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463. 저승에 닿기를
“옘병…….”
사내는 황급히 전투화를 신으며 이를 갈았다.
사내의 이름은 박범구. 이계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베테랑 헌터였다. 등급은 이곳에서는 흔해 빠진 A급.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헌터지만, 이곳에서 인정받기에는 A급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인정을 받으러 온 건 아니지만.
‘망할 몬스터 놈들…….’
범구는 검을 차고 생활관에서 달려 나왔다.
그는 A급에서도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딱히 성실하거나 붙임성이 좋지도 않았다. 다만 딱 하나, 인맥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연줄 아닌 연줄이 있어서 협회의 직원이 되어 평범하게 월급을 받아 살아가던 중이었다.
이렇게 전장에 돌아오게 된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누가 그렇겠냐마는.
‘지들도 죽기 싫으면서 왜 쳐들어오는 건지…….’
범구는 몰랐다.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죽음을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복도로 나와 보니 헌터들이 현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범구는 잠시 갈팡질팡하다가 이어셋의 존재를 깨닫고 전원을 켰다.
‘젠장, 지난번엔 이런 거 없었다고.’
이어셋의 채널을 맞추자 그를 찾는 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범구 헌터! 박범구 헌터 어딨어!]
“지금 갑니다.”
집합 장소는 기지 막사 앞이었다.
집합을 마친 그들에게 지휘통제실의 무전이 날아왔다. 출동할 장소와 간단한 상황 설명.
[공세가 두 곳이에요. 8조는 남쪽 공세를 맡을 겁니다. 위치는…….]
범구와 헌터들은 장비를 챙기고 지시받은 장소를 향해 경공을 펼쳤다.
이어셋에서 더욱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강상호 헌터님은 다른 임무 수행 중입니다. 김민정 헌터님도 조금 늦을 겁니다. 그러니 죽지 않는 몬스터를 발견하면, 전부 악마로 간주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피하십시오.]
악마 대응 메뉴얼은 총 세 가지.
첫째는 어떻게든 두 놈 이상을 잘게 썰어서 재생하지 못하도록 뒤섞는 것.
둘째는 X급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셋째는 도망치는 것.
그러니까 메뉴얼의 3번을 적극적으로 참고하란 뜻이다.
‘사고 나기 딱 좋은 날이네.’
범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쟁의 배경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색감이 유난히 쨍쨍한 아침. 누군가가 이런 날에 전쟁영화를 찍겠다고 하면 아무도 투자하지 않았을 법한, 그런 날이었다.
조원 중 한 명이 물었다.
“도착 예상이 언제랬죠?”
“5분 이내.”
몬스터들의 도착을 말하는 것이었다. 조장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빨리 시작해! 우리가 제일 먼저니까.”
“예.”
범구와 조원들은 서둘러 마나 폭탄을 매설하기 시작했다.
“조심해. 터지면 다 뒈져.”
조장이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임무는 다가올 적군의 진격을 늦추고, 수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 비록 놈들의 수는 몇천이고 그들의 조는 여덟 명이었지만, 지뢰라는 보이지 않는 위협을 이용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지뢰가 고작 열 몇 개뿐이더라도.
매설을 마쳐가는데 한 자락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놈들이 와요.”
바람의 정령은 주인의 목소리를 전하고 사라졌다.
헌터들은 서둘러 흙을 덮어 마무리를 지었다. 산 너머에서 아스라하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범구가 나뭇잎을 뿌리고 돌아서는데.
등 뒤, 지뢰를 매설한 곳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어?”
헌터들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방금 그들이 지뢰를 묻은 바로 그 땅 위에, 검은 무언가가 서 있었다.
박쥐를 닮은, 검은 피막으로 둘러싸인 인간의 모습.
“지뢰라……. 우리는 쓸 수 없는 물건이지.”
그것이 땅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들이 너무 많아서……. 그러나 너희의 이 발명품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우리 또한 잘 알고 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놈이 발을 떼면 지뢰가 터질 것이고, 그러면 누군가는 죽는다. S급 헌터들은 호신강기를 쓰면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A급 헌터들은 절대 무사할 수 없었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범구가.
범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눈앞에 있는 놈은 누가 봐도 악마. 그리고 악마가 그들을 살려줄 리 없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범구에게 악마가 말했다.
“두려운가 보군.”
“…….”
“안심해라.”
그 말에 헌터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놈의 꿍꿍이가 대체 무엇인지.
악마가 피막이 달린 팔을 넓게 벌렸다.
“해칠 생각은 없다. 구태여 너희와 말을 섞는 것도 그 때문이고.”
“뭐?”
조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장은 지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무슨 소리냐?”
“인질이란 걸 잡아보려는 것이지.”
악마가 발 한쪽을 옆으로 옮겼다.
“살고 싶다면 움직이지 말도록.”
모두의 몸이 굳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이 다가오고 있다. 몇천 마리가 되는 놈들에게 포위당하면 그때부턴 방법이 없는데.
인질이 된다고 해서 살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그럴 깡이 없었다.
‘X됐군.’
범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서라도 써 둘 것을…….’
유서도 없이 하직한 친형이 떠올랐다.
최전방 중의 최전방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형. 그 형의 연줄 덕분에 협회에 편하게 취직을 했지만, 범구는 도통 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굳이 그렇게 위험한 임무를 자처했는지.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인질…….’
범구의 시선이 악마와 지뢰를 훑었다.
사람은 몬스터를 인질로 잡지 않는다. 그러니 인질을 인질로 교환하려는 목적은 아닐 것이다. 필시 저승부대원들을 유인하려는 미끼의 용도.
몬스터들은 그들을 곱게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고.
그냥 죽인 다음, 인질로 잡고 있다고 사기를 칠 게 분명했다.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
그렇다면 이길 수 있는 길을 가리라. 범구는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낌새를 알아챈 헌터들이 당황했다.
“범구?”
“야, 박범구!”
“네놈……?”
심지어는 악마마저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면 해야 할 일을 한다. 범구는 헌터들이 부르든 말든 내공을 끌어올려 손에 맺었다.
지금 그의 임무는, 이 자리에서 인질로 잡히지 않는 것.
도망치거나.
혹은 시체가 되어서라도.
“너.”
범구는 악마를 노려보았다.
“뗄 수 있으면 떼 봐.”
“죽고 싶단 뜻인가?”
악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난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해보라고. 못하지? 넌 어차피 우릴 살려줄 생각이 없거든.”
범구의 손에는 계속 내공이 맺혀 있었다. 지뢰가 터지면 기를 쏘아서 폭발을 상쇄해볼 생각이었다.
되면 도망치는 것이고. 안 되면 조금 일찍 죽는 것이고.
그는 헌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공격해!”
“야, 이 미친놈아! 다 죽이려고?! 그러다 너도 죽어, 임마!”
“잡히면 어차피 죽어. 우리만 죽는 게 아니라 남들도 다 죽는 거라고. 차라리 싸워보고 죽어!”
하지만 헌터들은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서 갈팡질팡하는 모습. 범구는 그런 그들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형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때 능선에 거대한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이런……!’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범구는 그냥 기를 쏘아버리려고 했으나, 이미 몬스터들이 일대를 포위한 후였다. 이제는 기를 쏜다 해도 도망칠 데가 없었다.
악마가 느릿하게 박수를 쳤다.
“인질이 된 것을 환영한다.”
그들의 주변으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다 끝이다. 이제 잡혀가서 살해당하고 거짓 인질이 되어 미끼로 이용당할 것이다. 몬스터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실의에 빠진 범구를 악마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뭐냐.”
악마의 손가락이 아래를 향했다.
“와서 밟아라.”
악마가 그들을 데리고 떠날 수 있도록 지뢰를 밟고 있으란 뜻. 범구는 내공이 맺힌 손을 언제든 내쏠 수 있도록 몸 가까이 당겼다.
“싫다면?”
“왜 마다하는 거지? 너희 인간들이 올 때까지 서 있으면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거든.”
더 큰 것을 위해. 다 함께 도망치거나, 이 자리에서 모두 죽거나. 범구의 두 손바닥 사이에 강기가 차올랐다.
“죽자.”
“야, 박범……!”
강기를 쏘려는 범구에게 헌터들이 소리치는 순간, 가까운 나무의 가지 사이에서 작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하늘색으로 불타고 있었다.
“……!”
악마가 대경실색하며 발을 떼었다.
그 즉시 악마가 밟고 있던 땅이 솟아올랐다. 찰나의 순간, 지뢰에 담겨 있던 푸른색의 마나가 용암처럼 땅을 들끓게 했다.
그 광경을 본 헌터들이 죽음을 직감했을 때.
가느다란 그림자가 손을 뻗어, 하늘색 불꽃을 넓게 펼쳤다.
콰아앙
불꽃 너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오르커드에 대비할 필요가 없어 화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마법 폭탄. 그 때문에 폭심지에서 가까운 곳은 S급 헌터의 강기만큼의 위력이 나왔다. 직격당한 악마는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헌터들에게는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
“뭣…….”
헌터들은 검을 찬 여인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여인은 대꾸도 없이 불꽃을 거두고 검을 뽑았다.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하늘색 불꽃이 퍼졌다. 넓게. 그러나 날카롭게.
불꽃은 지나가는 길의 모든 것을 베어 넘겼다.
쿠워어억……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스러지는 광경을, 범구와 헌터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대체…….”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여인은 피조차 묻지 않은 검을 칼집에 넣고는, 굵고 길게 땋은 머리를 휘날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헌터들은 그제서야 그 여인이 이제 갓 묘령에 접어든 소녀라는 것을 깨닫고는, 얼이 빠져서 눈만 끔뻑거렸다.
“누구……?”
“아저씨들.”
소녀의 눈이 번득였다.
“혹시 강상호라는 사람 알아요?”
* * *
“강 헌터는 지금 타지역으로 출장 나갔어.”
범구는 복도를 걸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그들의 주변에서는 방금 막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헌터들이 생활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쪽은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다. 일단 강 헌터 묵는 방에 데려다 줄게.”
“네.”
세희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범구를 따라 걸었다.
도착한 곳은 2층에 가장 외따로 떨어진 생활관. 범구는 문을 두드렸다가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다.”
“네.”
세희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범구는 자신의 생활관을 향해 돌아서다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부협회장을 맞닥뜨렸다.
부협회장의 곁에는 머리가 하얀 소녀와 안대를 쓴 소년이 함께하고 있었다.
“박범구 헌터.”
“예.”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예.”
범구는 도현을 따라갔고, 소년과 소녀는 세희가 들어간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내는 기지의 뒷마당으로 나왔다.
담배를 피던 헌터들이 부협회장을 피해 슬쩍 걸음을 돌렸다.
“범구야.”
헌터들이 모두 사라지자 도현이 운을 떼었다.
“너희 조가 너 때문에 다 죽을 뻔했다더라.”
“맞아요.”
범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같이 죽으려고 했어요.”
“왜?”
“인질로 잡으려고 하길래.”
그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더 많이 죽잖아요.”
“……그랬겠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랑 대원들이 죽잖아.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어?”
“그냥…….”
범구는 혀를 쯧 차고 고개를 돌렸다.
“피는 못 속이나 보죠, 뭐.”
그러고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부협회장님도 그랬을 거잖아요.”
“글쎄.”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 헌터들은 납득 못할 거야.”
“알죠. 각오하고 있었어요.”
“부대를 옮겨 줄게.”
“전방이요, 후방이요?”
“어디가 좋아?”
“전방.”
범구는 손가락에 강기를 맺어 담배 끝을 지졌다.
“최전방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
도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죽지 않게 조심해라.”
“예.”
곧 도현이 막사로 들어갔고, 범구는 그런 도현의 뒷모습을 흘끗하다가 연기 한 자락을 만들어 하늘로 올려 보냈다.
멀고, 길게, 높이.
저승에 닿을 때까지.
* * *
“어?”
방에 들어선 나빛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선생님, 태화가 안 보여요…….”
“민정이 누나가 데리고 있어.”
상호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짧은 다리가 바닥에서 조금 떴다.
“다친 사람들이 좀 있더라. 나빛이 네가 치료해주고 와.”
“괜찮아요?”
나빛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혼자 계셔도 괜찮겠어요……?”
“괜찮아, 괜찮아. 얼른 갔다와.”
“다녀올게요…….”
“으응.”
상호는 서둘러 방을 나가는 나빛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공세는 북쪽과 남쪽, 두 곳으로 왔다. 그래서 뭔가 술수가 있는가 싶었더니만 악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싱겁게 끝나 버렸다. 특히 남쪽은 무슨 이유에선지 공세가 싹 정리되어 있었다. 헌터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는데.
누가 와서 쓸어버리기라도 했나.
‘어쨌든 악마가 없었다는 건…… 놈들이 내 상태를 알지는 못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좀 안심이 되었다.
오늘의 전투는 비교적 가벼웠다. 죽은 사람도 없다는 모양이고. 상호는 마음을 내려놓고 TV 리모컨을 들었다.
그런데 뒤통수에 뭔가가 닿았다.
부드러운 누군가의 품.
‘……!’
상호의 몸이 굳었다.
정수리에 숨결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악마가 숨어들어온 건가. 그의 생활관은 대체 어떻게 알아냈는가. 오만 가지 상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시야의 왼쪽에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나타나 그의 왼눈을 가렸다.
그리고 나직한 속삭임이 귀에 닿았다.
“선생님.”
“……!”
상호의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그를 세희가 꼭 끌어안고 속살거렸다.
“대답을 잘 하셔야 해요.”
“……응.”
“왜 안 오셨어요?”
“……사정이 있었어.”
그를 끌어안은 세희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
“……응.”
“대답을 잘 하셔야 해요.”
“응…….”
“안 오실 거면 왜 안 데려가셨어요?”
“…….”
답정너다.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 상호는 세희의 뺨에 키스를 갈기기 위해 고개를 뒤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세희가 그의 머리통을 덥석 잡았다.
“……켁!”
“뽀뽀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세희의 목소리는 어느새 스산하게 바뀌어 있었다.
“선택지는 두 개예요.”
“세희야……?”
“사정을 설명해 주시든가…….”
“응…….”
“아니면 사정을 가르쳐 주시든가…….”
“…….”
상호의 등에 진땀이 줄줄 흘렀다.
사정을 설명하고 싶어도 세희가 납득할 리 없었다. 태화랑 나빛이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거냐고 따질 게 뻔했다. 그냥 대답하지 말고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생각을 세희도 알아차렸을까.
세희는 상호를 끌어안고 벌떡 일어섰다.
“씻으러 갈래요.”
“왜 나까지…….”
“위험하잖아요. 혼자 계시면 안 돼요.”
“지금은 네가 더 위험해…….”
“알면서 왜 그러셨어요.”
“제발…….”
상호가 애원했지만 세희는 들은 척도 않고 여자 샤워실로 향했다.
결국 상호를 잃어버린 나빛이 울고불며 부대를 싸돌아다닐 때까지, 그는 세희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샤워를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