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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45화 (445/501)

<445화>

445. 처형식

봉인소의 어느 방.

“한번 짚어보자.”

상호는 화이트보드를 두드렸다.

“일단 지난번처럼 구덩이에서 졸병 하나를 꺼내 죽여보고, 죽는 게 확인되면 바로 혈석에 봉인된 놈을 죽이고, 그다음에 대악마들. 만약 안 죽거나 애매하다 싶으면 혈석으로 넘어가지 않고 계속 졸개들로 실험하고. 맞지?”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최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건 태화야. 악마의 눈은 다시 만들기 힘들어. 그러니까 어떤 돌발상황이 생기든 난 태화부터 챙길 거야.”

상호의 시선이 민정의 옆에 앉은 리주를 향했다.

“비전투인원들은 다 후방으로 빼낼 거예요.”

“네…….”

“중요한 게 있으면 챙겨요. 꼭 연구를 해야겠다 싶으면 헌터들한테 맡기고.”

“저어,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그럼 포기해요.”

“네에…….”

리주가 고개를 푹 숙였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상호는 리주를 무시하고 민정을 돌아보았다.

“언제 시작할까?”

“연구원들 짐 챙겨서 피신시키고, 헌터들 준비시키고…… 여유롭게 점검한다 생각하면 내일 점심이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때로 하자.”

중요한 일이니 꼼꼼하게 검토할수록 좋을 것이다.

상호의 곁에 선 태화는 심심한지 꼬리를 흔들거리며 딴청을 피고 있었다. 상호는 그런 태화의 볼을 쿡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야, 잘 들어. 너도 같이 하는 작전이잖아.”

“들었어! 내가 젤 중요하다매.”

“그리고?”

“헌터들 짐 싸서 피신시키고 연구원들 싸울 준비한다고.”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헹.”

태화가 장난스럽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쨌든 다 듣긴 했던 모양이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화이트보드를 돌아보았다가, 마지막 확인을 끝내고 문가를 향해 걸어갔다.

“태화 지키고 있을게. 잘 준비해 줘.”

“응.”

민정이 손을 흔들었다.

“쉬고 있어.”

* * *

그래서 온종일 쉬고만 있었다.

쉬라고 해서 옳다구나 쉰 것은 아니고, 태화의 곁에 24시간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너무 많이 와서 익숙한 곳이라, 구경도 산책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온종일, 작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뒹굴거리고만 있었다. 태화와 함께.

그의 곁에 누운 태화가 갑자기 발을 마구 굴렀다.

“아아아악! 심심해!”

“요튜브 좋아하잖아. 요튜브 봐.”

“나 운동할래!”

“갑자기?”

“밖에 나가자! 응? 응?”

“스쿼트하고 팔굽혀펴기 해. 요튜브로 배우면 되겠네.”

“아악! 요튜브 지겨워 죽겠어! 나갈래!”

“어수선한데 방해하지 말고 안에 있어.”

“우씨…….”

태화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쌤.”

“응.”

“나 그거 해볼래. 스파링.”

상호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니가?”

“응.”

“나랑?”

“응!”

태화가 허공에 잽을 날렸다. 상체를 어설프게 숙였다가 뒤로 젖히면서.

“슉슉! 오지윤이랑 하는 거 봤어. 요러케, 요로코롬, 슉! 슉!”

“잘하네. 딱히 대련 안 해도 되겠다.”

“아니이! 심심하잖아! 나 쌈 가르쳐줘.”

“왜. 가르쳐주면 누구 패게.”

“안 패! 우씨, 대봐, 대봐.”

“야, 야! 어디 어른을 치려고 그러냐!”

상호는 태화의 주먹을 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해봐 임마. 너는 새끼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해.”

“어어? 진짜 간다? 명치!”

명치로 날아드는 주먹을 새끼손가락이 쳐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새끼손가락 하나로 충분할 줄은 몰랐다. 그는 태화의 주먹을 날아드는 족족 새끼손가락으로 쳐내며 혀를 찼다.

“어이구, 어이구. 주먹이랑 발이 같이 나가네. 너 싸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우씨……, 이론은 완벽한데.”

태화의 고개와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갸웃갸웃, 기우뚱기우뚱. 그 모습이 꼭 불협화음에 맞춰 억지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샤샥 피하고 주먹. 이게 아닌가? 슈슉 피하고 주먹?”

“암만 해봐라. 털끝이라도 닿나.”

“못할 거 같아? 우씨, 무슨 새끼손가락이 이렇게 세……, 에잇!”

태화가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상호는 새끼손가락으로 태화의 이마를 밀다가, 곧 져주는 척 뒤로 물러나 침대에 나동그라졌다.

“그래, 해 봐. 관절기로 붙어 봐.”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겐가?”

“아니, 니가 올라타는 게 아니라…….”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상호야, 저녁은 어떻게…….”

민정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침대에 상호와 태화가 한데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상호는 멍하니 민정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태화를 밀어냈다.

“어, 응. 저녁? 먹어야지, 저녁 당연히 먹어야지…….”

“아니야.”

민정이 슬그머니 문을 닫으려 했다.

“하던 거 하고 먹어도 돼. 근데 좀 깬다, 상호야. 그럴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진짜로…….”

“아니야! 그냥 침대에서 레슬링 좀 하려고…….”

“나한텐 변명 안 해도 돼, 상호야. 나랑 네 나이차가 너랑 태화 나이차보다 많으니까…….”

다 닫혀가는 문틈 사이로 민정의 쓴웃음이 보였다.

“내가 뭐라 하면 안 되겠네. 상호야, 즐거운 시간 보내…….”

“아니 누나, 누나!”

“태화야, 나 먹을 건 남겨 놔…….”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손을 뻗은 채로 굳어버린 상호에게 태화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뭘 남기라는 거야?”

“……넌 몰라도 돼.”

상호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어떻게 그런 타이밍에 딱 들어올 수가 있을까.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펀치! 펀치!”

“그만 쉬자, 태화야…….”

“심심해! 심심해 죽겠어!”

“이미 심심해하는 목소리가 아니야, 임마…….”

“어라, 들켰네. 그럼 얌전히 내 노리개 해. 이랴, 이랴~.”

“내려와…….”

“이랴!”

“……에휴.”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 * *

그날 밤.

상호는 태화의 머리맡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품에 안은 검을 어깨에 기대어 놓고서.

누워있던 태화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자?”

“자려고.”

아주 작은 기척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선잠을 자려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깰 거라 빨리 자야 돼. 너도 얼른 자.”

“그럼 무릎베개 해줘.”

그는 태화의 머리를 끌어당겨 무릎에 놓았다.

그때 문 바깥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뿐하면서도 아이들보다는 조금 무거운 걸음걸이.

상호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조심스럽게 열린 문 사이로 민정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 자고 있었구나.”

“뭔 일 있어?”

“아니, 그냥…….”

쓴웃음을 짓는 민정의 시선은 태화를 향하고 있었다.

“잘 자고 있나, 확인하고 싶어서 왔어.”

“아.”

태화가 상호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났다.

“쌤, 나 좀 걷다 올게.”

“뭘 걸어, 임마! 위험하게…….”

“내가 모를 거 같아? 나도 이제 열아홉이야. 알 거 다 알아. 마음 넓은 내가 다~ 이해할게.”

“야! 이리 와.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상호는 버럭 성을 내며 태화의 꼬리를 잡았다. 순간이동으로 도망칠 수 없게.

당장 내일이 그토록 중요한 날인데, 그 전날에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가만히 있어. 절대 다른 데 가지 말고 잠이나 자.”

“그치만 민정쌤이…….”

“아니야, 아니야.”

민정이 손을 흔들었다.

“내가 깜빡했어. 응. 오늘은 안 될 것 같네.”

그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눈빛에 묻은 미련을 읽어버린 상호는, 마지못해 민정을 불러세웠다.

“같이 자자, 누나.”

“응?”

“혼자 심심하게 자지 말고.”

민정의 안색이 밝아졌다.

살짝 웃음을 흘리며 다가온 민정은 상호의 곁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럼 우리 이야기나 할까?”

“태화 자야 하는데…….”

“이미 자고 있어.”

“……응?”

어느새 태화는 상호의 무릎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수면 마법을 건 모양이었다.

민정이 씩 웃으며 태화의 머리를 침대로 내려놓았다.

“이제…… 이야기, 해도 되겠네?”

“……으응.”

순간 불길한 생각이 상호의 뇌리를 스쳤다.

하필 오늘. 하필 오늘 밤. 이렇게 중요한 날에 이럴 목적으로 찾아왔다는 게. 혹시 태화를 그의 곁에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건 아닐지.

‘설마…….’

상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랬으면 얘가 알아봤겠지.’

그래도 한 번 고개를 든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상호는 곁으로 점점 다가앉는 민정을 끌어안고 귀에다가 속삭였다.

“누나, 오늘은 그냥 자자.”

“응?”

“내일 피곤할 것 같아서 그래. 다 끝낸 다음에 해도 되잖아.”

그 말에 갑자기 민정이 상호의 멱살을 잡고 침대에 쓰러트렸다.

“……누나?”

“그럼 빨리 하고 자자.”

“아니, 아니 잠깐만…….”

“누나도 오래 참았어, 상호야. 이제 안 되겠어. 어린애들이 단물 다 빨아먹고 껍데기만 남는 꼴 더는 못 봐…….”

“누나가 나를 껍데기로 만들려고 하고 있잖아……!”

“잘 먹을게…….”

“아니……!”

상호의 절규는 민정의 입술에 파묻혀 사라졌다.

* * *

“쌤.”

태화가 눈곱을 떼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악마라도 본 표정인데.”

“…….”

악마를 보긴 했다. 정확히는 악마적인 몸과 악마적인 기술을.

상호는 퀭한 눈을 문지르며 옆을 내려다보았다. 민정이 얇은 이불을 두른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게 피곤할 거라니까…….’

어른이고 아이고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구나.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태화가 민정이 덮은 이불을 슬쩍 들췄다.

“완전 보내버렸네?”

“……얌마!”

“수녀님한테 듣기로는 절뚜기 3분카레랬는데. 좀 절륜해졌나봐?”

“……시끄러. 일어나기나 해. 씻으러 가게.”

상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태화와 함께 방을 나서며 문을 닫기 전에 돌아본 민정은, 어째 어제보다 피부가 탱탱하고 매끈해져 있었다.

* * *

[상호야, 들리니?]

이어셋과 귀에서 민정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상호는 버튼을 눌러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어. 누나는?”

[응, 잘 들려.]

민정은 봉인소 건물 창가에 서 있었다. 중앙 마당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작전은 중앙 마당 내에서 진행될 테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이렇게 이어셋을 미리 착용했다. 돌발상황이 일어나서 1분 1초가 아까울 시간에 이어셋을 찾고 있을 순 없으니.

확인을 마친 상호는 곁에 서 있는 태화를 돌아보았다.

“시작할게.”

“응.”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덩이 속에서 살점이 튀어나왔다. 민정이 마법으로 꺼낸 것이었다. 상호는 그 살점에게 다가가며 검을 뽑았다.

“보여?”

“응.”

태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엄청…… 잘 보여.”

“어느 쪽?”

“여기.”

태화의 검지에서 얇은 광선이 쏘아져 나왔다. 레이저 포인터처럼.

“지금, 이 방향이야.”

“거기서 찔러넣으면 돼?”

“응.”

검푸른 불꽃이 검을 휩쌌다.

베르멜로 때의 경험이 있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상호는 태화가 가리킨 곳에 정확한 각도로 초혼강기를 찔러넣었다.

검이 살점을 찌르고.

초혼강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갔다.

푸욱……

더 깊이.

더 깊게. 수많은 인생을 농락해온 족속들에게 연민이나 동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태화의 눈으로. 그리고 예경의 검으로.

상호는 손에 힘을 주어 더욱 깊숙하게 초혼강기를 꽂아 넣었다.

푸화아악

갑자기 칼끝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분수처럼. 찔린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듯이.

상호는 그 흑연을 보고 확신했다.

그 확신을 담아, 마지막으로 강하게 검을 찔러넣었다.

키아아악

상처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듣는 이의 혼을 찢어버릴 듯한 비명소리는, 대기를 울리고 살갗을 떨리며 길게 이어지다가, 검은 연기를 쿨럭쿨럭 내뱉으며 사그라들더니.

화르륵……

살점과 함께 불타올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그 모습을 모든 헌터들이 지켜보았다.

태화가 살점이 있던 곳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성공……한 거야?”

“응.”

상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건 성공일 수밖에 없다.

그의 시선이 혈석을 향했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누나.”

[그래도 되겠어?]

“응.”

저놈이 대체 뭐 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꺼림칙한 것은 빨리 처리해 두는 것이 나았다.

그의 눈빛이 혈석 속을 꿰뚫었다.

개 해골 머리의 악마.

“시작한다.”

상호는 검을 들고 혈석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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