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465. 바톤터치
챡
무언가 찰기 있는 것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세희는 살며시 눈을 떴다. 자신의 집중을 깨는 이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무 아래서 나빛이 스스로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다.
“나빛.”
“응.”
“뭐해?”
“정신 차리는 거야.”
나빛이 눈을 부릅뜨고 세희를 올려다보았다. 양 뺨에 새빨갛게 손자국을 남긴 채.
“중요한 전투니까!”
“그래.”
“이리 와. 세희도 해 줄게.”
“됐어.”
“얼른! 너 졸고 있었잖아. 눈 감는 거 다 봤어.”
주변의 소리와 기운에 집중하느라 그랬던 건데. 세희는 입맛을 다시며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나빛이 세희의 양 뺨을 양손으로 쫙쫙 때렸다.
“세희는 육체파니까 쪼끔 더 쎄게!”
“아파.”
“미안…….”
세희는 울상을 짓는 나빛을 밀어내고 다시 집중했다.
하늘에는 민정이 있으니 몬스터가 언제 오는지 경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세희는 벌써부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악마들이 어떻게 공격해올지 모르기에.
눈을 감고, 속으로 상호의 가르침을 뇌었다.
‘촉각은 청각보다 빠르다.’
기감을 펼치고, 절대로 방심하지 않기.
이츠키가 당했을 때 똑똑히 배웠다.
‘……응?’
세희의 감각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잡혔다.
기운. 무언가 뭉글뭉글하고 푹신한 듯한 기운. 만약 그것이 물질이었다면 흐릿한 안개나 포근하게 부는 바람과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희가 느낀 것은 마나였다.
‘이건…….’
이것이 마나라면, 더 먼 곳에서 무언가 강대한 것이 여기까지 마나를 불어 보낸 것이고.
또 그것이 일부러 불어 보낸 것이 아니라, 그저 무의식적으로 흘리고 다닌 것뿐이라면.
그 근원은 결코 흐릿하지도, 포근하지도 않을 것이다.
‘민정 선생님은……?’
민정은 느꼈을까. 세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민정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만 보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힘들었다.
세희는 손을 들어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민정 선생님.”
[응, 세희야.]
“혹시 느껴지세요?”
[응? ……아아.]
민정은 그제서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응. 느껴져. 그치만 아직 많이 먼데…….]
“뭔가 강한 게 오는 것 같아요.”
그 순간 기운의 방향이 바뀌었다.
마나를 불어 보내는 문제의 근원이 방향을 튼 것이다. 서쪽에서 남쪽으로. 세희는 그걸 감지하자마자 민정을 불렀다.
“선생님, 몬스터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거 맞아요?”
[으응, 정령사들은 그렇다는데.]
민정이 대답하자마자 세희의 발이 땅을 박찼다. 나빛이 깜짝 놀라 세희를 불러세우려 했다.
“세희야? 어디 가?!”
“넌 선생님 도와서 몬스터들이랑 싸우고 있어.”
세희는 마나가 불어오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놈의 발은 빨랐지만, 세희의 발도 빨랐다. 세희가 속도를 높이자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저릿저릿한 기운이 오싹하게 등골을 타고 흘렀다.
틀림없는 악마의 기운.
그것도 보통 놈이 아닌.
‘대악마야.’
분명히.
놈이 향하는 곳은 남쪽. 도현과 헌터들, 상호와 태화가 있는 방향. 놈의 꿍꿍이가 뭔진 몰라도 세희는 놈을 쫓아야 했다. 그러라고 민정과 나빛이 있는 조에 배정받은 거니까.
곧 시야에 나무 위를 달리는 악마가 들어왔다.
피처럼 붉은 갈기에 새까만 피부를 가진, 사자 머리의 수인.
‘저놈은…….’
야성의 악마. 세희가 싸워본 적 있는 놈이었다.
대악마 중에서 신체 능력이 가장 강하다는 놈. 하지만 지난번에 세희가 싸웠을 때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었다. 그때는 혼자서 싸운 게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힘을 회복했다지만…….’
어차피 넘어야 할 벽.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상호를 따라갈 자격도 없는 것이다. 세희는 그렇게 검을 뽑아 강기를 날렸다.
앞서 달려가던 악마의 등에 하늘색 불꽃이 날아들었다.
“응?”
악마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코앞에까지 강기가 날아든 후였다.
콰아앙
밤하늘에 하늘색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의 한쪽 구석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세희는 그걸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날아가 검을 휘둘렀다. 놈의 목을 향해서.
하지만 칼날은 목에 닿지 못했다.
터억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이 세희의 검을 잡았고.
휘날리는 붉은 갈기 속에서 시뻘건 눈동자가 번득였다.
“애송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그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네년이 이쪽에 있었군.”
“……흥.”
세희는 대꾸하지 않고 주먹을 들어 놈의 얼굴에 휘둘렀다.
악마가 이빨로 손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악마 또한 세희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세희는 손을 비틀어 빼내고 악마의 튀어나온 콧잔등을 힘껏 후려쳤다.
콰앙
악마의 몸이 땅에 꽂혔다.
세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악마의 앞에 착지해, 검을 양손으로 잡아 아래로 내리찍었다. 악마의 가슴팍을 향해.
야성의 악마는 그 검을 보고 움찔하더니 황급히 몸을 굴려 검을 피했다.
푸욱
검이 맨땅에 깊숙이 박혔다.
세희는 잠시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왜 피했지?’
아까는 손으로 막았는데.
혹시. 세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검을 뽑아 놈을 향해 돌아섰다. 악마는 그새 일어나서 그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쪽박인 줄 알았더니 당첨이었군.”
“당첨은 당첨이지.”
세희의 칼끝이 악마를 향했다.
“상품이 죽음일 뿐.”
벼락처럼 뻗은 칼이 악마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악마는 이번에도 급히 물러나며 검을 피했다. 세희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놈의 악마의 구멍은 가슴팍에 있고.
그 악마의 심장이 있는 곳으로는 초혼강기를 받아낼 수가 없어서 피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모르는구나.’
이 악마는 세희 자신에게 악마의 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희는 악마와의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한쪽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선 자.
다른 한쪽은 천방지축으로 까불다가 이제 막 죽음의 공포를 깨달은 자.
둘의 결의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촤좍
세희는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악마를 압박해 들어갔다.
예상대로 악마는 잔뜩 당황하며 공격을 피하는 데에 급급했다. 반격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듯.
칼끝이 더욱 집요하게 악마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크으……!”
흥분한 악마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커졌다.
내지른 팔 아래로 훤히 보이는 빈틈. 세희는 그곳을 향해 칼을 뻗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악마의 눈이 있는 척을 할 뿐. 실제로는 없고.
이렇게 빈틈이 보여도, 정작 유효타를 먹일 수 없었다.
‘……윽.’
세희는 일부러 헛손질을 했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악마의 가슴팍을 스쳤다.
그러나 아무리 멍청해 보여도 악마는 악마였던 건지.
“……애송이.”
악마의 입꼬리가 위로 슬쩍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악마의 손이 세희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앙
“……커흑!”
세희는 뒤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입장이 바뀌어 버렸다. 토해낸 숨을 다시 들이키며 재빨리 일어서는 세희에게 악마가 업신여기는 눈빛을 보냈다.
“낙첨이었군.”
벌레를 깔보는 듯이.
“네년 같은 애송이는 여흥거리도 못 된다.”
“……웃기네.”
세희는 기습적으로 칼을 휘둘렀지만, 악마는 가볍게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로 칼날을 잡았다.
“그자만큼 강할 줄 알고 기대했는데…….”
그리고 세희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나 보군.”
촤아악
네 줄기의 검은 강기가 세희의 호신강기를 파고들었다.
“윽……!”
간신히 막아내긴 했지만, 종이 한 장 차이. 세희의 초혼강기와 악마의 마나는 그 강도와 밀도가 엇비슷했다.
악마가 목과 손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더 보여줄 건 없나?”
“…….”
“밑천이 다 까였나 보군.”
붉은 갈기가 술렁이고, 검은 가죽 밑에서 근육이 불끈 솟았다. 그 탓인지 악마의 덩치가 두 배는 커진 것만 같았다.
몸을 잔뜩 긴장시키던 악마가 갑자기 땅을 박차고 세희에게 달려들었다.
“……큭!”
방금과는 속도가 차원이 달랐다.
묵직하면서도 빠르다. 있는 그대로의 강함. 마나 없이 싸운다면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속도와 힘이었다.
그야말로 야성.
악마의 이빨이 세희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
물리면 잡힌다.
잠깐이라도 잡혔다가는 호신강기의 강도와는 관계없이 관절이 꺾일 것이다. 힘으로는 놈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세희는 주먹에 기를 담아 놈의 얼굴에 휘둘렀다.
퍼엉
밝은 하늘색 폭발이 일어났다.
잠깐 시야를 가리는 데 성공했다. 세희는 이제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뒤로 빠지려 했다.
그러나 야성의 악마는 폭발을 헤치고 세희에게 달려들었다. 온 산을 뒤흔들 듯 쩌렁쩌렁하게 으르렁거리며.
크르아아아악……
“칫!”
잡히면 죽는다. 세희는 땅을 박차고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거리를 벌리기엔 충분했으나, 악마는 어울리지 않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그를 추격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손톱과 이빨이 재차 세희를 향해 다가왔다.
아직 착지하지 못했는데.
세희는 발에 내공을 끌어올려 허공을 박차려 했다.
‘……늦었다.’
너무 늦었다.
악마의 손아귀가 세희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제 저 손에 전신의 관절이 산산이 으깨어질 터였다.
세희가 그렇게 생각하며 생을 놓아버리는 순간.
어디선가 붉은 강기가 날아와 악마의 등을 베었다.
촤악
“크르……!”
악마가 핏발 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냐!”
“므아.”
세희의 몸이 굳었다.
“아으, 아으아…….”
나무 사이에서 작고 그림자가 쏙 튀어나왔다.
가느다란 몸과 얇은 팔다리. 치솟은 뿔과 채찍처럼 긴 꼬리.
“……뜨아!”
다혜가 붉은 초혼강기를 두르고 서 있었다.
다혜는 악마를 노려보며 주홍색 눈동자를 부라렸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부숴버리겠다는 듯이.
당연하게도, 악마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복권이 또 있었군.”
피식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릴 뿐.
“한번 긁어 보실까.”
악마의 손톱에서 검은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 * *
“다행히…….”
백발의 여인이 검을 빙글 돌렸다.
“늦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예.”
도현은 팔뚝에 난 상처를 부여잡고 앞을 노려보았다.
백의를 두른 촉수투성이의 악마. 마법과 주술을 다루는 신비의 악마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떨어뜨렸던 창을 허공섭물로 집어 올리며 물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니, 다 데려오라길래 다 데려왔죠. 강 선생이랑 애들 있는 곳에도 사람이 갔을 거예요.”
해련은 그렇게 대답하며 악마를 흘끗했다. 악마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해련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저놈한테만 집중하면 되겠죠?”
“조심하세요.”
도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초강기를 뚫는 놈들입니다.”
“알아요, 알아요. 그러니까 부협회장이 당했겠지.”
인자한 목소리. 하지만 눈빛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
해련은 손을 내젓고 검을 치켜들었다.
“물러나서 치료하고 있어요.”
검에서 황금색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