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462. 같은 임무
“……아웅.”
다혜는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방학의 아침. 원래대로라면 맘 편히 뒹굴거리다가 슬쩍 일어나서, 오늘의 아침밥은 뭘까 기대하면서. 상호의 방 창문으로 몰래 들어가 곤히 자는 상호에게 바디프레스를 먹여줘야 하는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저씨 괜찮을까…….’
전쟁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습격이라는데.
그래도 아저씨가 몬스터에게 당할 실력은 아니니까.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배고픈데…….’
직접 차려 먹긴 귀찮은데. 배는 고프고. 그래서 뭘 먹긴 해야겠는데, 일어나긴 싫고.
그래서 하릴없이 뒤척이고 있는데.
“꾸웅……. 므아?”
문득 상호의 방 냉장고에 넣어둔 빵이 생각났다.
‘빵!’
다혜의 발은 이미 창턱을 밟고 있었다.
바람처럼 달려가 상호의 방 창문을 열어보니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상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다혜는 폴짝 뛰어 안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아저씨 것도 남겨놔야 하나?’
산 지 꽤 된 것 같은데. 상태 보고 안 좋으면 그냥 다 먹어버려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를 열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응?’
다혜는 빵을 허겁지겁 집어먹다 말고 현관을 돌아보았다.
“……따으악!”
세희가 팔짱을 낀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인 채. 언제까지 안 들어오나 한번 보자, 라는 뜻의 어딜 봐도 유부녀 같은 눈빛을 지으며.
깜짝 놀란 다혜는 사레가 들려 버렸다.
“케흑, 콜록콜록. 뜨아아…….”
요란스레 가슴을 두드리며 물을 마셔도 세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현관문 외에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이.
다혜는 진땀을 흘리며 살금살금 창가로 걸어갔다.
“므아…….”
“언니.”
“……뜨아!”
세희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선생님 보면 나한테 알려줘.”
“아으아으…….”
“그리고 그 빵 내 거야.”
“……뜨아!”
“먹어, 그냥.”
“므아…….”
다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상호의 방을 도망쳐 나왔다.
아무래도 상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세희를 피해 다녀야 할 것 같았다.
* * *
일어나 보니 다행히 옷이 도착해 있었다.
상호는 민정이 가져다준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아이들을 깨워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과 현관에서는 보급받은 물자를 정리하느라 헌터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늦은 아침을 먹고, 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
‘삐졌구만…….’
그래서 열심히 문자로 풀어보려 했지만, 메세지 옆 숫자만 사라질 뿐. 답장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상호는 양치를 하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다녀오라고 하지 않았었나……?’
분명 그를 붙잡으려고 하는 나빛을 말리며 곱게 보내줬던 것 같은데.
설마 다녀 ‘오지’ 않아서 화가 난 걸까. 그치만 세희가 고집은 세도 이해심이 없는 건 아닌데.
‘전쟁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있지…….’
전쟁을 겪어 본 그와 겪지 않은 세희의 이해도가 같을 순 없으니까. 상호는 그렇게 여기며 양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나빛이 침대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인가?’
그러고 보니 나빛의 가족은 나빛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나빛을 가족에게 보내고 싶었지만, 오르커드에 대비하려면 나빛이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빛은 해맑게 웃으며 핸드폰 너머의 상대와 통화를 했다.
“으응, 선생님이 우리 옷 태워먹어서……. 헤헤. 응? 아아, 나도 같이 싸웠지~.”
상호는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세면도구를 정리하며 귀를 기울였다.
아마 그의 반 아이인 듯했다.
“조금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선생님이 내 덕분에 이겼다고 칭찬해 주셨어. 헤헤…….”
[──, ────?]
“응! 부협회장 아저씨랑 민정 선생님도 계셨는데, 나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대, 헤헤…….”
나빛이 한껏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세희 너도 같이 있었으면 굉장했을 텐데~.”
“……!”
통화 상대가 세희였다니.
상호는 초조한 눈빛으로 나빛을 흘끔거렸다.
“아니, 재미가 있었던 건 아니구, 그냥 선생님이랑 같이 싸우니까…… 그냥 그거 자체가 좋았달까? 진짜 수제자가 된 느낌? 헤헤헤…….”
[──.]
“태화? 태화는 숨어 있었대.”
옆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던 태화가 신경질을 부렸다.
“뭘 숨어, 멍청아. 경호받고 있던 거지. 지는 집에도 경호원 있으면서…….”
“세희야, 잠시만~. 꾸꾸야!”
“아니 X팔, 쌤! 뭘 보고만 있어! 내가 틀린 말 하지도 않았는데…… 우웁!”
“쉿, 쉿…….”
상호는 황급히 태화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희에게 그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듯싶었다.
“응. 태화가 늘 그렇지 뭐~. 괜찮아. 응.”
[──?]
“응? 그건 잘 모르겠어. 빨리 돌아가진 못할 것 같은데. 으응. 지윤이한테 말해서 꾸웅이 잘 챙겨줘.”
[──.]
“응~. 나중에 또 전화할게~.”
나빛이 통화를 끊고는 티 없이 환한 얼굴로 상호를 돌아보았다.
“세희는 잘 있대요!”
“……그거 참 다행이네.”
자기가 세희의 속을 뒤집어 놨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세희가 삐친 이유는 명백했다. 자신은 나빛이 상호를 따라가겠다는 것을 막아줬는데, 정작 나빛은 상호와 함께 싸워서 활약을 하고 세희 자신은 학교에 남게 되었으니.
세희가 따지고 들면 상호는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음에 보면 또 대판 싸우겠구나…….’
그는 한숨을 쉬며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 * *
“전선 구축은 끝냈다.”
도현이 지휘통제실 벽에 걸린 지도를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기지도 다 활성화했고, 감지 마법이랑 정령 감시, 그리고 오르커드 대비해서 재래식 감시카메라도 빠짐없이 설치했어.”
의자에 앉아있던 민정이 물었다.
“지하는?”
“진동 감지도 하고 있어.”
“바다는?”
“땅이랑 마찬가지.”
도현의 손가락이 강원도 어딘가를 짚었다.
“지난 12시간 동안 3건의 침입 시도가 있었어. 감시가 약한 곳을 찾으려는 거겠지. 그리고 그 말은…….”
“전면전이 아니라 게릴라전을 계획 중이다?”
“그렇지.”
상호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큰 전투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예상하기를 노린 걸지도.”
함정일지도 모르니, 항시 모든 종류의 전투에 대비해야 했다.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허리를 꼿꼿이 편 나빛이 눈에 힘을 빡 주고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졸리면 그냥 자고 있어.”
“으아?”
꼬박꼬박 졸던 태화가 퍼뜩 눈을 떴다.
“아, 아냐. 다 듣고 있었어.”
“자, 그냥. 당장 30분 후에 출동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그냥 잘게.”
태화는 책상에 얼굴을 박고 본격적으로 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짓던 민정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상호야.”
“응?”
“왜 지금 전쟁을 일으켰을까?”
“악마의 눈을 없애려고겠지.”
“그래서일까?”
“……응?”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그러면?”
“단순히 그 목적이라면…… 마신의 회복을 기다리는 게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해.”
“……응?”
“그렇잖아.”
민정이 상호와 태화를 차례로 가리켰다.
“적군의 가장 강하고 위험한 무기를 없애려는데, 정작 자기들이 투자하는 자원은 그에 한참 못 미치잖아. 몬스터를 아무리 보내도 널 죽일 순 없잖아? 그걸 모를 놈들이 아닌데.”
“오르커드는 꽤 곤란했는데.”
“그걸로 널 죽일 순 없어. 그냥 도망쳐버리면 끝인걸. 설령 온 나라가 초토화된다 해도…… 너랑 태화만 살아있다면 마신은 죽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놈들도 알아.”
“그런……가?”
“놈들이 너희를 없애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은…… 마신의 회복을 기다리는 거였어.”
상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의 말이 전부 맞았다.
“그렇겠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답은 하나야.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면 당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민정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전쟁을 먼저 일으켜서 네가 사람들을 지키게 만든 거지. 마신이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음.”
“이번 습격에 대악마가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야. 놈들은 네가 도시를 지키려고 하는지, 포기하고 혼자 살아남으려 하는지 알아보려고 오르커드를 보냈을 거야. 다행히 나빛이 덕분에 놈들 의도대로는 안 됐지.”
“헤헤헤…….”
나빛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호는 그런 나빛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민정에게 물었다.
“그럼 놈들이 원하는 건 오히려 전면전인가?”
“그렇지. 어떻게든 가시적이고 분명한 위협을 주려 할 테니까. 반대로 우리는…… 최대한 빨리 침투해서 마신을 죽여야 하겠지.”
민정이 상호와 도현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때처럼.”
세 저승부대원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와 완벽하게 똑같은 임무. 그러나 확연히 달라진 상황. 비록 인원은 반의반으로 줄었으나,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이제는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 출발해야 해.”
민정의 눈빛에 결의가 비쳤다.
“전면전을 시작하면 피해가 극심할 거야. 가능한 한 빨리 출발해야…….”
“잠깐만, 잠깐만.”
상호는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아직 때가 아냐.”
“왜?”
“그놈이 있는 곳까지 어떻게 가는데?”
상호의 말에 도현이 눈을 끔뻑였다. 지금 뭔 소릴 하냐는 듯.
“가면 가는 거지 뭐가 문제야?”
“그러니까 몰래 가야 할 거 아냐.”
“굳이? 그놈 잡을 부대만 모아서 비행기 타고 가면 되지. 가다가 공격받으면 그대로 꼴아박으면 되고…….”
“아니, 봐봐.”
상호는 답답해서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직 그놈 상태가 어떤지 모르잖아.”
“그거야 잡으러 가기 전까진 당연하지.”
“형 말대로 비행기로 성대하게 꼴아박았다간 우리가 왔다는 걸 놈이 알 거 아냐? 그러면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 수도 있잖아.”
“그럼 쫓는 거지, 뭐.”
“아니 그니까 내 말은, 그렇게 질질 끌 수가 없다니까? 갈 거면 몰래 가야 돼.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어디서 어떻게 공격할지 모르게. 그리고 그 몰래 들어가는 것도 시간 제한이 있단 말야.”
도현과 민정이 어리둥절해했다.
“왜?”
“왜 질질 끌면 안 되는데?”
“그니까…….”
이 인간들 까먹었나 보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먼 곳을 돌아보았다.
“……내일쯤이면 알게 될 거야.”
* * *
“아하…….”
민정이 상호의 뒤통수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였구나.”
“……응.”
상호는 민정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작아진 얼굴. 작아진 손. 또 은호가 되어버린 상호는 민정에게 안긴 채 꼼지락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무턱대고 잡으러 갔다가 이 상태에서 공격받으면 끝장이니까.”
“그래서 질질 끌 수가 없는 거고?”
“응.”
“주기는 일정해?”
“거의 열흘…… 그치만 정확하진 않아.”
“열흘이라…….”
민정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그러면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몰래 닷새 만에 도착해서 기습하고, 또 닷새 만에 돌아올 계획을 짜야겠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렇겠지.”
상호는 조그만 입으로 웅얼거렸다.
“그런데 몰래 침입하는데 닷새 만에 도착하기가…….”
“어렵지.”
몰래 가면 속도가 느려질 테니. 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아직은 힘들겠네. 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해.”
“열흘이란 주기도 확실하진 않아. 좀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아.”
“그러게…….”
고개를 끄덕이던 민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상호야.”
“응?”
“네가 주기적으로 이렇게 된다는 거, 놈들이 알고 있을까?”
“……모르길 바래야지.”
이럴 때 악마 놈들이, 특히 대악마가 쳐들어오면 심히 곤란하니까. 상호는 민정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웨에에엥──
기지에 사이렌이 울리고.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지휘통제실 직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헌터 전원, 당장 전투 태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