퇴각하고 있었다. 상호는 도망치는 놈들을 향해 강기를 날리고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형, 형.”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채널을 돌려 민정을 불렀다.
“누나, 누나. 들려?”
[어, 상호야.]
“형이 무전이 안 돼.”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에 답이 돌아왔다.
[여기도 지금 세희가 안 보여.]
“……뭐?”
[전투 시작 직전에 뭔가를 느꼈나봐. 어디로 달려갔는데 아직도 안 보여. 지금 찾고 있어.]
그 말을 들은 상호는 즉시 땅을 박찼다. 품에 안긴 태화의 머리가 뒤로 휙 쏠렸다.
“으그으으……!”
“좀만 참아.”
둘은 북쪽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 * *
발밑으로 수많은 몬스터들의 행렬이 지나갔다.
몬스터들의 퇴각을 이끌던 지배의 악마 앞에 신비의 악마가 나타났다. 지배의 악마는 별다른 뜻 없이 물었다.
‘성과는?’
‘…….’
왜 답이 없을까.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왜 답을 안 하는가. 지배의 악마는 영혼의 눈빛을 날카롭게 치떴다.
‘무슨 문제라도 있던 거냐?’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신비의 악마는 입을 닫았다.
다들 퇴각 중인데 다른 한 놈은 어디에 있나. 지배의 악마는 눈살을 찌푸리며 야성의 악마를 불렀다.
‘흑사자.’
‘…….’
‘흑사자?’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귓구멍을 닫았나. 지배의 악마는 깃들어 있던 악마의 육신을 버리고 영혼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에 야성의 악마의 영혼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신났군.’
지배의 악마는 흑사자의 영혼을 붙잡았다.
하지만 흑사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의 싸움에 잔뜩 빠진 모양이었다.
‘흑사자, 퇴각해라.’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무엇에 빠졌기에 이리도 부름을 씹어대는가. 지배의 악마는 흑사자의 왼쪽 눈으로 슬그머니 들어섰다.
주먹이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콰아아앙
‘……!’
지배의 악마는 그 주먹에 깃든 힘을 알아보고 흠칫했다. 인간에게 이런 힘이 있을 줄이야.
그러나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고, 지금은 퇴각을 해야 했다.
‘흑사자?’
‘방해하지 마라.’
흑사자가 현실과 영혼 양쪽으로 포효했다.
‘이 애송이들을 전부 죽이고 갈 테니……!’
‘그만 놀고 돌아와라. 또 잡혀서 봉인당하기 싫으면.’
‘꺼져!’
지배의 악마의 영혼이 흑사자의 왼쪽 눈에서 튕겨져 나왔다.
고집불통이 따로 없다. 하지만 강제로라도 퇴각시켜야 했다. 시간을 끌었다간 그 사내가 도착해 흑사자를 죽일지도 몰랐다.
혹은.
‘그놈이 널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 허튼짓하지 말고 빨리 돌아와라.’
‘…….’
두개골에 근육밖에 없는 흑사자였지만, 그 말은 알아들은 듯싶었다.
‘……쳇.’
큰 폭발음이 한 번 들리고, 흑사자의 기운이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속에서 흑사자가 불쑥 나타났다. 졸개의 몸에 돌아온 지배의 악마는 눈을 떠 흑사자의 상태를 살폈다.
검은 가죽에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닥쳐라.’
흑사자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네놈도 수십 마리씩 죽었으면서.’
‘나는 가장 강한 놈을 상대했으니 당연하지. 군말 말고 퇴각이나 해라.’
‘……흥.’
흑사자도 몬스터들의 행렬에 섞여들었다.
지배의 악마는 인간들이 있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놈들이 전투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 사내의 말이 떠올랐다.
다음도 다다음도 맘대로 되지 않을 거라 했던가.
‘그래도 다음번은 다를 것이다.’
지배의 악마는 그제서야 돌아서서 퇴각 행렬을 따랐다.
* * *
좁아터진 땅에 참 많이도 모였다. 헌터도, 몬스터도.
몬스터들이 짓밟고 지나다닌 땅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헌터들과 싸운 땅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헌터들은 파헤쳐진 땅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해 기지로 돌아왔다.
참전한 헌터는 400여 명.
사망자는 23명.
“나름 잘 지켜냈다기엔…….”
도현이 마당에 눕혀놓은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잃은 게 너무 많네.”
“그러게.”
상호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민정과 나빛이 활약하지 않았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그와 도현, 세희가 악마에게 발이 묶인 상황에서 이 정도의 희생만 나왔다는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 더 죽어갈 것이다.
“가서 쉬어.”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상호도 돌아서서 막사로 향했다. 그렇지만 쉴 생각은 없었다. 그의 발길은 막사 1층의 어느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환자들이 줄줄이 누워 있었다.
“으으……아.”
“끄윽…….”
고통에 겨운 신음이 가득했다.
이 막사 전체가 임시 병동이 되어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환자들 사이로는 신앙인들이 띄엄띄엄 앉아 자신이 맡은 환자에게 성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중에 한 명. 연회색 머리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 선생님…….”
상호는 살짝 손바닥을 들었다. 치료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그 뜻을 알아들은 나빛이 고개를 다시 숙이고 눈을 감았다. 환자를 쓰다듬는 손에서는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상호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익숙한 뒷모습의 청년.
“어이.”
“아.”
성연이 가까이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네요.”
“언제 왔어?”
“원래 있었습니다. 후방 기지에 있었을 뿐이지.”
못 본 지 좀 됐는데도 어째 대화가 낯설지 않았다. 헤어진 지 반나절도 안 된 것처럼.
상호는 지배의 악마를 떠올리며 흙 씹은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럽니까?”
“아니, 그냥. 니랑 목소리가 완벽하게 똑같은 악마가 있어서.”
한숨을 쉬고 침상에 걸터앉는 그를 성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상호는 성연이 치료 중인 환자를 흘끗했다.
“급한 환자는 다 끝냈나 보네?”
“예. 살려만 놓은 거라서 다 끝나면 다시 봐야 하지만.”
성연이 나빛을 돌아보았다.
“제자죠?”
“응.”
“실력이 좋던데요. 신앙심이 깊은 모양입니다.”
신앙심이란 게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칭찬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상호는 환자들을 조금 더 둘러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해.”
“예.”
성연은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상호는 나빛을 흘끗하고 방을 나서려다가, 문 옆에서 튀어나온 태화를 맞닥뜨리고 눈을 끔뻑였다.
태화의 손에는 밥과 반찬이 든 식판이 들려 있었다.
“그거 뭐야?”
“밥.”
“아니, 그건 보면 알잖아. 왜 식당에서 안 먹고.”
“쟤 밥 안 먹었을 텐데.”
나빛의 밥을 챙겨주려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길을 비켜주며 태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병실이니까 조용히 해야 돼.”
“응.”
태화는 나빛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이제 잠시 쉴 수 있을까. TV에선 어떤 뉴스가 나오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생활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서려는데, 복도에 해련이 서 있었다.
해련이 그를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언제 오셨담.’
상호는 말없이 해련의 곁에 다가서서 벽에 등을 기댔다.
헌터들이 바쁘게 오가는 복도에 둘만이 가만히 서 있는 와중에, 상호가 먼저 운을 뗐다.
“다혜도 왔다고 하더만. 둘이서만 온 거예요?”
“아니. 선생들도 데리고 왔지. 류 이사장도 왔어.”
“누구 다쳤어요?”
“다행히 다친 사람만.”
죽은 사람은 없나 보다. 상호는 속으로 안도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미진 씨랑 설미 선생님은요?”
“둘 다 왔었어. 근데 다들 발이 느려서 전투는 못 했고. 나랑 다혜랑 선생 몇 명만 와서 도왔지.”
“교장선생님은 다친 데 없죠?”
“빨리도 물어보네.”
해련은 쓴웃음을 짓다가 한숨을 폭 쉬었다.
“전쟁, 길어질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상호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다.
전투는 복권. 생과 사를 가르는 복권.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의 지인들은 더 많은 복권을 긁게 될 터였다.
그래서 전쟁을 일찍 끝내긴 해야겠는데.
무언가 가슴에 걸리는 게 있었다.
“때가 되면…… 끝나겠죠.”
그는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해련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가서 쉬어요. 피곤했을 텐데.”
“괜찮아요. 그런데…… 얼마나 있다 가실 거예요?”
“나는 다시 돌아가야 될 것 같아. 선생들 데리고. 다혜는 어떻게 할까요?”
“다혜……, 으음.”
상호는 당황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째 돌아가라고 하면 깽판을 칠 것 같은데.
일단 대화를 나눠봐야 할 듯했다.
“오늘 밤에 돌아가시는 건 아니죠?”
“학교 말하는 거죠? 내일 낮에 가겠지. 지금은 치료 중이니까.”
“그럼 결정해서 내일 알려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해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선생들 상태 볼게요. 강 선생은 쉬어요.”
“예.”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2층으로 향했다.
그들이 묵던 기지가 아니고 임시 병동으로 쓰는 기지라서 생활관은 없었다. 방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헌터들이 피난민마냥 빼곡히 누워 모포를 덮고 있었다.
한쪽은 여자 방, 한쪽은 남자 방.
상호는 여자 방의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세희야, 세희야.”
안에서 세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다혜 있어?”
“네.”
“잠깐 데리고 나와 봐.”
곧 문이 열리고 둘이 복도로 걸어 나왔다.
씻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목에 수건이 걸려 있고 머리가 젖어 있었다. 상호는 수건을 받아들어 둘의 머리를 털었다.
“다혜야.”
“아으.”
다혜는 평소보다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쟁을 처음 겪은 이가 짓는 표정. 상호는 그 표정이 어떤 심정에서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다혜야. 여기 남을래, 학교로 돌아갈래?”
“……므으.”
다혜가 세희의 손을 잡았다.
“아으, 으아…….”
“여기 있을 거래요.”
세희가 나직하게 말했다.
“자기도 이제 대악마랑 일대일로 싸울 수 있다고…….”
“다혜 네가?”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세희를 돌아보았다. 둘이서 야성의 악마를 만났다는 것까진 들었는데.
그가 묻지 않아도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라구요.”
“……으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에겐 다혜가 필요했다. 상호, 그리고 세희와 더불어 대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 오늘처럼 세 방향으로 나뉘어 올 경우를 대비해서, 초혼강기를 쓸 줄 아는 헌터들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지금 다혜의 안색은, 학교에서 그가 봐왔던 밝은 얼굴빛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얘들아.”
상호는 세희의 손을 잡은 다혜의 손을 잡았다.
“전쟁은 이겨도 져도 남는 게 없어.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행복이란 게 느껴지지 않아. 잠깐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면서도…… 손을 뻗으면 사실은 훨씬 멀리 있었다는 걸 깨닫게 돼.”
전장에 들어선 이는 그 순간 제자리에 멈추어 버린다. 전쟁을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그래서 상호는,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 동안 어른이 되지 못했다.
“모든 게 끝났을 때 너희한테 남아있는 건…… 너희 생각과는 무조건 다를 거야. 그게 전쟁이야. 만약 그걸 감수할 수 있다면…… 이 선택에 대해서, 이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상호는 둘과 눈을 마주쳤다.
“나랑 같이 싸워줘.”
“……아으.”
다혜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므아웅.”
통역은 필요하지 않았다.
세희도 수건이 얹힌 머리를 그의 품에 묻으며, 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절대 후회 안 해요.”
“……그래.”
상호는 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같이 싸우자.”
적어도 이 땅을 지키는 동안에는.
셋은 그렇게 가만히 서로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다혜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