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454. 대적자
“굳이 날 불러낸다는 건…….”
상호는 느릿하게 바위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악마의 심장을 보지 못할 거라고 착각하는 건가?”
“허세를 부려도 소용없다.”
신비의 악마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놈의 힘은 마법과 주술. 그는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싸울 준비도, 도망칠 준비도 충분히 되어 있었다.
“허세인지 아닌지 니가 어떻게 알아?”
“허세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었겠지.”
악마가 피식 웃었다.
“네가 그렇게 당당한…… 아니, 당당한 척을 하는 이유는, 지금 도망쳤다가는 네가 아닌 다른 자에게 악마의 눈이 있다는 것을 들키기 때문이다. 틀렸나?”
“…….”
이놈들과는 길게 말해 봤자 득 될 게 없다. 상호는 강검을 만들어 손에 쥐었다.
“그럼 지금부터 한번 알아볼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지.”
수상한 마나의 기운이 상호의 주변을 스쳤다.
상호는 땅을 박차고 옆으로 뛰어 그 마나를 피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뒤틀렸다.
상호의 내장이 있었던 자리였다.
“네가 어떻게 악마의 눈을 얻었는진 모르겠지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귀에서 먼지 가까운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지금, 네게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군.”
“……쯧.”
상호는 혀를 차고 강검을 던졌다.
쏜살같이 날아간 비수는 반투명한 보호막을 꿰뚫고 악마의 백의를 찔렀다. 인간이었다면 오른쪽 옆구리였을 부분.
놈이 몸을 움찔했다.
‘엇비슷하게 맞췄나.’
저 주변에 악마의 구멍이 있을까.
그러나 신비의 악마의 몸은 촉수 덩어리. 저 백의 안에서의 움직임을 꿰뚫어 볼 수도 없거니와, 싸우는 도중에 촉수 하나하나의 위치를 외우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주변에 수백 개의 강검이 나타났다.
평소의 것보다 가느다랗고 작지만, 대신에 그만큼 많았다. 상호는 강검을 조종해 악마에게 날렸다.
“……!”
악마는 소리 없이 당황하며 허공에 검은 원을 만들고는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은 순간이동을 왜 안 쓰지?’
태화 같은 악마 융합체들은 잘만 쓰고 다니는데.
뭔가 이유가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해결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는 하늘로 도망친 악마를 향해 수백 개의 강검을 내쏘았다.
거꾸로 올라가는 강검의 폭포가 신비의 악마를 덮쳤다.
콰아아아……
갈가리 찢어진 백의 쪼가리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폭포가 지나가고 난 후에 보인 것은, 수많은 강검에 수많은 방향으로 꼬챙이가 된 촉수 덩어리.
상호는 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살아 있냐?”
“……하나 물어보자.”
촉수가 꿈틀했다.
“네놈은 여기 왜 온 거지?”
“니들이 이상한 짓을 하길래.”
항공사진이나 인공위성 따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리라. 상호는 이죽거리며 강검을 손에 쥐었다.
“우리 하늘에는 눈이 달려서, 인간한테 자기가 본 걸 알려주거든.”
“……흥.”
촉수가 낱낱이 떨어져 내렸다.
수많은 지렁이처럼 변한 악마는 땅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상호는 강검을 땅에 박아 폭발시키려 했으나, 지렁이 중 하나가 남아 말을 했다.
“이미 우리의 신께 말씀드렸다.”
상호의 눈가가 씰룩였다.
“살아서 도망칠 생각은 포기하도록…….”
지렁이는 그 말을 남기고 땅으로 들어갔다.
“쳇.”
상호는 강검을 거두고 혀를 찼다.
곧 악마들이 몰려올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아직 저 검은 수정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는데.
한참 고민에 빠진 그의 시야에 구석에서 벌벌 떠는 두 마리의 고블린이 들어왔다.
“끼륵…….”
고블린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상호는 고블린들을 딱히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놈들을 지금 처리한다고 해서 전쟁에 유불리가 더해지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는 고블린들을 놔두고 돌아섰다.
“끼엑?”
“키이…….”
고블린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방망이를 치켜들고는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상호에게 달려왔다.
‘뭐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상호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놈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두 고블린은 그의 곁을 빙빙 돌며 무어라 껙껙댔다.
“뭐라는 거야, 임마.”
등 좀 보였더니 사냥본능이 깨어났나. 상호가 눈을 끔뻑이다 강검을 꺼내려는 그때.
왼쪽에 있던 녀석이 무언가를 흉내 내었다.
부자연스러운, 무거운 걸음걸이.
“골렘?”
그의 입에서 자동으로 그 단어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움직이는 암석, 바다 위로 떠오른 땅.
‘……대륙을 골렘으로 만들고 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 상상도 되지 않는 규모에 상호는 잠시 뇌가 굳었다.
그렇지만 곧 납득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워낙 많이 겪어서.
‘신비의 악마란 놈은 그런 것까지 할 수 있나…….’
그렇게 여기고 넘어갈 뿐이었다.
골렘의 핵의 크기는 골렘의 크기에 비례한다. 저 반으로 조각난 수정은 제법 크긴 했지만, 수정의 크기도, 마나의 규모도 대륙을 움직일 정도는 못 되었다. 신비의 악마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고.
여기 있던 건 중계기일 뿐.
본체가 따로 있는 게 분명했다.
‘이놈들이 알고 있는 것 같군.’
손짓하는 모양을 보니 그런 듯했다.
상호는 걸음을 떼며 놈들에게 말했다. 알아들을 순 없겠지만.
“안내해봐.”
* * *
“이 길이 맞아?”
긴코가 수풀을 헤치며 큰앞니에게 물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
“맞다니까?”
큰앞니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가리켰다.
“멀뚱이표 새 별자리 안 외웠냐? 저게 바다뱀자리잖아. 학교에서 벽화 안 읽었냐?”
“새끼……. 그래, 니 아빠 오우거다.”
긴코는 짜증을 내고는 뒤를 흘끗했다.
인간. 검은 옷을 입은 애꾸눈의 사내가 둘을 따라오고 있었다.
“근데 이래도 돼?”
“뭐가?”
“인간이잖아.”
인간은 멍청하고 나약한 주제에 잔인한 족속.
개체 하나하나는 고블린보다 강했지만, 몬스터 전체의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나약했다. 개중에 몇은 특출나게 강한 경우도 있지만, 일단 지능은 고블린보다 떨어진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언제 돌변해서 우릴 죽일지 모른다고.”
“그럼 어때?”
큰앞니는 앞만 보고 걸었다.
“너도 봤잖아. 신의 대리자가 뱀박이 죽인 거. 결국 그놈이 그놈이야. 뒤에 놈은 우릴 더 오래 살려주고 있고, 어쩌면 조용히 보내줄지도 모르지.”
“그래도 인간인데…….”
“꼬우면 가. 난 뱀박이의 복수를 한다.”
“……쯧.”
긴코는 툴툴거리면서도 떠나지는 않았다.
“신에게 들키면 더 잔인하게 죽을지도 몰라. 복수에 눈이 멀면 끝이 안 좋다는 거 잊지 말라고. 난 분명히 경고했어.”
“신이 신다워야 신이지. 툭하면 죽여대는 게 무슨 신이야?”
“……배교자가 되자는 거냐?”
“대리자가 저 인간을 무서워했어.”
큰앞니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시종일관 압도당하다가 도망까지 쳤잖아. 저자라면 자유를 줄지도 몰라. 우리 모두에게…….”
뱀박이와의 의리, 그리고 종족의 실리. 큰앞니는 고블린답게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긴코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얌마, 너 그렇다고 배교를 하자는 거냐? 원래 세상에서 인간을 싸그리 치워준 게 누구야? 농사지을 땅을 지들이 다 처먹고는, 평평한 땅은 다 자기들 거고 농사는 지들만 지을 줄 안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을 없애준 게 누구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둑질 좀 하려고 하면 빤딱이는 갑옷 입고 말 타고 쳐죽이던 놈들을 없애준 게 누구냐고? 엉? 벽화 안 읽었냐?”
“이건 핍박이다, 긴코. 절대 자유가 아니야.”
큰앞니는 또렷한 눈빛으로 긴코를 돌아보았다.
“가장 멍청하고 탐욕스런 종족이나 서로의 자유를 박탈한다. 또 가장 나약하고 의지 없는 종족이나 거기에 순응하고 살지. 긴코. 너는 인간들처럼 살 거냐? 아니면 고블린답게 죽을 거냐?”
“…….”
“뱀박이를 생각해라.”
긴코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나저나 슬슬 쉬어야 할 시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수정을 관리하다가 온종일 걷고만 있으니, 아무리 고블린이 강인한 종족이라도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뒤의 인간은 지치지도 않는지 그저 걷기만 했다. 마치 강철로 만든 골렘처럼.
‘이대로는 안 되겠다.’
큰앞니는 인간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어이, 인간.”
인간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힘은 신의 대리자를 쓰러트릴 만큼 강하지만 지능은 낮아 보인다. 큰앞니는 혀를 끌끌 차고 긴코를 돌아보았다.
“말이 안 통할 것 같은데. 잠은 어떻게 하지?”
“자는 척을 하면 알아듣지 않을까? 아무리 멍청한 인간이라도…….”
둘은 슬그머니 걸음을 멈추고 머무를 곳을 찾았다.
긴코가 나무둥치 옆에 자리를 잡자 인간 사내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이놈들이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큰앞니는 속으로 침음했다.
‘이 멍청한 인간을 믿어도 될는지…….’
그래도 살해당한 뱀박이를 떠올리며, 이 인간 사내가 그래도 신과 대리자들보단 낫다는 확신을 가지고,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했다.
말을 알아들었을까.
인간이 돌아서서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거 어디 가는 거야?”
“따로 자고 오겠다는 거겠지.”
그러자 긴코가 눈을 빛냈다.
“지금 도망치자.”
“뭐? 야, 저 놈을 이용해야 종족이 자유를…….”
“합리적으로 생각해, 인마. 배교고 나발이고 우리부터 살아야 할 거 아니냐. 지금 도망치면 살 수 있어! 대리자가 굳이 우릴 찾아내지도 않을 거고…….”
“……으음.”
그것도 맞는 말. 큰앞니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지금 도망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그때. 풀숲에서 무언가가 쑥 튀어나왔다.
큰앞니와 긴코는 화들짝 놀랐다가, 나타난 것이 아까의 그 인간 사내임을 깨닫고는 안도했다.
그런데 사내의 손에 덩굴이 들려 있었다.
아주 길고 질긴 덩굴.
“……응?”
고블린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 * *
꼬박 사흘이 걸렸다.
보폭이 좁은 고블린들을 무언의 압박으로 쪼아가며, 잠도 최소한으로, 식사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걷기만 했다.
그렇게 다다른 곳은 거대한 산맥 속 어느 돌산.
상호는 저 멀리 위치한 돌산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하군.’
산으로 묻어도 감출 수 없는 마나의 기운. 이 정도라면 능히 대륙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고블린들을 돌아보며 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키이익…….”
고블린들은 그를 힐끔거리며 왔던 길로 돌아갔다.
둘의 모습이 산맥 너머로 사라졌을 때쯤, 상호는 돌산을 향해 걸어갔다.
돌산에는 무언가가 떼를 지어 계속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꼭 위로 솟은 흰개미집에서 흰개미가 나오는 모습을 닮았다. 다른 점이라면 피부가 초록색이고, 사람을 닮았다는 것.
오크였다.
‘미완성이었나.’
그는 오크들이 짊어진 검은 수정을 보았다.
필시 대륙 골렘의 핵의 재료. 저 산의 내부에서는 사흘 전 보았던 검은 수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수정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걸 부숴야 한다.
다시는 복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쿠구구구……
두 손에 거대한 기운이 맺혔다.
상호가 손을 들자 공기가 진동하며 낮은 신음을 뱉었다. 먹구름 속 천둥이 울리고 울리다 사라지는 소리처럼.
돌산 위에는 어느새 백의를 고쳐 입은 신비의 악마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막을 셈인가.’
상호가 놈을 향해 기운을 내쏘려는 순간.
발밑에서 손이 하나 튀어나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흙에 반쯤 파묻힌 악마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니. 함정이었던 걸까. 그러나 상호는 놀라지 않았다. 시간을 사흘이나 줬는데 아무런 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터.
그는 씩 웃으며 다른 쪽 발을 들어 올렸다.
“알고 있었어, 새끼야.”
퍼억
걷어차인 악마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