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438. 선에 대한 믿음
“쌤, 쌤쌤.”
“응?”
옆을 돌아보니 태화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다.
“왜.”
“강옷찢개따.”
“……응? 옷 찢겠다고?”
“아니, 겠다가 아니라 개, 따. 뭔 말인지 알아듣겠어?”
그런 해괴한 말을 대체 누가 알아듣냐.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머리를 쥐어짜내 대답했다.
“강한 옷 찢는 개미 따라…… 아니, 이건 아닐 거 아냐. 뭔데?”
“강상호 옷 찢어버리고 개처럼 따…….”
“……얌마!”
태화는 상호의 손을 피해내며 낄낄거렸다.
“그럼 강내다봄은 뭔지 알아?”
“……뭔데?”
“강상호 내 다리 봄~.”
“야!”
상호는 태화의 꼬리를 잡고 찰싹찰싹 때렸다.
“야, 가서 마법 공부나 해! 있지도 않은 말 만들어가지고 사람 놀리지 말고…….”
“진짜 쓰는 말인데? 전교생이 다 쓰는데?”
“……웃기지 마.”
“강내가봄도 있는데? 맞춰볼래?”
“얌마!”
꿀밤이라도 한 대 날려야지 안 되겠다, 그가 성을 내며 손을 뻗자 태화가 손가락을 휘둘러 그의 손을 쳐냈다.
“칭~, 치잉~. 근데 쌤.”
“뭐. 또 이상한 소리 하려고…….”
“쌤은 이런 줄임말 못 알아듣겠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줄임말을 누가 알아들어!”
“아니야. 이건 쌤이 늙어서야.”
휘둘러지던 손가락이 상호를 정면으로 가리켰다.
“쌤은 유행이란 거에 좀 관심을 가져야 돼.”
“안 그래도 그저께 은율이한테 끌려갔다 왔어…….”
“쌤 요즘 유행하는 TV프로그램 뭔지 알아?”
“요즘 그 뭐냐, 나 혼자 참견 시점인가…….”
“땡! 틀렸어. 무박1일이야!”
상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건 개벽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나 나오던 프로그램인데.
“얌마, 언제적 무박이야. 그건 너 공갈젖꼭지 빨고 있을 때 종영된 건데…….”
“진짜야! 요즘 어린애들 다 무박 봐! 요튜브에서 인기야! 엄…… 아, 이게 걸 엄마가 없네. 그럼 쌤 걸고! 레알!”
“누굴 거는 거야, 임마!”
이렇게 성질내서 득 볼 게 뭐가 있나. 상호는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유행은 무슨 유행이야. 그냥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거야…….”
“그치만 유행을 알면 쌤이 좋아하는 여자 꼬시기도 쉬워지는걸.”
“난 필요 없어.”
“와, 자신감 뭔데? 근데 팩트긴 해. 온몸이 무기니까.”
“그 말이 아니야…….”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애들한테 이상한 거 하지 말라 그래. 난 유행 같은 거 안 어울리니까.”
“그래? 근데 다른 애들이 가만 안 둘걸.”
“제발…….”
“다음 차례가 누군진 모르겠는데, 뭐 뻔하잖아? 세희랑 나빛이랑 지윤이겠지.”
태화는 놀리듯이 혀를 쏙 내밀었다.
“고생하셔~.”
그 순간 상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야, 태화야.”
“응?”
“이리 와 봐.”
그가 태화를 덥석 들어 안자 태화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뭐, 뭔데?”
“둘이서 야생 갔다 오자.”
“……뭐어?! 나 이미 구천구백구십구번 갔다 왔잖아! 왜 또 난데?!”
“둘이서만 가자, 응? 민정쌤 보러 가서 좀 쉬다 오자. 돌아올 땐 좀 꾀죄죄해지겠지만…….”
“그래놓고 산에서 지낼 거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자~ 가자~.”
“아니 왜 나야! 좋은데 싫어! 아아아아아악!”
상호는 태화를 둘러메고 창턱을 박찼다.
* * *
“선생님~.”
“……으응.”
“도망치려고 하셨다면서요~.”
그의 등에는 나빛이 매미처럼 붙어 있었다.
“제가 싫으세요……?”
“아니…….”
“그럼 왜 그러셨어요?”
가장 큰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이기 때문에.
상호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며 그의 방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뭘 보자고?”
“드라마요~.”
나빛이 리모컨을 꾹꾹 눌렀다.
“요즘 인기인 드라마가 있어서요~.”
“장르가 뭔데?”
“네? 드라마는 드라마 아니에요?”
“……요즘은 장르가 없어 보이긴 해.”
옛날엔 시대극이 참 많았는데. 상호는 어릴 적을 떠올리며 TV를 보았다.
대략 여자 검사가 누명을 쓴 남자 범죄자와 열혈 남자 경찰 사이에 끼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내용이었다.
‘그냥 감옥에 사이좋게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경찰한테 총 맞아 죽느니 그게 나을 것 같은데. 상호는 나빛과 자신의 사이에 놓인 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때마침 손을 뻗고 있던 나빛과 손이 맞닿았다.
“……헤헤.”
눈이 마주치자 나빛이 웃었다.
이쪽이 TV보다 볼 맛이 나는데. 그래서 상호는 보라는 드라마는 안 보고 나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빛은 TV로 시선을 돌렸다가, 상호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선생님, 드라마 같이 봐요~.”
“보고 있어.”
“안 보고 계시잖아요~. 이거 잘 보셔야 돼요. 이따가 감상문 쓰셔야 된단 말이에요~.”
“……감상문?”
상호의 몸이 굳었다.
“잠깐만, 나빛아……. 이거 몇화짜리야?”
“30화요~.”
“30시간을…… 봐야 한다고?”
“아직 방영 중이라 더 나올 거예요~.”
나빛이 환하게 웃었다.
“감상문은 매 편마다 톡으로 20줄씩 써주세요~.”
“…….”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상호는 은근슬쩍 나빛에게 팔베개를 내어주고 슬금슬금 품에 끌어안았다.
“그냥 같이 자자, 나빛아. TV 보지 말고…….”
“앗, 안 되는데……. 선생님 회춘시켜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내일 보자, 내일. 응?”
“헤헤헤…….”
나빛이 헤프게 웃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
그렇게 일요일도 같은 방식으로 나빛의 마수를 흘려 넘기고, 주말의 마지막 날을 만끽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상호의 방에 찾아왔다.
“……하솔아?”
상호는 현관문을 반만 연 채로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단비랑 초란이도……? 무슨 일이야?”
“멍, 선생님!”
“응.”
“가위! 바위!”
단비가 다짜고짜 가위를 냈다.
단비의 손이 빨라 봤자 총알보다 빠를 순 없다. 상호에게는 단비가 낸 가위를 보고도 잠시 고민에 빠질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져주면 뭔가 곤란해질 것 같았다.
“보!”
그래서 낸 주먹.
상호의 주먹을 본 단비가 눈을 치떴다.
“선생님이 졌어요!”
“……응?”
“이건 강기 가위예요!”
단비의 손가락에는 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구닥다리 가위바위보라는 편견은 버리세요! 이젠 강기 가위바위보의 시대예요! 멍!”
“…….”
“들어가겠슴다!”
얼떨결에 패배해 버린 상호는 아이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한바탕 드잡이질이라도 할 듯이 거칠게 들어선 아이들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거실에 다소곳이 일렬로 앉았다.
“멍.”
“……왜 온 거야?”
“선생님 회춘시키러요.”
너희도 그거냐. 상호는 이마를 짚었다.
“……그냥 쉬다 가. 이상한 거 하지 말고.”
“선생님은 융통성이 필요해요!”
“융통성 있게 조용히 있다 가면 안 되겠니……?”
“그치만 안 하면 언니들한테 혼날 거예요.”
“융통성은 언니들한테 필요한 것 같구나…….”
“멍.”
단비가 돌아보자 초란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상호에게 내밀었다.
작고 하얀 조약돌.
“멍, 이게 뭐 같아 보이세요?”
“돌 아냐……?”
“틀렸어요!”
“그럼 뭔데?”
“아리가 가끔 낳는 미숙란이에요!”
“……그걸 왜 가져와, 임마!”
상호는 기겁하면서도 혹시라도 깨질까봐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진땀을 뚝뚝 흘리는 그에게 하솔이 카페에서 사온 듯한 플라스틱 커피 컵을 내밀었다. 하얀색이라서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이거 드세요.”
“응, 고마…… 푸확!”
커피가 아니었다. 물도 안 섞은 100% 간장.
“푸웁! 콜록, 콜록, 어으……. 야, 얘들아!”
“커피라는 편견을 버리세요! 멍!”
“으으…….”
상호는 덜덜 떨며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얘들아, 제발 이런 장난은…… 응?”
“…….”
간장을 뒤집어쓴 하솔이 눈을 깜작이고 있었다.
옆에서 신나게 열변을 토하던 단비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멍, 선생님. 하솔이 욕실에서 씻고 가게 하려고…….”
“……아니야!”
“저희는 그럼 나가 볼게요……. 초란아, 가자. 멍.”
“아니야, 가지 마, 집에 남아 있어, 제발…….”
상호는 손을 싹싹 비비며 머리를 박았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거니, 응? 왜들 이래…….”
“선생님 기운이 없어 보여서요.”
“응……?”
하솔이 휴지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들이 선생님 걱정 많이 해요. 요즘 기운이 없으시다고.”
단비도 꼬리를 촐랑이며 상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도 작아지고, 허리도 구부정해지고…… 꼭 갱년기라도 온 것 같아요. 멍.”
“……그래서 이러는 거야?”
“멍.”
상호는 쓰게 웃었다.
“그냥 여름이라 그래, 여름이라……. 너희도 더우면 힘들잖아. 그냥 그런 거야.”
“그런 거였어요?”
“응. 딱히 힘든 건 없어.”
아이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럼 언니들한테도 그렇게 말해주면 돼요?”
“응. 아, 하솔아. 미안하다. 선생님이 간장인 줄 모르고…….”
“괜찮아요.”
“씻고 가.”
상호는 바닥에 흘린 간장을 닦고 허공섭물로 옷장을 열었다.
“갈아입을 옷 있으니까. 묻은 건 선생님 주면 빨래해서 돌려줄게.”
“멍, 선생님. 역시 저랑 초란이는 나가볼게요…….”
“아니, 단비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야!”
단비와 초란이 창문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둘을 쫓아 달려가는 상호의 이마에서는, 간장보다 진한 진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 * *
움막을 이루는 나뭇잎 사이로 드문드문 별빛이 내려왔다. 하지만 짜증이 나 있는 가은의 마음까지는 닿지 못했다.
“지금 말 안 하면 이제 한 마디도 안 할 거예요.”
“……하하.”
상호의 입이 열렸다.
가은은 그 안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호를 노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삶에는 방향이 있거든.”
상호는 씩 웃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면 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 그게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야.”
“…….”
가은은 상호의 허리에 차인 검을 바라보았다.
저 검에 대한 사연은 이미 알고 있다. 작년에, 본인 입으로 들려주었으니까.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그걸 왜 저한테 말해요?”
“응?”
“세희 언니도 있고, 태화 언니도 있잖아요.”
가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생님 좋아하는 사람들 다 놔두고 왜 저한테 말하는데요?”
“네가 날 싫어하니까.”
‘좋아하지 않으니까’가 아니라 ‘싫어하니까’.
상호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스스럼이 없었다.
“그래서 알려주는 거야. 너 혼자만 알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주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고.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게…….”
“그걸 왜 나한테 맡겨요?”
가은은 혀를 차고 돌아누웠다.
“됐어요. 싫어요. 난 그런 역할 질색이라서.”
“그래도 돼.”
상호는 씩 웃었다.
“그냥 한 명은 알아 줬으면 했어.”
“…….”
가은의 눈가가 씰룩였다. 언짢은 듯. 짜증 나는 듯.
그러다 상호의 돌아서는 발소리를 듣고는, 그 등을 몰래 훔쳐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다가.
“……들어오세요.”
“응?”
“옆에 앉아 있어요.”
가은은 돌을 하나 집어 그와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이 선 넘어오지 말고.”
믿기에는 너무도 하잘것없는 선.
그럼에도 가은이 그 선을 믿는다는 것을, 상호는 알고 있었다.
“……그래.”
그는 피식 웃고는 가은을 등지고 앉았다.
사내는 밖을 향해서, 소녀는 움막 안을 향해서. 서로에게 뒤를 맡긴 채, 한 사람은 잠에 들고 한 사람은 남았다.
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