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452. 징조
채앵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주말의 운동장에서는 운동복을 입은 해련이 세희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검기 없이, 오로지 검으로만. 내공은 호신강기와 검을 강화할 정도로만.
해련의 검이 빠르게 휘둘러지며 세 갈래로 나뉘었다.
“흡…….”
세희는 침착하게 검을 들어 막았다.
촤촤촹
꼭 세 번의 참격이 동시에 가해진 것 같았다. 잔상이지만, 잔상이 아니게 될 정도로 빠른 속도.
세희도 찌르기를 날리며 칼끝을 살짝 튕겼다.
투웅……
굵은 고무줄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열 갈래로 갈라졌다.
해련의 잔상보다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검로를 감추기에는 충분했다. 세희의 검이 찌르기를 막으려는 해련의 검을 슬쩍 피해냈다.
칼날이 칼등을 타고 해련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다.
“……윽!”
해련은 급히 검을 들었다.
세희도 그 힘에 맞춰 검을 내리눌렀지만, 찌르기는 아쉽게 해련의 몸을 빗겨나가 어깨 위로 빗나가게 되었다.
해련이 뒤로 물러나며 숨을 돌렸다.
‘정말…….’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하루가 다르게 느는구나.’
가르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수업을 시작할 때도 그리 약하지 않은 아이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검술만으로도 해련을 위협할 수준이 되었다.
해련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약속과 다르지만…….’
그리고 세희를 향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별다른 술수가 담기지 않은, 그저 평범한 횡베기. 그러나 해련의 저의는 그 뒤에 숨어 있었다.
세희가 해련의 검을 받아내려는 순간, 해련의 검에서 금빛 강기가 솟았다.
‘미안.’
검만 베고 바로 멈출 것이다.
얼마나 당황할지, 어떻게 반응할지. 반응속도와 임기응변을 둘 다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약속을 깨고 예상외의 상황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희의 검에서도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즈걱
해련의 검이 맥없이 잘려나갔다.
‘……어라.’
당황한 해련의 앞에 세희의 칼끝이 겨누어졌다.
“반칙이에요.”
“……반응이 빠르구나.”
“대비하고 있었거든요. 소중한 검이라.”
해련은 그제서야 세희가 쥐고 있는 검이 상호의 검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언제 받았니?”
“좀 됐어요.”
세희가 살짝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를 자랑하는 듯이 뿌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스승님 검이에요.”
예쁘죠, 라는 말이 뒤에 붙을 것 같은 말투.
해련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주 웃어 주었다.
“그렇구나.”
베었다가는 아쉬울 뻔했다.
해련의 잘린 검에서 강기가 사라졌다. 해련은 검의 잘려나간 단면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새로 들고 올게. 잠시만 기다리렴.”
“네.”
칼 소리가 멈춘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지나갔다.
* * *
“그래서.”
이츠키가 물었다.
“왜 저만 데리고 오신 겁니까?”
“세희 수영복 사려고.”
상호는 눈앞의 수영복 매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가 세희랑 키가 제일 비슷하니까…….”
“하긴 저희 중에선 제가 제일 가깝긴 합니다.”
이츠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걸어가서 수영복을 대뜸 집었다. 면적이 제일 좁은 것으로.
“이게 선생님 취향 아닙니까?”
“내려놔…….”
“이상하다. 이게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선생님.”
“응.”
“왜 세희를 데려오지 않고?”
“교장선생님이랑 수업 중이야.”
“세희가 불쌍합니다.”
“응?”
“담임이란 작자가 수업은 대리 맡기고 제자 벗길 궁리나 하고 있으니…….”
“…….”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수영복을 살폈다.
언뜻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아니 실제로 그랬지만, 그래도 세희가 빨리 강해져야 나중에 함께 놀 수 있고, 그때를 대비해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연두색 수영복을 들어 올렸다.
“이건 어울릴까?”
“세희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래? 예쁜데…….”
“세희는 색이 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건 그렇지.”
문득 이츠키의 왼쪽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옷을 고르고 있는 이츠키의 왼쪽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약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카시타.”
“네.”
“눈은 괜찮아? 별일 없어?”
그 말에 이츠키가 잠시 오른쪽 눈을 감았다.
“딱히 별일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해줘야 돼.”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서, 상호는 핸드폰을 꺼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연락처 보내 놓을게. 만약 나하고 연락이 안 되면 그 사람들 도움 받아.”
“연락이 안 될 일이 있습니까? 혹시 저를 떼어놓고 어디 바람피러 가시는 건…….”
“……그런 거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츠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일 없게 해주는 겁니다.”
“으응.”
상호는 그 시선을 피해 수영복을 골랐다.
“사카시타, 이건 어때?”
“뭐 말입니까? 아, 이겁니까? 우와, 이거 끈…….”
“아니 이게 뭐야! 아니, 이거 아냐. 잘못 봤어, 다른 거, 다른 거……. 이건 어때?”
“그건 어린이용인데……. 선생님, 혹시 지금 저랑 세희가 작다고 돌려 까시는……. 아아, 잘 알겠습니다.”
“……아니!”
“이건 세희에게 말해두겠습니다.”
“제발…….”
그는 눈물을 삼키며 황급히 정상적인 수영복을 찾아 나섰다.
* * *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학교로 돌아와 보니, 해련과 세희는 아직도 운동장에서 대련을 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부러진 칼날 하나가 굴러다녔다.
‘설마……?’
상호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자세히 보니 다행히도 예경의 칼날과는 모양이 달랐다.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세희와 해련을 돌아보았다.
세희의 검이 휘어져 해련의 검을 타 넘었다.
‘이야…….’
검이 실제로 휘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검로가 매끈했다.
처음 만났을 땐 그저 빠르기만 한 쾌검이었는데, 이제는 수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패기롭게 해련을 몰아붙인다.
상호는 어지러이 휘감기는 서로의 칼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희의 칼이 해련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쉬익……
순간, 해련이 검의 방향을 틀었다.
조금 부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검에 휘둘리듯이. 칼날을 상대에게 내민 것이 아니라 손잡이 쪽을 자신에게 당겼다.
상호는 해련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검술 실력이 비슷하다면 남은 건…….’
실전 경험.
해련은 칼의 코등이로 세희의 칼끝을 막아내고.
턱……
힘껏 밀어내서 세희의 자세를 무너뜨렸다.
아니, 무너뜨리려 했다.
“……!”
세희가 빙글 돌자 해련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세희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해련이 밀어낸 힘을 이용해, 몸을 자연스럽게 돌리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퍼억
세희의 검이 해련의 호신강기를 때렸다.
“……으음.”
해련은 침음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걸 받아칠 줄은 몰랐네.”
“검에만 집중할 시기는 지났거든요.”
세희는 상호를 흘끗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끄응…….”
해련이 비틀거리며 상호를 향해 다가왔다.
“강 선생, 나 늙었나봐…….”
“늙었죠.”
“어머, 어쩜 그렇게 심한 말을 해?!”
“늙었으니까.”
“아흑……!”
해련은 비틀거리던 걸음 그대로 여교사 숙소 쪽을 향해 걸어갔다.
상호는 해련의 뒷모습을 향해 피식 웃다가, 곁에 다가온 세희를 돌아보았다.
“운기조식 하러 갈까?”
“네.”
둘은 또 다른 수업을 위해 숙소로 향했다.
* * *
세희와의 운기조식이 끝난 뒤, 저녁.
상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소파 쪽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네?”
소파에 앉은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샥 돌렸다. 나빛, 지윤, 은율.
태화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세희는 기숙사에 씻으러 간 참이었다.
“너희 방학에 놀러 가고 싶은 곳 있어? 바다라든가 가볼 생각인데.”
태화가 툭 내뱉었다.
“몰디브.”
“……해외 말고.”
“제주도?”
“배나 비행기 안 타는 곳으로…….”
상호는 해수욕장 정보가 뜬 핸드폰 화면을 태화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데 말이야. 사람이 많은 데도 좋고, 적은 데도 좋고…….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데 없어?”
“없어!”
태화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우리가 차가 있어, 시간이 있어? 우리 나이대 애들이 무슨 국내를 가보고 싶네 마네야. 빙수 가게 아니면 몰디브지. 애초에 해수욕장 이름도 몰라.”
“그럼 좀 찾아봐 임마. 안 놀러갈 거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됐어 그럼. 나빛아, 지윤아. 가고 싶은 데 찾아봐.”
“네!”
“아익, 쌤!”
“꾸꾸야~. 우리 어디로 갈까~.”
나빛이 헤실거리며 핸드폰을 양 엄지로 신나게 두드렸다.
지윤은 턱을 괸 채로 나빛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고, 상호와 옥신각신하던 태화도 은근슬쩍 나빛의 곁에 붙었다.
“야, 야. 오지윤. 우리 대게 함 조질까?”
“니가 우얀 일로 그래 좋은 생각을 하노. 대기 하믄 영덕이제. 포항도 좋고…….”
“난 부산 가보고 싶어…….”
“아니다, 마. 부산 음식은 서울 가믄 다 있다. 근디 대기 실헌 기는 바다 가서 묵어야 하는 기라.”
“꾸꾸야, 너는 어때……?”
“뺙?”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디로 놀러 갈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세희도 바다 가면 좋아하겠지…….’
실력이 빨리 늘고 있으니, 그때면 하루이틀쯤은 놀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방구석에 놓인 종이가방을 흘끗하며 씩 웃었다.
* * *
날이 지나 방학식.
[너무 신나게 놀지 말고~.]
TV 화면 속에서 해련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시국이 흉흉하니까 늘 뉴스에 귀 기울이고~.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적극적으로 신고하도록 해요~.]
“네~.”
전교에 대답이 울려 퍼졌다.
[여름철 주의사항 통신문도 한 번씩 읽어보고~.]
“네~.”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네~.”
[명절이 아니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 한 번쯤은 찾아가고~.]
“…….”
본심이 훤히 보이는 말에 전교가 조용해졌다.
예상치 못한 침묵에 당황한 해련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다들 편히 쉬고~. 개학식에 봐요~.]
“네~.”
방송이 종료되고 TV 화면이 검어졌다. 상호는 TV를 끄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1학년 아니지?”
“유행어로 미는 거야?”
“……다들 방학 뭔지 알잖아. 그치?”
“네.”
“므아.”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인데, 식중독을 조심하라느니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잔소리는 했다.
“교장선생님 말씀대로, 요즘 시국이 흉흉해. 뭔가 수상한 게 보이거나 하면 협회에 신고하고, 선생님한테도 알려주고…… 알지? 너희도?”
“네~.”
“그래.”
그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뉴스 잘 보고. 선생님 문자 늘 확인하고. 그리고…… 방학 중에 다같이 놀러 갈 테니까, 같이 갈 사람들은 가족 일정 말해 주면 안 겹치게 조정해 볼게.”
“놀러 가요?”
“어디로요?”
“동해안 쪽으로…….”
그때 상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오면 십중팔구 안 좋은 일이던데. 상호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핸드폰을 꺼냈다.
하필이면 발신인이.
‘……형이네.’
무슨 일이 생겼나.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돌아섰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안색이 좋지 않았을까. 나빛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런 것 같아.”
거짓말을 지어내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복도로 나와 문을 닫았다.
도현의 전화.
제발 목소리가 밝았으면 좋겠는데. 상호는 눈을 감고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어, 형.”
[야, 상호야.]
많이 긴장한 목소리.
[빨리 여기로 와봐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