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434. 믿었는데
6월.
해가 점점 길어져서 이제는 저녁을 먹으러 나갈 때도 밖이 밝았다. 그리고 그 반대로 학생들의 소매는 1년의 최단기록을 경신하고 있었다.
태화도 은근슬쩍 치마를 줄였지만, 금방 상호에게 잡히고 말았다.
“아니! 짧은치마는 권력의 상징이라고오!”
“머리도 짧게 밀어줄까?”
“3학년은 치마가 허벅지 절반 아래로 내려가면 안된다니까? 여곤데 뭐 어때! 쌤은 좋잖아! 아 씨, 3학년은 줄여도 된단 말이야!”
“누구 맘대로 교칙을 바꿔, 임마. 너 이리 와. 1학년 때는 못했지만 이젠 벗겨서라도 갈아입힐 거야.”
“엣?”
덕분에 태화의 치마는 반에서 가장 길어지게 되었다.
“이게 뭐야! 펄럭이잖아! 아줌마들 치마잖아! 쌤 나 유부녀 만들고 싶어?! 내 치마 돌려줘! 진짜아!”
“아줌마 같으니까 얼마나 권위적이고 좋냐. 이번 여름엔 그거만 입어. 어차피 넌 체술 안 쓰잖아.”
“왜! 왜! 왜 나만 갖고 그래! 다른 반 애들은 다 짧게 입는단 말이야! 글구 이러면 꼬리는 어떻게 빼는데!”
“몰라.”
“아아아아아악!”
그 후로도 태화의 반항은 계속되었지만, 상호는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악마의 심장을 볼 방법을 찾느라 골머리를 싸매면서도, 충실하게 아이들과의 학교생활을 영위하던 어느 날.
유난히도 무더운 아침, 나빛이 책상에 픽 엎어졌다.
“더웡…….”
“마, 꾸꾸야. 어무이 삼계탕 한 그릇 끓여드리라.”
“뺙?”
물그릇에 동동 떠 있던 혁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름의 초입이다보니 더위가 더욱 생소하게 느껴졌다. 상호도 요즘은 슬슬 땀이 나서 반팔을 입고 있었다.
‘덥긴 덥네…….’
부채를 팔랑이는 그에게 아이들이 입을 삐죽였다.
“쌤.”
“선생님.”
“응?”
“왜 에어컨 안 켜줘요?”
예현여고라는 부유한 사립학교의 교실이 찜통이 된 진짜 이유. 선생이 에어컨을 안 켜줘서.
아이들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더워요, 선생님…….”
“에어컨 켜주세요…….”
“안 돼.”
상호는 딱 잘라 거절했다.
“훈련이야. 더워도 참아.”
“어떤 훈련이요……?”
“당연히 더위 버티는 훈련이지. 산에 에어컨이 있겠어? 제대로 된 헌터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버텨야 해. 그리고 아직 한여름도 아니잖아.”
그 말에 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돈 내고 학교 다니는데 에어컨도 못 쐐요?”
“네 돈은 아니잖니.”
미래와 태화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제 돈인데!”
“나도 내가 잘해서 받은 장학금인데!”
“그러면 반 옮기고 편하게 헌터 해.”
“아니! 그냥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태화가 마나로 만든 콩알탄을 딱콩딱콩 날려댔지만, 상호는 눈을 감고 팔짱을 끼었다.
인내도 엄연한 헌터의 덕목 중 하나.
“더우면 부채 써. 세수도 하고. 만약 쉬는 시간에 에어컨 있는 곳에서 쉬는 거 걸리면…… 많이 후회하게 될 거야.”
“매점은요?”
“아이스크림은요……?”
“안 돼. 야생에 아이스크림이 어딨어.”
“에엑…….”
태화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우씨, 그럼 에어컨비 줘! 우리 학비에서 전기세 떼서 줘!”
“그럼 넌 내가 사준 밥 다 토해내.”
“그건 이미 사랑으로 계산했징~.”
“나도야. 이게 다 너희 잘되라고 하는 거야.”
“아아니이이이! 사랑하면 에어컨 들어달라고!”
“수업 나가자.”
“선생님, 저희 이 날씨에 뛰면 죽어요…….”
“안 죽게 단련하는 거야. 가자. 선생님도 같이 뛸게.”
“으잉…….”
“멍, 복날인가…….”
상호는 우거지상이 된 아이들을 뒤로하고 교실을 나섰다.
* * *
좀 많이 덥다.
상호는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여름은 여름인가…….’
약간 뛰었다고 땀이 이렇게 줄줄 날 줄이야.
아침이라 몸도 풀고 애들 체력도 기르고, 또 겸사겸사 더위에 대한 내성도 기르고. 그럴 요량으로 운동장을 가볍게 몇 바퀴 돌았는데,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로 땀이 났다. 예현여고 운동장이 좀 많이 넓은 편이라서.
아이들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멍, 나 죽어, 헥헥…….”
“니는 무예가가 그래 힘들어카믄 우짜노. ……아따, 그래도 덥긴 하구마잉.”
“아으아.”
그나마 쌩쌩한 아이는 다혜.
반면에 가장 힘들어하는 아이는 나디아였다.
“나빛! 살려준다! 나 죽는!”
“선생님, 나디아 언니 완전 푹 익었어요…….”
“뜨겁다! 젖는 땀! 죽이는 여름!”
나디아는 비틀거리면서도 수돗가를 향해 돌진했다. 상호는 그런 나디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디아에게 유독 가혹한 훈련임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나디아가 헌터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설령 나디아가 졸업하자마자 러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참는 것 자체가 수련이지.’
더위뿐만이 아니라 배고픔, 불편함, 고통.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역치를 늘려서.
상호는 헥헥대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힘들어?”
“네…….”
“죽겠어?”
“네…….”
“근데 안 죽는데?”
“……네?”
“더 뛸 수 있잖아.”
상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은 스탠드에 앉아. 아닌 사람들은 나랑 계속 뛰고. 근데 선생님이 보기에 정말 죽을 것 같은 사람은…… 나디아 빼고는 없는 것 같다.”
“아…….”
태화가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어지러어어우운데엥…….”
“꾀병 부리지 말고, 임마. 걸어서라도 따라와. 가자, 얘들아.”
“야, 천세희! 쌤 좀 말려 봐!”
“뛰기나 해, 바보야.”
그와 아이들은 세 바퀴를 더 뛰었다.
구보를 마치자 아이들이 스탠드에 철푸덕 쓰러졌다.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아이들은 수돗가를 향해 걸어갔다. 지윤과 세희, 은율, 다혜까지 네 명.
나머지 나빛과 이츠키와 태화와 2학년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으으으…….”
“에어컨……, 선풍기…….”
“문명에 의지하지 마라, 얘들아. 사람 자체가 강해져야 하는 거야.”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옷을 파닥여 안에 바람을 넣었다.
그래도 땀이 좀 많이 난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윗옷을 벗어 스탠드에 던졌다.
어차피 윗몸 정도는 바다 가면 다 보니까.
“우왓! 임신맨 시동 걸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임마.”
“근데 왜 벗어?”
“땀이 좀 나긴 하더라.”
“땀이 나면 에어컨을 틀자고!”
“안 돼.”
나빛이 누운 채로 그를 돌아보며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치사해요…….”
“……응?”
“저희는 못 벗는데…….”
그때 이츠키가 스산하게 말했다.
“왜 못 벗습니까?”
“……안돼, 사카시타. 하지마.”
“여자도 벗을 수 있어야 하는데…….”
“…….”
상호는 아이들을 피해 수돗가로 도망쳤다.
수돗가에서는 아이들이 세수를 하고 있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로 어푸어푸 세수를 하던 지윤이 상호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잇, 쌤예! 가까이 오지 마이소. 지금 애 낳으믄 어무이 기절합니더.”
“아무 짓도 안 했어! ……어라, 나디아?”
수돗가의 물 받는 곳에 나디아가 누워 있었다.
“뭐해……?”
“선생님, 같이 누워, 천국이 여기…….”
“나디아, 거긴 더러워, 일어나…….”
“야생이 땀 흘려서 빨래하는, 선생님이 더 더러워…….”
“……야생이 더 더럽다는 뜻이지?”
상호는 한숨을 쉬고 세수를 했다.
물에 젖은 얼굴을 정수리 쪽으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드는데, 은율과 세희가 가까이에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왜?”
“아니요, 그냥.”
“물 튄다, 얘들아. 좀 떨어져 있어.”
“괜찮아요.”
“머리 털어야 하는데…….”
결국 그는 스탠드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털었다.
스탠드에선 이제 간신히 기운을 차린 아이들이 멍한 얼굴로 금속 기둥에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시원해……. 기분 좋아…….”
“야, 저리 가. 이거 내꺼야.”
“싫어……. 넌 날아서 위쪽에 붙으면 되잖아…….”
“마법이 죠스로 보이냐? 나도 움직이기 싫다고!”
“죠스콘 먹고 싶다…….”
“아오…….”
태화는 나빛을 밀어내다가 포기하고 기둥에 뺨을 붙였다.
그러다 상호가 얼굴과 몸에서 물을 줄줄 흘리며 다가오자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상호를 향해 달려와 양 팔뚝을 덥석 잡았다.
“잠깐만, 쌤. 잠깐만.”
“뭐야, 뭔데…….”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뭔가 눈빛이 진지하다. 상호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젖은 몸을 찬찬히 살피던 태화가 갑자기 스탠드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햇밥 가져와!”
“……얌마!”
“가만히 있으라니까! 밥도둑 다 흘리잖아! 야, 빨리 안 가져와!”
“멍……!”
“아니 단비야, 가지 마! 야!”
상호는 급식소를 향해 달려가는 단비를 다급히 쫓았다.
웃통을 벗은 채로 강아지 소녀의 뒤를 쫓는 사내. 아이들은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되게 위험해 보이는 거 알까?”
“또 이상한 소문 퍼졌다고 슬퍼하시겠네…….”
“백 퍼센트 자기 때문에 퍼지는 건데.”
“혼자만 모르고 있으니…….”
아이들은 측은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점심시간.
밥을 다 먹은 후에 학생도, 선생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 상호는 교무실 자리에 앉아 미진이 처리해놓은, 정확히는 처리해놓은 정도가 아니라 상호가 잘 알아먹을 수 있도록 정리하고 메모까지 첨부해놓은 업무들을 살피고 있었다.
요즘 악마들 때문에 너무 바빠서 교무실 일은 완전히 뒷전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미진에게 잔소리를 듣진 않았다.
‘내가 바쁘다는 걸 드디어 알아주나…….’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무실에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 한여름은 아니라 가볍게 돌리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가까운 곳에 앉아 있으면 서늘해서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그의 머릿속에 땀을 흘리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볼일만 보고 빨리 나가야겠다.’
애들한테는 에어컨 쐬지 말랬으면서 자기만 교무실에 들어와 있을 순 없으니.
상호는 미진이 메모해둔 것만 빠르게 읽어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교실로 향하는 와중에 문득 궁금해졌다.
‘단련…… 잘하고 있겠지?’
다른 교실에서 에어컨을 쐬고 있다거나.
혹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조지고 있다거나.
‘에이, 그럴 리가……. 난 우리 애들 믿어.’
그는 스스로의 의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하지만 교실로 향하는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교실 문을 열었는데.
‘……없다!’
상호는 벼락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아무도 없다. 2학년도, 3학년도. 반장도, 전직 반장도, 교장 손녀도, 가끔 무섭지만 제일 착한 아이도, 첫 번째 제자도, 후계자도.
텅 빈 교실에는 먼지만 휑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얘들아…….’
그렇게나 더위가 싫었을까.
그렇지만 땀을 싫어하면 좋은 헌터가 될 수 없다. 상호는 마음을 굳게 먹고 돌아섰다.
아이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래도…….’
아직 단정 지을 순 없다.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믿을 것이다. 그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학교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은 다른 교실들.
‘……없네.’
매점.
‘……여기도 없네.’
혹시나 싶어 샤워실 문짝에도 귀를 대어 봤지만.
“꺅! 변태…… 아, 강쌤이네. 쌤, 왜 여기 계세요?”
“으응, 우리 애들 찾느라…….”
“강쌤은 들어가셔도 될 텐데.”
“아무도 뭐라 안 할걸요.”
“…….”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얘들이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본관을 싹 털어봐도 나오질 않는다. 상호는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애들이 갈 만한 곳이……. 아!’
한 곳 더 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교장실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잡았다 요놈들…… 엥?”
“으응?”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해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뭐야……. 강 선생? 무슨 일이야?”
“……아니에요. 근데…… 밤에 제대로 못 주무셨어요?”
“잠을 잘 자야 늦게 늙는대…….”
“어디까지 젊어지시려고…….”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문을 닫았다.
여기도 없으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설마…….’
그의 시선이 별관 쪽을 향했다.
* * *
‘……역시나.’
상호는 이사장실 창문을 슬그머니 들여다보았다.
처음 찾아간 곳은 체력단련실. 거기에 없길래 별관도 아닌가 싶었으나,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와봤더니 여기에 다들 모여 있었다.
이사들이 앉는 소파에 아이들이 한 명씩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았다.
‘대체 어떻게 들어갔냐…….’
마법으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을 텐데. 힘으로 열었다면 경보가 울렸을 테고.
아마 태화가 마법으로 딴 것 같았다. 저래 보여도 악마 융합체인데다가 가장 강한 마법사의 첫 제자이니.
‘그런 능력을 땡땡이치는 데에다가…….’
상호는 끙끙 앓으며 방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짜증나.”
‘?’
상호의 숨이 멎었다.
“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런 건 피곤해 죽겠어.”
“야생에 던져놓는 건 좋은데 왜 학교에서까지 이래야 하는진…… 잘 모르겠긴 해.”
“선생님 좀 고리타분하시니까…….”
“결혼하고 나면 아기한테 핸드폰도 티비도 안 보여주고 책만 읽어줄 것 같아…….”
미래의 말이 상호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렀다.
뒷담이 아니라 앞담이었더라도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호는 눈물을 삼키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교육자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교육의 길은 원래 고된 법.
이 방법이 옳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창문을 벌컥 열었다.
“얘들아.”
순간 아이들의 몸이 굳었다.
“……앗.”
상호를 돌아본 아리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이 맥없이 떨어졌다.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려 했으나.
“교실…….”
눈치 없는 콧물이 자꾸 고개를 디밀어서, 코를 훌쩍이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었다.
“……교실로 와.”
“네…….”
쭈뼛쭈뼛 일어난 아이들이 문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