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453. 교두보
“이게 한 달 전 사진.”
도현이 프로젝터 화면을 두드렸다.
하얀 화면에는 사진 두 개가 나란히 띄워져 있었다. 둘 다 하늘에서 촬영한 아르게스의 항공사진. 한 지역을 찍었으나 날짜는 다른.
언뜻 보기엔 똑같아 보였다.
“이게 오늘 사진.”
“뭐가 달라진 거야?”
“남서쪽을 잘 봐봐.”
자세히 살펴보니 오늘 사진에서는 남서쪽 땅이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한반도를 향해서.
상호는 그 조그만 혹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산 같은 거라도 무너졌대?”
“저 튀어나온 게 경기도보다 더 커.”
10km짜리 산이 한쪽으로만 무너져도 저런 건 안 생긴다. 도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들이 뭔가 꾸미고 있는 거야.”
“그렇겠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반도로 오는 길목이 좁으니까, 공격로를 하나 더 뚫으려는가봐.”
“그래.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린 두 배 이상으로 골치 아파질 거고.”
“……잠깐만.”
어째 말투가 수상했다. 그를 여기로 부른 것도 그렇고.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 눈을 끔뻑였다.
“나보고 해결하라는 거야?”
“같이 가자면 같이 가고.”
“폭탄 같은 걸로 어떻게 안 돼?”
“된다 하더라도 원인을 찾아야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만큼 바다를 메운 게 말이 되냐. 터무니없는 뭔가가 있어. 그걸 알아내야 앞으로 대비를 하지.”
“……으음.”
말이야 맞는 말인데.
그는 고민하다가 도현과 눈을 마주쳤다.
“몰래 쓱 들어가서 꼬장 놓고 나오라고?”
“그게 제일 낫잖아?”
하긴 놈들의 감시체계는 인간보단 허술한 편이고.
한반도로 오는 공격로가 하나 더 생겼다가는 지난번 전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피해가 생긴다. 게다가 놈들은 이제 더 이상 다른 나라에는 집중하지 않을 테니, 깨어난 악마들을 제하더라도 몬스터들의 공세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갈게.”
“민정이랑 같이 가든가.”
“아냐, 됐어. 혼자가 편해. 몰래 갔다가 몰래 나오면 되지.”
“그래.”
도현이 핸드폰을 들며 물었다.
“바다로 들어가는 게 낫겠지?”
* * *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배를 타게 되었다.
상호는 난간에 기대어 눈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리려나…….’
일주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일주일 동안 먹고 자는 것은 걱정이 없으나, 그때쯤이면 아이들과 바다에 놀러 갈 예정이었다. 다들 많이 기대하고 있을 텐데.
‘아니, 내가 들뜬 건가…….’
사실, 아이들이 기대하는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그냥 그가 기대하고 있기에 아이들도 그러지 않을까 지레짐작할 뿐.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선장이 다가왔다.
“도착했습니다, 헌터님.”
배가 있는 곳은 바다 한가운데였다.
“식사라도 하고 출발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빈속이 편하다. 상호는 손을 탁탁 털며 자신의 차림을 쓱 둘러보았다.
물을 잘 먹지 않는 얇은 전투복.
검과 핸드폰은 학교에 두고 왔다.
“저는 갈 테니까 조심히 돌아가세요.”
“예, 수고하십시오.”
선장이 고개를 꾸벅이자마자 상호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난간을 훌쩍 뛰어넘은 그는 요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바다로 잠겨 들었다. 몬스터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들이 있는 바다는 아르게스의 근해.
그러나 뭍에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먼 곳.
‘수영은 또 오랜만이군.’
그동안은 다리 때문에 수영을 하지 못했고, 고친 후로는 물가에 간 적이 없었다.
그는 경공을 섞어 물속을 빠르게 헤엄쳐 나아갔다.
발밑, 푸른 허공 속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고래구만.’
몬스터가 아닌 게 상호에겐 다행이었다. 수중전은 별로 달갑지 않아서.
그래도 해양 생물들은 지능이 대체로 낮기에 들켜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육지에 있는 고등한 몬스터들.
한번 보이면 소문이 쫙 퍼져서 떼거지로 몰려드니, 하늘로도 못 가고 땅으로도 못 가고 이렇게 바다로 잠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올 때는 눈치 안 봐도 되겠지만.
“……푸우.”
산소가 부족해서 수면으로 떠올라 숨을 들이켰다.
수평선을 살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뭍까지의 거리는 100km 이상. 물속에서는 아무래도 달리고 나는 것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으니, 한두 시간쯤 더 헤엄쳐야 땅이 보일 것이다.
그는 다시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 * *
자박……
창백한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남았다.
“……후우.”
상호는 숨을 몰아쉬며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갔다. 젖은 머리가 미역처럼 얼굴에 감겨 있었다.
오랜만에 전력으로 수영을 했더니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힘들어 죽겠군.’
물기를 털어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기묘할 정도로 넓고 평탄한 모래사장이었다.
모래도 영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이, 희면서도 검은 게 도통 평범한 땅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를 찌르는 듯한 썩은 냄새.
상호는 모래에 박혀 있는 가느다란 가시를 집었다.
‘생선뼈…….’
바닷가에 생선뼈가 있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지만.
그러한 뼈가 지평선까지 널려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떼몰살을 당했구만.’
물고기들이 땅을 걷다가 죽었을 리는 없고.
몬스터들이 현대미술을 배웠을 리도 없으니.
‘땅이 올라온 거겠지.’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바다 밑의 땅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들어 올렸는가. 이제 그걸 알아내는 게 그의 숙제였다.
그때 아주 희미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땅속 아주 깊은 곳에서.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상호의 시선이 아르게스 쪽을 향했다. 절벽 같은 지형과 기암괴석, 그리고 쩍쩍 갈라진 땅이 멀리에 보였다.
일단은 이 평야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 몸을 숨길 곳도 없으니 변장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냄새도 숨겨야 하고.
전쟁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짓을 또 할 줄은 몰랐군.’
그는 생선 썩은 땅을 손으로 퍼서 머리에 부었다.
* * *
어느 깊은 협곡 아래.
“쿠륵카륵.”
“키르르륵.”
초록 피부의 난쟁이들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다.
신이 찰흙을 빚다가 화장실이 급해서 대충 던져놓은 것처럼 생긴 몬스터들. 되다 만 눈코입과 가늘면서도 짤막한 팔다리는 이 종족이 뇌와 엄지손가락이 달린 몬스터 중에서 제일 하등한 노예종족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난쟁이들은 열심히 무언가를 닦고 있었다.
집채만큼 크고, 흑진주처럼 반질반질한 검은 수정.
“키히익!”
모자를 쓴 난쟁이가 다른 난쟁이들을 재촉했다. 더 깨끗하게, 더 정성들여 닦으라는 것처럼.
상호는 바위 뒤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누나가 있었으면 번역이 됐을까…….’
좀 고등한 놈들의 언어체계에 대해서는 해석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어 있었다. 특히 문자를 쓸 줄 알고 부족 간에 문서를 전달하는 놈들.
그러나 하등한 몬스터들의 언어에 대한 해석은 진척이 그리 좋지 못했다. 발음도 부정확하고 영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마치 개가 짖는 것처럼.
‘아니, 벨이 더 나았겠지.’
악마는 모르는 말도 알아들을 수 있다니까, 베르멜로가 있었다면 저놈들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없고.
상호는 거대한 수정을 흘끗했다.
‘저게 원인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가까운 곳에는 고블린 놈들밖에 없지만, 오는 길목에는 크고 강해 보이는 놈들이 많았다. 덕분에 땅굴도 파고, 1시간에 1m씩 포복전진을 하기도 하면서 몰래 여기까지 들어왔다.
‘암만 봐도 귀한 건데…….’
맘 같아선 일단 부숴보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저 수정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니.
마법의 매개체일 뿐이거나, 하루 이틀이면 다시 설치할 수 있는 물건일 수도 있으니까.
‘밥을 먹고 올 걸 그랬군.’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인내심을 갖고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한 무리의 오크가 수정을 향해 다가왔다.
‘그렇지.’
다행히 오크들의 말은 상호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오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오크들이 고블린의 뒤통수를 치며 무어라 소리쳤다. 거칠고 난폭한 말투로.
‘……사투리인가.’
땅도 넓고 교류도 별로 없으니, 지역마다 말이 다를 것이다.
잘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몇몇 단어는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얀 신관, 바위 오크
‘하얀 신관, 바위 오크……?’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저 검은 수정과 연관된 자들의 이름인가. 아니면 오크들의 잡담일 뿐인가.
정보가 더 필요했지만, 나머지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오크들이 돌아서서 왔던 길로 사라졌다.
‘쳇.’
아쉽지만 정보를 더 얻지는 못했다. 상호는 속으로 혀를 차고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이따 다시 와봐야겠구만.’
일단은 먹고 싸고 눈을 좀 붙여둬야겠다.
그의 몸이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 * *
야식은 바싹 익힌 도마뱀 구이.
껍질이 좀 질겼지만 기다리면서 먹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상호는 도마뱀 고기를 질겅거리며 바위를 슬쩍 넘겨다보았다.
‘웃기는 놈들이군…….’
수정 곁의 고블린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길목을 지키는 강한 녀석들을 믿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저 수정을 관리하는 것뿐이거나.
‘한번 골려 줄까.’
어차피 이대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내공을 가늘게 뽑았다.
실처럼 뻗어 나간 강기는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수정을 살피다가, 단번에 찔러서 꿰뚫어 버렸다.
우직……
수정에 금이 갔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수정에 무슨 문제가 생긴지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애초에 마나에 둔감한 종족이라.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수정을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쩌저적……
부서진 수정이 양옆으로 쓰러졌다.
쿠웅
“키에엑……!”
잠에서 깬 고블린들이 혼비백산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수정이 박살난 걸 발견하고는, 안 그래도 초록색인 얼굴을 더욱 진한 초록색으로 물들이며 입을 떡 벌렸다.
우린 이제 죽었다, 라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니 좀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으나.
‘전쟁에서 임무를 맡았으면 죽을 각오를 해야지.’
불쌍하단 생각 이상은 하지 않았다.
상호는 도마뱀 고기를 질겅거리며 고블린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끼륵…….”
한 고블린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공포에 질려 정신줄을 놓고.
“끼에에엑!”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다른 고블린들이 따르려 하는 순간.
쿠웅……
협곡 전체가 진동하며, 도망치던 고블린의 앞에 거대한 검은색 원이 생겼다.
“키…….”
당황하며 물러나던 고블린의 몸이 순두부처럼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끼에…….”
그 모습을 본 고블린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죽은 놈은 오크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놈이었다. 죽도록 일만 하다가 저리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상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불쌍한 짜식…….’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검은 원에서 나온 것은 하얀 로브를 두른 존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비슷한 형태지만, 땅에 질질 끌리는 로브의 밑으로 미끈한 촉수가 언뜻 보였다.
신비의 악마.
상호는 기척을 숨기는 데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
그러나 신비의 악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개미를 밟은 것뿐이라는 듯. 개미와 할 말은 없다는 듯. 뭉그러진 고블린의 시체를 밟고 지나 반쪽이 난 수정을 살필 뿐이었다.
하얀 두건이 아주 살짝 기우뚱했다.
“키륵.”
두건 아래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히익, 키르르륵…….”
“……꾸륵.”
고블린들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대악마가 굳이 고블린에게 물어봐야 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사안임은 분명했다.
이로써 저 검은 수정이 중요하단 건 확실해졌고.
‘분명 떠오른 땅과도 관련이 있겠지.’
신비의 악마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때 신비의 악마가 몸을 움찔하더니, 상호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상호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잽싸게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들킨 것 같네.’
직감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악마란 놈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는 질겅거리던 도마뱀 고기를 삼키고 내공을 꺼낼 준비를 했다.
곧 바위 뒤에서 인간의 말이 흘러나왔다.
“나와라,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