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455. 약속이기에
“……후우.”
세희에겐 말하지 않았다.
“후…….”
상호는 강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는 잘게 토막 난 악마들의 시체가 어지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흐르는 피가 어찌나 많은지, 일대가 붉은 진창이 되어 발을 옮길 때마다 질퍽거렸다.
그를 에워싼 악마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알고 온 겁니까?”
“뭐가.”
“저 산에 대해서.”
“물론.”
상호는 뺨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골렘이잖냐.”
“알고는 있군요.”
악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귀하라도 우리를 상대하면서 산까지 부수기는 무리입니다. 서로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귀하의 전력을 데려오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때는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조촐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꺼져.”
상호는 혀를 찼다.
태화를 데려왔다면 악마 몇 놈을 죽일 수는 있었겠지만, 전투 중에 쓰기에는 지나치게 번거로운 방식이었다. 데려와 봤자 위험해지기만 했을 터.
그러므로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핵만 부수고 조용히 돌아갈 테니.”
“그렇게 놔둘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테지요.”
쓰러져 있던 악마들이 일어났다.
“귀하도 참으로 독종입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단 걸 알 텐데도 포기하지 않으니……. 그 점에서는 본받을 만하군요. 무모한 건지 멍청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끈기 있는 거지.”
“그 이유가 뭡니까?”
이유.
한반도로 오는 공격로가 늘어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너희는 한반도로 총공세를 퍼부을 것이고, 민간의 피해가 지난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기 때문에. 그걸 막으려면 지금 부숴놔야 하기 때문에.
그 외에도 이유는 많았지만.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약속했거든.”
바다로 놀러 가야 하기 때문에.
상호는 강검을 들어 악마를 겨눴다.
“근데 네놈한텐 설명해도 모를 거야. 그러니 시답잖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덤벼봐라. 다시 전력으로.”
“이제 알겠습니다.”
악마가 피식 웃었다.
“무모하고 멍청하군요.”
악마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르고 싶었으나 팔이 무거웠다.
‘……망할.’
그래도 검을 들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으니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힘차게 강검을 움켜쥐었다.
검을 휘두른 궤적을 따라 악마의 선혈이 흩뿌려졌다.
“키힉…….”
“키아악!”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불사의 군단과, 이따금씩 날아드는 마법들. 상호는 그 모든 것을 강검으로 베어나가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때.
츳……
발톱 하나가 그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순간 죽음이 눈앞을 가리려 했을 정도로. 상호는 잠시 캄캄해졌던 시야를 눈에 힘을 주어 되찾고 놈의 목을 베었다.
퍼억
놈의 머리통이 저 멀리 날아갔다.
선뜩했던 가슴이 쿵쿵거리며 식은땀이 살짝 배어났다. 발톱이 조금만 빨랐다면 호신강기를 제때 강화하지도 못하고 베였을 터였다.
죽음의 공포가 마음에 엄습해 왔다.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세희에겐 그가 어디를 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세희의 귀에 흘러 들어갈까봐. 해련에게만 간단하게 설명하고 왔을 뿐.
그가 싸우러 간다는 것을 알려주면 세희가 눈에 불을 켜고 따라오려 할 것이 뻔했기에.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훌쩍 떠나왔다.
‘못 죽어.’
그래서 지금은, 죽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불덩이가 입을 쩍 벌리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상호는 강검을 채찍처럼 휘둘러서 불덩이를 흩어버리고는 돌산을 흘끗했다.
방어막을 펼친 신비의 악마가 그에게 마법을 날리고 있었다.
‘저놈을 조져야 하는데…….’
붙잡는 놈들이 너무 많다.
가까이 다가가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멀리서 강기를 날리자니 저 방어막이 거슬렸다.
산을 통째로 날려버리려면 날카로운 강기가 아니라 거대한 강기를 날려야 하는데, 그러면 아무리 천색창염의 초혼강기라도 저 방어막에 부딪혀 대부분의 에너지를 잃고 산을 조금 흔드는 정도로 끝날 터였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퍼억
상호는 강검을 크게 휘둘러 악마를 떨쳐내고 땅을 박찼다.
하늘 높이 뛰어오른 그를 향해 악마들이 날개를 펼치고 쫓아왔다. 그의 발치까지 따라온 악마들이 검고 붉은 손을 뻗어 발을 붙잡으려 했다.
그래도 그는 놈들을 걷어차고 베어내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후욱……
쏜살같이 날아오른 그의 몸이 구름에 둥근 구멍을 남겼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위로 올라간 상호는, 충분한 높이에 다다르자 양손에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며 깍지를 끼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 양손이 서서히 땅을 향했다.
동시에 그의 몸도 앞으로 기울었다.
쉬익
그의 몸이 바람을 가르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구름을 향해서. 그 너머의 돌산을 향해서. 그 안에 있는 골렘의 핵을 향해서.
마치 유성처럼, 푸른 불꽃에 휩싸인 채로.
“키익……!”
의도를 알아차린 악마들이 속도를 줄여보기 위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의 몸을 휩싼 불꽃에 닿는 족족 터져나갈 뿐이었다.
상호는 속도를 높여 구름을 뚫었다.
쿠구구구……
이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니라 운석이라도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구름을 헤치자 나타난 것은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의 방어막으로 뒤덮인 돌산.
신비의 악마가 핵을 지켜보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소용없어.’
부질없는 발악일 뿐.
천색창염의 완성된 초혼강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부순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호는 방어막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다같이…….’
손이 방어막에 닿았다.
* * *
“야.”
“응?”
큰앞니는 수풀을 헤치다 말고 긴코를 돌아보았다.
“왜?”
“그 인간, 성공했을까?”
긴코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큰앞니는 헛웃음을 쳤다.
“너도 이제 그 인간이 성공하길 바라는 거냐?”
“궁금하잖냐. 그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긴코가 아닌 척 혀를 찼지만,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큰앞니는 그걸 알고 킬킬거렸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어쩌겠어. 구경하다 뒈지기 싫으면 모르는 채로 살아야지…….”
그때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서 있는 땅이 덜덜 떨리고, 숲의 나무들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우지직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긴코와 큰앞니는 당황하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뭐지?”
“설마…… 크읍!”
푸화아악
한 박자 늦게 날아든 풍압이 둘을 덮쳤다.
작고 가벼운 고블린들의 몸이 붕 떴다가 내동댕이쳐졌다.
“악!”
“아이고…….”
큰앞니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불어온 곳은 골렘의 핵이 있는 방향이었다. 산맥의 등성이 위로 흐릿하게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긴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인간이 한 걸까?”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누가 이겼는지, 누가 옳았는지.
큰앞니는 폭음이 난 산맥을 등지고 다시 수풀을 헤쳤다.
* * *
“선생님…….”
나빛이 코를 훌쩍였다.
“어디 갔어…….”
“모르겄디.”
지윤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상호가 사라진 지 일주일 째. 그녀들이 있는 곳은 상호의 방. 있는 사람은 3학년 전원과 미래.
소파에 앉은 세희는 TV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세희의 주변에서는 악마를 만났을 때처럼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마, 세희야.”
“응.”
“니는 머 아는 거 읎나.”
“없어.”
하지만 짚이는 건 있어 보였다. 저렇게 넋이 나가 이따금씩 원망하는 눈빛을 짓는 걸 보면.
지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한숨을 쉬었다.
“어델 간 기고. 아무헌티도 말을 안 허고……. 누구 아는 사람 읎나?”
“여자 만나러 갔겠지.”
침대에 엎드린 태화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싸우러 간 거면 날 데려갔을 거 아냐. 눈이 나한테 있는데. 그냥 평소처럼 아닌 척 여자 꼬셔서 실수인 척 자고 있을 듯?”
“그 말도 맞네.”
은율이 고개를 끄덕이고 세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을 거야.”
“알아.”
세희의 눈 밑이 씰룩였다.
“말도 안 하고 간 게 빡쳐서 그래.”
한기가 방에 휘몰아쳤다.
돌아오면 또 한 판 하겠구나. 전교에 한바탕 태풍이 불 것이다. 미래는 주차장 트럭 위에 놓인 슈트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고?”
지금은 방학. 학교에 남은 아이들은 가은과 이서를 제외하면 다 이 방에 있는데. 가은은 올 것 같지 않고.
고개를 돌린 지윤의 시야에 문을 여는 상호가 들어왔다.
“앗!”
“선생님!”
나빛이 펄쩍 뛰어 현관으로 달려갔다.
상호의 꼴은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머리에는 진득한 무언가가 말라붙어 있고, 얼굴은 흙먼지가 묻어 꾀죄죄, 옷도 무언가에 젖었다가 말라서 버석거리고, 하얀 소금기가 전체적으로 묻어 있었다.
달려들던 나빛이 멈칫했다.
“선생님…….”
“응?”
“싸우고 오셨어요?”
상호가 씩 웃었다.
“운동하다 왔는데?”
거짓말도 너무 성의가 없다.
그럴 만큼 피곤에 절은 목소리. 나빛은 무어라 따지지도 못하고 앞을 비켜주었다.
“얼른 씻고 주무세요…….”
“으응.”
상호는 안으로 들어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팔짱을 끼고 선 세희가 표독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생님.”
“응.”
“운동하다 오셨어요?”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씩 웃으며 답했다.
“아니.”
나빛이 물었을 때와는 다른 대답. 그 말에 나빛의 눈동자가 핑핑 돌았다.
“어? 방금 저한텐…….”
“알았어요.”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무시고 일어나면 얘기해요.”
“으응…….”
상호는 흐릿한 미소를 짓고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순간 시야가 어지러워지며 걸음이 비틀거렸다.
“……으음.”
“쌤예.”
넘어질 뻔한 그를 지윤이 덥석 붙잡았다.
“괘안심꺼?”
“응.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이만큼 오래 싸운 적이 없었다. 이만큼 무리한 적은 있지만.
상호는 고개를 들어 지윤을 바라보다가, 지윤의 손과 옷에 묻어난 피와 흙과 소금을 발견했다.
“아이고, 씻어야겠다, 지윤아……. 미안.”
“예?”
지윤은 눈을 끔뻑이다가 씨익 웃었다.
조금 장난스럽게.
“아아, 괘안심더. 같이 씻음 되겠네예.”
“……응?”
“비칠~비칠 거리가꼬 혼자 씻다 넘어져뿌면 어뜨칼랍니꺼. 지가 씻기 드릴게예. 지는 동생덜 씻기바서 괘안타 아입니꺼.”
“아니, 아니 잠깐…….”
“들어오이소~.”
지윤은 상호를 잡아끌어 욕실에 들어가서는 곧바로 문을 잠가 버렸다. 아이들이 막지 못할 만큼 빠르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이들은 멍하니 눈만 끔뻑이다가, 곧 눈에 불을 켜고 문을 부숴버릴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오지윤! 문 안 열어?!”
“느덜이 누굴 씻기 봤겠노. 내헌티 다 맡기라. 하이구야, 쌤예~. 이기 다 무신 흙입니꺼. 싹 베끼뿔고 담궈야겠네예.”
“지윤아, 지윤아! 잠깐만…….”
“얌전히 벗으이소. 구석구석 씻기 드릴게예. ……우왓!”
문 너머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이게 머입니꺼. 어머, 어머…….”
“아니! 거기까지 씻기지 말라고!”
“팔팔해졌네예, 밖에서는 막 쓰러질라 캤으믄서. 이거 요래 씻기믄 되겠습니꺼? 요래? 싹 까가꼬?”
“으악……!”
“문 열라고, 개년아아아!”
“비켜, 내가 부술게.”
세희의 말에 상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다 벗겨지고 있는 꼴을 아이들한테 보였다간.
그는 내공을 뻗어 문에 불어넣었다.
“얘들아, 제발……. 지금 들어오면 안 돼…….”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문을 두들겼다.
쾅 쾅
“어라, 안 부서지는데?”
“쌤이 막고 있나 봐.”
“같이 하자. 하나, 둘…….”
“얘들아……?”
“셋!”
“제발……!”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박살난 문.
상호의 애잔한 목소리는 그 사이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