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429. 조우
“쌤.”
소파에 누운 태화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리했네.”
“……응.”
하긴 했다. 그래도 아주 살짝인데. 여자 눈에는 그게 보이는 걸까.
상호는 괜스레 손을 들어서 약간 굽슬해진 머리카락을 꼬았다.
“티나?”
“여자 만나?”
“아니.”
사실 만나긴 했다. 그렇지만 태화가 생각하는 의미는 아니고.
베르멜로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하도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비싼 헤어샵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상호까지 서비스로 해주겠다길래 받게 된 것이었다.
“많이 이상해?”
“아니, 이상한 건 아닌데…… 쌤이 그러는 거 보니까 신기해서. 애들이 보면 완전 깜짝 놀랄걸?”
“……이상하단 말이구나.”
안 하던 짓이니까. 그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카락을 쭉쭉 당겼다.
그런데 태화는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근데 그러면 머리는 왜 한 거야? 여자 안 만난다매.”
“……그냥, 분위기 전환.”
“누구한테 잘 보일 일 있어?”
태화의 눈이 샐쭉해졌다.
“교장쌤이야?”
“아니야, 임마. 너까지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그럼 누군데? 나한테만 말해 봐. 나한텐 말해도 되잖아. 천세희랑 하나빛이 무서운 거 아니야?”
“야, 니가 뭘 안다고…….”
괜히 아닌 척 큰소리를 친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에.
상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끙끙 앓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벨이 헤어샵에 가보고 싶대서…… 따라갔다가 덤으로 받은 거야. 별거 아냐.”
“우씨, 나도 그런 데 좀 데려가봐!”
“……그래. 너한테 제일 말하면 안 됐던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 태화가 작은 마나의 탄환들을 날렸다. 탄환들은 상호의 머리를 경박스럽게 딱콩딱콩 때려댔다.
“또 여자 늘렸구만.”
“……아니야.”
“뻔하지 뭐. 근데 쌤. 요즘 되게 덥지 않아?”
“에어컨 안 돼.”
“우씨, 돈 벌어서 다 어따 쓰는데! 그년한테 갖다 바치게?!”
“아니 에어컨이 안 된다고…….”
고장난 걸 어쩌란 말이냐. 상호는 이마를 짚었다.
“더우면 찬물로 샤워해.”
“앗, 은근슬쩍 씻고 오라는 신호?”
“나가 임마. 밤엔 시원하던데 나가서 자.”
“미래 부르면 에어컨 고쳐주지 않을까?”
“걔가 수리공이냐? 학생을 어떻게 부려먹어.”
“아~.”
태화는 소파에서 발을 구르다가 축 늘어져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내일은 그냥 교실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쉬었으면 좋겠어.”
상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안 되겠다. 아직 문명에 찌들어 사는구나.”
그 말에 태화가 질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씨, 잠깐만, 아니야! 에어컨 필요 없어! 아이스크림 필요 없어! 그냥 이대로 살게!”
“누가 뭐래? 그냥 그렇다고.”
“그래놓고 내일이면 야생으로 끌고 갈 거잖아! 다 알아! 나, 나 수업 잘 받을게. 불평 안 할게. 응? 응?”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걱정 마, 걱정 마.”
“진짜지?”
태화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 쌤 믿어.”
“빨리 찬물로 씻고 자.”
“나 맨땅에서도 자는 완전 자연인인 거 알지?”
“그럼, 그럼. 당연히 알지.”
“……믿어, 진짜.”
태화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상호는 그런 태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 * *
“아아아니이이이!”
본관 옥상에서 태화가 빽 소리를 질렀다.
상호는 본관 현관 앞에서 옥상을 올려다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내려와라, 태화야.”
“X발! 안간다며! 안데려간다며! 나 안 가! X까! 뛰어내릴 거야!”
“야, 내가 너 못 잡아서 여기 있는 것 같아? 좋은 말로 할 때 가자, 태화야.”
“응, 잡아봐 잡아봐. 쌤이 아무리 빨라도 건물 안에선 내가 더 빠르거든? 학교 뽀개면서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 올해 연봉 싹 토해내도 모자랄걸!”
“너 자신 있냐? 진짜 해볼래? 건물에서 누가 더 빠른지? 너 쌤이 진짜로 달리는 거 본 적 있어?”
“응 X나느리죠? 1층 5층 순간이동으로 왔다갔다하면 아무것도못하죠? 여자화장실 못들어오죠? 샤워실 못들어오죠? 개꼴받죠? 들어오면 은팔찌 스웩이죠? 초범 아니라서 빼박 징역이죠? 허접~ X밥~.”
그 말에 구경나온 아이들이 깜짝 놀라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강 선생님 전과 있어?”
“위험한 남자인가봐…….”
“나 미쳤나봐, 더 좋아질 것 같애…….”
전과가 어딨냐. 경찰서를 좀 많이 왔다갔다 했을 뿐이지.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태화를 향해 부릅떴다.
“……야! 빨리 안 내려와! 너 자꾸 그러면 니 노트북이랑 캠코더 압수해서 숨겨놓을 거야! 빨리 내려와!”
“구라를 쳐도 정도가 있지! 약속했잖아! 안 간다고 약속했잖아! 누가 구라치래? 나 이제 쌤 안 믿어!”
“너 이제 노트북 압수야. 졸업할 때까지 압수야. 지금 내려와도 안 돌려줘. 캠코더도 압수할까? 응?”
그 말에 태화는 전교가 울리도록 빼액 소리쳤다.
“내 뱃속에 강상호 애 있다아아아!”
“……얌마!”
“임신광선은 실존한다아아! 내가 봤다! 가랑이에서 X나 굵게 뿜어져 나오더라아아아!”
교장실 방향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상호는 도망칠 준비를 하며 태화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너 두고 봐. 가만히 안 넘어가.”
“학생은 노예가 아니다! 학생들이여 일어나라! 안 일어나면 니들도 임신당한다!”
“너 진짜…….”
그때 태화의 뒤에서 가느다란 팔이 쓱 다가왔다.
“쌤도 빡치지?! 나도 빡쳐! 그러게 왜 거짓말해? 약속했으면 약속을 지켜야 할 거 아니…… 으긱?!”
“잡았어요, 선생님.”
세희가 태화의 꼬리를 잡은 채로 상호를 내려다보았다.
“교실로 데려갈게요.”
“으응, 고마워.”
“이거 놔! 이 노예새끼야! 여러분! 저는 절대 퇴학하지 않습니다! 휴학하지 않습니다! 아주 건강하고 어떠한 지병도 없으며…….”
“따라와, 등신아.”
“끼에에엑──!”
태화의 비명이 옥상 담벼락 너머로 멀어져 갔다.
* * *
“……씨잉.”
상호에게 꼬리를 잡힌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X가탱.”
“그러게 어차피 잡힐 거 왜 그렇게 발악하냐.”
“비겁하게 천세희를 쓸 줄은 몰랐지.”
상호는 혀를 차고 앞을 돌아보았다. 책상에 앉은 아이들이 상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태화랑 실습 갔다 올게.”
“무신 실습인데예?”
“멍, 성교육 실습이요?”
“……야영 실습 가려고. 태화가 너무 문명에 찌든 것 같더라.”
“아니라고오오! 내가 얼마나 에어컨 싫어하는데에에!”
“시끄러. 하여튼 그러니까…… 갔다올게.”
“둘이만요?”
나빛이 눈을 동그렇게 떴다.
“임신광선 쏘고 오시게요?”
“아니…….”
“그럼 왜 하필 둘이서…….”
“너희는 불평 안 하니까……. 태화만 자꾸 에어컨 아이스크림 없으면 못살겠네 하니까 데려가는 거야.”
그 말에 나빛이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며 불평할 거리를 찾았다. 상호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알았어, 알았어……. 한 명 더 같이 가자. 으음, 누가 좋을까…….”
속세에 찌든 아이가 또 누가 있나. 상호는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서가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핸드폰을 슬그머니 책상 아래에 집어넣고 있었다.
“이서가 좋겠다.”
“이서가 좋으세요……?”
나빛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생님, 이서는 아직 어린애예요…….”
“아니 나빛아, 액면가로 따지면 네가 더…….”
“이서는 임신광선을 맞으면 죽어버려요…….”
“아니…….”
그때 이서가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벌레 씹은 듯 찌푸린 얼굴로.
“싫은데요.”
“너희 이제 1학년 아니잖아.”
상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헌터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다른 애들도 다 시킬 거야. 이서 너만 조금 먼저 하는 것뿐이야. 횟수는 똑같이 맞춰줄게.”
“부모님한테 허락 받으면 갈게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석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상호는 씩 웃을 뿐이었다.
“이서야. 이거 알아둬.”
“뭐를요.”
“헌터사회는 원래 선조치 후보고야.”
“……네?”
이서가 눈을 끔뻑였다.
* * *
“X~같~다~.”
숲속에 태화의 노랫소리가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아주 X같다~!”
“조용히 해, 임마.”
상호는 핀잔을 날리고 수풀을 헤쳤다.
그의 옆에는 내공으로 붙잡아둔 이서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이서는 상호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오만 쌍욕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태화가 그의 팔을 흔들었다.
“쌤. 저거 뭐야?”
“뭐.”
“저거. 저기 나무에 붙은 거.”
나무줄기에 주홍색 날개를 펼친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나비야? 쌤 저런 것도 먹어?”
“저거 나비 아냐.”
“응?”
“쥐 같은 거야.”
상호는 새 모양의 강기를 만들어 그 생물에게 날려 보냈다.
강기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생물은 날개를 접으며 뒤로 확 돌아서 강기의 새를 공격했다가, 뜨거운 강기에 역으로 데여서 헐레벌떡 줄행랑을 쳤다.
“새를 유인해서 잡아먹는 놈이야.”
“쥐가 새를 먹어?”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먹는 거지. 자기보다 약하면 뭐든 사냥하는 거고. 여긴 다 그래. 뱀도, 새도, 쥐도. 다 서로를 잡아먹어.”
상호는 검지를 들어 빙 돌렸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해.”
그게 이곳, 아르게스라는 땅의 법칙.
“일단 물부터 찾고 지낼 만한 곳을 찾자. 따라와.”
“X~같~다~.”
“조용히 좀 해.”
“아주 X같다~!”
“……에휴.”
* * *
물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호는 기억을 더듬으며 어느 커다란 산 근처를 맴돌다가, 졸졸졸 흐르는 작은 냇가를 발견했다.
태화가 물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이거 마셔도 돼?”
“응.”
손을 담가보니 물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건 안 끓이고 바로 마셔도 돼.”
“그래? 어디…… 으엑, 차거!”
“덥다 덥다 노래를 불렀잖아. 이게 헌터의 에어컨이야.”
상호는 그렇게 대꾸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은 이서가 냇가 옆 바위에 앉아 있었다.
“이서야.”
대답 대신 매서운 눈빛이 날아왔다.
“이서야, 어차피 해야 되는 거야. 네가 그러고 있으면 내가 빨리 돌아갈 것 같아?”
“…….”
“네가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빨리 돌아가지.”
상호는 이서를 살살 구슬렸다.
“이서 너 나한테 배우니까 실력 금방 늘어서 2등까지 했잖아. 넌 하면 되는 애라니까? 이것도 별것 아닌데 네가 시작을 못 하는 거야. 한번 해보면 진짜 별것 아닌데 말이야. 언니들 자주 실습 오는 거 봤지? 갔다와서 뭐 힘들다고 한 적 있어? 나 뒷담한 적 있어?”
“……아뇨.”
“그렇다니까. 해보면 재밌을지도 몰라. 시작만 해보자. 응?”
그 말에 이서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알았어요. 대신 핸드폰만이라도 돌려줘요.”
“놓고 왔는데?”
“…….”
“한번 핸드폰 없이 지내보는 거지 뭐. 아이고, 시간이 벌써…….”
상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이서를 보며 씩 웃었다.
“이서 혹시 배고프지 않아?”
“……고파요.”
“밥 먹을까?”
“네.”
“자.”
이서의 코앞에 무언가가 쓱 들이밀어졌다.
잠시 눈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던 이서는, 곧 그것이 애벌레라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꺄아아아아악!”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야 한다니까. 자, 얼른 먹어. 생각보다 맛있어. 이놈은 생밤 맛 난다.”
“꺄악! 꺅!”
“이야, 이서가 비명도 지르는구나.”
상호가 낄낄거리며 애벌레를 들이미는데, 갑자기 태화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태화를 돌아보았다.
“태화야.”
“응.”
“뭔가 느껴지는 거야?”
“어어……. 느껴……지긴 하는데.”
“악마야? 어느 쪽?”
“이쪽인데…….”
태화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동쪽을 바라보았다.
“되게 먼데…… 되게 커.”
“크다고?”
“응. 큰 건지, 많은 건지……. 하여튼 그래.”
“얼마나 큰데? 평소에 보던 악마들이랑 비교하면.”
“한…… 백 배쯤.”
상호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