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450. 제자 너머의 관계
오후 3시.
한여름의 해가 아직 높을 시간. 그리고 도서실에 학생이 있으면 안 될 시간.
사서는 점심시간이 지나면 도서실 문을 잠그고 행정실에 가거나, 교무실에 가거나, 혹은 수다를 떨 사람을 찾아 학교를 배회하거나 했다. 그래서 이 시간의 도서관엔 보통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한 명이 있었다.
“…….”
해가 쨍쨍한 창문 옆. 책장의 그늘 아래.
세희는 벽에 기대어 앉아 책을 뒤적거렸다.
팔락……
종이를 넘기는 속도가 느렸다.
오랫동안 글을 읽지 않았다. 검을 쥔 시간이 훨씬 길어서.
평범한 세상의 평범한 학생이라면 반대였을 텐데.
세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모르겠네.’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은 읽기를 포기하고,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았다.
‘할 것도 없고…….’
이대로 앉아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드는데.
손이 허전하니 뭔가를 쥐어야만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다. 세희는 허리를 더듬다가 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요 없어.’
잠이나 잘까. 세희는 책장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서서히 내려오는 햇살이 따가웠지만, 도서실이라 습도 때문에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낮잠을 자기에 꽤나 좋았다. 장소도, 시간도.
그렇게 깜빡, 잠에 빠지려는 찰나.
“뭐야.”
익숙한 목소리가 책장 사이로 파고들었다.
“왜 여기 있냐?”
눈을 뜨니 태화가 꼬리를 촐랑이고 있었다.
기분 좋게 잘 수 있었는데 방해를 받다니. 세희는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렸다.
“넌 왜 왔는데.”
“니 찾고 있었지. 나도 땡땡이쳤걸랑.”
태화는 팔을 크게 설렁거리며 사뿐사뿐 걸어와 세희의 곁에 앉았다.
“뭐하고 있었냐?”
“자려고 했는데 니 때문에 다 깼어.”
“잘 거면 기숙사 가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어?”
“그냥…….”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검을 잡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서 다른 꿈을 구경해보러 왔다. 하지만 그걸 태화에게 알려주고 싶진 않았다.
“……그냥.”
“참나.”
태화는 혀를 차고는 세희에게 가까이 다가붙었다. 서로의 어깨가 꾹 눌릴 만큼.
“야.”
“뭐.”
“말해줘.”
“뭘.”
“쌤이랑 무슨 일 있었는데.”
“……몰라도 돼.”
세희는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피했지만, 태화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야, 야. 좀 말해 봐. 나한테도 말 못해? 나한테만 살짝 말해봐. 내가 비밀 하난 잘 지키잖아. 응? 응?”
“아 싫어. 달라붙지 마.”
“니 진짜 그러기야? 내가 그저께 너 먹으라고 아이스크림 갖다 준 거 까먹었어?”
“이츠키가 줬는데 팥맛이라 안 먹고 나한테 갖다 준 거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아 씨, 들켰네.”
태화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서, 진짜로 말 안 할 거야? 진짜로?”
“…….”
세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끄러미 태화를 바라보았다.
“야.”
“엉.”
“너 만약에 있잖아.”
“엉.”
“만약에, 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랑 헤어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면…… 헤어질 거야?”
“……엉?”
태화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너 드라마 봤냐?”
“진지해, 멍청아.”
“쌤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세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골똘히 고민하던 태화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왼쪽으로 기웃, 오른쪽으로 기웃거리다가 세희를 홱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절대 안 놔줄 거야.”
문제를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말을 대충 하긴 했지만.
세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 사람이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헤어져야 하는 거란 말이야.”
“뭔 소리야, 그게. 헤어지면 안 떠나고 안 헤어지면 떠난다고? 누구야 그게. 청개구리야?”
“아니…….”
말해주지 않고서는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태화에게 말해주기 싫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해주기 싫었다. 상호가 자신을 다 가르치고 나면 떠나려 한다는 것은.
그때 세희의 시야에 태화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하나는 빨갛고, 하나는 까맣고.
“……잠깐만.”
세희는 눈을 끔뻑였다.
“야, 너.”
“응?”
“너는 선생님이 마신 죽이러 갈 때도 같이 가잖아.”
태화가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레 뭘 묻냐는 것처럼.
“그렇게 되겠지?”
그 말에 세희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태화가 그녀의 고민을 이해할 리 만무했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절대로.
“됐어. 꺼져. 나가.”
“아 왜! 말을 똑바로 해봐. 쌤이랑 무슨 일 있었냐고.”
태화는 답답한지 가슴을 쾅쾅 두드리다가 세희의 어깨를 붙들었다.
“야, 나는 니 편이야. 내가 너 안 도와줄 것 같애? 계속 혼자 끙끙 앓고만 있을 거야? 니가 말해야 나랑 애들이 도와줄 거 아니야!”
“필요 없다고.”
“그럼 계속 그렇게 뚱하게 있을 거야? 쌤이랑 서먹하게 지낼 거야? 그게 좋아? 됐어 그럼. 나도 너 안 도와줘.”
태화가 콧방귀를 뀌며 몸을 팩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태화는 곧 세희를 슬그머니 돌아보고는 은근슬쩍 다시 다가붙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말해죵.”
“꺼져.”
“아 진짜 말해달라고! 뭐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거야? 야, 야. 내 눈 봐봐.”
태화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너 나랑 친구 아냐?”
세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거랑 상관없어.”
“아니, 대답을 해. 너 내 친구 아냐? 어차피 선생님이랑 관련된 일 아냐? 근데 왜 말을 안 해줘?”
태화의 말이 세희의 가슴을 쿡쿡 찌르다가.
“너 나랑 겨우 그 정도야?”
한 방에 꿰뚫었다.
집 벽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바람이 휑한 듯도 하고, 시원한 듯도 하고,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한 듯도 하고, 무너질 것 같기도 하고.
세희는 어지러운 심정으로 태화와 눈을 마주쳤다.
‘…….’
친구.
누가 뭐래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같은 배경을 살아온.
짜증 나지만, 어쨌든 친구.
“……날 다 가르치고 나면 싸우러 가시겠대.”
“……응?”
“선생님이. 그런데 선생님은 자기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셔.”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그냥, 이야기하다가.”
세희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던져버렸어. 날 가르치는 게 당신이 죽으러 가는 길이라면, 이딴 거 배우고 싶지 않다고……. 선생님 보는 앞에서, 칼을 바닥에 던졌어.”
“오우.”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그랬으면 엉덩이 엄청 맞았을 텐데.”
“너라면 어떡할 거야?”
“엉?”
“너라면, 네가 뭔가를 배우고 있는데 그걸 다 배우고 나면 선생님이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을 하러 가신다면, 어떡할 거냐고.”
“글쎄…….”
태화의 눈동자가 한 번 데그럭 굴렀다.
“나라면…… 으음, 아마도…… 전보다 훨씬 더 장난을 치겠지. 쉬지 않고.”
“뭐?”
장난을 치겠다니.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세희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역시 이 바보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
“아니, 들어봐.”
태화가 세희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어차피 싸움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그러면 하루라도 더 재밌게 살아야지. 한 번이라도 더 웃고. 그래서 나는 그럴 거야. 이것저것 재지 않고 생각없이 장난칠 거야.”
넌 평소에도 그러지 않느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세희는 꾹 참고 잠자코 들었다.
태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거면 충분해. 쌤 웃는 거.”
“……정말.”
세희는 샐쭉한 눈으로 태화를 째려보았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지금 너처럼 서먹하게 굴어서 쌤 웃지도 못하고 시무룩하게 있는 거? 난 딱 질색이야. 그렇게 살면 재밌겠냐? 하루라도 더 맛있는 거 먹고, 하루라도 더 놀아야지.”
태화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내가 시한부였을 때 딱 알았어. 아무리 비싼 밥을 먹어도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없으면 다 헛거야. 언제 죽을지 몰라도 좋아하는 사람만 옆에 있으면 다 오케이고. 선생님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면, 난 절대 선생님이 시무룩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세희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태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선생님이 죽는다는데. 하지만 태화는 자기가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세희는 그런 적이 없었고.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그때 태화가 도서실 밖으로 나가며, 마지막 한 마디를 툭 남겼다.
“하긴 니가 뭘 알겠냐. 머리도 멍청한 게.”
“……하.”
우둑
세희의 손에서 관절 꺾는 소리가 났다. 누가 누구에게 멍청하다 하는지.
세희는 태화의 등에다가 톡 쏘아붙였다.
“나도 알아, 등신아.”
사실은, 몰랐다.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먼저 겪어 본 사람의 말이라면.
‘네가 맞겠지.’
세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화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 * *
종례 시간.
상호는 교탁에 서서 아이들을 둘러보는 척 세희를 흘끗했다. 하루 종일 수업에 안 오더니 다행히 종례에는 왔다.
어째 기운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무슨 일 있었나…….’
그는 고개를 살짝 기웃하다가 해련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뿐, 그 이상은 세희의 자유.
그러나 때로는 자유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힘으로 막을 수는 없고…….’
말로 잘 설득해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한편으로 세희는.
‘……안다고 말은 했지만.’
막상 상호의 얼굴을 보니 괜히 화가 났다.
왜 혼자서만 짊어지려 하는가, 왜 여태 말해주지 않았나, 날 정말 제자로만 봐왔던 거냐. 따지고 싶은 건 많았지만 지금은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세희의 눈빛에 다시 살기가 담기자 상호가 움찔하며 종례를 시작했다.
“그, 으흠. 오늘도 수고 많았고. 내일 보자.”
“쌤, 쌤.”
“응?”
태화가 책상을 양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렸다.
“오늘 저녁 뭐 먹어?”
“글쎄. 뭐 먹고 싶은데.”
“암거나. 야, 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태화의 팔꿈치가 세희의 옆구리를 찔렀다.
딴에는 도와준다고 이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태화의 팔꿈치를 쳐냈다.
아직 화가 덜 풀려서.
그 모습을 본 상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따가 말하자. 다들 수고했고. 가서 쉬어.”
“네.”
아이들이 가방을 챙겼다.
지윤과 나빛, 그리고 이츠키와 은율이 세희를 돌아보았지만, 세희의 기운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교실을 나갔다.
태화도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었지만.
“닌 진짜 바보야.”
그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갔다.
그렇게 교실에는 상호와 세희만 남게 되었다.
“……으흠.”
상호가 헛기침을 했다.
어색한 침묵. 이 학교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이 둘이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나, 오늘은 처음 만난 사이만도 못하게 불편한 기운이 흘렀다.
그래도 세희는 교실을 나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당신이 먼저 다가오라.
나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 뜻으로.
“세희야.”
그래서 상호가 다가왔다.
“아직 덜 풀렸어?”
“…….”
“그렇구나.”
상호는 씩 웃으며 세희의 옆 책상에 걸터앉았다.
“세희야, 선생님이 생각해 봤는데.”
“…….”
“아무리 그래도, 널 데리고 전쟁에 나가기는 힘들 것 같아.”
“……태화는 데리고 갈 거잖아요.”
그 말에 상호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태화도 웬만하면 안 데리고 가고 싶어. 방법이 있으면 그렇게 할 거야.”
“왜 그렇게 혼자 하시려고 하는 거예요?”
날카로운 눈빛 아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왜 제 말은 안 들어줘요? 왜 혼자서 다 결정해요?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려주지도 않고, 제가 뭔가 하려고 하면 왜 다 안 된다고만 하세요?”
꼭 아이가 부모에게 따지는 것과 같았다.
그걸 세희 스스로도 느꼈지만, 이게 어리광일지라도 상호를 사지로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라도, 떼를 써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애초에 선생님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세상 사람 모두한테 있는 의무잖아요. 남들보다 더 빨리 강해졌다고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해요? 그 사람들이 게으른 거잖아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다가, 울화통이 터져 버렸다.
“당신도 다 알면서! 왜 혼자 죽으려고 해요? 이미 충분히 해온 거 아니에요? 전쟁을 끝내고 사람들 구하고, 큰사부님 잃고 다리병신으로 살아왔으면 충분한 거 아니에요?”
“세희야.”
“대체 왜 당신이 다 짊어지려 하는데!”
세희의 얼굴은 눈물콧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상호는 그런 세희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손을 잡으려 했지만, 세희는 상호의 손을 떨쳐내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칼도 심법도 다 필요없어요.”
그때 한 자락 기운이 세희의 손에 닿았다.
세희는 체내로 파고들려 하는 기를 느끼고 움찔했다.
‘이건…….’
어제처럼 내공을 잇자는 뜻.
세희는 망설이다가 자신의 내공을 상호에게로 뻗었다. 영혼이 연결되면 자신의 이 답답한 마음을 상호도 알아줄 거라 생각하며.
세희의 기가 상호의 손에 닿자, 서로의 기가 연결되었다.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감정과 기억들.
예경을 만날 날, 예경을 잃은 날. 다혜를 만난 날, 다혜를 잃었던 날. 그리고 세희를 만난 날. 세희가 천색창염을 배운 날.
상호의 생각이 파도처럼 세희에게 흘러들었다.
‘이게 내가 너희를 만난 이유야.’
너희를 나처럼 되게 만들지 않겠다.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잃고, 아직 어린 아이가 전투에서 죽고. 그런 일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러 이곳에 왔다.
상호가 세희의 손을 잡자 더욱 가까이에서 생각이 섞였다.
너희한테 전쟁을 겪게 하기 싫었다.
그렇지만 이미 한 번 욕심을 부려서── 전쟁이 일어날 걸 각오하고 봉인을 풀었고.
다행히 그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 결과도 비교적 좋았지만, 어쨌든 그의 욕심이었단 것만은 부정할 수 없고.
이제 세희를 가르치고 떠나겠다는 것 또한 이미 욕심이며, 사실은 진작에 떠나서 마신을 죽이러 가야 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에 일어날 전쟁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세희는 상호의 생각을 읽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모든 욕심이 사랑이라도. 세희는 상호의 손을 밀어냈다.
‘싫어요.’
칼 따위 잡지 않겠다.
심법 따위, 더는 배우지 않겠다.
스승을 죽이는 길을 제 손으로 비질하라니. 죽어도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때 세희의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검.
‘……!’
칼 따위, 잡지 않겠다.
세희는 그 검을 집어던지려다가, 그 검이 자신의 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멈칫했다.
“……아.”
예경의 검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상호가 웃고 있었다.
‘내 보물이야.’
그의 손은 세희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에서부터 한 자락 생각이 흘러들었다.
검이 아니라 네가.
심법이 아니라 마음이. 예경으로부터 내려져 온 유산이라고.
‘던질 수 있으면 던져봐.’
‘……!’
던지라면 못 던질 줄 아는가. 세희는 눈을 부릅뜨며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끝내 던지지는 못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를 악물면서도.
잡은 손이 검을 놓지 못했다.
‘……이걸.’
세희는 결국 팔을 천천히 내리고, 원망 가득한 눈으로 상호를 노려보았다.
‘이걸 어떻게 던져요…….’
시울 붉은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상호가 씩 웃었다.
“못 던지겠지?”
짓궂은 사람.
괘씸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세희는 검을 꼭 쥔 채로 상호를 향해 달려들어서.
가슴팍에 박치기를 날렸다.
빠악
“커헉! 세, 세희야……?”
세희는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고, 눈물콧물이 흐르는 얼굴을 상호의 품에 찧어댔다.
“죽어요, 죽어요, 그냥 죽어버리세요…….”
“죽지 말라고 이러는 거 아니었어……?”
“몰라요, 죽어요, 죽어버려요……. 바보야…….”
세희가 그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상호는 그런 세희의 등을 토닥이며, 내공의 연결을 끊고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다 잘 될 거야.”
“……안 믿어요.”
세희가 중얼거렸다.
“나도, 내 방법을 찾을 거예요.”
“……그래.”
그것까지 막을 순 없다. 그게 천세희란 사람의 선택이라면.
상호는 세희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방과후의 교실, 둘만의 공간에서.
상호는 예경의 검을 품은 세희를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