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64화 (464/501)

<464화>

464. 전면전

“그러니까.”

태화가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상호와 세희를 돌아보았다. 식빵 사이에 녹은 초콜릿을 끼운 조악한 디저트였다.

“쌤 잡으려고 무작정 강원도까지 왔다고?”

“어.”

“미친년…….”

태화가 혀를 찼다.

“올 거면 말하고 오지 그랬어. 필요한 거 많은데.”

“없이도 잘 사는 것 같은데.”

세희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무릎에 앉은 상호를 내려다보았다. 상호는 아직도 세희에게 꽉 잡혀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쵸, 선생님?”

“……응.”

“잘 살고 계셨죠?”

“……아니.”

“필요한 게 있었어요?”

“세희가 필요했어…….”

“아슬아슬하게 합격.”

세희가 새침하게 말하며 상호의 뺨을 문질렀다.

불합격이었다면 무슨 벌을 받았을까. 상호는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어 주스만 홀짝였다.

‘그나저나…….’

세희를 여기 계속 머무르게 해도 괜찮을까.

세희는 강하니까 전쟁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또 세희가 있으면 은호가 됐을 때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세희는 그에게는 최후의 보루고, 이렇게 전투에 데리고 다녔다가는 마신을 죽이러 갈 때도 은근슬쩍 따라붙을 게 뻔했다.

지금 단호하게 끊어내는 게 맞지 않을까.

‘일단 몸이 돌아오면 얘기해야겠다.’

이 꼴로 말해봤자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주스를 발칵발칵 들이켰다.

* * *

그래서, 다음 날.

단둘이서 이야기하기 위해 세희를 깨워 식당으로 갔는데.

“일어났냐?”

도현이 먼저 밥을 먹고 있었다.

식판에 담긴 양을 보니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상호는 눈을 마주쳤는데 따로 먹기도 뭣해서 그냥 밥을 받아 도현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세희를 바라보았다.

“세희야.”

“싫어요.”

“…….”

“안 가요.”

다혜의 옹알이도 읽고 마음도 읽더니, 이젠 운만 떼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들여다보이는 모양이었다.

둘의 말을 들은 도현이 눈을 끔뻑였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세희 학교 보내려고.”

“뭐? 왜? 세희 강하잖아.”

“아직 학생이잖아.”

상호의 말에 도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뭔 소릴 하냐는 듯이.

“니가 할 말이냐? 야, 내가 너 처음 봤을 때보다 세희가 나이 더 많아.”

“그때하고 지금은 다르지.”

“이야……. 이게 내로남불이냐?”

도현이 혀를 끌끌 찼다.

도와주질 못할망정 초를 치고 있다. 상호는 도현을 한 번 째려보고는 세희를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세희야. 일단 이야기를 잘 들어봐. 네가 여기 있으면…….”

“선생님 맞을래요?”

“…….”

“왜 선생님은 되고 저는 안 돼요?”

세희가 허리에 찬 예경의 검을 까딱거렸다.

“선생님은 저보다 어릴 때 참전하셨잖아요.”

“그땐 지금이랑 상황이 달랐어. 그땐 어떻게 해야 전쟁에서 이길지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잖아.”

“선생님 그땐 저보다 약하셨을 거 아니에요.”

“…….”

그렇긴 한데.

이런 식으로는 설득이 힘들겠다. 상호는 도현의 도움을 받기 위해 발을 뻗어 도현의 다리를 툭툭 치려 했다.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돕겠지…….’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발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동시에 그를 향해 박히는 세희의 눈빛.

‘…….’

다 읽혀 버렸다.

결국 그는 논리로 이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채, 세희의 날카로운 시선을 슬쩍 옆으로 흘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형 없을 때 말해야겠네…….’

* * *

그날은 습격이 없었다.

습격이 없어도 헌터들은 항상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래도 TV를 보거나, 핸드폰을 하거나, 부대원들과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간단한 운동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창밖에서 헌터들이 족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쌤.”

침대에서 핸드폰을 하던 태화가 그를 불렀다.

상호는 멍하니 TV를 보고 있다가 태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

“나 심심해.”

“그래.”

“우씨…….”

조그만 불똥이 날아와 상호의 팔뚝에 닿았다.

“아야! 야 임마, 어디 선생님 팔에 빵을 놔!”

“쌤이 내 말을 무시하잖아! 나 심심하다고! 쟤 봐, 쟤도 할 거 없어서 칼만 닦고 있잖아!”

“나?”

예경의 검을 닦던 세희가 눈을 깜작였다.

“난 좋아서 닦는 건데.”

“X랄마! 대체 누가 칼을 좋아서 닦는데!”

“난 좋은데?”

“진짜 미친 변태년이네…….”

질렸다는 듯이 세희를 꼬나보던 태화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쌤, 쌤.”

“응?”

“지휘통제실에 컴퓨터 있던데. 그걸로 게임해도 돼?”

“……맞을래?”

“외않되?”

“요걸 확 그냥…….”

“확 뭐, 확 뭐. 확 덮쳐?”

“……에휴.”

상호는 한숨을 쉬고 생활관을 쓱 둘러보았다.

나란히 붙어 있는 침대 네 개. 그 위에 누운 태화. 역시 한쪽에 싹 몰아 둔 옷장 겸 관물대 네 개. 그 옆에 놓인 빨랫대에 빨래를 너는 나빛. 방 한가운데에 놓인 책상과 그 앞에 앉아 칼을 손질하는 세희. 창가 쪽에 놓인 TV.

단체생활에는 그도 아이들도 이골이 났지만, 그래도 심심한 건 어쩔 수 없었다.

“TV나 봐.”

“쌤이 계속 뉴스만 보잖아!”

“다른 데 틀어도 다 뉴스야.”

사실상 전쟁 4일 차.

몬스터들이 미디어를 통해 선전포고를 할 리도 없고, 지금까지는 헌터들이 수비를 잘해준 덕에 민간에는 아직 전시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유례없을 정도의 대규모 습격이었던데다가 협회의 지속적인 상황 전파 덕분에,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도 금방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들 전쟁을 겪어 본 이들이었기에.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서서히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상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최근 몬스터들의 잦은 습격이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데요.]

TV 속 앵커가 말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협회가 정부와 협조하여 타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협회가 접촉한 나라는 총 5개국으로, 모두 태평양 연안의 아르게스와 인접한 나라…….]

“왜 안 도와주는 거야?”

태화가 중얼거렸다.

“몬스터들이 다른 나라도 공격해?”

“아니.”

“그럼 왜 안 도와주는 거야?”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도현이 들어서며 대답했다.

“증거가 없으니까.”

“꺄악!”

속옷을 널던 나빛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빨랫대를 가렸다. 도현은 나빛을 보았다가 급히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아이고, 미안하다. 으흠……. 어쨌든, 그 나라들 입장에서는 몬스터들이 한국으로만 쳐들어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거야.”

“근데 실제로는 그렇잖아요.”

“앞으로 어떨지는 그 나라들은 모르지. 우리야 겪은 게 있으니까 알지만…… 그 나라들은 우리가 하는 말이 진짠지 아닌지 모른다는 거야.”

“그니까 다 호로새끼들이란 거죠?”

“……내가 설명을 잘 못하나?”

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 나라들은 자기 국민을 지키는 게 먼저야. 봐봐, 걔들이 한국에 지원군을 보냈어. 그런데 자기네들이 공격당해서 국민이 죽었어. 그러면 걔네들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게 되는 거잖아?”

“으음…….”

태화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그걸 알면 왜 도와달라 했어요?”

“안 하면 안 했다고 뭐라 하거든. 사람들이.”

안 된다는 걸 알아도 시도는 해야 한다. 시도도 안 했다가는 퇴짜만 맞은 것보다 더한 욕을 들어먹게 되니까.

도현은 입맛을 쩝 다시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애들 데리고 나와. 족구나 한판 하자.”

“족구라…….”

상호는 왼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긴 하네. 그래. 하자.”

“엥, 쌤이랑 아저씨랑 붙으면 끝 안 나는 거 아냐?”

“하다 보면 끝나겠지, 뭐.”

“아, 그럼 저도 할래요…….”

“나빛이 족구 할 줄 알아?”

“아뇨!”

“……그래. 가르쳐 줄게.”

“그럼 나도 할래.”

“저도요.”

“세희도? 세희가 끼면 밸런스가 안 맞…… 악! 알았어, 알았어. 같이 하자, 응…….”

“와아~.”

두 사내와 세 소녀는 복도를 걸어 바깥으로 나갔다.

* * *

그날 저녁.

하루도 멀다는 말이 꼭 맞게, 몬스터들이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위성카메라를 통해 감지되었다.

추정 위험도는 S 500.

“이번엔 정말로 뚫어보려는 모양인데.”

도현이 어두운 안색으로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모니터에 띄워진 지도에서는 새빨간 점들이 세 갈래로 나뉘어 서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상호는 지도를 시뻘겋게 매운 점들을 보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르커드는?”

“없어. 그치만 마나를 쓸 줄 아는 놈들이 오겠지.”

도현의 손가락이 지도를 짚었다.

“놈들은 세 곳으로 온다. 세 곳 모두에 악마가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악마를 상대할 사람들이 가야 하는데…….”

“……음.”

상호는 곁에 있는 세희, 태화, 나빛과 민정을 돌아보았다.

도현까지 포함하면 여섯. 여섯이서 3개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나랑 태화가 붙어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식으로 조를 짜든 세희는 그와 따로 가게 된다.

‘……젠장.’

세희를 작전에 포함시키기는 싫었지만, 지금은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세희와 그는 따로 놓고.

또 세희가 다칠 경우를 대비하려면 나빛이 함께 가야 하는데, 그럼 또 조를 나누기가 애매하다. 어른을 한 명 붙이자니 다른 어른은 혼자 가야 하고, 안 붙이자니 애들끼리라 너무 불안하고.

‘형 혼자서 악마랑 싸울 수 있나…….’

대악마들이 오게 되면 좀 불안한데.

이번 공세의 크기를 보니 놈들이 온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놈들이 영혼의 마나를 쓴다면 도현 혼자서는 벅찰 게 뻔해서.

그리고 사실, 누가 누구랑 같이 가든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수호부대원들이 있긴 한데.’

수호부대원들은 S급 기백 명분의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 그들에게 악마와 싸워주기까지를 바라기는 무리였다.

안 그래도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몬스터들이 헌터들을 무시하고 도시로 돌격해도 막기 힘든 게 실정이었다.

‘헌터가 너무 없어…….’

상호는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세희, 나빛이, 누나가 제일 북쪽으로 가. 내가 태화랑 남쪽으로 갈게. 형은 수호부대원들 데리고 가운데로 가서 버텨. 북쪽이랑 남쪽에서 도우러 갈 수 있게.”

“그게 낫겠네. 그래.”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안 남았어. 바로 출발하자.”

* * *

해가 저물고, 달이 뜨기 시작한 하늘.

태화는 산 중턱의 작은 바위에 앉아 상호를 돌아보았다.

“쌤.”

“응?”

“이번엔 나도 싸워도 돼?”

“응.”

오늘은 지난번과 달리 태화를 데리고 도망칠 사람이 없다. 보호해줄 사람도 없고. 그와 함께 싸워야만 했다.

상호는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내 옆에서 멀리 떨어지지 마.”

“좀 두근거리네.”

“무서워?”

“아니.”

태화가 피식 웃었다.

“나 쌤이랑 합을 맞추면서 싸워본 적은 없으니까.”

“……그렇지.”

상호도 살짝 웃었다.

산 주변에는 헌터가 쫙 깔려 있었다. 공세의 형태가 명확했던 오르커드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정확히 어느 산의 어느 구역으로 들어오는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대략적인 방향만 알 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그 방향으로 헌터도, 몬스터도 모여들 것이다.

그때 먼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온다.”

그 말에 헌터들이 움찔하며 무기를 들었다.

아직은 모습도, 소리도,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중에 상호의 말을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상호는 검을 뽑으며 태화에게 물었다.

“느껴져?”

“……으응.”

태화가 멀리 능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악마야.”

그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능선에서 그림자들이 튀어나왔다.

거대하기도 했고, 작기도 했다. 하얗기도 하고, 검기도 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그림자들이 어떤 것은 느리게, 어떤 것은 빠르게 헌터들을 향해 다가왔다.

온 산을 개미떼처럼 뒤덮은 몬스터들이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그중에 몇 마리, 특히 빠르게 다가오는 놈들이 있었다.

퍼억

상호의 강검이 한 놈을 찔렀다.

사람을 닮은 형태의 일그러진 그림자는,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푸른 불꽃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상호를 바라보았다.

눈코입이 없던 얼굴이 세로로 갈라지며 혀가 날름거렸다.

“당첨이군요.”

“그러게.”

상호는 놈의 목을 가볍게 날리고 대꾸했다.

“나도 니가 제일 보고 싶었…….”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그를 향해, 정확히는 그의 옆을 향해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태화를 찢어발기려 다가가는, 검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상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새끼가……!”

휘두른 검을 따라 검푸른 불꽃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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