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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42화 (442/501)

<442화>

442. 봄은 없다

상호는 글씨를 빼곡히 써둔 화이트보드를 두드렸다.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거지.”

그의 앞, 회의실의 길쭉한 탁자에는 악마와 관련된 인물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도현과 해련, 화상 통화로 참여중인 민정과 리주. 그리고 효은과 혜소에다가 세희, 태화, 다혜, 이츠키. 마지막으로 베르멜로까지.

“맨 처음 개벽이 일어났어.”

지우개가 저 혼자 둥실 떠올라 화이트보드를 지우고, 보드마카가 저 혼자 떠올라 선을 그었다.

“저쪽 세상. 그리고 이쪽 세상. 어떤 이유로 충돌이 일어나면서 세상이 합쳐졌어.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은 융합체가 됐고…… 영혼을 다른 차원에 두고 있던 악마들은, 세상끼리 합쳐질 때 제대로 넘어오질 못하고 틈새에 갇혀 버렸지.”

상호의 시선이 베르멜로를 향했다.

“맞냐?”

“네에……, 제가 알기로는.”

“말했다시피, 악마들은 영혼을 다른 차원에 둔다. 그 영혼과 몸을 이어주는 게 악마의 구멍이고.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악마의 영혼, 편의상 심장이라고 부르는 그걸 찔러야 하는 거지.”

상호는 손으로 지르는 시늉을 했다.

“그게 초혼강기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마신이 두려워하는 거고.”

해련이 물었다.

“그럼 그 악마의 구멍이라는 걸 어떻게 보죠?”

“악마의 눈으로요.”

이츠키는 혜소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상호는 이츠키를 눈짓하고 말을 이었다.

“사카시타의 눈이 악마의 눈이에요.”

“어떻게?”

“개벽 때 융합된 거죠. 악마의 눈만. 이제 그 악마의 눈을 완성시키는 게 우리 목적이에요.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

그때 누군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두 갠데…….”

상호의 시선이 노트북 화면을 꿰뚫고 리주에게 박혔다. 깜짝 놀란 리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두 개. 하나는 사카시타를 악마로 만드는 거고, 하나는 악마의 눈을 악마에게 이식하는 것. 이 두 가지예요. 하지만 사카시타를 악마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눈을 악마에게 이식하겠다?”

“네.”

“누구한테?”

해련의 물음에 상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것 때문에 모인 거예요.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어서.”

검고 붉은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식할 악마는 당연히 둘 중 하나야. 악마. 아니면 악마 융합체. 문제는…….”

상호의 손이 베르멜로를 가리켰다.

“쟤도 인간 태생이라. 백 퍼센트 악마가 아니거든.”

그리고 또 다른 이유. 이 귀중한 무기를 악마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것.

마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목숨이 달린 이 악마의 눈을, 전향한 지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배신자 출신 악마에게 맡길 순 없었다.

아무리 믿겠다 약속을 했더라도.

상호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식할 사람은 나와 가까이 있을 수 있어야 해. 내가 항상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태화가 이식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응?”

태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거…… 아파?”

“그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어.”

상호는 리주와 이츠키, 혜소를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첫째는, 악마의 눈을 이식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악마의 눈은 주술적인 개념.

그게 과연 눈을 물리적으로 이식한다고 옮겨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미지수였다.

“만약 이식이 안 된다면……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사카시타를 악마로 만드는 방법을 고려해야겠지. 둘째는, 악마의 눈을 악마에게 이식한다고 정말로 그 눈이 완성되는가.”

이것은 현시점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알아낼 방법이 없는 문제였다.

그저 가능하리라 믿을 뿐.

아무런 근거도 없이.

“셋째는…… 악마 융합체가 악마가 맞는가.”

“응?”

태화가 눈을 깜작였다.

“악마…… 아냐? 나?”

“물론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그렇기에 마신의 봉인체로 선정되기도 했고.

그러나 악마 융합체가 과연 악마의 눈을 완성시킬 수 있을 만큼 악마에 가까운지는, 아무도 알 방법이 없었다. 두 번째 의문처럼.

“그렇다고 완전한 악마도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는 거고, 우리가 선택해서 결정을 내려야 해. 악마의 눈을 태화에게 넣을지. 베르멜로에게 넣을지.”

상호는 리주를 바라보았다.

“형수.”

“네.”

“형수는 태화가 악마에 얼마나 가깝다고 생각해요?”

“과학적……으로요?”

“뭐든 간에. 형수 경험상으로.”

리주가 생각에 잠겼다.

“악마냐 인간이냐를 가르는 건…… 저희가 만든 기준은 하나예요. 자신만의 악마 인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걸 기준으로 본다면 태화 양은 분명히 악마예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융합체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악마 인자이기도 하고.”

“결론은, 악마다?”

“네.”

상호는 이번에는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사카시타. 네가 보기에는?”

“실은 있는데 구멍은 없습니다.”

이츠키가 태화를 흘끗했다.

“제 입장에서는 인간이라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습니다.”

“그래.”

다음은 베르멜로.

“너는?”

“……일단 악마 냄새가 나긴 하거든요.”

베르멜로가 상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치만, 주인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거라서…….”

“인간 태생?”

“……네에.”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좀 이따 보자.”

“아아아아니! 그치만 그게 사실인데요! 노력하라고 말씀하셔도……!”

“누가 뭐래? 이따 보자고.”

“아아앙! 아니, 잠깐!”

발을 동동 구르며 앙탈을 부리던 베르멜로가 눈을 부릅떴다.

“악마여도 구멍이 없을 수는 있어요.”

“어떻게?”

“구멍은 그냥 육신과 다른 차원의 영혼을 이어주는 것뿐이에요. 만약 평범한 생물들처럼 육신과 영혼이 같은 차원에 있다면…… 구멍이 안 보이는 게 당연하죠.”

“악마의 영혼이지만 다른 차원에 있는 게 아니다?”

“네!”

기세등등한 꼴이 꼭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자부하는 듯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도움은 되는 내용이었다.

상호는 마지막으로 혜소를 돌아보았다.

“혜소야.”

“네.”

“네 느낌은 어때?”

혜소가 눈을 깜작였다.

“저는 전문적인 건 잘 모르는데요.”

“느낌을 물어보는 거야. 저기 저 빨간 언니랑 태화랑.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

“……으음.”

작은 손이 꼬물거리며 염주를 굴렸다.

“그렇게 물으셔도 모르는 건 몰라요.”

“그래?”

“그치만 하나 알겠는 건…….”

혜소의 시선이 베르멜로를 향했다.

“저기 저 악마라는 언니도. 사람이랑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요.”

“……그렇구나.”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머지는 당사자들이랑 따로 이야기해 볼게. 오늘은 여기까지…….”

“므앙?”

“……응?”

당황하며 아이들이 앉은 쪽을 돌아보니, 다혜가 손을 번쩍 치켜든 채로 무어라 옹알거리고 있었다.

“으아므아으!”

“으응……?”

“이럴 거면 자기는 왜 데려왔냬요.”

“아으아으아!”

상호는 헛기침을 했다.

“너희도 알아야 하니까 데려온 거야. 만약 내가 실패하면 너희가 이어서 해야 하니까…….”

“아으!”

“언니도 자기만의 구별 방법이 있다는데요.”

“……응?”

악마와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이 또 있단 말인가.

상호가 어리둥절해서 잠시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다혜가 태화의 목덜미를 잡았다.

“아으!”

“아 씨, 뭔데…… 꺄아아아악!”

“후루루룩~.”

그리고는 신명나게 볼을 빨기 시작했다.

“쮸아아앙.”

“아악! 꺼져! 다 꺼져! 레즈가 몇 명이야, 이 미친년들아아악!”

“……우린 밥이나 먹자.”

“네.”

상호와 나머지 사람들은 둘을 내버려두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 *

이후 베르멜로까지 빨아본 다혜가 말하길, 맛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상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태화야.”

둘만 돌아온 회의실.

그의 곁에 앉은 태화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응.”

“곧 너한테 이츠키의 눈을 이식할 거야.”

상호는 태화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게 물리적인 방식이든, 주술적인 방식이든, 너한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허락을 받으려고 해.”

“안 할 수 없잖아.”

태화가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내가 안 하면 쌤이 못 이기는데, 어떻게 안 해. 그렇게까지 말해 놓구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런가?”

상호는 쓰게 웃으며 태화의 뺨을 문질렀다.

“미안해.”

“그리고 어차피 나는…… 내 목숨도 걸어 봤어. 겨우 눈 하나 따위도 못 걸 리가 없잖아.”

진지하던 태화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옆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많이 아프진 않겠지?”

“마취는 하겠지만 장담은 못 해.”

“우씨, 겁주지 마…….”

“이식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상호는 씩 웃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지?”

“……응.”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태화는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헌터니까.”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웃다가, 서서히 서로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찰카닥……

문 열리는 소리.

상호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헛기침을 했다.

“으흠! 흠.”

“뭐야.”

문가에 선 효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뭐 했냐?”

“아니?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는 거 없으면 빨리 나와, 새꺄. 할 말 있으니까.”

“아, 알았어.”

말투가 이미 약간 빡친 분위기였다. 상호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태화를 돌아보았다.

“부대 휴게실 가서 애들이랑 쉬고 있어.”

“응.”

태화가 검은 연기를 터트리고 사라졌다.

그나저나 효은이 할 말이 있다니. 상호는 가슴을 졸이며 회의실을 나와 효은의 곁에 붙었다.

“혜소는?”

“이츠키한테 맡겼어.”

“할 말은?”

“너.”

효은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잘못한 거 없어?”

순간 상호의 등에 진땀이 쫘악 배어났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평소 같았으면 헛소리 말라며 당당한 척을 했을 테다.

문제는, 짚이는 게 있었다.

“……뭐가?”

“니 입으로 말해.”

효은이 다가서며 그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나한테 말해야 했던 거 없어?”

거짓말을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이었다.

대체 어떻게 효은의 귀에 들어가게 된 걸까. 가은에게밖에 말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내 입으로는 말 못 하지…….’

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모르겠는데?”

“몰라?”

“응.”

효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너 여자가 왜 또 늘었어?”

‘?’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여자요?”

“너 아까 회의실 보고 느낀 거 없어?”

“응…….”

“다 여자잖아.”

효은이 손바닥으로 회의실 쪽의 벽을 쾅쾅 두드렸다.

“오빠 빼고 싹 다 여자잖아, 이 새끼야!”

“아니…….”

겨우 그것 때문이었냐.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새꺄. 저 빨갱이 여자는 언제 데려왔어? 악마 중에 꼴리는 년 하나 보이니까 냅다 납치해온 거지? 뻔하다 뻔해, 등신아. 너도 너 스스로가 주체가 안 되지?”

“그게 아니라 쟤가 인간 태생이고, 대악마니까 아는 게 많을 것 같았고…….”

“핑계 대지 마.”

효은이 검지를 들어 그의 코 앞에 들이댔다.

“진짜 마지막이야. 너 더 이상 늘리지 마.”

“아니…….”

“딱 쟤까지만 봐준다. 먹고 싶으면 먹어. 근데 나보다 많이 먹잖아? 그럼 다 같이 뒤지는 거야. 너랑 나랑 저년이랑.”

“……안 먹었어!”

“참도 그렇겠다 X새끼야. 뭐? 주인님?”

그걸 들었구나. 상호의 눈동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것도 다 사정이 있어…….”

“그래, 사정이 자주 있었겠지.”

“아니…….”

“오늘도 사정이 있을 예정이고, 새끼야. 너 안 되겠다. 그냥 지금 싹 쥐어짜줄게.”

“아니……!”

“따라와.”

상호는 머리채를 잡힌 채로 회의실에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 * *

저녁 시간.

“……윽.”

상호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삐걱대는 허리를 부여잡았다.

그 모습을 본 베르멜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아프세요?”

“말 걸지 마.”

“네…….”

그의 냉랭한 반응에 베르멜로는 시무룩해서 밥을 뒤적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다. 상호는 등허리를 문지르며 효은을 흘끗했다.

효은은 그와 베르멜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님.”

“말 걸지 말라고…….”

“저분이 주인님 애인이에요?”

베르멜로가 젓가락으로 효은을 가리켰다.

“저어기, 저분.”

“어.”

“되게 예쁘네요. 성격도 좋아 보이고…….”

“…….”

넌 눈깔이 삐었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남아있는 한쪽 눈을 효은이 뽑아버릴지도 몰랐다.

“……그치.”

“제가 눈에 안 드는 이유가 있었네요.”

베르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착한 애인이 있으니까…….”

“…….”

“조용하고, 욕도 한 마디 안 할 것 같은 분이 얼굴까지 예쁘고. 게다가 주인님 같은 거친 남자도 다 받아주는 걸 보면 마음씨까지 고울 테니…….”

“…….”

“힘든 게 당연했네요, 저는.”

베르멜로는 입맛을 다시다가 씩 웃으며 상호에게 가까이 다가붙어 속삭였다.

“그래도 가끔은…….”

“꺼져.”

“네에…….”

베르멜로는 다시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상호는 그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효은을 흘끗거리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겠냐…….’

백에 하나,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이 와도.

알콩달콩한 연애는 인생에 없을 듯싶었다.

‘내 팔자야…….’

오늘따라 국이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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