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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32화 (432/501)

<432화>

432. 죽지 않는 자의 시체

상호는 발치를 노려보았다.

“일어나봐, 이 새끼야.”

“……흠.”

땅에는 바싹 마른 체형의 악마가 쓰러져 있었다.

길쭉한 팔다리에 강검이 하나씩 박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악마는 팔을 강검째로 들어 땅에서 빼냈다.

그러자 상호의 발이 악마의 팔을 짓밟았다.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나는데 왜 그러십니까?”

“일어나봐.”

“……취향 참 고약하시군요.”

악마는 혀를 차고는 픽 쓰러졌다.

상호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옆에서 날아온 마법을 막았다. 그를 향해 쏘아진 검은 결정들이 검에 달라붙으려 했지만, 타오르는 강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렸다.

“실력으로 안 되니까 이젠 기습이냐?”

“기습도 실력입니다. 알고 있을 텐데요.”

데굴데굴 굴러다녀야 할 것 같은 체형의 악마가 상호에게 끈적한 무언가를 뱉어냈다.

동시에 반대편에서도, 머리 위에서도. 검은 번개와 새를 닮은 악마가 날아들었다. 재생을 마친 악마들이 하나둘 가세하고 있었다.

상호는 손바닥에 기를 모아 장풍으로 액체를 쳐내고.

파아앙……

번개를 검으로 막으며, 강검을 꺼내 새를 반으로 갈랐다.

토막 난 새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그는 후속타를 대비하며 자세를 고쳤으나, 악마들은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포기했냐?”

“실례. 잠시 상황을 보고 왔습니다.”

“어떤데?”

“귀하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죽었다는군요.”

마음을 흔들기 위한 헛소리. 상호는 무시하고 검을 겨눴다.

“뻥치고 있네. 너희가 지고 있는 게 뻔하지 뭐. 너야말로 거기 가봐야 되는 거 아냐?”

“귀하가 놀아달라고 해서 놀아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흙바닥에서 거대한 손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이겼다는 건 기정사실입니다. 빠르든 늦든……. 귀하는 이렇게 나와 놀면서,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면 됩니다.”

“그렇겐 안 될걸.”

상호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거구의 악마를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너희가 있던 세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쪽 세상은 절대 맘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거든.”

그리고 검을 들어 올렸다. 칼끝이 하늘을 향하게.

다음 순간, 어느새 내리쳐진 검에서 검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와 그와 악마들이 서 있던 일대를 휩쓸었다.

* * *

“으…….”

태화는 화끈거리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제때 반응하지 못해 화염을 조금 맞아 버렸다. 백옥처럼 희던 피부에 빨간 반점과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쓰라렸지만, 고통스러워할 시간은 없었다.

“쌤.”

“응.”

“마법 하나 접어야 할 것 같은데…….”

태화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은 결정들. 악마에게 닿으면 팽창하지만, 사람에게 닿을 때는 사라지는 마법. 이 마법의 유지에 신경을 쓰느라 대응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시야가 급변했다. 푸르고 흐릿하게.

“……아.”

태화의 몸이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파앙

민정의 손이 태화의 등짝을 후려쳤다. 손에 담긴 마나가 태화의 코로 흘러든 연기를 바깥으로 몰아냈다.

“정신 차려.”

“넵.”

태화는 다시 균형을 잡았다.

팔이 여덟 달린 늑대인간 악마가 턱의 희끗한 털을 쓸었다. 그러면서도 나머지 일곱 개의 손에서는 마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노부 따위에게 곤란을 겪으면 어쩌자는 것이냐. 대체 어떻게 대악마를 셋이나 잡아둔 게냐? 하나는 인간 태생이라 하더라도…….”

“뭐래, 틀니 딱딱거리는 소리밖에 안 들리는데.”

태화가 펼친 방어막에 불과 번개가 한 차례 작렬했다.

발밑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악마들은 하나하나가 무예가이자 마법사였지만, 태화의 검은 결정과 다혜의 초혼강기 때문에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다.

헌터들의 저항 또한 거셌다.

‘……으음.’

늑대인간 악마는 인간들 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모인 자들이 인간의 최정예란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잘 싸울 줄은 몰랐다. 겨우 인간 따위가 악마를 상대로 이렇게나 선전하다니.

바닥에 악마의 시체가 쌓여갔다.

‘주인께서 오시지 않으면…….’

악마의 재생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이틀. 아무리 못해도 몇 시간. 지배의 악마라면 시체에게도 싸워라, 재생해라 명령을 내릴 수 있겠지만, 지금 대악마는 마신의 적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늑대의 눈동자가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검붉은 돌, 그리고 뚜껑이 덮인 거대한 금속 통.

또 다른 대악마의 냄새를 풍기며, 중앙 마당의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놓여 있었다.

‘너무 함정이 아닌가…….’

늑대인간 악마는 양옆에서 날아드는 마법진에 번개를 날리며 고민했다.

그러나 악마는 불사.

두려움 따윈 알지 못한다.

‘엎어버려라.’

명령을 받은 악마들이 금속 통을 향해 달려들었다.

헌터들은 그런 악마들을 한 번이라도 더 베려 했으나, 악마들은 팔다리 하나 잃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썩은 고기에 들개가 꼬이듯, 통을 향해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모든 악마들이 통을 향해 달려가던 그때.

쿠웅……

마당의 땅이 울리더니, 악마들의 발아래에 거대한 마법진이 번쩍였다.

‘도망쳐!’

늑대인간 악마가 급히 소리쳤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마법진이 그려진 땅이 한순간에 뻥 뚫린 구덩이로 변했다. 혈석과 금속 통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구덩이 위에 서 있던 악마들은 속절없이 아래로 추락했고, 날 수 있는 악마들도 검은 결정을 맞고 떨어져 내렸다.

그제서야 벽을 이루고 있던 하얀 날개들이 악마들에게 달려들었다.

푸드덕……

수천 마리의 몸 없는 새가 악마들에게, 악마들의 시체에 달라붙더니 그들을 구덩이로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늑대인간 악마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급히 마법진을 부숴보려 했으나, 이미 둥그런 결계가 악마를 가둔 후였다. 악마가 날린 번개는 방어막에 부딪혀 빠지직 소리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악마는 고개를 들어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나이 든 쪽이 어린 쪽에게 말했다.

“태화야.”

“네.”

태화는 손을 바쁘게 놀려 수차례 인을 맺었다.

악마들이 떨어진 구덩이에 무언가가 빽빽하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단면이 칼처럼 날카로운 검은 결정.

그 모습이 꼭 이빨과 같아서, 마치 거대한 짐승이 아가리를 벌린 듯했다.

쿠르르르……

검고 날카로운 이빨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며, 아가리에 들어온 모든 것들을 갈가리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악마들의 비명소리가 구덩이를 가득 채웠다.

이제 온전한 악마는 거의 남지 않았다. 헌터들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은 잔당들의 팔다리를 베고 구덩이 속으로 던졌다.

산 채로 떨어진 악마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곧 검은 이빨에 난자당해 붉은 곤죽이 되었다.

‘젠장……!’

일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늑대인간 악마는 여덟 손에 마나를 모았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단 두 개.

눈앞의 여인들을 죽이거나.

저 허공에 떠 있는 통을 쏟아 대악마들을 부활시키거나.

악마는 후자를 택했다.

“크아아!”

여덟 손이 한곳으로 모이며 순수한 마나의 대포를 쏘았다.

그 어떤 속성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힘의 마나. 마나의 포탄은 결계를 꿰뚫고 대악마들이 담긴 통을 향해 날아갔다.

포탄이 통에 닿으려는 순간.

콰아앙

붉은 기운을 두른 주먹이 포탄을 부숴버렸다.

“아으!”

양손과 양발에 검은 결정이 용의 비늘처럼 돋아난, 꼬리가 채찍처럼 기다란, 뿔이 오만할 정도로 드높게 솟은, 주홍빛 눈동자의 소녀.

소녀의 검이 악마를 세로로 베어버렸다.

“……끅.”

반으로 갈라진 목에서 되다 만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혜는 검을 공중에 던져놓고 악마의 토막 난 몸을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으랴아앗!”

그리고는 기합을 내지르며 구덩이를 향해 던졌다.

퍼억

마지막 악마가 구덩이 속에서 갈려 나갔다.

다혜는 떨어져 내린 검을 낚아채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으!”

“막타쳐놓고는 폼잡고 있네. 나 아니었으면 못 이겼거든?”

“느아앙?”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앙? 누구는 화상까지 입으면서 고생했는데!”

다혜의 앞에 선 태화가 불을 내뿜었다.

민정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땅으로 내려가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상황 종료 아니에요. 작전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다친 사람은 마취한 후에 후송하세요.”

다행히 다친 사람은 몇 없었다.

민정은 부상자들이 마취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상호야.”

[어, 누나.]

소리를 들어보니 한창 싸우고 있는 듯했다.

[거긴 정리됐어?]

“응. 일단은. 넌 잘 돼가? 유인할 수 있겠어? 아니면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니, 있어 봐, 내가…… 잠깐만, 누나. 거기 다 정리한 거 맞아?]

“응?”

민정은 눈을 끔뻑이다가 구덩이 쪽을 돌아보았다.

구덩이에서 붉은 무언가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살점과 피가 한데 엉겨 만들어진 거인.

“으엑……!”

태화가 질겁하며 결정을 더 빠르게 회전시켰지만, 아무리 다리를 베어도 거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힘줄로 움직이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거인이 허공에 뜬 금속 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윽……!”

주변의 헌터들이 당황했다.

민정도 급히 공격 마법을 펼쳤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나 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저 위에 떠 있는 것은 전부 허상. 마법으로 만든 환각. 실제는 건물의 지하에 있고, 공간을 꼬아서 진짜의 냄새가 나게 만들어 놓았다.

악마도 속을 수밖에 없으리라.

‘시작하세요.’

민정이 눈빛을 보내자 주술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문을 중얼거렸다. 멍청하게 걸려들은 지배의 악마를 봉인하기 위해서.

그녀의 예상대로, 거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손을 뻗었다.

“보아라!”

수천 개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죽는 자들이 죽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이길쏘냐! 보아라! 우리 죽지 않는 자들의…….”

순간 거인의 손이 멈췄다.

주술을 잘 모르는 민정은 주술사들이 임무를 잘 마친 줄 알았다. 그렇지만 곧 주술사들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고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허탈한 목소리.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멈춰있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흐하하하하하!”

거인이 광소를 터트렸다.

고막이 터질 듯한 웃음소리에 헌터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웃음소리만으로도 땅이 진동할 정도였다. 다행히 주술사들은 주술에 집중하기 위해 오감을 제어하는 마법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가장 나이든 주술사가 주문을 맺기 위해 목에 힘을 주는 순간.

쿠르르……

거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구덩이에 떨어진 살점과 피는 지배의 악마가 강림하기 전처럼 곱게 갈려 나갔다.

“……놓쳤습니다.”

주술사들이 침음했다.

“그래도…… 봉인해 놓은 악마들은 지켰군요.”

“…….”

민정은 말없이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지배의 악마를 봉인하진 못했지만, 야성과 신비의 악마가 풀려나는 일은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럼에도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착각일까.

거인의 시선이 금속 통이 아니라 혈석에 향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은.

‘대체…….’

그녀는 고민하다가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상호야, 빨리 와. 할 얘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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