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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33화 (433/501)

<433화>

433. 예상치 못한 마주침

“그래서.”

상호는 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놈이 혈석을 보고 웃은 것 같다……고?”

“응.”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인 이는 총 여섯. 상호, 민정, 도현, 베르멜로, 태화, 리주.

늦은 밤이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악마와 관련된 이들을 빠짐없이 불러 모았다.

“좀 이상했어. 코앞에 대악마가 담긴 통이 있는데, 갑자기 멈추더니 웃더라. 그러고는 도망쳐 버렸어.”

“환각인 걸 들킨 거 아냐?”

상호는 태화를 돌아보았다.

“태화 네가 보기엔 어땠어?”

“어어…….”

태화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글쎄에……. 근데 난 민정쌤 말이 더 맞는 것 같아. 손을 뻗다가 갑자기 멈췄던 게…… 완전 깜짝 놀란 것 같았어. 웃는 것도 약간 어이없어서? 화나서? 웃은 것 같긴 하지만, 우리한테 화난 게 아닌 것 같았고…….”

“혈석을 보고?”

“응…….”

“……으음.”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혈석에 들어있는 악마는 이제 그냥 잡졸일 뿐이다. 그의 안에 있는 악마도, 세희의 안에 있는 악마도 이미 제거했다.

지배의 악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래도 왜 웃었는지는…… 설명이 안 되네.’

안다고 가정해도, 모른다고 가정해도, 대체 왜 혈석을 보고 놀랐는지, 광소를 터트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놈에게는 하찮은 졸개 중 하나일 뿐인데.

그는 시각을 조금 바꿔 보기로 했다.

“혈석엔 그놈만 있는 게 아니잖아.”

“응?”

“융합체들한테서 뽑은 피도 있지.”

민정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걸 보고 놀랐다구?”

“그건 같은 대악마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모두의 시선이 베르멜로를 향했다.

별생각 없이 뒷짐 지고 관망하던 베르멜로는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에 화들짝 놀라 차렷 자세를 취했다.

“뭐, 뭐를요……?”

“저 혈석.”

상호는 제자리로 돌려놓은 혈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 안에 든 악마 말고 다른 거.”

“저, 저는 인간 태생이라…….”

“악마 떼 이새끼야. 그러고도 니가 혈마녀야? 닌 앞으로 그냥 혈녀야, 혈녀.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죄송해요…….”

베르멜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슨 추측을 해도 허무맹랑한 공상일 뿐.

그때 상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너는 너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

혈석 속의 악마가 그의 심상에서 사라지며 남긴 말.

상호는 가만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래도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아 포기하려는데.

베르멜로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지배의 악마가 환각을 못 알아보진 않았을 거예요…….”

“뭐?”

“악마의 감각은 인간보다 훨씬 많으니까……. 아무리 마법을 잘 쓰더라도, 주술로 존재의 감각을 느끼는 악마는 속일 수 없어요……. 아마 지배의 악마는, 그 환각을 이용해서 실체를 꺼내려 했을 거예요.”

“그럼 환각 때문에 놀란 건 아니다?”

“네…….”

“뭔가 있긴 있구만.”

모두의 시선이 혈석을 향했다.

악마조차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오직 지배의 악마만이 알아보고 광소를 터트렸다. 그런 물건을 대체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상호는 혈석을, 그 옆의 금속 통을.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에 뻥 뚫린 구멍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답은 하나야.”

이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완벽한 해결책.

“놈들을 죽일 방법을 찾아야 해. 뭐가 되었든 간에……. 그 악마의 심장이란 걸 찌를 방법을 찾아야 해. 야, 벨.”

“네, 네?!”

“케이크만 처먹지 말고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봐.”

“네에…….”

“형수도. 저 혈석에 들어간 융합체 혈액 중에 특이한 게 있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알아봐 주세요.”

“네에……, 근데.”

리주의 시선이 슬그머니 태화를 향했다.

“제일 특이했던 건 역시…….”

“…….”

상호는 말문이 막혔다.

마신의 빙의를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악마의 인자.

“……그래도 한번 더 알아봐 줘요.”

“네, 도련님…….”

리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호는 베르멜로의 손을 잡고 마당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태화가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벨.”

“네.”

“네가 탐욕이고. 야성, 신비, 지배. 나머지 둘이 뭐라고?”

“하나는 불사고…… 하나는 몰라요.”

상호의 검지가 베르멜로의 가슴팍을 눌렀다.

“진짜 몰라? 나 지금 진지해.”

“네…….”

눈이 진심이었다.

더 을러도 얻을 것은 없어 보였다. 그는 손을 내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둘은 뭐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지?”

“네.”

“이 세상에 온 뒤로 한 번도 본 적 없어?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한 번도?”

“그게, 애초에 저희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알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치만 마신이 집합시킬 때도 안 온 걸 보면…… 무슨 문제가 있긴 한 것 같아요. 불사의 악마니까 죽지는 않았겠지만…….”

“잠깐만.”

상호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네…….”

베르멜로가 상호를 힐끔거렸다.

“한 2년? 3년? 그쯤 됐어요. 여기 온 직후에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헤매다가…… 마신이 깨어난 다음에야 그 앞에 모인 거예요. 대악마들끼리…….”

“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됐다고?”

“네.”

하긴, 전쟁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긴 했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다. 상호는 찌푸린 눈살을 더더욱 찌푸렸다.

“그럼 그동안은 너희 원래 세상에 있었던 거야?”

“아니요, 세상의 뒷편에…… 틈새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오다가 다 못 넘어오고 끼인 거죠. 거기서 나오는 데 몇 년이 걸린 거고…….”

“그래?”

상호의 검지가 혈석을 가리켰다.

“저놈은 좀 많이 일찍 나와있었는데?”

“하급 악마는 존재가 작아서 그래요.”

“……흐음.”

대략 맞아떨어지긴 하는데, 어쨌든.

“너 혹시 그 두 놈 만나면 알아볼 수는 있어? 만약 모습이 달라졌다거나 하면 말이야.”

그 말에 베르멜로가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뭔가 불만이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상호와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저기, 계속 말했는데……. 불사의 악마 말고 다른 한 놈은 만난 적도 없고, 뭐하는 놈인지도 모른다구요. 당연히 봐도 몰라요. 몇 번을 말해야…….”

“뭐?”

상호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베르멜로를 건물 쪽으로 몰아붙였다.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베르멜로가 얼굴을 붉히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어쭈, 뭐라고? 이젠 막 기어오르네?”

“아랫배가 자꾸 지끈거려요…….”

“……뭐?”

“그리고 반항 같은 거 안 하니까 알아두세요…….”

“…….”

이마가 지끈거렸다.

“……그래서, 그 불사의 악마란 놈은 알아볼 수 있겠어?”

“저는 인간 태생이라…….”

“너 X발 이리와봐.”

결국 뚜껑이 열려버린 상호는 베르멜로의 팔뚝을 잡고 거칠게 잡아끌었다.

“뭐만 하면 인간 태생 인간 태생,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안 돼도 해보겠다고나 해봐 이 새끼야. 다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아, 안 되는 걸 어떡해요…….”

“시끄러, 네 그 태도가 문제야. 직접 노력하려는 건 아무것도 없고 태생만 탓하는 자세가 문제라고. 니는 좀 정신머리를 고쳐야 돼. 따라와, 이 자식아.”

“씻고 와도 돼요……?”

“…….”

둘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태화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도현과 민정을 돌아보았다.

그 둘의 시선도 상호와 베르멜로가 들어간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민정쌤이랑 아저씨는 쌤이 저러는 거 보면 무슨 생각 들어요?”

그 말에 도현이 입맛을 다시고 민정이 눈을 감았다.

“이해해야지.”

“마음에 빈자리가 있어서 몸으로라도 채우려고 하는 거야.”

“아하…….”

셋은 가여워하는 눈빛으로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뒤에선 리주가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새벽.

도현은 베르멜로를 데리고 협회로 돌아갔고, 상호는 태화와 다혜를 데리고 학교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쪽잠을 자고 일어나 이서의 상태를 확인한 것이었다.

‘……안 받네.’

상호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분명 학교에 잘 데려다 줬다고 했는데. 혹시 아직 자고 있는 걸까. 30분 뒤면 등교해야 할 시간인데.

그는 고민하다가 번호를 꾹꾹 눌렀다.

‘이제 초란이가 반장이니까…….’

전화를 걸자마자 초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선생님.]

“초란아, 이서 깨어있는지 확인 좀 해 줄래?”

[네.]

슬리퍼 끄는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답이 없어요.]

“그래, 알았다.”

[깨울까요?]

“아니야, 괜찮아. 선생님이 직접 갈게. 고마워.”

[네, 학교에서 봬요.]

통화가 끊기자 상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목련관에 가는 건 처음.

‘……처음 맞나?’

지금 2학년인 아이들 방에는 찾아간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손가락을 꼽으며 아이들의 이름을 외던 상호는, 곧 자신의 기억이 맞다는 것을 깨닫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애들 방에 얼마나 많이 들락날락거렸기에 이것도 기억을 못 하는지.

‘처음 맞네……. 어쨌든.’

그는 창문을 나와 목련관으로 향했다.

기숙사들의 입구로는 등교를 하는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가까이 갔다가는 좀 곤란할 것 같았다.

상호는 핸드폰을 보며 등교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목련관 주변을 슬그머니 기웃거렸다.

‘내 전화만 씹는 건 아니겠지……?’

이미 등교해서 교실에 있다든가.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그는 기숙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방 배치표를 찾았다.

‘2층, 223호…….’

계단을 올라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223호의 옆방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으아, 지각이다, 멍…….”

입에 식빵을 문 단비가 상호를 발견하고는 꼬리를 바짝 세웠다.

“멍! 아직 지각 아니에요!”

“……지각이라며.”

“잡으러 오신 거예요……? 잘못했어요, 일찍 일어날게요…….”

“아니, 좀 늦을 수도 있지…….”

상호는 쓰게 웃고 단비의 어깨를 토닥였다.

“교실 가 있어. 선생님은 이서 어떤지 확인 좀 할게.”

“이서 학교 안 왔어요?”

“전화를 안 받아서.”

단비는 멀뚱히 눈을 깜작이다가 조금 느긋해진 걸음으로 등굣길에 올랐다.

상호는 단비의 살랑거리는 꼬리를 바라보다가 223호의 문을 두드렸다.

“이서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아픈 걸까. 그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에게 마흔을 입은 건 아닐까. 악마들과 싸울 때 워낙 정신이 없었던 터라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따자.’

다른 걸 딴다는 게 아니라 문을 딴다는 뜻이었다.

상호는 내공을 밀어 넣어 자물쇠 속 쇠를 움직였다.

……딸칵

조그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 들어가 보니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옷은 침대에 책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고, 바닥에는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침대에는 이서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상호는 쓰레기를 피해 조심스럽게 걷다가, 찌그러진 맥주 캔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X벌, 이거 뭐야!’

하도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목소리가 나올 뻔했다.

깨어나면 제대로 혼내야겠다. 그는 그렇게 마음먹고 이서의 몸을 슬쩍 둘러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세히 한번 살펴봐야겠다. 상호는 엎어져 있는 이서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 돌려 눕혔다.

앞쪽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의 시선이 이서의 다리에 덮인 얇은 이불로 향했다.

‘조심조심…….’

상호가 이불을 잡고 들추려는 순간.

“……어?”

눈을 뜬 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둘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

“…….”

상호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설명해야 한다. 변명해야 한다. 당장 하지 않으면 전과자가 되어버린다.

“이서야, 이, 이건…….”

“…….”

“그러니까 그, 몸을 좀 보고 싶어서…….”

굳어버린 머리가 말을 똑바로 지어내지 못했다.

“아니, 그, 그게……. 이서 네가…… 다쳤을까 봐…… 같이 자려고…….”

악마한테 상처를 입으면 빙의당하니까 다쳤는지 확인하고, 다쳤으면 같이 자서 빙의를 풀어주려 했다.

……라고 설명하는 게 왜 그리도 어려운지.

“이서야, 그러니까, 그…… 진정, 진정하고 잘 들어 봐. 선생님이 말하는 건 그냥 같이 잔다는 뜻이 아니라, 네 안에 들어가서…….”

“꺄아아아악!”

면상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하…… X발.’

다시는 남의 방에 몰래 들어오지 않겠다.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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