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437. 신세대
“이야~.”
상호는 최대한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은아, 저기 봐라. 산이 푸르고…….”
“…….”
가은은 평소처럼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운전이나 하라고 핀잔을 날리지도, 산이 푸르러서 뭐 어쩌라는 거냐고 쏘아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조수석에 앉아 정면을 쳐다볼 뿐.
상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산에 단풍이 피어 있었던 것 같다.
둘은 지금 야생에서의 훈련을 위해 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서 정도만 되어도 등에 업든 품에 안든 해서 편하게 날아갔겠지만, 상대가 그의 내공이 닿는 것조차 싫어하는 가은이라서 이렇게 차에 태워 가는 것이었다.
문득 가은이 말했다.
“할 이야기 있다면서요.”
“응.”
“지금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상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약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아직도요? 며칠이 지났는데.”
“그러게. 좀 오래 걸리네.”
가은이 그를 째려보았다.
“시답잖은 이야기면 반 옮길 거예요.”
“하하…….”
상호는 살짝 웃어주고 차를 몰았다.
* * *
“처음은 물부터 찾아야 해.”
상호는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을 찾으러 이동하면서 중간중간 필요한 물건들을 찾는 거야. 생각해 봐. 생존에서 물 말고 필요한 게 뭐지?”
“…….”
“수업할 땐 대답해 줘.”
“불이요.”
“음식이랑 잘 곳이지. 불은 수단이고.”
그는 지나가면서 나뭇가지를 몇 개 꺾었다.
“불 피울 줄 알아?”
“아뇨.”
“이따 가르쳐 줄게. 일단 지금은 땔감을 모으는 거야. 그리고 길을 잃지 않게 표시하는 것이기도 해. 나는 아니지만 너처럼 숲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길을 잘 잃거든. 같은 곳을 빙빙 맴돌기도 하고.”
“그 정도로 길치는 아닌데요.”
“그래? 그럼 가은이 네가 앞장서 볼래?”
가은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빨리해 그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물은 어떻게 찾는데요.”
“계속 걷는 거지. 걷다 보면 물소리가 들리고, 물 냄새가 나고……. 아니면 나처럼 공중에서 보든가, 지도를 통째로 외우든가.”
“지도가 있어요?”
“작전용 지도가 있지.”
당시에 쓴 것은 위성사진에 저승부대원들이 수기로 적어 놓은 조악한 지도였지만, 그래도 그 지도가 있었기에 부대원들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걷던 상호는 가은의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가은아, 저거 봐봐.”
“뭔데요.”
“내가 아까 꺾은 나무네.”
“……!”
빙빙 돌았다는 뜻.
그렇게 자신 있게 나섰는데 길치를 인증해 버렸다. 가은은 당황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호는 그런 가은의 모습을 보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가은이 길치구나?”
“아니, 이럴 리가 없……, 선생님이 뭔 짓 했죠?”
“나? 나는 그냥 가은이 뒤만 따라갔지~.”
“뻥치지 마요, 진짜!”
“가은이 오늘 좀 귀엽네.”
사실은 상호의 짓이 맞았다. 몰래 내공을 뻗어서 꺾어 둔 것이다.
그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가은의 앞으로 나섰다.
“이제 왜 표시를 하면서 걸어야 하는지 알겠지?”
“……쳇.”
“에이, 대답해줘~.”
“징그럽게 굴지 마요.”
“엑…….”
둘은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 * *
저녁은 한 움큼의 딱정벌레와 몇 마리의 애벌레였다.
이서 때와 달리 가은에게는 선택권을 주었다. 사냥에 성공하면 그 동물을 먹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가은은 눈에 불을 켜고 척추동물을 찾아다녔지만.
단 한 마리도 찾지 못했다.
“가은이 사냥도 못하네~.”
“안 먹을 거예요.”
“네가 먹을 때까지 훈련 안 끝낼 건데?”
“……쯧!”
벌레를 집는 가은의 얼굴은 이미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조촐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물을 찾으면서 봐두었던 구부러진 나무 아래서, 나뭇잎을 엮어 작은 움막을 만들었다.
밖에서 보초를 서던 상호는 움막 안에 누워있는 가은을 돌아보았다.
“더워서 잠이 안 오지?”
“안 벗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더워도 잘 수 있게 훈련을 해놔야 한다는 뜻이야.”
“선생님 때문에 못 자는 거예요. 말 걸지 마요.”
“그런 거야?”
그 흘려 넘기는 듯한 말투에, 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낮에.”
“응?”
“나뭇가지 부러뜨린 거, 선생님이 한 거죠.”
“글쎄, 어떨까.”
“동물들도 선생님이 다 쫓아낸 거고.”
“그냥 가은이 네가 길치고 사냥치인 게 아닐까?”
“할 말이 있어서 데려왔단 것도 거짓말이고.”
그 말에 상호는 살짝 웃었다.
“이제 말해줄 때도 됐지, 그치?”
“있는 척 하지 마요.”
“아니, 있어. 조금 망설여질 뿐이야.”
“뭔데요, 그럼.”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별 예쁘다. 그치?”
“…….”
가은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움막을 이루는 나뭇잎 사이로 드문드문 별빛이 내려왔다. 하지만 짜증이 나 있는 가은의 마음까지는 닿지 못했다.
“지금 말 안 하면 이제 한 마디도 안 할 거예요.”
“……하하.”
상호의 입이 열렸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아침.
교실로 돌아온 가은에게 나빛과 단비가 달려들었다.
“가은아! 괜찮아?”
“멍, 임신 안 했어?”
가은은 눈을 반짝이는 둘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리 가.”
“끼잉…….”
단비는 깨갱거리며 자리로 후다닥 도망쳤지만, 나빛은 남아서 가은의 배를 문질렀다.
“혁구 동생 생겼어!”
“저리 가라고, 바보 언니.”
“히잉…….”
나빛도 부리나케 자리로 도망가 혁구를 쓰다듬었다.
“혁구야, 동생 없대…….”
“뺙?”
“엄마가 내년에 만들어 줄게…….”
세희는 자리에 앉는 가은을 쳐다보았다.
이틀 동안 야생에서 지낸 것치고는 비교적 상태가 멀쩡했다. 꾀죄죄한 꼴이야 씻으면 되지만, 보통은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얼굴에 묻어나기 마련인데.
적응을 잘한 모양이었다.
‘별일 없었던 모양이네.’
그런데 그때 가은이 정확히 세희를 돌아보았다.
세희는 움찔했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멀뚱히 눈을 끔뻑일 뿐.
가은은 세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뭐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태화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야, 근데 어제 쌤 표정 별로 안 좋던데.”
“어제 밤에 말이가?”
“엉. 목소리에 기운이 없더라고. 축 처져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태화와 지윤의 시선이 가은을 향했다.
“야, 가은아.”
“뭐.”
“진짜로 별일 없었냐?”
“……어.”
“어어, 대답이 와 늦노. 함 말해바라 마.”
“쌤이 막 더듬고 그러지 않았어?”
“아니.”
가은은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러진 않았어.”
“에이, 재미읎네.”
“쌤이 웬일로 여자를 안 건드렸지?”
태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허리까지 써서 윗몸 전체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니 그럼 왜 기운이 없는 거야? 더 이해가 안 가는데?”
“요즘 계속 그러지 않았나?”
“멍, 아직도 화나신 거 아냐?”
“저번에 에어컨 때문에? 에이…….”
“쌤이 그래 쪼잔허지는 않을 턴디…….”
머리를 싸매던 아이들 중에서 미래가 고개를 들었다.
“언니.”
“응?”
“우리 선생님한테 들켰을 때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느 로봇 기똥차다고…….”
“아니, 그 전에. 우리 혼나기 전에.”
아이들이 고개를 기웃했다.
“잘 기억 안 나는디…….”
“뭐라고 했던가? 그냥 덥다 더워 죽겠다 그랬던 거 같은데…….”
은율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 기억났어. 그때 우리 선생님 뒷담하고 있었어.”
“……뒷담?”
“선생님 너무 고지식하다고.”
그 말에 아이들은 진땀이 났다.
“……그걸 들었다고?”
“멍…….”
“그것 때문에…… 삐진 거야? 그럼 어떡해?”
“모르지, 그건…….”
“대책을 세워야 해.”
미래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문제에는 언제나 해답이 있는 법이야. 다 같이 고민하면 금방 답이…….”
“멍!”
단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나 좋은 생각 났어!”
“뭔데?”
“선생님을 신세대로 만드는 거야!”
“응?”
아이들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사람의 세대를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어떻게?”
“3유를 가르쳐 주는 거야!”
“뭔 개소리야?”
“유행! 유도리! 유연한 사고!”
단비는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지으며 은율을 가리켰다.
“유행은 옷 잘 입는 은율이 언니가 맡아!”
“그 유행이야?”
“유행어 같은 거 말하는 거 아니었어?”
“그럼 유행어는 제일 초딩같이 말하는 태화 언니가 맡아!”
“뭠마?!”
발끈하는 태화의 옆에서 지윤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믄 내가 최신 유행 개그를…….”
“안 돼! 언니는 아무것도 하지 마! 언니가 선생님 다음으로 제일 늙었어!”
“이 개시끼가……. 이리 온나 임마, 된장을 칵……!”
단비는 관자놀이를 누르러 달려드는 지윤을 피하며 소리쳤다.
“유도리랑 유연한 사고는 제일 착한 하솔이가 맡아!”
“쟤가 어딜 봐서 유연한데?”
“그치만 남은 언니들은 다 꽉 막혔거나 말을 못 한단 말이야!”
“므아?”
“네?”
“…….”
졸지에 꽉 막힌 언니들이 된 넷. 세희와 지윤과 나빛과 이츠키는 뭐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입도 꽉 막혀 버린 듯이.
단비가 눈썹을 치키며 소리쳤다.
“다 같이 하는 작전이야! 내가 말한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면 우리가 도와주는 거야! 선생님 정신적 회춘 작전!”
“무슨 작전이라고?”
“……깨앵!”
단비는 깜짝 놀라 후다닥 자리로 도망쳤다. 앞문을 열고 들어선 상호가 멀뚱히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선생님 요즘 정신이 없어서 잘 못 들었는데…… 전신주 해충? 그게 뭐야?”
“모, 몰라도 돼요, 멍.”
“궁금한데…….”
상호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업이나 하자.”
* * *
다음 날.
상호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마주하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은율아?”
“네.”
“여긴…….”
“옷가게요.”
은율이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선생님 맨날 양복 아니면 추리닝만 입고 다니시잖아요.”
“남자 옷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아니에요. 남자 옷도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은율의 손에는 이미 하얀 티셔츠가 들려 있었다.
“이거 입어 보세요.”
“이거 그냥 면티 아냐……?”
“소매가 조금 길어요. 선생님은 팔꿈치 위로 올라가는 것만 입으시잖아요.”
“으응…….”
“그리고 반바지도요. 자, 갈아입어 주세요.”
은율은 상호를 계산대 옆까지 떠밀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커다란 전신거울을 발견하고는 여자 점원에게 물었다.
“여기가 탈의실이에요?”
“네.”
점원은 상호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고는 입술을 살짝 핥으며 말했다.
“갈아입혀 드릴까요?”
“…….”
상호는 못 들은 척 탈의실 안으로 도망쳤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니 은율이 또 다른 옷을 손에 가득히 들고 있었다. 아직 입고 있는 옷이 어떤지 보지도 않았는데.
“은율아, 일단 천천히 보고…….”
“선생님은 다 어울리니까 괜찮아요.”
“아니…….”
“이것도 입어 보세요.”
“다 어울리면 갈아입을 필요가…….”
하지만 상호의 항의는 은율이 밀어붙인 옷가지에 파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수십 벌을 갈아입고, 탈의실에 살림을 차려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들락날락거리고 난 후에.
옷을 한 아름 든 은율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은율아, 나 근데 아직도 모르겠어. 갑자기 옷은 왜…….”
“선생님은 패션이 너무 낡았어요. 그래서 늙어 보이는 거예요.”
“그런 거야……?”
상호는 한숨을 쉬며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받은 점원은 은율을 힐끔거리더니 상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회원이 되시면 할인도 받으시고 적립도 받으실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거 바로 되는 거예요?”
“네, 그럼요~.”
적립은 몰라도 할인이 된다면야. 그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네에~. 그럼 전화번호 알려주시겠…….”
그때 은율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냥 바로 일시불 해주세요.”
“네, 네? 그치만…….”
“저희 선생님 할인 싫어해요. 적립은 더 싫어하고.”
은율은 직접 카드를 긁어 버리고 상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수고하세요.”
“은율아? 왜…….”
“빨리 가요.”
“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가게를 나서는데, 뒤에서 점원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상호의 귀까지 흘러들었다.
“여우같은 년, 어린것이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
간을 빼먹힐 뻔했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은율을 돌아보았다.
종이 가방을 손에 그득히 든 은율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옷은 마음에 드세요?”
“으응.”
“내일부터 입고 다니세요. 제가 아까 입혀 드린 코디대로. 기억 안 나시면 제가 문자로 보내 드릴게요.”
“으응…….”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래도 젊어 보인다니 기분은 나쁘진 않네…….’
엄밀히 말하면 제 나이를 찾아온 거지만.
옷이 날개이긴 한가 보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은율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아이들이 어떤 작전을 세우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