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35화 (435/501)

<435화>

435. 맞불

상호는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

“…….”

무거운 침묵이 교실에 흘렀다.

뺨에 흐르는 땀은 더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은율과 초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빛은 눈을 내리깐 채 울먹였고, 태화는 상호의 눈치를 보며 진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세희와 지윤은 가만히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고, 다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리의 꼬리를 우물거렸다.

상호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다들 우물쭈물, 쭈뼛쭈뼛. 그러나 단 두 아이만은 그러지 않았다.

이서는 딴청을 피며 창밖을 보는 중이었고.

가은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꾹 참는 표정으로 상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들아.”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선생님이 뭐라 그랬어.”

초란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어컨 쓰지 말고 아이스크림 먹지 말라고…….”

“그런데 왜 그랬어?”

“죄송해요…….”

“초란이 넌 반장이잖아. 말릴 생각은 전혀 안 했어?”

“죄송해요…….”

상호의 시선이 이번엔 3학년 아이들을 향했다.

“너희는 언니면서 하루도 못 참고 말을 안 들어?”

“므아…….”

“다혜 말고. 사카시타랑 나디아도 잘 몰랐다 쳐. 그런데 너희 다섯은. 내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잖아. 아냐?”

“맞아요…….”

나빛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잘못했어요…….”

“누가 제일 먼저 하자고 했어?”

“다 같이 했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책임을 나누려 했지만, 상호는 이서의 눈동자가 단비를 향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단비가 그랬어?”

“……멍.”

당황한 단비가 귀를 축 늘어뜨렸다.

“너,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이사장실까지는 누가 가자고 했어? 문 연 건 태화지?”

“……웅.”

“이사장님 방은 지가…… 가자고 했심더.”

지윤이 이실직고했다.

한 명만 혼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상호는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고민하다가 눈을 감았다.

“얘들아.”

“네…….”

“선생님 너희 혼내기가 너무 힘들어.”

나빛에게서 콧물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너희가 이렇게 선생님 말을 안 들어주면……선생님으로서 너희를 안 혼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내자니 싫고…… 그런 힘든 선택을 강요하게 되는 거야.”

나빛에게서 콧물을 길게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말아줬으면 해.”

“죄송해요…….”

“근데 선생님.”

조금도 기어들지 않은 목소리.

상호는 가은을 돌아보았다.

“응.”

“왜 우리 반만 그래야 해요?”

가은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선생님 말대로 하는 게 좋은 헌터가 되는 길이라면 다른 반도 다 시켜야죠. 선생님은 그럴 수 있잖아요. 근데 왜 우리만 시키는데요?”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내가 너희보다 강하다. 맞지?”

“……네.”

“너희는 내 강함을 따라오기 위해 이 교실에 있는 거야. 다른 반 아이들은 아니야. 걔들이 날 따라올 필요는 없지. 다만, 만약 그 애들이, 그 반 담임선생님이 날 따라잡고 싶다고 하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 방식을 추천할 거야. 당연히.”

“…….”

가은은 그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더위를 참으면 강해져요?”

“스트레스는 판단의 적이야. 전투는 매 순간 생사가 갈리는 작업이고. 상상해 봐. 산에서 더위에 헥헥대다가 몬스터를 마주친 사람. 멀쩡하게 걷다가 마주친 사람. 누가 더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선생님이 내가 스트레스를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어떻게 아는데요?”

그 말에 상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이상은 둘이서만 말하는 것이 좋다. 그는 문가로 걸어가며 가은에게 손짓했다.

“가은아, 잠깐만 나와 줄 수 있어?”

“…….”

가은은 앉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호의 말에.

“그래, 그럼 다른 애들이 잠시 나가 있으…….”

끼이익

의자를 신경질적으로 밀며 일어나, 성큼성큼 뒷문을 나섰다.

상호는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 복도로 나왔다.

가은은 벽에 기대어 서서 반대편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선생님 따라와봐.”

그 말에 가은의 몸이 움찔했다.

“……싫어요.”

“네가 나랑 단둘이 있는 거 싫어하는 건 알아. 매점으로 가자.”

상호는 그렇게 말하고 매점으로 걸어갔다.

그가 걷기 시작한 지 한참 후에야 등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점까지 걸어, 매점 문을 열고 가은이 들어오기까지 기다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필요 없어요.”

“어차피 너는 말 안 하고 나만 말하고 있을 텐데 뭐라도 먹고 있어야지.”

“…….”

가은은 그를 째려보며 아이스크림을 하나 골랐고, 그도 이어서 하나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친 둘은 창가에 기대어 나란히 마주 보고 섰다.

“가은아.”

“…….”

“네가 강한 아이인 건 나도 알고 있어.”

상호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다른 아이들이랑 다르다는 것도 알고. 그렇지만 네가 나보다 전투를 잘 아는 건 아니잖아. 전쟁도 그렇고.”

“전 어차피 산에 갈 일 없는데요.”

“경찰도 똑같아. 한여름에 잠복근무를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 내가 볼 때 넌 절대로 내근직에 앉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야?”

“…….”

가은은 말없이 창밖을 돌아보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은 아이스크림을 다 깨물어 먹었다.

“가은이. 선생님이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요.”

“언니들이랑 이서가 산에서 지내고 온 거 알지?”

“네.”

“나랑 둘이서만 가줄 수 있을까?”

“……미쳤어요?”

가은의 눈이 번득였다. 그래도 상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내가 가겠다고 할 거 같아요?”

“네 자유지. 근데 난 진지해.”

상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 아무도 못 듣는 곳에서.”

“여기서는요?”

“여긴 정령들이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려고 하는데요? 언니들한테 하면 되잖아요?”

“네가 아니면 안 돼.”

그 말에 가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호를 위아래로 꼬나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젠데요.”

“네가 좋을 때. 그래도 고생하기 싫으면 일찍 가는 게 좋을걸. 점점 더워질 테니까.”

“……생각해 보고요.”

“그래.”

상호는 씩 웃고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가자. 교실로.”

* * *

그 후로 아이들은 상호의 말을 잘 들었다.

에어컨을 쓰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더위를 식히는 데에 물과 부채 외에는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과 상호의 사이는 미묘하게 서먹해진 채였다.

그러기를 며칠.

“이대론 안 돼!”

태화가 책상을 내리쳤다.

“이러다 한여름에 쪄 죽어! 쌤을 설득하든 뭘 하든,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뒤지기 싫으면!”

“그치만 선생님 요즘 우리랑 잘 안 놀아 주시구…….”

나빛이 코를 훌쩍였다.

“우리한테 정떨어지셨나봐…….”

“어른이 되어가지고 쫌스럽게 말이야! 학생이 일탈 좀 할 수도 있지!”

“야, 불 꺼. 더워 죽겠는데 이씨…….”

세희는 불을 뿜는 태화의 입을 틀어막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기분이 조금 안 좋긴 한 것 같아.”

“멍, 어떻게 풀어드리지…….”

나빛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기분이 좋아지시면 화가 풀어지실 거야!”

“그렇제. 밥을 묵으면 배가 부르겠제. 근디 밥을 어데서 구하냐 이 말이데이.”

“내가 해볼게!”

나빛은 그대로 문가를 향해 달렸다.

아이들은 자신만만하게 교실을 나서는 나빛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괜찮을까?”

“쌤은 쟤한텐 껌뻑 죽으니까, 괜찮기는 할 텐데…….”

“더 망치지는 않겠지?”

“그러길 바래야지…….”

아이들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 * *

“선생님~.”

교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상호는 목소리를 듣고 옆을 돌아보았다.

나빛이 방글방글 웃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으응, 나빛아. 왜?”

“선생님~.”

“응.”

“선생님~.”

“으응…….”

당황한 그의 어깨를 나빛이 작은 손으로 주물렀다.

“시원하세요?”

“으응. 괜찮아……. 근데 갑자기 안마는 왜…….”

“그냥요, 헤헤…….”

나빛은 헤실거리며 상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런데 그때 교무실 문이 열리더니 미진이 들어왔다.

“……컥!”

미진과 눈이 마주치자 상호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나빛아, 나빛아. 괜찮아, 이제 그만…….”

“에이, 괜찮아요. 헤헤헤……. 시원하게 해드릴게요, 헤헤…….”

“아니, 아니……. 이제 충분…….”

제자에게 안마를 받고 있는 선생. 그 모습을 본 미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아니 이 정신나간 인간아!”

“미, 미진 씨, 그게 아니고…….”

“교무실에서 학생한테 안마를 받고 있어?! 당신이 그러고도 선생이야!”

“아니 제발 내 말 좀…….”

“맨날 내 어깨 주무르겠다면서 학생한테는 안마를 받아?! 학부모들이 보면 어쩔 거야? 이게 말이 되는 행동이에요? 강 선배, 말해봐요. 이게 말이 되냐고!”

“잘못했습니다…….”

상호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교무실에서 상호에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자리에 앉은 선생들 중 그 누구도 미진을 말리지 못했다. 건흠도 파티션 밑으로 몸을 숨기기 바빴고, 그나마 달랠 수 있는 설미는 자리에 없었다.

“한 번만 더 여자들 손대 봐요.”

“이건 나한테 닿은 건데…….”

“어쨌든 한 번만 더 그래 보라고요. 효은 언니한테 다 말할 거예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살려주세요…….”

“나빛이 넌 얼른 가. 안마 같은 거 해주지 마.”

“네에…….”

나빛은 손을 싹싹 비비는 상호를 뒤로하고 부리나케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이마에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 * *

“실패했어?”

“응…….”

나빛이 코를 훌쩍였다.

“나 때문에, 선생님이 미진 선생님한테 혼났어…….”

“조지뿟네.”

지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텄다 마. 인자 은호 되길 기둘리는 수밖에 읎다. 은호 됐을 때 누나야덜이 풀코스로 귀여워해줘뿔믄…….”

“일단 정리를 좀 해보자.”

세희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선생님이 기분 상하신 이유는 우릴 믿었는데 우리가 배신해서잖아. 그렇지?”

“응.”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믿음을 다시 살 수 있을까?”

턱을 괴고 고민하던 은율이 입을 열었다.

“더 더워도 괜찮다는 걸 보여드릴까?”

“언니? 더 더우면 죽어……!”

“보일러를 트는 거야.”

“안 돼! 멍! 진짜, 진짜 안 돼!”

“말이 되는 소릴 해, 멍청아!”

은율의 의견은 태화와 단비의 결사반대에 밀려 채택되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미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니들, 이거 어때?”

“응?”

“맞불을 놓는 거야.”

“……맞불?”

그 말에 3학년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평소엔 똑똑하던 애가 갑자기 미친 소리를 하고 있으니.

태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야, 미래야. 더위 먹었냐? 쌤 화나면 진짜 X돼!”

“아니 들어 봐. 선생님한테 놓자는 게 아니야.”

“그러면?”

미래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학교에 놓는 거지.”

“……응?”

아이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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