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456. 조그만 웃음소리
누군가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쌤, 쌤.”
“……으음.”
“일어나 봐.”
태화의 다급한 목소리.
상호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지금 아침 아홉 시야! 빨리 일어나서 준비해야지.”
“준비?”
아닌 밤중에 홍두깨는 왜 찾냐. 상호는 비몽사몽간에 이해를 하지 못해 눈곱만 긁적였다.
“무슨 준비?”
“아이 진짜, 정신 차려! 오늘 놀러 가기로 했잖아. 오늘 목요일이란 말이야.”
“……뭐?!”
눈이 번쩍 뜨였다.
목요일은 바다에 가기로 약속한 날. 반 아이들 전원과 해련, 설미, 미진을 데리고 포항 쪽에 놀러 갈 예정이었다.
깜빡하고 알람을 안 맞춰 놓은 모양이다. 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어라?’
그러고 보면 어제는 화요일이었는데.
혹시 전투의 후유증으로 뇌에 문제가 생겨서 일시적인 치매가 왔나. 그는 침착하게 구구단을 외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제 화요일 맞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았다. 방학이라 출근도 없고 해서 날짜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어제는 화요일이 맞았다.
사람의 시간 감각이 폼이 아닐진대, 수요일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태화야.”
“웅.”
“오늘이…… 목요일이라고?”
“웅.”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수요일이었잖아. 기억 안 나?”
“아니……. 잠깐만, 잠깐만. 내 핸드폰 어딨지?”
“여기.”
상호는 태화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화면에 뜬 날짜는 8월 2일, 목요일.
‘8월……?’
8월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나.
꼭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정신은 말짱한데 핸드폰은 그가 미쳤다고 외치고 있으니.
‘내가 어제 착각했었구나.’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아홉 시면 늦었는데. 약속 시간은 여덟 시니 선생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상호는 황급히 일어나 허둥지둥 옷을 챙겨입었다.
태화가 현관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
“짐은 내가 다 싸 놨어.”
“으응, 땡큐……, 잠깐만.”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옷을 입다가 굳어 버렸다.
“……네가?”
“웅.”
뭐 문제 있냐. 태화가 따지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다.
애가 원래 이렇게 부지런한 애가 아니었는데.
‘이상해…….’
상호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보았다. 해련과 설미, 미진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
그런데 해련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강 선생~ 우리 먼저 가 있을게~
기다리다 지쳐서 출발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면 더 미안했을 테니.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곧 출발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가자, 태화야.”
“웅.”
둘은 짐을 챙겨 방을 나섰다.
* * *
“달려~!”
“달리고 있잖아, 임마.”
상호는 바닷가 도로에서 차를 몰며 핀잔을 주었다.
출발도 늦었는데 도착도 늦으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최대한 쌩쌩 달려보려 했지만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예상보다 한 시간은 늦어버렸다.
차는 곧 예약해뒀던 펜션 앞마당에 들어섰다.
‘응?’
어째 마당이 한산한데.
먼저 도착했다던 해련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상호는 텅 빈 주차장을 보고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뭐지?’
뭐 살 게 있어서 나가기라도 했나.
설마 펜션을 착각했나. 혹시나 싶어서 확인해 봤지만 이곳이 맞았다.
‘대체…….’
아침부터 위화감의 연속.
주차를 마치고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아이들이 밖으로 끄집어냈다.
“쌤, 뭐해? 나와.”
“아니, 확인할 게 있어서…….”
“오늘 수요일이야.”
“잠시만 기다려 봐, 교장선생님한테 연락…… 엉?”
상호는 멍하니 태화를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오늘 수요일이라고, 쌤. 이걸 속네.”
아이들이 차에서 짐을 꺼내 펜션으로 나르며 태연하게 말했다.
“선생님 핸드폰 시간 바꿔놨어요.”
“왜……?”
“선생님 어른들이랑 오면 어른들끼리만 놀잖아요.”
“어른들 빼고 놀려고 하루 먼저 왔어요, 멍.”
“뭐? 그치만…… 문자가…….”
“미래가 선생님 폰 해킹했어요.”
“간단하죠.”
미래가 콧대를 높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된통 속았다. 상호는 얼이 빠져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잠깐만, 그럼 이 펜션은……? 예약은 내일…….”
나빛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해놨어요.”
“아니, 먼저 묵고 있던 사람이 있었을 거 아냐. 성수기라 가뜩이나 예약하기 힘든데…….”
“저희는 선생님이 어디로 놀러 가자고 했을 때부터 작업하고 있었어요…….”
방긋 웃는 나빛의 미소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저희 손바닥 안에 있는 거예요…….”
“뺙.”
“…….”
상호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래, 알았어. 선생님들은 내일 알아서 오겠지…….”
“밥해!”
“근데 이러면 나 혼자 너희 다 돌봐야 하잖아…….”
“알았으니까 밥부터 해. 배고파.”
“나는 놀러 온 게 아니게 되잖아…….”
“밥해!”
“므아!”
“제발…….”
가방에서 식재료를 꺼내는 상호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밥 한 끼 먹였을 뿐인데 가방이 홀쭉해졌다.
원래 계획은 2박 3일이었는데. 하루 일찍 와서 3박 4일이 됐으니 중간에 식재료를 더 사오거나 외식을 더 많이 하게 될 듯했다.
어쨌든 20인분을 혼자 만들어야 했던, 전쟁 같은 첫 끼니를 무사히 넘기고.
상호와 아이들은 해변으로 향했다.
“선생님.”
곁에서 걷던 이츠키가 그를 불렀다.
“왜 선글라스 쓰셨습니까?”
“햇빛 눈부시잖아.”
“여자들 보려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그 반대의 이유였다. 남을 보려는 게 아니라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이제 더 이상 절름발이도 아니고, 애꾸눈은 선글라스로 가렸지만, 나이와 외모를 불문하고 남자 한 명이 여자 십여 명을 달고 다니는데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달고 다니는 게 아니라 끌려다니는 거지만.
세상 사람들이 거기까지 알 리 만무했다.
‘그래도 눈치 있는 사람이면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다.
해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피서철이기도 했고, 원래 인기가 좋은 곳이기도 했다. 다만 상호가 예상한 것보다도 사람이 많아서,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아이들과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바다를 자주 와보지 않아서 이렇게나 붐빌 줄 몰랐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시야에 보일 때마다 꼭 한 번씩 상호의 일행을 흘끗했다. 어쩌면 최소 두 번씩은.
‘시선집중이구만…….’
상호는 일단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짐을 내려놓자 아이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웃옷도 훌러덩, 반바지도 훌러덩.
태화가 바지를 내리다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호를 돌아보았다.
“쌤, 왜 고갤 돌려? 어차피 벗어도 수영복인데.”
“그냥.”
펜션에서 미리 갈아입고 오긴 했지만. 어쨌든 상호는 먼바다만 바라보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정확히는 수영복만 남기고 다 벗은 아이들이 상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선생님~, 제가 보트 태워 드릴게요, 헤헤…….”
“나빛아, 선생님은 짐 보고 있을게…….”
“안돼요~.”
잡아끄는 힘은 보잘것없었으나 상호는 거기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 같이 가버리면 짐은 누가 보나.
“얘들아, 다 가면 어떡하냐, 몇 명은 남아야지…….”
“제가 남을게요.”
초란이 먼저 그늘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가은이 앉아 있었다. 가은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몸을 꽁꽁 싸맨 채로 그저 앉아서 바다만 보았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남자들을, 보기도 싫다는 듯.
상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두 명 더 남아. 혼자 다니지 않게.”
“아, 그럼 제가…….”
하솔도 그늘로 향했다.
남은 건 한 명.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누가 남을 것인지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빛이 이서를 가만히 바라보며 보내는 눈빛이, 상호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님에도 뒷목을 서늘하게 했다.
물론 나빛의 마음속은 ‘안 나서면 죽는다’가 아니라 ‘이서가 남았으면 좋겠는데~’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압박이 된다는 것이 나빛의 무서운 점이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다 못해 손사래를 쳤다.
“됐어, 됐어. 태화가 남아.”
“뭐어?! 왜 나야!”
“교대로 놀면 되잖아. 믿음직한 네가 먼저 동생들 보고 있어.”
“우씨,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
태화가 꿍얼거리며 가은과 초란, 하솔에게 향했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어진 아이들은 상호의 팔을 잡아끌고 등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쌤예~. 한번 질펀~하게 젖어보입시데이~.”
“너무 붙지 마. 사람들 이상하게 본다…….”
“그럼 업어주세요, 헤헤…….”
“뜨악! 나빛아, 나빛아……. 그렇게 막 업히지 말고…….”
“일단 한 번 담그는 겁니다.”
“므앙.”
“어풉! 꼬로록…….”
“꺄하하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물속에서도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 *
하마터면 자신이 지켜낸 바다에 수장당할 뻔했다.
다행히 바다에 서른 번쯤 처박힌 후에는 아이들도 질렸는지 자기들끼리 물놀이를 하러 갔다. 바다 한복판에서는 나빛의 황금빛 성력 보트가 난폭하게 질주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언니 달려~!”
“부아아앙~.”
상호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튜브에 누워 한가롭게 둥둥 떠다녔다.
헌터란 직업은 원래 보람을 느끼기 힘든 직업이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노는 것을, 또 사람들이 노는 것을 보니 악마 놈들을 막아내기를 꽤나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옛 기억이 났다.
‘감상이 어때요?’
해련의 목소리.
‘우리가 지켜낸 아이들이잖아요.’
그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때는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했다. 잘 자랐네요, 하고 흐릿하게 맞장구칠 뿐. 아이들의 밝은 모습은 오히려 그에게 드리워진 전쟁의 그늘을 선명하게 만들 뿐이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자랑스럽습니다.’
상호는 눈을 감았다.
‘우리 부대원들이…….’
그때 무언가가 그의 발끝에 닿았다.
슬며시 눈을 떠 보니 튜브를 탄 세희가 동동 떠 있었다.
“선생님.”
“으응.”
“저한테 뭐 할 말 없으세요?”
상호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세희를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수영복 예쁘네.”
“……그거 말고요.”
표독한 눈빛이 그를 찔렀지만, 세희의 볼은 이미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뭐 해줄 말 없으세요?”
“글쎄…….”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연히 뭣 때문에 싸우러 갔는지를 물어보는 것일 터. 하지만 상호는 쉬이 말해주지 않았다.
일단은 장난을 치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잘 놀다가 한가롭게 쉬고 있는데, 세희가 싫어할 이야기를 해서 말다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예쁘고 착한 세희가 무슨 말이 더 듣고 싶을까…….”
“장난치지 마요.”
세희가 상호의 발을 잡고 발바닥을 마구 긁었다.
“지금 곤란하시면 이따 밤에 얘기해요.”
“아야야, 간지럽다, 세희야…….”
“약속하세요.”
“그래, 그래, 약속……. 에이, 그만해!”
상호는 폭소를 터트리며 세희의 손을 피해 다리를 뺐다.
세희도 서운했던 건 어느새 풀렸는지, 상호가 누워 있는 튜브를 뒤집어엎으려 장난을 쳤다. 둘은 그렇게 튜브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뒤엉킨 채로 숨을 골랐다.
“휴전, 휴전하자, 세희야…….”
“항복 아니면 안 돼요.”
“항복, 항복…….”
“제가 아는 선생님은 항복 안 해요.”
“……응?”
“무적이니까.”
그의 위에 올라탄 세희가 씩 웃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저랑 싸워주는 거예요.”
“……으응.”
“약속이에요.”
“응.”
상호도 씩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할게.”
그러자 세희가 그의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는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튜브의 구석을 눌러, 함께 자빠져 물속에 첨벙 빠져들었다.
“으악……!”
“아하하…….”
뜨거운 태양 아래, 왁자하게 인산인해를 이룬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물보라 속 맑은 웃음소리가 조그맣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