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431. 공습
[비전투인원은 벙커로 보냈어.]
이어셋에서 민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치는 나만 알고 있긴 한데…… 벙커가 있다는 것 자체는 몇 명이 더 알지도 몰라. 만약 악마에게 빙의당하는 헌터가 생기면…….]
“그놈들 목적은 그쪽이 아닐 거야.”
상호는 하늘 높은 곳에서 아르게스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해봤자 혈석이랑 그 곤죽이겠지.”
[그렇긴 하겠지만…….]
“어차피 다 지키느냐, 다 못 지키느냐야. 그쪽은 신경 쓰지 말자.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응.]
봉인소에서는 악마들에 대한 대비가 한창이었다.
애초에 악마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계획된 만큼, 이런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대책도 철저하게 세워놓았다. 그 대책이란 것의 대부분은 상호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지만.
상호가 없을 경우를 상정한 대책도 분명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안 보여?]
“응.”
상호는 산의 능선을 쭉 둘러보았다.
의심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도, 술렁이는 나뭇잎도.
“아예 늦게 쳐들어올 생각일지도 몰라.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우리가 준비를 끝내 놨다는 걸 알고?]
“글쎄, 그건 또 아닐 것 같기도 한데……. 태화는 뭐 느껴지는 거 없대?”
[아직은 없다는 것 같아.]
조금 더 앞으로 가서 찾아볼까. 상호는 미끄러지듯이 아르게스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때 능선에서 한 줄기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온다.”
그는 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검에서 내쏘아진 강기는 날아갈수록 몸집을 불리더니, 땅에 닿기 직전에는 산맥을 가로지를 크기가 되었다.
콰아앙……
온 골짜기마다 폭음이 울려 퍼졌다.
수천 번 겹친 메아리가 하늘 멀리 사라져 갈 때쯤, 흙먼지를 뚫고 악마들이 개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준비해, 누나. 내가 다 잡아둘 수는 없어.”
[응.]
민정이 대답하자 상호는 검을 집어넣고 두 손을 양옆으로 들어 올렸다.
손에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자들은 하늘에서 산을 느꼈을 것이다. 투명하되 거대한 압박감을 가진 기운이 한낱 사람의 손에 맺혀 있었다.
마구잡이로 달려오던 악마들이 순간 움찔했다.
“스읍…….”
상호는 심호흡을 하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두 개의 산이 하나로 합쳐지며 산맥이 되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손에 잡아둘 수도 없는 힘을, 그는 조금도 무너뜨리지 않고 온전하게 모아 손과 손 사이에 압축했다.
그리고 양손을 힘껏 앞으로 내질렀다.
두욱
기묘한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한쪽이 찢어진 북을 치면 이런 소리가 날까. 쏘아져 나간 기운의 강대함을 생각하면 시원스럽지 못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가 만들어낸 결과는 전혀 달랐다.
방금 전까지 악마들이 달려오고 있던 땅이 푹 꺼져 있었다. 동그랗게, 원통 모양으로.
거대한 절구가 깊숙이 찧고 간 듯이.
악마들은 짓밟힌 벌레처럼 짜부라지고 터진 채였다.
쿠르르……
뒤늦게 무너진 흙이 악마들의 시체 위로 쏟아져 내렸다.
“……후우.”
상호는 얼얼해진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땅으로 내려갔다.
구덩이 바깥에서 살아남은 악마들이 허둥지둥 어딘가로 달려갔다. 봉인소로 향하는 놈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놈도 있고.
추적을 피하려는 듯했다.
“그쪽으로 간다, 누나.”
[응.]
민정이 짧게 대답했다.
상호가 땅에 착지하자 짜부라진 악마 시체들 사이에서 짐승의 앞발 하나가 튀어나왔다.
발바닥 사이가 갈라지며 입술처럼 움직여 소리를 내었다.
“참으로…… 곤란한 힘이군요.”
성대도 없는데 어떻게 목소리가 나는지.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손을 걷어찼다.
“꺼져, 기분나쁜 새끼.”
“그래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귀하가 우리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것…….”
입이 요사스럽게 키득거렸다.
“이제 어쩌시렵니까? 우리를 죽이지도 못하면서. 평생 이곳에 묶여 있으렵니까?”
“글쎄.”
그새 재생한 악마들이 조용히 구덩이를 벗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모른 척 내버려두었다.
다 계획이 있다.
“어차피 네놈들도 별수 없긴 마찬가지일걸.”
“우릴 너무 무시하는군요.”
“글쎄. 두고 봐야지.”
상호는 손을 까딱였다.
“슬슬 우리끼리 놀아 보자고. 가장 강한 놈으로 들고 와.”
* * *
“……오고 있어요.”
태화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사방에서…….”
“아으…….”
다혜가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은 민정과 헌터들과 함께 봉인소 중앙 마당에 서 있었다. 육각형으로 마당을 둘러싼 건물 너머에 불안한 적막이 감돌았다.
민정은 땅에 그려놓은 마법진을 흘끗했다.
“다혜야.”
“므앙?”
“알아들은 거 맞지?”
“아으.”
“절대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지 마.”
“아으아으아~.”
알아들은 게 맞는지 의문이었다.
민정도 다혜의 폭주는 본 적이 있었다. 작년에 학교에 있었을 때. 확실히 일반적인 힘은 아니긴 했지만.
‘얼마나 잘 다룰 수 있을지…….’
그나마 실전 경험은 풍부하다는 게 다행이었다.
태화도 지난번 혈마녀와 악마들의 습격 때 악마들과 싸운 경험이 있다. 싸웠다뿐이랴, 유의미한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그래도 민정은 걱정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승부대원의 입장에서 보면 다 애송이일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은 언젠간 싸워야 하니까.’
신입이면서 경력직일 순 없는 법. 누구든지 버거운 시련을 헤쳐 나가야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민정은 걱정을 거두고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곧 도착합니다. 각자 임무 잊지 마세요. 정령들은?”
후드를 쓴 남자가 허공에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5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도망치고 있습니다. 이제 4백 미터…….”
코앞까지 다다랐다. 민정은 하늘로 솟구쳐 올라 마나를 운용했다.
뒤따라 올라온 태화도 민정의 곁에서 마법을 도왔다.
“크르…….”
다혜도 기다란 뿔과 꼬리를 꺼냈다.
모두가 전투 준비를 마쳤을 때. 창문 깨지는 소리가 적막을 몰아냈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건물 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팔이 여럿 달린 회색 늑대인간.
마치 불상처럼 여덟 개의 팔을 펼친 채, 개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자세로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하아……
늑대인간의 입에서 푸른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는 서서히 퍼지며 중앙 마당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악마들이 건물을 넘어오는 중이었다. 뿔이 갈기처럼 난 악마, 텅 빈 눈구멍에서 무언가 끈적이는 액체를 끊임없이 흘려대는 악마, 잘린 목에 이빨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악마.
악마들이 당도하자 주술에 무지한 이들도 저릿저릿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으.”
한 헌터의 입에서 낮은 침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가만히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항복한다고 살려줄 놈들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은 중앙 마당의 대기를 팽창시켜 푸른 연기를 바깥으로 몰아냈다.
민정도 마법을 완성시키고 시동을 걸었다.
따악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청량하게 마당을 울렸다.
민정의 앞에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하얀 깃털이 뿜어져 나왔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화염방사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쏟아진 깃털들은 허공에 흩날리다가 조금씩 뭉치더니 수많은 날개가 되었다. 마치 몸통 없는 새처럼. 날개들은 건물 바깥쪽을 빙글빙글 맴돌며 일대를 새하얗게 뒤덮었다.
그 모습을 본 늑대인간 악마가 고개를 기웃했다.
“이게 무엇인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섭하군, 세상이 다르다고 예의도 다르진 않을진대……. 마신을 한 번 뵈었다고 노부 같은 잡졸은 눈에 뵈지도 않는 겐가? 허허, 섭하군, 섭해.”
“므아!”
“으응?”
다혜가 날린 검강이 늑대인간의 옆을 스쳤다.
다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악마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으아으!”
“어째 못알아듣겠더라니. 벙어리였군.”
악마는 다혜를 무시하고 날개의 벽을 둘러보았다.
날개는 악마의 출입을 막지 못했다. 아니, 아예 그런 용도가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 더욱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악마에게도 생소한 마법.
“들어간 마나의 양치고는 별 볼 일 없는 듯한데…… 으음, 이건 또 무엇인고?”
악마의 주변에 검은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악마가 그 검은 눈송이를 손으로 잡는 순간, 눈송이가 갑자기 팽창하더니 검은 결정창이 되어 악마의 팔을 꿰뚫었다.
“……오호.”
늑대인간 악마는 감탄하며 결정창을 뽑아냈다.
“어린것이 제법이군.”
건물을 넘어온 악마들이 헌터들에게 달려들었다.
악마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 검은 가루들이 결정창이 되어 악마들의 몸을 꿰뚫었다.
“키익…….”
“크르……커걱.”
덕분에 헌터들은 쉽게 선공을 점할 수 있었다.
모인 헌터들은 수호부대원들, 혹은 그에 엇비슷한 수준의 강자들이었고, 상대하는 악마들은 잡스런 졸개들이었다. 초강기를 쓰지는 못하더라도 악마들의 몸을 베어내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초혼강기를 쓰는 아이는.
“아으!”
온몸에 붉은 강기를 두른 채로 악마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느아아아!”
“키엑……!”
“으아으아으아!”
칼이 번쩍일 때마다 악마의 팔다리가 날아갔다.
다른 헌터들에겐 게걸스럽게 달려들던 악마들이 다혜의 앞에서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늑대인간 악마는 하등한 악마들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이 연놈들은 우리 심장을 못 본다. 마음껏 공격해라.’
‘이야기가 다른데…….’
‘영혼의 마나를 쓰는 인간은 한 놈이라며?’
‘저 계집애는 볼 수도 있는 거 아냐?’
‘우리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한심한 놈들.
늑대인간 악마의 마음에서 살심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주인께 반항하겠단 거냐? 뒈지기 싫으면 헛소리 말고 공격해라.’
‘…….’
주춤했던 악마들이 괴성과 함께 다시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건물을 넘는 악마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들의 주인이 마신의 적을 잘 붙잡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대로면 목표를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
다만 저 하얀 날개의 벽과 검은 눈송이가 심히 거슬렸다.
악마의 시선이 하늘에 떠 있는 두 여인을 향했다.
‘저기군.’
늑대인간 악마는 날아올라서 그들을 마주했다.
빨간 뿔과 화살촉을 닮은 꼬리. 어린 쪽 여자는 반인반마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가 저 검은 결정의 주인이렷다.”
“으엑, 말투 개틀딱.”
“그럼 네가 저 날개의 주인이겠군.”
늑대의 눈이 민정을 향했지만, 민정은 대답 대신 기습적으로 불덩이를 날렸다.
악마는 불덩이를 가볍게 쳐내고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니 같으면 말하겠냐? 븅신~.”
“그저 궁금한 것뿐이다. 저 날개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여덟 손의 검지가 모두 민정을 가리켰다.
“저걸 유지하느라 마법도 똑바로 못 쓰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지 않느냐. 방금 내게 날린 잔망스러운 불덩이같이……. 그럴 가치가 저 날개들에게 있느냐고, 그저 궁금하여 물어보는 것뿐이다.”
민정은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나를 끌어모아 다시금 공격을 준비할 뿐.
악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다. 원한다면 상대해 주지.”
“우리 이미 싸우고 있거든? 치매라도 걸렸냐?”
“허나 아이야, 기억해 두어라.”
저릿저릿한 감각이 민정과 태화의 피부를 타고 흘렀다. 태화는 몸서리를 치며 입을 다물었다.
“악마는 숨 쉬듯이 마법을 자아내는 존재임을…….”
악마가 입에서 푸른 연기를 흘렸다. 여덟 손으로 각기 다른 마법진을 그리며.
“저런 쓸데없는 마법에 의식을 소모해가며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죽음으로서 깨닫게 해주마.”
“…….”
민정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