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444. 불사 죽이기
“갑자기 쓰러졌다고?”
“예.”
지윤의 턱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놀고 있었는디, 갑자기 픽…… 쓰러졌심더.”
“보자.”
상호는 지윤에게서 태화를 받아 상태를 살폈다.
지난번과 같았다. 끙끙거리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게.
‘……그놈인가.’
골목에 숨어 있던 그림자.
그는 태화를 안아 들고 지윤과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미진 선생님 찾아서 수업하고 있어.”
“괘안은 깁니꺼?”
걱정 가득한 목소리.
별것 아닌 척 대답하려 했지만, 약간 늦고 말았다.
“괜찮을 거야.”
“……알겠심더.”
그 잠깐의 망설임을 알아차렸을까. 지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영 시원치 못했다.
“아덜헌티는 잘 말하겠심더. 걱정 말고 다녀오이소.”
“응.”
한시가 급하다. 상호는 짧게 대답하고 숙소를 향해 달렸다.
* * *
사방이 어둠이었다.
‘……역시나.’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파스텔톤의 하늘도, 솜사탕 향기도. 아이가 그린 듯한 건물들도. 모두 흔적도 없이 어둠 속에 파묻힌 채였다.
그는 손을 들어 초혼강기를 피웠다.
검푸른 불꽃이 희미하게나마 앞을 밝혔다.
‘심상은 그대로다.’
바뀐 건 그림자뿐.
더 이상 골목에 숨어 있진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태화를 찾아야 했다.
그는 불꽃을 최대한 크게 키웠다.
‘젠장, 이걸로는…….’
밝기가 만족스럽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던 그때.
검푸른 불꽃 속에서 하늘색 불꽃 한 점이 떨어져 나왔다.
‘……!’
상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늘색 불꽃은 팔랑거리면서도 빠르게 검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상호는 그 불꽃을 따라 몸을 날렸다.
불꽃이 가는 길의 끝에는 한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의 옥상에, 한 소녀가 검은 무언가로 묶인 게 보였다.
‘……쳇.’
소녀는 당연히 태화.
그림자는 마치 덩굴처럼 온 건물과 태화를 휘감고 있었다. 덩굴에 묶여서 억지로 일어나 있는 꼴이 꼭 실에 매인 인형과 같았다.
상호는 옥상에 착지해 강검을 휘둘렀다.
촤악
하얀 다리를 옭아맨 덩굴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뿐, 다른 곳을 묶은 덩굴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덩굴을 풀었던 다리마저도 또 다른 덩굴에 묶여 버렸다.
상호는 이를 갈며 덩굴을 계속 베어냈다.
‘젠장……!’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었다.
덩굴은 오히려 더 많이 엉겨들어 그의 손목까지 옭아맸다. 당황한 상호가 손에 초혼강기를 피워 봤지만,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덩굴을 떼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망할……!’
둘 다 잡아먹히게 생겼다.
이제 태화는 완전히 덩굴로 뒤덮이기 직전이었다. 상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태화의 몸에 초혼강기를 흘려보냈다.
태화는 반드시 살려야 했다. 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뒤는 세희가 이으면 되었다.
푸화아악
검푸른 불꽃이 상호와 태화의 주변을 휩쌌다.
그럼에도 검은 덩굴은 쉽사리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림자는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또 새로운 덩굴을 뽑아내어 그들을 한데 묶었다.
‘이놈…….’
너무 강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래도 평범한 악마가 아닌 것 같았다.
상호는 덩굴에서 손을 잡아빼어 태화의 뺨을 잡았다.
“태화야.”
“으…….”
“태화야? 일어나 봐, 태화야!”
이 심상에서 제일 강한 건 태화 본인인데. 그림자에게 어떻게 당한 건지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그 순간 덩굴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컥……!”
태화를 부르려던 목소리가 폐부에 갇혔다.
뺨을 잡았던 손도 덩굴에 붙잡혀 버렸다. 그는 버둥거리며 태화를 깨우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커……헉…….”
틀렸다.
겨우 여기까지인가.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상호는 이를 악물고 충혈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망……할.’
덩굴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하얗게 변한 시야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
여자인 건 확실한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 하얀 얼굴.
웃는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아.’
그렇게, 숨통이 끊어지려 하는 순간.
하늘색 불꽃 한 점이 그림자에 떨어졌다.
쉬익……
검정에 하늘색이 녹아들었다.
꼭 물감이 물에 퍼지는 것처럼. 사르르 흩어진 불꽃은 그림자에 색을 더하며, 상호와 태화를 묶은 덩굴까지 그 세를 뻗었다.
덩굴이 힘을 잃고 맥없이 흘러내렸다.
“커흑…….”
상호는 숨을 들이키고 황급히 태화를 안았다.
그림자에게서 거리를 벌리자 덩굴이 다시 그들을 쫓았다. 하지만 이전보다 확연히 속도가 느렸다. 무언가의 방해를 받는 듯이.
그리고 이제는, 태화를 벨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촤아악
휘두른 강검에 덩굴들이 베여나갔다.
상호는 심호흡을 하고 강검을 강하게 쥐었다. 내공. 혹은 영혼. 혹은 마음. 그 무엇이 되었든, 강검에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을 불어넣었다.
강검이 그 길이를 더해갔다. 세상 끝에 닿을 것처럼.
그 거대해진 강검이 하늘을 가르며 그림자를 향해 떨어졌다.
쿠구구……
세상을 뒤덮은 그늘이 강검의 궤적을 따라 갈라졌다. 그 틈으로 파스텔톤 하늘이, 솜사탕 향기가 흘러들었다.
베이고 있다.
벨 수 있다.
상호는 확신을 가지고 검을 내리쳤다.
콰아악
강검이 그림자를 갈랐다.
키히아아악
날카로운 괴성이 그림자에서 흘러나왔다.
그림자는 덩굴을, 세상의 검정을 거둬들이며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이 꼭 사람이 엎드린 것 같았다.
상호는 그것을 향해 다시 강검을 휘둘렀다.
퍼억……
그림자가 다시 강검에 베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괴성을 지를 뿐, 쓰러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명확한 형태를 갖추어 상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림자의 손톱이 상호를 향해 날아왔다.
“……크읍!”
상호는 크기를 줄인 강검으로 놈의 손을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자세를 바로잡고 검을 겨누는데, 어느새 이마에 진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이 자식…….’
빨랐다. 그리고 강했다. 절대로 평범한 악마가 아니었다.
이츠키의 눈에 있었던 악마라서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츠키는 악마 융합체도 아니고, 눈만 빼면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강한 놈일 줄이야.
그는 그림자에게 검을 겨눈 채로 태화를 흔들었다.
“태화야, 태화야.”
“응……?”
덩굴 때문이었던 걸까. 다행히 태화는 눈을 떴다.
그림자를 본 태화가 몸을 움찔했다.
“뭐, 뭐야…… 저거?”
“악마겠지.”
상호는 그림자가 채찍처럼 휘두른 덩굴을 피해내고 혀를 찼다.
“베어도 죽질 않아. 네가 없애야 해.”
“내가……? 어떻게?”
“너만 할 수 있어. 여긴 네 마음속이잖아.”
“그치만…….”
태화는 자신이 없는 듯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해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어…….”
“할 수 있어.”
그는 태화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옆에 있잖아.”
그때 갑자기 그림자에서 찢어지는 괴성이 튀어나왔다.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저러나. 상호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 태화가 중얼거렸다.
“말하고 있어.”
“……응?”
“돌려달라고…….”
태화의 붉은 눈동자에 그림자가 비쳤다.
“내 눈, 내 피, 내 힘, 전부 돌려달라고…….”
“그럴 순 없지.”
상호는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태화의 손을 잡았다.
“같이 해보자.”
“같이?”
“네가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생각해.”
그리고 검을 치켜들었다.
“셋 세면 같이 날리는 거야.”
“잠깐, 잠깐…….”
“아직 생각 못 했어?”
“으응…….”
“준비되면 말해.”
태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됐어.”
“간다. 하나…….”
상호의 강검이 확 타올랐고.
“둘.”
태화의 뿔 사이에 보랏빛이 모여들었다.
“셋!”
검푸른 화염과 보랏빛 광선이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두 가지 공격이 한데 합쳐지자 기세가 더욱 맹렬해졌다. 마법과 무공.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아냈지만, 이 심상의 세계에서는 뜻만 같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과물은 같았다.
마나와 영혼.
콰아아아
폭포처럼 세차게 쏟아진 광선과 불꽃이 그림자에 직격했다.
키히익……
그림자는 고통에 신음하며, 벌레가 죽듯 팔다리를 오그라뜨리고, 또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몸을 마구 비틀다가.
캬아아아악
온 세상을 찢어버릴 듯한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는, 연기처럼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상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해치웠나 보다.”
“아잇, 쌤!”
“……응?”
아래를 내려다보니 태화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말 하면 어떡해! 그런 말 하면 나중에 또 나온단 말야!”
“……그런 거야?”
“주워담아! 주워담아! 말한 거 다시 집어먹어! 얼른!”
태화가 허공에 그러모으는 시늉을 해서 상호의 입으로 가져갔다.
어쨌든 해치웠다.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압박도. 그림자도. 그 어떤 불길한 낌새도 더는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게 평소 태화의 심상 그대로였다.
“거봐.”
그는 강검을 없애고 태화를 바라보았다.
“하니까 되지?”
“으응.”
태화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다가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쌤이 알려줘서 한 거잖아. 나 혼자선 못 했어.”
“이제는 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거지.”
“아니야. 나 못 해. 난 쌤 있어야 돼.”
“얌마, 언제까지 남한테 의지해서 놀고먹을라고…….”
“응애~ 응애~. 밥줘~ 해줘~.”
“하아…….”
상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곧 피식 웃고는 태화를 꽉 끌어안았다. 숨도 못 쉬게.
“우웅! 숨막혀어! 확 핥아버린다!”
“너 때문에 애들이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일어나면 걔들한테 사과부터 해.”
“사과를 왜 해? 내 잘못 아닌데?”
“그냥 미안해 한번 해줘. 별거 아니잖아. 너는 임마 친구들한테 미안해 한 번 하는 게 그리 꼬와서…….”
“응, 꼬와. 안할건데? 안할건데? 때릴꼬야? 꼬우면 때려봐. 때려봐~. ……아잇, 숨막힌다니까아!”
“그러라고 하는 거야.”
“우우우움!”
발버둥 치는 태화를 꼭 안고서, 그는 키득거리며 태화의 굽슬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 * *
“갔다올게.”
상호는 차창을 열고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싸우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네.”
가장 가까이에 선 세희가 대답했다. 영 탐탁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희의 시선은 조수석에 앉은 태화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꼭 둘이만 가셔야겠어요?”
“응.”
그는 살짝 웃고 작게 속삭였다.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내가 못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네.”
“어떻게 하라고?”
“이츠키의 왼쪽 눈을 악마 융합체한테 이식하라고요.”
“그래.”
제대로 알고 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 해도 세희가 잘 이어갈 것이다. 상호는 만족한 미소를 짓고 차창을 올리려 했다.
그런데 세희가 차창을 꽉 잡아서 힘으로 내리눌렀다.
“세희……야?”
당황한 상호에게 세희의 시선이 꽂혔다.
“선생님.”
“응?”
“이상해요.”
“……뭐가?”
“왜 그런 말을 하셨던 거예요?”
차창을 잡은 세희의 손에서 꾸드득 소리가 났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에요?”
“위험하지. 중요하고…….”
“선생님이 죽을 수도 있어요?”
“아마도.”
“그럼 보내드릴 수 없어요.”
눈빛을 보니 싸워서라도 잡아둘 생각인 듯했다.
물론 죽으러 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죽을 위험은 있었다. 항상.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언제나 죽을 수 있지. 사람은.”
상호는 쓰게 웃었다.
세희에게 부담을 주거나 겁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이번에 죽을 확률이 그리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에.
그러나 어제 태화의 심상에서 죽을 뻔한 후로, 이전까지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후사를 챙기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치만 네가 원한다면…….”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꼭 살아서 돌아올게.”
세희도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약속이에요.”
“응.”
상호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둘의 손가락이 단단히 엮였다.
둘이 서로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자 곁에서 지켜보던 태화가 한마디 했다.
“임신광선 쏘네.”
“……얌마.”
“빨리 출발이나 하자구. 오늘 데이트 상대는 나잖아. 나한테 집중해.”
“데이트는 무슨…….”
그래도 출발은 해야 한다.
상호는 차창을 올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갔다올게.”
“네.”
세희가 차에서 물러났다.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나빛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음번엔 저도 같이 가요…….”
“으음, 아마 다음번은 없을 거긴 한데…….”
“어디가 되었든 둘이서만 가요…….”
“응.”
상호는 씩 웃어주고 차창을 올렸다.
차를 몰아 교문을 빠져나오자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하나 남은 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교차로의 빨간불에서 차가 잠시 멈췄을 때. 그는 그 틈을 타 태화에게 물었다.
“짐은 잘 챙겼지?”
“응.”
“얼마나 걸릴지 몰라.”
트렁크에는 일주일 동안 입을 옷들이 실려 있었다. 구덩이 속의 악마들이 몇 마리나 될지 몰랐기에.
“노트북은 챙겼어?”
“거기 컴퓨터 있잖아.”
“얌마, 그건 연구용이고…….”
“몰라. 심심하면 쌤 가지고 놀 거야.”
“……그래.”
상호는 입맛을 다시다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거의 다 왔다.’
초혼강기도, 악마의 눈도 다 준비했다.
이제 남은 것은 확인뿐.
‘거의 다…….’
그는 초록불이 되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동쪽을 향해.
죽여도 죽지 않는 것들을 죽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