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466. 뒤쳐진 이
“……우왓.”
태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자신을 둘러싼 악마들이 코앞까지 달려들고 있었는데. 한 차례 검푸른 폭풍이 불더니 전부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그리고 어깨와 등에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
상호는 태화를 품은 채로 검을 앞으로 겨눴다.
“안 되지, 새끼야.”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을 닮은 시꺼먼 형체가, 세로로 갈라진 얼굴 사이로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들의 주변에 악마들이 모여들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얼추 수십 마리. 나무 뒤에 보이지 않는 놈들까지 합치면 백은 너끈히 넘을 듯했다. 상호는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옆을 흘끗했다.
산 아래쪽에서 헌터들과 몬스터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악마들이 상호와 태화의 주변을 슬금슬금, 둥그렇게 돌았다.
“우리도 귀하와 그 조그만 반푼이에게만 용무가 있으니까…….”
“……쯧.”
상호는 혀를 차고 태화의 귀에 속삭였다.
“태화야.”
“응.”
“내가 한 놈 잡으면, 심장 방향에 아무 마법이나 날려.”
“응.”
태화가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태화를 왼팔과 내공으로 안아 들었다. 태화도 한쪽 팔을 그의 목에 감고 다른 팔을 들었다.
둘의 칼과 손이 악마들을 겨눴다.
키힉……
둘을 둘러싼 악마들이 킬킬거리며 공격해 들어왔다.
놈들은 상호의 초혼강기를 뚫지 못했다. 그럼에도 달려드는 이유는 내공이 바닥날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서. 바다가 아무리 깊어도 결국은 바닥이 있는 법이니.
여태까지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했다.
콰직
가늘고 긴 강검들이 한 악마의 사지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태화의 손에서 새빨간 불꽃이 쏘아져 나갔다.
“쌤!”
상호는 그 즉시 불꽃을 따라 강검을 던졌다.
콰악
악마의 가슴팍에 강검이 틀어박혔다.
분명 깊숙이 박혔음에도 등 뒤로 튀어나오진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공간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악마는 몸을 덜덜 떨다가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키야아아악……
흐릿한 비명소리를 남기고.
하지만 다른 악마들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상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호는 그의 팔을 붙잡는 악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마들에게서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한 놈 죽이고 나면 겁나서 물러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다들 지배의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저 소모품일 뿐인가.’
그렇다면 한 놈 한 놈 줄여나가는 수밖에.
상호는 다시 강검을 조종해 악마의 사지를 꿰뚫었다.
* * *
“네년…….”
사자의 얼굴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므아?”
다혜는 검을 치켜든 채로 눈을 끔뻑였다.
“아으아으아?”
“인간에, 용에, 악마에…… 온갖 것이 섞였군.”
“므아!”
“난 그냥 악마다. 사자가 섞인 게 아니라.”
다혜의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세희는 정신을 다잡고 검을 들어 올렸다. 죽었다 살아난 참이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언니.”
“아으.”
“어떻게 알고 왔어?”
“므아으아.”
교장선생님 따라왔는데 이쪽에서 세희 냄새가 나더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쨌든 와줘서 다행이긴 하다. 세희는 한숨을 쉬고 악마를 노려보았다.
“2대 1인데.”
“그래서?”
“상대할 수 있겠어?”
다혜의 검에서도 검붉은 초혼강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야성의 악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몸을 수그렸다. 언제든 앞으로 튀어나갈 수 있게끔.
“이제야 좀 여흥거리가 되겠군.”
그리고 말을 마치자마자 땅을 박찼다.
거대한 대포알이 눈앞으로 닥쳐드는 것 같았다. 저토록 멀리 있음에도 시야를 가득 메우는 압박감.
세희의 숨이 턱 막혔다.
‘윽…….’
폐에 남은 숨이 없어서,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그 순간 다혜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악마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아으!”
작은 발이 거대한 사자 수인에게 닿는 순간.
콰아아앙
폭발음이 쩌렁쩌렁하게 산을 울렸다.
저 멀리서 전투 중이던 인간과 몬스터의 소음이 잠시 멎었다. 아마 다들 폭음을 듣고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짧은 정적을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채웠다.
우두둑……
우지끈, 우지끈, 콰앙. 한 아름이 되는 나무들을 박살내며 날아간 악마는 커다란 바위에 부딪히고 나서야 구르는 것을 멈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었고, S급 헌터라도 치명상을 면치 못했을 위력.
하지만 악마는 벌떡 일어나 다혜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악마가 뻗은 손을 다혜가 쳐냈다.
둘의 신체가 부딪힐 때마다 폭음이 천지를 울렸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한지 귀뿐만이 아니라 살갗이 얼얼할 정도였다. 세희는 감히 그 둘의 전투에 끼어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때 악마가 다혜의 손목을 잡았다.
“므으……!”
다혜는 균형을 잃고 그 손에 끌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곧 발을 강하게 내딛고 균형을 되찾더니, 역으로 악마의 팔뚝을 잡아 크게 휘둘렀다.
콰아앙
“……크륵!”
내동댕이쳐진 악마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다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악마의 가슴팍을 밟았다. 악마가 몸부림을 치며 다혜의 균형을 흐트러트리려 했지만, 다혜의 발은 천 근짜리 추를 달아 놓은 듯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다혜의 검이 악마의 목으로 날아갔다.
촤악
검은 액체가 허공에 튀었다.
“……!”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혈. 색은 다르지만 분명히 악마의 피.
‘……언니가.’
대악마를 베었다.
깔끔하게 베어내진 못했다. 그 때문에 악마는 다혜를 걷어차고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목을 부여잡은 악마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검은 선혈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희는 멍하니 그 액체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베었다고?’
자신은 베지 못했는데.
상호를 따라가겠다는 자신은 악마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는데, 다혜는 저렇게 간단하게.
심지어 지금도 악마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시종일관 몰아붙이고 있었다.
“……크륵!”
악마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피를 흘리고 수없이 얻어맞으면서도, 악마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더욱더 맹렬하게 포효하며 다혜에게 반격을 날렸다.
시간이 지나자 반격은 서서히 공격이 되었고.
다혜의 공격은 반격으로 바뀌었다.
“느읏……!”
다혜는 당황하며 악마의 공격을 쳐냈다.
가늘고 긴 꼬리가 채찍처럼 악마를 후려쳤다. 하지만 악마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꼬리를 낚아채더니.
크게 휘둘러, 다혜를 땅에 처박았다.
“……크아!”
다혜는 고개를 들어 돌조각을 뱉어냈다.
부릅뜬 주홍빛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크르…….”
다혜의 입술 사이에서 악마와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예 검을 던져버리고 짐승처럼 싸움을 이어가는 다혜와,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듯한 야성의 악마.
세희는 함부로 끼어들지도, 내버려두고 떠나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
앙다문 입술 위 혼란스러운 눈빛.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주변도, 세희의 마음도 어지러워져 갔다.
* * *
“……우리.”
해련은 그슬린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상성이 안 좋은 것 같네.”
“그러게요.”
도현은 창을 꼬나들고 주변을 노려보았다.
둘의 주변에는 백의를 입은 촉수 괴물들이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얼추 수십 마리.
그 너머에 수백 마리.
그 너머에 또 수천 마리. 시야를 빼곡히 덮을 만큼 수가 많았다.
“언제 걸려든 걸까요? 마나를 못 느꼈는데.”
“글쎄.”
도현의 물음에 해련이 중얼거렸다.
“마법이 아닐지도…….”
악마들이 서로의 촉수를 엮었다.
울타리가 된 촉수는 이제 땅을 기고 하늘로 솟기 시작했다. 도현은 그들을 가둬가는 촉수의 돔을 올려다보며 침음했다.
“위로 뚫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의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직 채 닫히지 못한 촉수 사이를 향해서.
땅에서 수많은 촉수들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으려 달려들었다.
머리 위에서도.
“쳇…….”
도현은 그중 하나를 창으로 찔렀다.
하지만 창은 촉수를 끊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촉수가 빠르게 창에 감겨들었다. 그는 그 즉시 창을 버리고 강검을 만들었다.
그러나 강검으로도 촉수를 베어내진 못했다.
촉수가 도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크윽!”
도현의 몸이 아래로 쑥 잡아당겨졌다.
앞서 날아가던 해련이 그를 돌아보고는 도로 내려와 촉수를 베려 했다. 도현은 그녀를 말리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젠장…….’
촉수로 지어진 돔은 결국 약간의 빈틈도 없이 닫혀 버렸다.
바닥에 착지한 도현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촉수를 강기의 폭발로 막아내며 해련을 돌아보았다.
“그냥 두고 가시는 게 나았습니다.”
“몸이 먼저 움직이더라고.”
해련은 가볍게 대답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촉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갇혔네요.”
“예.”
“어떡하지?”
촉수가 베이지를 않는데.
갇혀 버린 이상 자력으로 탈출할 순 없다. 도현은 강검을 길게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상호가 올 때까지 버텨야죠.”
“강 선생도 잡혀 있으면?”
“…….”
그 물음에는 답하지 못했다.
촉수들이 슬금슬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까보다 속도가 확연히 느렸다.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그들을 놀리는 듯했다.
도현의 이가 부드득 갈렸다.
‘망할…….’
초혼강기를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가온 촉수가 그의 목을 노리고 뱀처럼 달려들었다. 도현은 그 촉수를 강검으로 힘껏 때렸다.
콰앙
그 촉수는 튕겨나갔지만, 다른 촉수가 너무 많았다.
‘젠장, 젠장…….’
쳐내도 쳐내도, 촉수는 끝이 없었다.
그들을 둘러싼 촉수의 벽이 서서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엔 산소가 부족해서 질식사하고 말 터.
여기서 죽는 걸까.
창끝이 살짝 흔들렸다.
“집중해요.”
그걸 알아차린 해련이 짤막하게 타박했지만, 도현의 얼굴에는 이미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해련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언제부터 우리가 남의 도움을 기다렸어요?”
“……예?”
“우리가 해결하면 되는 일 아니야?”
검에 두른 황금빛 강기가, 좀 더 밝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헌터는 해결하는 사람이지, 해결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렇……죠. 하지만…….”
“그러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해련이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검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아는 저승부대원들은 그랬는데. 많이 물러졌네, 서 헌터.”
“…….”
도현은 말없이 해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젠 태양처럼 빛나는 해련의 검이 사선으로 한 번 쓱 그어졌다. 그 궤적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뻗어져 나간 강기는 결코 좁지 않았다.
타오르는 해일이 촉수를 휩쓸고 지나갔다.
쿠르르……
불이 붙은 촉수가 이리저리 뒤엉키며 오그라들었다.
해일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쭉 뻗어 나가 촉수의 벽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들이 선 바닥이 크게 진동하며 촉수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촉수의 천장이 열리고 하늘이 드러났다.
“나이는 이렇지만…….”
해련이 검을 가볍게 휘저었다.
“아직 죽을 때는 아니거든.”
촉수들이 빠르게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수없이 많았던 신비의 악마들은 어느새 하나로 합쳐진 채였다. 백의 아래 이목구비 없는 그늘이 도현과 해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연기조차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도망쳤네.”
해련은 헌터들과 몬스터들이 싸우는 전장을 향해 지체없이 돌아섰다.
“가죠.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예.”
도현은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