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27화 (427/501)

<427화>

427. 흐르는 강물처럼

베르멜로는 협회에 맡겨졌다.

이미 도현과 상의했던 일이라 잡음이 크진 않았다. 모르는 헌터들에게 둘러싸인 베르멜로가 잠시 패닉에 빠져 상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사건이 있었지만, 그저 잠깐의 소동일 뿐.

그리고 꾸웅은 도시까지 그들을 따라왔다.

‘떼어놓긴 글렀군.’

결국은 나빛의 성력 양탄자에 함께 타서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예현여고의 운동장.

“……강 선생.”

해련이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뭔가 불만이 있는 거야?”

“아뇨.”

“그러면……?”

“귀엽잖아요.”

상호의 말에 운동장에 묶인 꾸웅이 꾸어엉 하고 울었다.

학교에서 키우려고 데려온 것은 아니고, 어디서 키울지를 정하기 전까지의 임시 거처. 그래도 안전을 위한 장치는 똑바로 해 두었다.

상호는 꾸웅의 목에 걸린 목줄과 땅에 그려진 마법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차피 이 밖으로 못 나오니까 안전해요. 잠깐만 여기 둘게요. 한 며칠 정도면 될 거예요.”

“강 선생…….”

해련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교장이라고 해서 이 학교의 주인인 건 아냐……. 이사장이 보면 어떻게 하려구?”

“에이……. 어떻게든 되겠죠, 뭐.”

상호는 해탈한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되면 되는 것이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이고…….”

“…….”

“인생사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래요. 굳이 거스를 필요 없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듯이…….”

산에 다녀오더니 인간이 맛이 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해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섰다.

‘상하기 전에 빨리 먹어야겠네…….’

* * *

“저거 뭐야?”

“곰 아냐? 곰?”

“누가 데려왔지?”

“강 선생님이래…….”

학생들 소곤거리는 소리가 상호의 귀까지 닿았다.

점심시간. 상호는 지금 학생들이 다치지 않게 꾸웅의 앞에서 통제하는 중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수업을 해야 해서 미진에게 통제를 시켰지만, 점심시간까지 짬을 때렸다가는 며칠 동안 눈총을 받을 것 같아서, 이렇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꾸웅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우왓, 방금 봤어? 봤어?”

“나 배에 느낌 왔어…….”

“리얼 임신미소, 임신미소. 꺄하학!”

“…….”

차라리 살인미소라고 해다오. 상호는 맘대로 웃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급식소 쪽에서 미래와 단비와 아리가 걸어왔다.

“선생님~.”

“어, 그래. 밥 맛있게 먹었어?”

“멍.”

단비가 귀를 쫑긋거리며 상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지나가는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임신시키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어요.”

“난 그냥 웃기만 했어…….”

“눈 마주치지 마요, 멍.”

“눈에서도 임신광선이 나오니……?”

미래가 장갑에 달린 자판을 두드렸다.

“제가 과학적으로 분석해 봤는데요.”

“분석까지 해야 할 일이야……?”

“학생들이 선생님의 웃음을 봤을 때 어떤 신체변화가 생기는지를 기록했는데요, 우선 옥시토신 분비량이 평상시보다 4배가량 많아졌어요.”

“그게 뭔데……?”

“여러 가지에 관여하는 호르몬인데, 일단은 자궁수축이 주된 사용처죠. 그러니까 선생님을 본 학생들은 자궁이 수축되면서 약간의 압박감을 받고, 일시적으로 임신당한 느낌을 받는다는…….”

“…….”

상호는 할 말을 잃었다. 말이 되냐고 따지고 싶은데 학력이 초졸이라.

‘이래서 사람이 배워야 하는데…….’

물론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더라도 어지간한 학부생보다 전문적인 미래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

그는 헛기침을 하고 애써 웃었다.

“장난치지 마. 그런 게 어딨어…….”

그 말에 미래와 단비가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아리가 뺨을 붉히며 아랫배에 손을 얹고 있었다.

“얘는 벌써 낳으려고 하는데요?”

“멍, 알 마려워?”

“…….”

상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장난칠 거면 가줘…….”

“멍, 꾸웅이 보러 왔어요.”

단비가 꾸웅의 아래에 펼쳐진 마법진 주변에서 기웃거렸다.

“왜 이름이 꾸웅이에요?”

상호의 내공이 꾸웅의 손등을 찰싹 쳤다.

“꾸어엉.”

“아하……. 누가 지은 거예요? 멍.”

“지윤이일걸. 나빛이일 수도 있고.”

“그럼 이거 저희가 키우는 거예요?”

“글쎄…….”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희가 자주 볼지는 모르겠다. 일단 학교 뒷산을 지금 사고 있긴 한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

“멍, 선생님이 사는 거예요?!”

“아니, 친구가.”

“친구가 부자인가 봐요, 멍…….”

“그런 편이지.”

좀 많이.

그때 미래가 눈을 반짝였다.

“야, 단비.”

“멍?”

“너 꾸웅이랑 말해 봐.”

“멍? 아니, 쟨 곰이고, 난 개고…….”

“혹시 모르잖아. 한번 해 봐.”

“머엉…….”

단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꾸웅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본 풍경이었지만 상호는 가만히 지켜봤다.

“멍.”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뿐만이 아니라 반응 자체가 없었다. 완전히 개무시. 열이 받은 단비는 자세를 낮추고 꼬리를 치켜세웠다.

“아르르르…….”

“…….”

묵묵부답.

꾸웅은 태연하게 하품을 할 뿐이었다.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듣지 않는다, 라는 듯이.

단비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래에게 따졌다.

“멍! 무시하잖아!”

“그거야 쟤는 곰이고 너는 개니까.”

“아르르르……, 한미래 너!”

“그나저나 아쉽네. 말이 통했으면 재밌었을 텐데.”

미래가 입맛을 다셨다.

“연구에도 쓸모가 있었을 텐데…….”

“연구? 무슨 연구?”

“그냥 몬스터 생태가 궁금해서. 다른 세상의 생물이라니 신기하잖아. 어떤 식으로 진화했는지도 궁금하고……. 뭐 나는 공학만 배웠지, 생물에는 젬병이지만.”

그 말에 상호는 고개를 기웃했다.

“미래야, 아까…… 옥시토신이 어쩌구 하지 않았어?”

“그걸 믿으셨어요?”

“…….”

“그리고 자궁의 옥시토신 수용체는 임신 말기에나 활성화되는 거예요. 임신도 안 했는데 자궁이 수축될 리 없잖아요.”

“생물엔 젬병이라며……?”

“선생님보단 잘 알죠.”

“…….”

그야 당연히 그럴 것이다. 상호는 입을 닫았다.

그런데 그때, 급식소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이 녀석 배 안 고픈가?’

슬슬 배고플 만도 한데.

설마 못 본 새에 고양이나 새라도 집어먹었나, 그런 의문을 품는 차에 급식소에서 지윤이 커다란 양푼을 머리에 지고 달려나왔다.

“꾸웅아~. 밥 묵자~.”

“꾸어엉.”

지윤이 마법진 안에 양푼을 내려놓자 꾸웅이 코를 처박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대체 뭘 저렇게 잘 먹는 걸까. 상호는 양푼을 들여다보았다가 당황했다.

“……잔반이야?”

“예.”

“허락은…… 받았어?”

“당연하지예. 좋아하시던데예. 앞으로 괴기 잔반 남으믄 밥이랑 쪼까 스까서 달라 캤습니더.”

“……잘됐네.”

양푼에 담긴 고기는 꽤 많긴 했지만, 그래도 꾸웅의 배를 채우기는 좀 부족해 보였다.

“이걸로 배가 찰까? 저녁도 먹여야 하는데…….”

“지가 알아서 하겠심더. 걱정하지 마이소.”

“내가 고기 좀 사올까?”

“아이, 지가 알아서 한다니까예.”

지윤은 손사래를 치고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지가 데리왔는디 우째 쌤 돈을 씁니꺼. 알아서 다~ 할 텡게 푹 쉬이소.”

“사람을 먹을까봐 그래…….”

“절대 안 그러게 하겠심더. 믿어주이소.”

“그래…….”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 * *

그날 저녁.

상호는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 자식 배고프면 분명 사람 보고 입맛 다실 텐데…….’

당장은 마법진 밖으로 나가지 못하지만, 배고플 때 자꾸 사람을 보고 냄새를 맡다 보면 사람을 먹고 싶단 욕구를 참을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몬스터를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짐승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번 상태를 봐야겠다.’

그래서 그는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달음에 운동장에 도착해보니 꾸웅 근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갈색 피부에 근육이 있는 아이, 연회색 머리를 길게 기른 아이.

지윤과 나빛.

둘의 앞에는 멧돼지가 하나 쓰러져 있었다.

“역시 도매건 소매건 가공품보다는 원자재가 싸게 먹히는 법이제. 뭣하러 고기를 사고 있노. 도축하고 운송하고 값이 붙는디…….”

“멧돼지 불쌍해…….”

“유해조수디.”

“다리만 자르고 성력으로 치료할 순 없을까……? 자르구 치료하구, 자르구 치료하구…….”

“……니가 제일 악마디.”

“응?! 주, 죽는 것보단 낫잖아…….”

“차라리 쥑이뿌는 기 낫제. 묵어라, 임마. 누나야가 니 땜에 잡아왔데이.”

“꾸어엉.”

꾸웅이 멧돼지를 먹었다. 우두둑 우두둑, 우적 우적.

상호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저걸 매일 할 수 있을까…….’

알아서 잘하겠다니까.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지켜보면 될 듯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돌아서서 남교사 숙소로 향했다.

* * *

다음 날.

학교 뒷산 주변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땅을 파고 다지고, 철심을 박고 시멘트를 굳히고.

상호는 그 모습을 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비쌌냐?”

“아니, 뭐. 가치가 있으면 금액은 상관없는데…….”

나로가 입맛을 다셨다.

“사업적으로는 손해지.”

“그럼 다른 쪽으로는?”

“어쩌겠어, 아픈 동생이 처음으로 어리광을 부렸는데…….”

처음으로 부린 어리광이 학교 뒷산이라니.

그걸 부탁하는 동생이나, 들어주는 오빠나. 평범한 남매는 아니었다. 물론 상황도 평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래가 몬스터 연구하고 싶다니까……. 실력 좋은 연구원한테 복지 해준 셈 치지, 뭐.”

“하하…….”

“근데 진짜 애완용이야?”

“……아마도.”

상호의 대답에 나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모르겠다, 정말. 해주고 싶어서 해주긴 했는데…… 정말 저놈을 키운다고? 몇십 년을 살지도 모르는데?”

“방법이야 찾으면 되는 거니까. 근데 아버님 어머님은…… 알고 계셔?”

“일단은 비밀.”

“그러냐.”

상호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야, 나로.”

“응?”

“넌 운명을 믿냐?”

“갑자기?”

나로는 헛웃음을 치다가, 상호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는 눈을 끔뻑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글쎄. 운명이 있다는 건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거잖아? 그러면 모든 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 개인도 단체도, 철학도 신념도. 모든 게 정해져 있으면 후회할 이유도 없고, 집착할 이유도 없고. 그냥 몸의 쾌락만 쫓으면서 약이라도 빠는 게 더 현명하겠지.”

상호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나로가 말을 이었다.

“근데 난 후회하고 집착하는 인생이 더 낫다고 봐.”

“……그래?”

“사람 사는 데 시련이 없을 수가 있나. 시련이 있으니까 인생에 의미가 있는 거지. 그런데 그런 시련들을 그저 정해져 있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난 그래서 운명론도…….”

나로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신도 안 믿어.”

하 남매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상호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나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래, 뭐.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 그런데 현실과 이상이 항상 같지는 않잖아? 만약 세상이…… 흐르는 강과 같아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다가온다면.”

먼 산을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떻게 받아들일래?”

“……나빛이 이야기야?”

“아니.”

아직은.

“그냥 물어보는 거야.”

상호의 말에 나로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피할 수 없는 시련이라면 받아들이겠지. 그게 정말로, 무슨 수를 써서도 피할 수가 없다면…… 당당히 받아들여야겠지. 그게 마음도 편하고, 멋도…… 멋은 좀 웃긴가?”

“아니, 아냐.”

상호는 피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련이 있으니까 인생에 의미가 있다. 그의 주변에서는 오직 예경만이 할 법한 말이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도움이 됐다. 나빛이한텐 지금처럼 쭉 잘해 줘. 그러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니가 그런 말을 하니까 걱정이 되는 거야, 임마. 너도 나빛이한테 잘해. 네가 누구랑 놀러다니는지가 내 귀까지 들려와.”

“……나도 꽤 노력하는 중이야.”

대체 그런 이야기들을 왜 오빠에게, 사장에게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 학부모들 귀에만 안 들어가게 해다오…….’

학교로 돌아가는 상호의 입에서는 한숨이 푹푹 쏟아졌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나로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