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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30화 (430/501)

<430화>

430.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으기이익……!”

태화의 앙다문 입 사이에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쌔, 쌤, 나 토할 거 같아…….”

“조금만 참아.”

상호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품에 태화와 이서를 꽉 끌어안은 채.

그때 머리 위 뒤쪽에서 무언가가 울부짖었다.

키야아아악

“……젠장.”

따라잡힌 듯했다.

익룡을 닮은 해골 새가 그들을 향해 쏜살같이 내리꽂혔다. 상호는 돌아보지도 않고 강검을 만들어 놈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새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고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이놈도 악마인가.’

상호는 이를 갈며 해골을 다시 한번 베어 넘겼다.

아이 둘을 데리고 도망치려니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둘을 데리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

태화에게 이서를 데려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느리고.

“쌤…….”

“조금만 참아.”

“아까보다 더 늘었어…….”

태화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 말대로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아르게스 방향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방향에서도. 악마가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지배의 악마라는 놈.

‘왜 지금…….’

순간 상호는 아직도 심상에 악마가 남아 있는지를 의심했으나, 곧 베르멜로와 함께 있던 것을 악마에게 들켰기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어쨌거나 일단은 도망쳐야 한다.

‘……잠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태화야.”

“으, 응?”

“너 혼자서 공간이동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어?”

“저기 산 정도까진…….”

“무리하는 거 아니지? 공간이동하고 바로 민정쌤 있는 곳까지 쭉 도망칠 수 있겠어?”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가.”

붉은빛이 태화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곧 마법진의 모습이 되었다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태화를 데리고 사라졌다.

상호는 이서를 꽉 끌어안았다.

“이서야.”

“네.”

이서의 목소리는 훨씬 더 떨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하나만 기억해. 절대 쫄지 마. 겁나면 놈들 보지 말고 나한테 얼굴 박고 있어. 알았지?”

“……네.”

이서는 조그맣게 대답하고 상호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상호가 경공을 풀고 떨어져 내리자 악마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나뭇잎 사이를 가르고 떨어져 내리는 해골 새. 수풀을 가르고 나타나는 뿔 달린 늑대. 나무를 부수고 나타난 거대한 괴수. 전부 어디 하나가 더 달려 있거나 덜 달려 있었다.

크르르……

공기를 낮게 울리는 울음소리.

상호는 검을 뽑고 이서를 품에 깊숙이 끌어안았다.

“나와.”

온몸에 입이 달린 인간형 악마가 앞으로 나왔다.

악마는 온 입에서 하얀 점액을 흘리며, 걸을 때마다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다가와 상호를 마주했다.

“도망치고 있던데.”

악마가 웃었다.

“뭘 또 그렇게 자신있는 척 서 있습니까?”

그 녀석과 똑같은 말투. 상호는 눈앞의 악마가 지배의 악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썹을 치켰다.

“너도 똑같잖아, 임마. 너 내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지?”

“그렇다면 어쩌시렵니까?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귀하를 죽일 수 있는 기회이니.”

칼끝이 악마를 가리켰다.

“내가 맞춰 볼까?”

“뭔진 모르겠지만 해보십시오.”

“너는 네 부하 눈으로 본 거야. 혈마녀랑 같이 있는 나를. 내가 도시에 계속 있을 거라고 착각했겠지. 그래서 그사이에 무언가를…… 아마 네 동료들을 구하려고. 그렇게 부하들을 긁어모은 거야.”

악마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보십시오.”

“아마 여기 있는 악마가 네가 끌어모을 수 있는 전부겠지. 너희한테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명운이 걸린 일이었다. 그런데 날 발견해 버린 거야. 분명 도시에 있어야 할 나를.”

검이 가볍게 한 바퀴 돌아 악마들을 가리켰다.

“너는 당황했겠지. 저놈이 왜 여기 있지? 설마 계획을 들킨 건가? 아마 당장 병력을 돌리려 했을 거야.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애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 아, 저건 모르고 있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들을 데려왔을 리가 없다, 하고.”

“……흐음.”

악마가 한쪽 눈을 치떴다.

“아니란 말입니까?”

“미끼라는 거지.”

상호는 이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는 낚인 거고.”

“이제야 흥미가 생기는군요. 그럼 어디 함정을 꺼내 보시지요.”

“준비가 덜 됐어. 이야기나 좀 해보자고.”

“하하…….”

악마의 수많은 입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해골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숲을 울렸다.

“이번엔 제가 맞춰 봐도 되겠습니까?”

“해봐.”

“귀하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악마가 손을 들어 상호를 가리켰다.

“우리가 이곳에 올 거란 사실도 전혀 모른 채. 그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우리를 마주쳤습니다. 귀하는 우리를 막고 싶었으나…… 곁에 귀여운 아이 두 명이 있었지요.”

그 손에 마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한 명은 능력이 있어 도망쳤으나…… 남은 한 명은 몸에 마나도 거의 없는 풋내기. 귀하는 차마 아이를 버리고 도망칠 수 없어 이렇게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아이의 존재가 귀하에게 아주 큰 부담이 된다는 것.”

마나가 휘몰아치며 상호와 악마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마신만큼 강한 귀하에게 약점이 생기는 순간을…… 우리가 운좋게 잡은 것이지요.”

상호는 강검을 만들어 마나를 갈랐다. 악마의 마나는 마법이 채 되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수십 개의 강검이 나타나 악마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푸확……

주변에서 치솟는 검은 피가 상호의 옷에 튀었다. 그는 검을 휘둘러 입 많은 악마를 베어버리고 이서의 귀에 속삭였다.

“걱정 마.”

“으…….”

“어차피 떨거지들이야.”

거대한 강검이 회전하며 악마들을 도륙했다.

일방적인 학살극. 악마들은 거리를 벌리며 마법을 쓰려 했지만 상호가 틈을 주지 않았다.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 마리의 악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럼에도 악마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질 않았다.

‘……젠장.’

상호는 다시 일어나는 악마들을 노려보며 진땀을 흘렸다.

죽지를 않는다. 심지어 반으로 동강내도 그 두 조각 모두 움직이며 상호에게 다가왔다.

꼭 좀비 떼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정신이 없지요?”

다른 악마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상호가 상체와 하체를 분리시켰던 놈이었다.

“귀하가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아무 의미 없습니다. 악마도 아닌 자가 우리의 심장을 일일이 찌를 수는 없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상호는 기혈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강검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몸에 무리가 오고 있었다.

“네가 깜짝 놀랄 만한 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대체 누가 믿겠습니까.”

악마가 웃었다.

“방금은 유인했다 했으면서, 이제와 함정이 있다고 허세를 부리다니……. 세상천지에 함정이 있단 걸 밝히면서 유인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검이 놈의 입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지배의 악마는 또 다른 악마의 입을 빌려 말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요.”

“제안?”

“솔깃하십니까?”

상호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이를 갈았다.

“착각하지 마, 이 새끼야. 잘 안 들려서 되물은 거야.”

“사실 낚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악마들이 공격을 멈췄다.

“거래를 합시다.”

“거래?”

“여기서 더 싸워 봤자 피차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 전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상호도 악마들을 죽이지 못했고, 악마들도 상호를 건드리지 못했다.

“우리는 목적을 이루고 싶고, 귀하는 그 아이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주고 싶겠지요. 그렇다면 서로 갈 길 가는 겁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려다주고 봉인소로 가면 어떡하려고?”

“우리는 그 전에 볼일을 마쳐야겠지요. 시합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썩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이서가 있는 한은 똑바로 싸울 수가 없으니.

그러나 상호에게는 이 제안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이야기를 꺼낸 게 악마이기 때문에.

‘……그래도.’

그는 품에 안긴 이서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악마를 노려보았다.

“……그래.”

“성사되었군요.”

악마의 고개가 끄덕여지다가 옆으로 기웃거렸다.

“헌데…… 그 정도로 그 아이가 중요합니까? 우릴 막는 것보다 그 아이의 안위를 우선해야 할 만큼……. 딱 봐도 아무런 능력 없는 애송이인데.”

“제자라는 거지.”

상호는 덜덜 떨고 있는 이서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능력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어. 나한테 중요한지가 중요한 거야.”

“그래도 전쟁에서의 승패가 갈릴지 모르는데…… 한낱 아이 하나에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날 있게 하는 이유야. 악마 따위가 이해할 리 없겠지만.”

“그렇습니까.”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사소한 궁금증이었습니다. 귀하가 그렇다면 우리야 좋지요.”

그리고는 느릿하게 꾸벅 인사했다.

“가시는 길 평안하시기를.”

상호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비산하는 흙 사이로 멀어지는 상호를 수천 수백 개의 눈이 지켜보았다. 지배의 악마는 잠시 상호가 멀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악마들에게 명령했다.

‘전속력으로 달려라. 놈이 도착하기 전에.’

그때 하늘에서 검푸른 무언가가 떨어졌다.

콰아아앙

폭발이 일대를 휩쓸었다.

갈기갈기 찢겨버린 악마들의 육편이 흙과 뒤섞여 파묻혔다. 악마는 입에 흙이 씹히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악랄한 놈…….’

재생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 * *

텅 빈 도로 한복판에 주차된 트럭.

상호는 그 앞에 착지했다.

“형.”

차에 기대어 있던 도현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트럭의 운전석과 화물칸에는 가장 가까운 부대에서 데려온 헌터들이 앉아 있었다.

도현은 상호의 품에 안긴 이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애야? 어쩌다 거기까지 가 있던 거야?”

“이야긴 나중에 해. 시간 없어.”

상호는 이서를 땅에 내려 세웠다.

하지만 이서는 다리를 후들거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으.”

이서가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수그렸다.

실습 한 번 나가보지 못한 아이가 악마를 마주치고,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다. 평범한 아이라면 진즉에 까무러쳤을 터.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 상호는 이서의 등을 토닥이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얼른 데려가서 쉬게 해줘.”

“나도 같이 싸우는 게 낫지 않겠냐? 나도 갈게. 애는 헌터들한테 맡기면 되잖아. 그러려고 부른 건데.”

“형은 돌아가서 베르멜로 지키고 있어.”

지배의 악마가 그쪽에도 수를 써 뒀을지 모르니까.

도현을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는 악마가 이서를 인질로 잡으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도현의 역할은 이서를 학교로 데려가고 베르멜로의 주변을 감시하는 것.

베르멜로 본인까지 포함해서.

“애는 데려왔어?”

“어.”

도현이 엄지로 뒤를 가리키자 트럭 뒤편에 숨어 있던 다혜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므아.”

“괜찮겠냐? 얘 말이 안 통해서는…… 싸울 때 소통이 안 되잖아.”

“어쩔 수 없어.”

세희는 최후의 보루고, 세희를 제외하면 초혼강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다혜뿐.

상호는 다혜의 등을 두드려 잠을 깨게 했다.

“그리고 다혜도 꽤 강하니까. 형은 모르겠지만.”

“아으.”

다혜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도현은 못 미더워하는 시선으로 둘을 쳐다보더니, 이내 이서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서를 등에 업으려다가 상호를 돌아보았다.

“야, 상호야.”

“응?”

“부탁한다.”

봉인소에는 리주가 있다.

상호도 비전투인원과 태화를 봉인소에서 빼내고 싶었지만, 봉인소에서 도시까지 가는 길에 습격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름 전투에 업을 둔 이들이니.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혜에게 손짓했다.

“다혜야, 가자.”

“아으.”

둘의 발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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