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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46화 (446/501)

<446화>

446. 계획대로

“아야.”

도톰한 손가락 끝에 피가 방울져 맺혔다.

“무슨 일이니?”

“별것 아녜요. 책에 조금 베였어요.”

“보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영주가 혜소를 돌아보았다.

혜소는 머쓱하게 웃으며 상처를 살짝 보여줬다가 숨겼다. 딱히 아프지 않다는 듯.

그리고 실제로도 작은 상처였다.

“보세요. 살짝 스친 거예요.”

“약 바르자.”

영주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제단 아래서 약 상자를 꺼냈다.

정말 별것 아닌데 유난을 떨어 버렸을까. 혜소는 괜스레 등 뒤로 손을 숨겼다.

“괜찮아요. 약 안 발라도 나아요.”

“곪으면 큰일 난다.”

영주는 기어코 혜소를 무릎에 앉히고 약을 검지에 짰다.

곧 혜소의 다친 검지에 약이 슬슬 발리고 반창고가 붙었다. 혜소는 피가 조금 배어나는 반창고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꼬박 숙였다.

“감사합니다.”

“혜소야.”

“네.”

“피에는 특별한 힘이 있어.”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혜소는 집중해서 들었다.

“화난 사람은 얼굴이 붉어지지?”

“네.”

“너무 많은 피를 보면 나도 모르게 움츠리게 되고.”

“네.”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보면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하고, 도와주게 되지. 또 피를 너무 흘리면 죽고.”

“네.”

“피라는 건 네 영혼과 타자의 영혼을 이어주는 다리야. 또 너를 세상에 있게 만들어주는 그릇이기도 해. 피가 있어야 네가 있고, 또 관계가 있고. 남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치료를 마친 영주는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함부로 흘리지 않게 조심하렴. 너도 모르게 주술에 휘말릴 수 있으니.”

“네.”

혜소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

꿈이구나.

혜소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왜…….’

왜 이런 꿈을 꾼 걸까.

기분 좋게 낮잠을 자려 했는데.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꿈을 꿔 버렸다.

그래도.

‘……간만에 뵈어서 좋았어요.’

쏙 나온 눈물 한 방울을 훔치고.

혜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씩씩하게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 * *

카각……

검이 혈석을 긁었다.

끼이이익……

칠판 긁는 소리.

혹은 경첩 녹슨 문을 억지로 열어젖히는 듯한 소리.

우지직……

그러다 삭은 나무껍질을 으스러트리듯, 마른 무언가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나더니.

콰자작

검붉은 돌이 갈라지고.

후두둑 쏟아지는 파편 사이로 개의 해골을 닮은 머리가 드러났다.

털퍼덕

돌이 완전히 조각나자 악마가 바닥에 떨어졌다.

악마의 움직임은 느릿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몸을 움직이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곧 고개를 들어 텅 빈 눈구멍을 상호에게 향하더니.

턱을 달그락거리며 웃었다.

“새끼…….”

상호는 검을 어깨에 얹었다.

“제삿밥 먹을 게 그리도 신나냐?”

달그락.

“그래, 새끼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줄게. 네 골통 올려서.”

달그락, 달그락.

더 말해 무엇하랴. 상호는 온몸에서 내공을 뻗어 악마를 압박했다.

우득……

악마가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놈이지만 육신의 힘은 별 볼 일 없었다. 상호는 검에 초혼강기를 불어넣으며 놈에게 다가갔다.

“태화야.”

“응.”

“방향.”

태화가 검지를 들어 악마의 미간을 가리켰다.

“여기.”

상호의 검이 그곳에 겨누어졌다.

그는 악마를 내려다보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이 악마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첫 전우들을 도륙했던 악마.

그에게 달려들어 한쪽 눈을 앗아갔고.

그 후에 예경을 만나게 되었다.

“잘 가라.”

좋든 싫든, 그의 삶을 바꾼 존재 중 하나.

“내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널 기억해 주지.”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밀어 넣었다.

뼈로 이루어진 악마의 미간이 부드럽게 뚫렸다. 달군 식칼로 묵을 자르듯이. 상호의 초혼강기는 그만큼 뜨겁고 날카로웠다.

악마의 턱이 더욱 빠르게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뼈뿐인 얼굴이라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겁이 난 것인지, 아니면 비웃는 것인지.

‘좋아 죽네, 새끼.’

그는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초혼강기를 더욱 길게 뻗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의 발악일 뿐이라 여기고.

그때 갑자기 태화가 흠칫했다.

“잠깐만, 쌤…….”

상호는 계속 검을 찔러 넣었다.

“말해.”

“걔…… 쌤 칼 피했어.”

“……뭐?”

그제서야 그는 검을 멈추고 태화를 돌아보았다.

“영혼이 움직였다고?”

“응, 방금…….”

“아까 그놈은 안 그랬잖아.”

“응…….”

그럼 이놈은 대체 뭔가.

상호가 방향을 다시 짚어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대악마들이 담겨 있던 금속 통 쪽에서.

상호는 황급히 태화부터 감싸고 금속 통 쪽을 돌아보았다.

‘……젠장.’

쏟아진 액체가 이미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하나는 네발 달린 짐승을 닮은 무언가로, 하나는 촉수가 달린 덩어리로.

민정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공격해!”

사방에서 마법이 날아들었다.

불덩이에, 결정창에 꿰뚫리면서도 대악마들은 꾸역꾸역 재생을 했다. 상호는 태화를 끌어안은 채로 공격을 도우려다 흠칫하며 앞을 돌아보았다.

개 해골 악마가 일어서 있었다.

“고맙다.”

낮고 진중한 목소리.

하지만 턱은 계속 경박하게 달그락거렸다.

“덕분에 좋은 걸 얻었군.”

“……너.”

상호는 강검을 겨누며 물었다.

“말할 수 있었냐?”

“악마라면 누구나 말할 수 있지. 물론 내가 하는 말은 다른 녀석들과는 좀 다르다만.”

“뭔 소리야? 너 뭐 하는 놈이야?”

“뭐 하는 놈이냐라…….”

포화의 흑연을 장막 삼아 폭음을 연주하듯이. 악마는 여유롭게 양옆으로 팔을 벌렸다.

무대 위에 선 지휘자처럼.

“받은 게 있으니 알려주도록 하지.”

“받은 게 뭔데?”

“그건 비밀이고, 나는 기만의 악마다.”

상호의 몸이 굳었다.

“……너도 대악마냐?”

“일단은 그런 셈이지.”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소개는 이쯤 하고…… 너와는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군.”

상호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검을 휘둘렀다.

퍼억

악마의 목이 단칼에 잘려나갔다.

하지만 악마는 태연하게 자신의 잘린 머리를 잡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궤적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는 듯.

그 동작이 지나치게 깔끔해서 이질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놈이 올 거다.”

잘린 머리가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봤을 테니…….”

“뭐?”

“건투를 빈다.”

그 순간 구덩이에서 액체가 솟구쳤다.

액체는 순식간에 거인의 형상을 갖춰 상호가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호는 황급히 태화를 안고 뒤로 빠졌다.

“……쳇!”

그때 이어셋에서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야! 대악마들……!]

포화 속에서 두 형체가 일어서고 있었다.

붉은 갈기에 피부가 검은 사자 인간. 백의 아래로 촉수를 뻗은 괴물.

야성의 악마와 신비의 악마가 고개를 들었다.

‘젠장.’

갑자기 튀어나온 기만의 악마만으로도 어지러운데 저놈들까지 부활하다니. 심지어 지배의 악마까지.

상호는 일단 태화를 지켜야 했다.

‘누나랑 헌터들끼리는 한 놈도 상대하기 벅찬데…….’

나머지 세 놈을 어떻게 상대하나. 그는 이를 갈며 검을 꽉 쥐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응……?’

대악마들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았다.

헌터들을 향하지도 않았다.

사자의 주홍색 눈동자와 하얀 후드, 그리고 붉은 거인의 머리는 기만의 악마를 향하고 있었다.

‘뭐지?’

상호가 의아해하는데, 지배의 악마가 기만의 악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데려가려는 건가. 그는 강기를 길게 뻗어 놈의 팔을 잘랐다.

촤아악

잘린 팔이 형태를 잃고 후두둑 쏟아졌다.

거인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기만의 악마를 향해서. 상호도 다시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야성의 악마가 기만의 악마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신비의 악마가 촉수 끝에 만든 마법진도, 헌터들이 아닌 기만의 악마를 향하고 있었다.

‘……뭐지?’

같은 편끼리 왜 공격을 하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서 있는데, 기만의 악마가 다른 악마들을 바라보며 턱을 달그락거렸다.

잘린 머리를 든 손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순간 붉은 거인의 몸이 떨리며 목소리를 지어냈다.

“잡아!”

그 말에 상호는 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놈이 왜 사람 말로 명령을 하고 있나. 설마 그에게 말한 걸까. 어이가 없어서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기만의 악마가 중얼거렸다.

“또 보자, 인간.”

그리고는 검은 불꽃으로 제 머리를 태워 버렸고.

희미한 연기 한 자락이 날아 하늘로 향했다.

‘…….’

상호는 그저 당황한 눈빛으로 그 연기를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이게 대체…….’

그러나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지배와 야성과 신비의 악마를 돌아보았다.

세 대악마는 분을 삭이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 둘은 눈코입이랄 게 없는데도.

야성의 악마가 상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멍청한 것!”

“뭔 상황인지 모르고 있긴 해.”

상호는 혀를 찼다.

“억울하면 니들이 알려줬어야지. 다 너희 업보야, 이 새끼들아.”

“멍청한 인간 놈들……!”

야성의 악마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주변의 헌터들을 위협적으로 둘러보았다.

“너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말을 해보라고, 새꺄.”

“불사의 악마입니다.”

“……뭐?”

상호는 갑자기 끼어든 지배의 악마를 돌아보았다.

“기만의 악마가 아니라?”

“기만의 악마이기도 하지요.”

“무슨 소리야?”

평소 같았으면 무슨 소리를 하든 일단 칼부터 날렸겠지만, 지금은 정보가 더 중요했다.

“알아듣게 좀 말해 봐. 기만이면 기만이고 불사면 불사인 거 아냐? 너희 합체도 하냐?”

“당신들이 놈에게 불사의 악마의 피를 주었습니다.”

지배의 악마가 몸을 꾸물거리며 말했다.

“차원을 넘어오며 찢어져 죽었던 불사의 악마의 피를…… 당신들이 한데 모아서 놈에게 갖다 바친 겁니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잠깐.”

상호도 그 말을 들으니 당황스러워졌다.

“불사의 악마의 피라고? 악마 융합체들의 피가?”

“차원의 급류에 잘못 휩쓸린 모양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악마라도 찢어져 죽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불사의 악마는 그 특유의 불사성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져도, 죽지 않고 인간의 몸에 들어간 겁니다.”

“그걸 저놈이 흡수했다고? 그럼 저놈도 이제 불사야? 아니……, 그 전에 불사의 악마는 너희랑 뭐가 다른 건데?”

“그것까지 알려줄 의리는 없지요.”

지배의 악마가 몸을 더욱 꾸물거렸다.

“차라리 봉인을 풀지 않았더라면 서로 좋았을 것을……. 혹은 놈을 잡았더라면, 우리가 봉인시키든 당신들이 봉인시키든 조용히 물러났을 텐데.”

“남 탓하지 마, 이 새끼야. 니들이 말을 안 해서 니들이 손해 본 거지.”

“어쨌든 시간도 충분히 벌었으니…….”

거인의 하반신, 구덩이 속 액체가 크게 출렁였다.

“귀하에게는 이만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이 새끼들!”

무언가 꼼수가 있었던 것이다.

상호는 급히 강검을 휘둘렀지만, 지배의 악마는 야성의 악마와 신비의 악마를 집어삼키더니 구덩이 속으로 몸을 무너뜨렸다.

붉은 곤죽이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수구에서 물이 내려가듯이.

그리고 쿠르륵, 소리를 내며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젠장.’

상호는 구덩이 아래에 드러난 구멍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대악마들도, 졸개들도 전부 풀려나 버렸다. 거기다 불사의 힘을 얻었다는 기만의 악마까지.

산 너머에 산이 있었다.

‘그래도…….’

이제 그의 손에는 삽이 있다. 그는 품에 안겨서 어리둥절해하는 태화를 내려다보았다.

산은 옮기면 되고.

악마는 죽이면 된다.

‘한 놈은 죽였어.’

이 방향이 맞다는 걸 확인했으니, 느리든 빠르든 나아갈 뿐.

그는 구덩이에서 시선을 거두고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이야기 좀 해야겠어,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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