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449. 가르침 너머의 것
“수고했고.”
조금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잘 쉬고. 내일 보자.”
“네에…….”
아이들의 대답에도 힘이 없었다.
담임이 기운이 없으니 아이들의 표정도 덩달아 시무룩했다. 상호는 그게 싫어서 억지로라도 밝게 웃으려 했으나, 어색하게 입꼬리만 조금 올라간 꼴이 될 뿐이었다.
그는 터덜터덜 걸어 교실을 나갔다.
……타악
문이 닫히자마자 아이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머고?”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미래가 눈을 깜작이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하루 종일 세희 언니랑 계셨잖아.”
“그러게. 어? 뭐야.”
태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칼 어따 팔아먹었냐?”
세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 없으면 화장실도 안 가는 뇬이……. 아, 부러진 거야? 정든 칼이 부러져서 슬퍼? 아이구 우리 세희 그래쪄~. 어떡해~. 우쭈쭈…….”
“…….”
“……왜 아무 말도 안 해?”
태화는 세희의 코앞에서 뻔질나게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세희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바심이 난 듯 어깨를 콕콕 찔렀다.
“야, 야. 화났어?”
“…….”
“야, 난 몰랐지, 니한테 칼이 그렇게 소중한지……. 알았어, 미안해. 근데 니도 잘못 있는 거 아냐? 나 빡쳤다고 한마디 해주는 게 어려워? 너도 나한테 사과해. 자!”
“꺼져.”
세희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쓰지 마. 그냥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러고는 쌩하니 교실에서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들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돌아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쟤 왜 저러냐?”
“몰라. 쌤이랑 키스하다 트림이라도 했나…….”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으니.
아이들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하교 준비를 했다.
* * *
그 이후로 세희는 상호와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을 때도. 다음 날 등굣길에서 만났을 때도. 조례 직전에 복도로 불러내어 검을 돌려주려 했을 때까지도.
“세희야,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
묵묵.
“칼 안 받을 거야? 수업하기 싫어?”
부답.
상호는 속으로 진땀이 줄줄 흘렀지만, 겉으로는 엄한 목소리를 지어내려 했다.
“세희야, 네가 좋든 싫든 간에 우리는 서로 선택한 관계고, 서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나는 널 가르치는 게 의무고, 너는 배우는 게…….”
빠악
“……커헉!”
정강이에 강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상호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2년 전처럼 절뚝거렸다. 그런 그를 세희가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싫어요.”
“으윽…….”
“이제 칼 따위 안 잡을 거예요.”
싸늘한 목소리로.
“그냥 버리세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교실로 들어가지도 않고 성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정강이를 부여잡은 상호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니…….’
지금 제일 힘든 건 그인데.
상호는 눈물을 삼키고 조례를 위해 교실로 돌아갔다.
* * *
세희는 결국 오전 내내 땡땡이를 쳤다.
설마 또 가출을 한 건 아닐까. 지난번에 다혜와 비교했을 때처럼. 상호는 노심초사하며 기감을 널리 펼쳤지만, 다행히 세희의 기는 학교를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상호가 세희를 본 것은 점심이 되어서였다.
“어, 쌤.”
볼이 빵빵하게 밥을 욱여넣던 태화가 급식소 입구 쪽을 가리켰다.
“삐순이 왔어, 삐순이. 야! 삐순아!”
“뺙?”
“아니 너 말고, 미친 삐약이 새꺄! 악! 악!”
팔을 마구 휘두르는 태화의 옆에 세희가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상호는 숟가락을 멈추고 세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희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아직도 많이 화났나…….’
이 불편한 침묵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천색창염의 전수도 빨리 진행되어야 맘 놓고 마신과 싸울 수 있을 텐데. 세희는 협조해줄 생각이 코빼기도 없는 듯했다.
그는 고기반찬을 집어 세희의 식판에 놓았다.
“흥.”
세희는 그 즉시 반찬을 집어 상호의 식판에 돌려놓았다. 절대로 화해할 생각이 없다는 듯.
상호는 포기하지 않고 반찬을 되돌려주었다.
슈슈슉
식판과 식판 사이를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질렸다는 듯이 혀를 차며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 가자, 단비야. 남이 깨 볶는 걸 머하러 보고 있노.”
“개빨라, 멍…….”
“난 매점이나 갈란다.”
아이들이 급식소를 나갈 때까지, 상호와 세희는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젓가락 싸움을 하고 있었다.
* * *
“……에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한숨.
자리에 앉아 있던 해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설명하기 귀찮다. 상호는 소파에 누운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머, 한숨을 그렇게 쉬어놓고 숨기기야? 내 방에 뱉은 한숨은 어떻게 할 거야?”
“제가 방금 다 마셨어요.”
“내 입에 좀 남아 있는데.”
해련이 입술을 할짝이며 눈을 반짝였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돌려줄까요?”
“……그냥 삼키세요.”
상호는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 끝날 것이다. 그러면 또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세희는 또 오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을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나 궁금하라고?”
“아니요, 아니요. 그냥 그런 일이 있다니까요…….”
“강 선생.”
“네.”
“한 판 뜰까?”
“……네?”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끔뻑였다.
“……아니, 일부러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나도 싸우자고 한 말은 아니에요. 그냥 간만에 대련하면서 한 수 가르쳐 달라고.”
“그런 거였어요?”
그렇다면야 상대해 줄 수 있지만.
지금은 아이들도 교사들도 한가롭게 걸어다니는 점심시간이고, 점심시간이 끝나면 수업을 해야 한다. 운동장이 빌 틈이 없을 텐데.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눈을 끔뻑였다.
“근데 어디서요?”
“운동장에서.”
“위험하잖아요.”
“죽자사자 하자는 건 아니잖아?”
해련은 그가 했던 말을 돌려주며 씩 웃었다.
“내공 빼고 칼 대 칼로만 싸워보자고. 강 선생.”
“……아하.”
무슨 의도인지 알겠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요. 나가요.”
* * *
“자아…….”
해련이 검을 겨눴다. 옆으로 서서 한 손은 등에 붙이고, 한 손은 쭉 뻗은 채로.
“한 수, 부탁해.”
“예에.”
상호도 검을 두 손으로 잡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주변에는 구경을 나온 학생들이 수십 명 서 있었다. 아이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가 상호의 귀에 닿았다.
“누가 이길까?”
“당연히 강쌤이지.”
“아냐, 교장쌤도 젊었을 적엔 날리셨다는데…….”
“젊었을 적이 아니라 늙었을 적 아냐?”
“자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여~. 자기 반 학생들로 모자라서 학교까지 먹으려는 강상호! 교장의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교장쌤! 과연 왕좌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돈으로 투표해주세용~.”
“최대 3천원입니당, 멍.”
구경 중인 아이들 중엔 상호네 반 아이들도 끼어 있었다.
아마 하솔도 와 있을 것이다. 상호는 검을 살짝 까딱이며 입맛을 다셨다.
이건 무대.
해련이 손녀 앞에서 위신을 되찾을 무대.
‘뇌가 너무 젊어지신 거 아닌가…….’
하긴 젊게 살면 좋은 거니까. 그는 그렇게 여기고 해련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적당히 합을 나누다가 져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세희랑 화해해야 하는데…….’
채앵
그러면서도 손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으음,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채앵 챙
거의 무아지경. 머릿속엔 온통 세희 생각뿐이었다.
세희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던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라.’
해련의 목 바로 앞에 검이 위치해 있었다.
생각 없이 이겨 버렸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상호는 당황하며 검을 거뒀다.
“아이고, 죄송해요. 딴생각을 하다가…….”
“…….”
해련은 웃고 있었지만 미간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불행히도 상호는 경황이 없어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번엔 집중할게요. 다시 해요.”
“응.”
해련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상호는 몇 번 검을 맞대다가 또 세희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해바라기가 늘 해를 바라보듯이.
‘잘 때 볼뽀뽀를 해볼까……. 에이, 그걸로 풀릴 리가. 뺨이나 안 처맞으면 다행이지……. 아차.’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해련의 부러진 검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이고.’
애들 앞에서 큰어른을 밟아버렸다. 상호는 당황하며 해련을 바라보았다.
“……교장선생님?”
“으…….”
해련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어제처럼 눈물이 펑펑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 선생 미워! 월급 다 깔거야!”
“교장선생님, 체통을…….”
“몰라! 사람이 어쩜 그래? 손녀 앞에서 이기게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어헝헝헝…….”
“……에휴.”
여기 놔뒀다간 교장으로서의 체면이고 뭐고 다 잃겠다. 상호는 해련을 잡아끌어 교장실로 향했다.
암만 봐도 나이를 뒷구멍으로 먹은 게 맞는 것 같았다.
* * *
해련이 코를 훌쩍거리며 차를 홀짝였다.
“세희 일 때문에 집중을 못했다고?”
“예.”
상호는 소파에 드러누워 한숨을 푹 쉬었다.
“세희랑 잠깐 영혼이 연결됐는데, 그때 애가 제 생각을 읽어 버렸어요.”
“무슨 생각 중이었는데? 어머, 설마…….”
“아니요.”
안 들어도 오디오라 헛소리가 나오기 전에 먼저 막았다.
“세희한테 모든 걸 가르치고 나면, 미련 없이 싸우러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걸 세희가 알아버린 거예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래서 같이 가겠대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죠. 같이 싸우러 갔다가 세희가 먼저 죽으면 안 되니까…….”
“응.”
“그게 세희는 맘에 안 들었나 봐요.”
“그렇겠죠.”
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한테 미련을 가져주길 바랄 텐데, 강 선생은 무공에만 관심이 있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어떻게 되든 간에, 그런 일들은 전쟁을 끝낸 후에나 가능한 건데……, 그냥 듣기 좋으라고 헛된 약속을 하기는 싫어요.”
“그래도 해줘요. 헛된 약속이라도.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선생님이랑 있고 싶어 할 것 아니야.”
해련의 말에 상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최대한 그러고 있어요.”
세희를 가르치는 것은 필요가 아닌 욕심.
처음에는 최소한 ‘초혼강기까지만이라도’였던 기준이 이제는 은근슬쩍 최대로 늘어나 ‘천색창염까지는’으로 바뀌어 있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해요. 그 길에 애들은 필요 없어요. 이 관계는 이제 내 욕심일 뿐이고, 더 길어지면 끊어내기 어려워져요…….”
“그건 욕심이 아니라 사랑이지.”
해련이 찻숟가락을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받아들여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심법 따위가 이유가 될 순 없어요. 그건 그냥 억지로 만들어낸 핑계인 거지. 조금이라도 더 그 사람 곁에 남고 싶은 거. 그걸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러요.”
“……어쨌든간에 저는 때 되면 끊어내야 해요.”
“그건 강 선생 사정이고. 세희의 사정도 있는 거지. 자, 봐봐. 강 선생은 애들이랑 더 있고 싶은 거야. 내 말이 틀려?”
“글쎄요.”
“좋아, 그러면 적어도 심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거지. 맞지?”
“네.”
“강 선생 역할은 거기까지야.”
찻숟가락이 상호를 가리켰다.
“가르치고 싶은 걸 다 가르치고 나면, 그 애는 이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야. 가르치고 난 이후의 일까지 강 선생이 간섭할 순 없어. 졸업한 애들한테도 이래라저래라 할 셈이야?”
“……그건 아니죠.”
“세희의 권리인 거야.”
해련이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가르치기만 해요. 그다음은 놔두고. 교육과 개인의 선택은 구별해야지.”
“그래도…….”
“세희가 강 선생이랑 함께 싸우겠다고 하면, 그건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천세희라는 사람의 선택인 거예요. 그러면 강 선생도 선생으로서 안 된다고만 할 게 아니라, 인간 강상호로서 막아야지.”
상호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끔뻑였다.
“……싸우라고요?”
“세희는 그렇게라도 하려고 할걸? 뭐, 아님 말고.”
해련이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뭐래도 세희를 가장 잘 아는 건 강 선생이잖아? 달래야겠다 싶으면 달래고, 싸워야겠다 싶으면 싸워요. 단, 선생 대 학생이 아니라 어른 대 어른으로서.”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려면, 어른으로서 존중해라.
상호는 그 말을 곱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해볼게요.”
“응.”
해련이 씩 웃었다.
“가봐요. 나도 슬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교장실을 나왔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복도에서는 아이들이 교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상호는 아이들 사이를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세희와 함께 싸울 순 없으니.
해련의 말대로, 어른 대 어른으로 설득해 봐야겠다.
‘그치만 상대가…….’
너무 엄청난 고집불통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말을 듣게 하려면 화부터 풀어야 할 텐데. 그런 고민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교실에 도착했다.
상호는 교실 문을 열었다.
“……응?”
당황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어붙인 책상과 그 위에 수북이 쌓인 천 원짜리 지폐.
“……니들 뭐하냐?”
“아, 쌤!”
태화가 돈다발을 쥔 손을 붕붕 흔들었다.
“쌤도 도와줘!”
“아니 뭐하냐고…….”
“돈 세고 있지. 배당금 나눠줘야 된단 말야. 야, 단비야. 너 얼마까지 셌냐?”
“멍! 언니가 말 걸어서 까먹었어……!”
“야이씨, 그걸 까먹으면 어떡해! 아 X바, 나도 까먹었잖아! 야!”
태화와 단비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열심히 지폐를 셌다. 아까 했던 강상호 VS 교장 토토로 긁어모은 돈인 모양이었다.
‘이놈의 짜식들이…….’
어디 학교에서 사설 도박판을 벌이고 있냐. 상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혼을 내려는 그때.
천장의 스피커에서 해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태화 학생~. 돈 다 들고 교장실로 오도록~.]
“아아아아아악!”
일확천금의 꿈은 파랗게 조각나 허공에 흩뿌려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