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439. 오탁
“어머.”
베르멜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이 왜 그러세요?”
“다크 서클이라는 거야.”
“아니 뭔지는 아는데…….”
“뭐. 니가 지워주기라도 하게?”
상호는 눈 밑을 문질거리며 핀잔을 날렸다.
어제 민정과 리주를 만나 실험을 했다. 악마 곤죽에서 악마의 눈만 추출해낼 수 있는지. 상호는 직접 실험을 하지는 않았으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곁에서 호위를 했다.
처음 해보는 실험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고, 결과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걸어볼 만한 실험이었기에 후일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남은 건 피곤뿐.
“지워주고 싶으면 방법이나 찾아봐.”
“네에…….”
풀죽은 목소리.
하지만 눈으로는 그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어…… 그런데.”
“뭐. 방법을 찾으려면 환기가 필요해서 외출을 해야겠어?”
“……헤헤.”
베르멜로는 겸연쩍은 듯이 웃고는 상호에게 애교를 부렸다. 손을 모으고 몸을 갸웃거리거나, 눈을 찡긋거리면서.
그러나 상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좋은 생각이 날 것 같지는 않은데.”
“에이, 혹시 모르잖아요…….”
“공부 못 하는 애들이 꼭 그러더라. 놀아줘야 공부가 잘 된다고.”
“……에에이~.”
은근슬쩍 달라붙은 베르멜로가 그의 팔을 잡고 몸을 비볐다.
“사실은 저랑 놀고 싶으시잖아요~.”
“니가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
그때 상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는 벽붙이 에어컨.
‘그러고 보면 이 녀석…….’
좋은 생각이 났다. 그는 조금 들뜬 속마음을 숨기고 언짢은 척, 퉁명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 나가자.”
“진짜요?!”
“대신 너, 나가서 찡찡대기만 해봐. 외출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할 거야.”
“네!”
베르멜로는 허겁지겁 나갈 준비를 했다.
* * *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으엑!”
기세등등하게 밖으로 나가던 베르멜로는 열풍을 정통으로 맞더니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상호는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못 나가겠어?”
“에이, 장난치지 마요! 마법은 또 언제 배우셨어요!”
“계절이라는 거야.”
“……계절?”
계속 뒷걸음질을 치던 베르멜로가 멈칫했다.
“아니, 우리도 기온이 바뀌긴 하지만…… 몇 주 만에 이렇게 바뀔 리가 없잖아요! 마법으로 장난치는 거잖아요!”
“야.”
백문이 불여일견. 상호는 베르멜로의 머리를 잡고 문 밖을 보게 했다.
“잘 봐. 사람들이 어떻게 입고 다니냐?”
“……속옷만 입고 다니네요.”
“아니야. 옷이야. 저게 옷이라고.”
“네에?! 아니, 저기 저 여자는 아무리 봐도…….”
“좀 짧긴 한데 바지야. 속옷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들한테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라고 했겠냐? 봐봐. 다들 저렇게 돌아다니고 있잖아. 이게 여름이라는 거라고.”
“여름…….”
베르멜로는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자신의 긴 소매와 긴 치마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벗어야 해요?”
“옷이라고, 인마. 전혀 안 듣고 있구만……. 그리고 넌 갈아입을 필요 없어.”
베르멜로의 팔과 다리는 혈마법으로 만들어진 상태. 남들처럼 입었다가는 빨간 팔다리가 훤히 드러날 터였다.
상호는 팔짱을 끼고 베르멜로를 바라보았다.
“어떡할래. 더워도 나갈래? 아니면 그냥 방에 있을래?”
“으으…….”
베르멜로는 밖을 계속 흘끔거렸다.
그러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손뼉을 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차! 마차 있잖아요!”
“자동차.”
“어쨌든! 그거 저번에 탔을 때 시원한 바람 나오는 구멍 있었잖아요!”
“있긴 하지.”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근데 지금 내 차가 없어.”
“왜요?”
“안 타고 왔거든.”
베르멜로가 당당하게 말했다.
“가져오세요!”
그 말에 상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에이, 농담, 농다암~!”
“농담이지? 난 진짜 니가 미친 줄 알았잖아. 얘를 언제 한 번 갈아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에에이~, 주인님도 농담하시는 거죠! 딱 걸렸어~. 헤헤헤…….”
“딱 갈리긴 하겠지. 네가.”
“……살려주세요!”
상호는 바닥에 머리를 박는 베르멜로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알았으니까 좀만 기다려. 협회 차 있는지 물어보게.”
“감사합니다…….”
베르멜로가 다시 머리를 박았다.
* * *
“형한테 빌린 차야.”
상호는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뭐 흘리지 마. 흘리면 갈아버린다.”
“…….”
“벌써 흘렸냐?”
베르멜로의 손에는 카페에서 산 빵과 달달한 라떼가 들려 있었다. 빵에 묻은 허연 연유 시럽이 조수석 시트 위로 똑똑 떨어졌다.
“……핥을까요?”
“냅둬, 임마.”
상호는 휴지를 찾다가 포기하고 운전에 집중했다.
분명 뇌를 환기시키겠다고 나왔는데. 이 옆에 앉아 있는 약간 모자란 악마는 뇌 속에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정보만 쑤셔 넣고 있는 듯했다.
‘시간 낭비가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그의 시야에 익숙한 두 뒷모습이 잡혔다.
‘어?’
인도를 걸어가는 두 소녀.
상호는 그 옆으로 차를 몰아 차창을 내렸다.
“얘들아.”
“우왓.”
이츠키가 움찔하며 베르멜로 너머에 앉은 상호를 돌아보았다.
“헌팅 중이신 겁니까?”
“……아니야.”
“저희인 줄 모르고 잡으신 것 같은데.”
“아니래도……. 그래서, 둘이 뭐해?”
세희가 이츠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새로 생긴 초밥집이 있대서, 같이 가고 있어요.”
“그거 때문에 서울까지 왔어?”
“네. 이츠키가 일식이 그립대서.”
상호는 베르멜로를 돌아보았다.
“야.”
“네, 네.”
“너 회 먹을 수 있냐?”
“회……?”
베르멜로는 회라는 단어를 듣고는 악마의 능력으로 뜻을 읽다가, 그게 날생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질겁을 했다.
“네? 생선을 어떻게 날로 먹어요…….”
“먹어본 적 없단 뜻이구만. 가자.”
“그럴 거면 왜 물어봐요……!”
“갈릴래?”
“……회 너무 좋아~.”
아이들을 태운 차가 식당으로 향했다.
* * *
“요즘 밖에 자주 돌아다니시더니.”
세희가 그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런 여자랑 붙어먹고 다니셨네요.”
“아니, 세희야. 붙어먹다니…….”
“변명하지 마세요. 안 들키려고 차까지 바꾸셨잖아요. 그것도 엄청 좋은 차로.”
“도현이 형 차야……. 빌린 거야…….”
“그러니까 굳이 좋은 차를 빌려서 악마랑 드라이브 중이셨다?”
“그랬으면 너흴 그냥 지나쳤겠지……!”
“그럼 이츠키한테 들키잖아요. 다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들키기 전에 선수 친 거잖아요. 제가 바보로 보이세요?”
“내가 바보야…….”
상호는 눈물을 흘리며 냉수를 쭉 들이켰다.
앞에서는 자리에 앉은 이츠키와 베르멜로가 메뉴판을 보며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이거 비싼 거예요? 맛있어요?”
“어, 그걸 시키면 선생님한테 갈릴지도 모릅니다.”
“그, 그럼 이걸로…….”
베르멜로는 메뉴를 검지로 가리키고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무언가 거슬리는 것이라도 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나 말을 하진 않았다. 고개를 기웃거릴 뿐.
이츠키가 상호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럼 저는 이걸로. 선생님은?”
“난 덮밥이나 먹을래.”
“덮친다는 걸 암시하시는 겁니까?”
“…….”
상호는 말없이 세희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그런데 이츠키도 무언가 신경 쓰인다는 듯이, 특유의 무표정한 눈빛으로 베르멜로를 계속 힐끔거렸다.
정확히는, 베르멜로의 가슴팍을.
그 모습을 본 상호는 내공을 꺼내 이츠키의 뺨을 톡 건드렸다.
“아.”
이츠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선생님, 잠깐만 같이…….”
“으응.”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희를 돌아보며 베르멜로를 눈짓했다.
“잘 보고 있어. 지도 모르게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녀석이니까.”
“왜 아직도 못 믿으시는 거예요!”
“니가 사고를 치잖아, 임마.”
“치이…….”
“잠깐 나갔다 올게.”
그와 이츠키는 가게 밖으로 나왔다.
상호는 이츠키에게 바싹 붙어서 조용히 물었다. 약간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뭔가 보여?”
“네.”
이츠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가게 안쪽을 쳐다보았다.
“검은 연기 같은 게…… 있습니다. 작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인간 태생이라 그럴지도.”
상호는 같은 방향을 보았다가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아니면 네 눈이 아직 불완전해서이거나.”
“지난번엔 안 보였는데.”
이츠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 역시…….”
“악마에게 당했었기 때문이겠지.”
그것 외엔 짚이는 게 없었다. 상호는 이츠키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네 눈은 원래 악마의 눈이었나 봐.”
“……그럴 것 같았습니다.”
이츠키가 눈을 감았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내일 월요일인가?”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학교 쉬고 나랑 봉인소 가자.”
“알겠습니다.”
둘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세희는 젓가락을 보란 듯이 잘그락거리면서 베르멜로를 주시하는 중이었고, 베르멜로는 젓가락을 다루지 못해 숟가락으로, 초밥을 조그맣게 끊는 중이었다.
그 순간 상호의 옆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뭐하는 짓입니까!”
‘……?!’
상호는 깜짝 놀라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츠키의 고함소리.
“사, 사카시타……?”
“살다살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어떻게 스시를 끊어서……!”
“쟤는, 쟤는 김치도 씻어먹는 녀석이야. 그러려니 해…….”
“선생님은 비빔밥을 물에 말아 먹습니까? 케이크 토핑으로 마늘을 올립니까? 못돼먹은 버릇은 고쳐줘야 합니다!”
“평화적으로 부탁해, 사카시타. 평화적으로…….”
상호는 부적을 꺼내려는 이츠키를 막으며 진땀을 흘렸다.
반면 베르멜로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채, 기어코 잘라낸 초밥을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헤집다가, 밥에 묻은 초록색의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뭐예요?”
“소스.”
세희가 태연하게 거짓 없는 거짓말을 했다.
“맛을 잡아주는 거야. 생으로 먹는 게 부담스러우면 듬뿍 넣어서 먹어 봐.”
“어딨어요?”
“여기 있잖아.”
간장 종지 옆에 붙은 와사비. 세희는 그걸 통째로 집어서 초밥에 얹었다.
“한 숟갈 듬뿍 먹어. 그래야 제맛이니까.”
“조, 조금만…….”
“선생님~.”
“다, 다 먹을게요!”
베르멜로는 해체했던 초밥을 싹싹 긁어서 숟가락에 담았다.
그리고 드디어 한 입.
“……푸우우웁!”
초록색 밥알들이 세희의 얼굴을 강타했다.
“푸우웁! 우웩, 웩! 콜록, 아으, 내 코! 코! 이건 진짜 독이잖아아아!”
“…….”
익숙한 풍경인데.
상호가 눈을 끔뻑이며 기억을 더듬던 그때, 주방에서 회칼이 쏜살같이 날아와 세희의 손에 잡혔다.
상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희야? 잠깐만, 잠깐만……!”
“이 X발년한테 회라는 게 뭔지 알려줄게요.”
“세희야, 식당에 애들 있어, 어린애들…….”
“육사시미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그는 간신히 세희를 달래서 회칼을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로 베르멜로가 회를 조금 맛보더니 회만 쏙쏙 빼먹다가 이츠키에게 정강이를 얻어맞거나, 매실장아찌를 먹고는 뱉었다가 세희에게 물벼락을 맞는 등의 소란이 있었지만, 비교적 사소한 일일 뿐.
상호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츠키의 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안개 속에 내려온 한 가닥 실마리.
‘……내일이면 답이 나오겠지.’
그게 삭은 실인지, 튼튼한 밧줄일지.
그는 입에 들어오는 게 어떤 초밥인지도 모른 채로 식사를 계속했다.
* * *
“빨리 오셨네요.”
뒤에 앉은 세희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좀 더 즐기다 오실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아니야…….”
상호는 애써 웃으며 안전벨트를 맸다.
베르멜로를 방에 데려다주고 차에 돌아온 참이었다. 도현의 차를 놔두고 셋이서 학교로 뛰어가도 되겠지만,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차라 편하게 데려다주고 싶었다.
“어디 카페라도 들렀다 갈래? 디저트 같은 거나.”
“글쎄요. 이츠키는…….”
조수석으로 넘어오려던 세희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선생님.”
“응?”
“이거…….”
세희가 검지로 가리킨 곳에는 허연 무언가가 굳어 있었다.
상호는 멀뚱히 눈을 끔뻑거리다가, 세희가 그걸 무엇으로 착각했는지 깨닫고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세희야……. 그거 아니야!”
“수녀님 옷에 묻어 있던 거랑 똑같이 생겼는데…….”
“뭘 본 거야! 아니야! 그냥 시럽이야, 시럽! 연유 같은 거…….”
“그렇게 말하면 제가 속을 줄 아세요?”
“아니라고! 속이는 게 아니야……!”
“아무렇게나 막 흘리고 다니시네요.”
조수석에 앉은 세희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몸매는 좋더라고요.”
“아니…….”
“뭐 차에서 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죠.”
“아니……!”
“그래서 남의 차 빌린 거였네요. 선생님 차에 흔적 남을까봐.”
“…….”
도망칠 구석이 없다.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진짜 아니야……. 한번 먹어보든가…….”
“네?”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먹으라구요?”
“연유니까! 이상한 거 아니니까, 먹어보라고…….”
“먹으라고 시키시면 먹을 순 있는데…….”
세희는 시트에 묻은 연유를 검지로 훑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입가로 가져가며, 상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이걸 먹는다 해도, 선생님 맛이 어떤지 몰라서 구별을 못하는데요.”
“맛은 아예 달라……. 내가 먹어본 적은 없지만…….”
“지금 확인해봐도 돼요?”
“…….”
결국 상호는 두 손을 들었다.
“맞아. 연유 아니야. 벨이랑 차에서 했고, 칠칠맞게 흘렸어. 이제 됐지? 휴지로 닦…….”
“그래요?”
그 말에 세희가 검지를 입에 쏙 넣었다.
할 말을 잃은 상호에게 세희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네요.”
“…….”
“디저트로 먹어도 되겠어요.”
세희는 혀를 쏙 내밀고는 안전벨트를 맸다.
“얼른 가요. 디저트 먹으러.”
“……그래.”
그는 간신히 핸들을 잡았다.
아이에겐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라던데, 져줘도 이길 수가 없으니. 이 아이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어른이 되면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여자를 이겨먹을 생각은 하지 말라던데.
‘그냥 죽는 날까지 지기만 하겠구나…….’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내비게이션으로 디저트 카페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