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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26화 (426/501)

<426화>

426. 섰네

“이게…….”

베르멜로는 식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냄비 속, 붉은 국물 속 꼬불꼬불한 노란 면.

“밥이에요?”

“어.”

상호가 그 음식을 그릇에 덜며 대꾸했다.

“정확히는 밥이 아니라 면이지. 설마 너희 세상엔 면도 없냐? ”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뭐.”

“빵이나, 고기나, 그런 건…… 없어요?”

국물은 흥건하고, 냄새는 독하다 싶을 정도로 맵다. 그녀가 살던 세상 기준으로는 하층민이나 먹을 법한 음식이었다.

식탁 주변에는 아이들과 민정이 앉아 있었다. 베르멜로의 말에 태화가 눈을 부릅뜨고 상호를 노려보았다.

“맞아! 왜 고작 라면인데! 우리 일주일이나 고생했는데!”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여기 음식을 우리가 축내면 어떡하냐. 여기 사람들은 배달도 안 오는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라면이 싫어? 그럼 먹지 마.”

“누가 싫대? 밥도 말아 먹을 거야.”

“그런데 선생님…….”

나빛이 상호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보다 약간 앞.

“그분은…… 누구예요?”

상호의 무릎에 앉아 있는 베르멜로를.

상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악마야.”

“악마…… 융합체요?”

“아니, 진짜 악마. 뭐 따지고 보면 이놈도 진짜 악마는 아니긴 한데.”

“그런데 왜 무릎에 앉혀요……?”

나빛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거긴 제 자리인데…….”

“아니, 나빛아, 다 이유가 있어…….”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자리 바꿔 드릴게요.”

“이유가 있다니까…….”

이유는 당연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베르멜로를 믿겠다 하긴 했지만, 그건 베르멜로가 하는 말을 믿겠단 뜻이지 아이들의 안전까지 맡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상호는 베르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며 라면을 담은 그릇을 나빛의 앞에 놓았다.

“어서 먹어, 나빛아. 면 다 불겠다. 니도 얼른 먹어.”

“……네.”

베르멜로는 포크를 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생긴 건 둘째치고 냄새가 너무 이질적이라서.

결국 베르멜로는 애써 웃으며 은근슬쩍 포크를 내렸다.

“저어…….”

“응?”

“배가, 안 고픈 것 같은…….”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베르멜로는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진 않았으나, 뒷목에 닿는 숨결의 온도로 상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살기를 감지하자 뒷목의 솜털이 쭈뼛 솟고 몸이 움찔 떨렸다.

“지금 나한테 밥투정 부리는 거냐?”

“아, 아니요…….”

“아무리 그래도 한 입은 먹어보고 안 먹는다 해야 할 거 아냐. 넌 밥상머리 예절을 그렇게 배웠어?”

“…….”

황족인데 그런 게 있었겠습니까, 베르멜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땀을 흘리다가 다시 포크를 집었다.

그렇지만 냄새가.

‘으엑, 매워…….’

당장이라도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이게 음식이 맞나. 고문에 쓰는 물건은 아닌가. 이 시뻘건 국물을 눈에 톡톡 떨어뜨리면 그 어떤 비밀이라도 다 불게 될 것 같았다.

슬쩍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은 기다란 쇠로 잘도 면을 집어 먹고 있었다.

“역시 사람이 밀가루를 묵어야제.”

“돼지야, 그만 처먹어. 그게 몇 그릇째야!”

“또 끓이면 되지 임마. 남 먹는 거에 집중하지 말고 너 먹을 거에나 집중해.”

“우씨, 배달도 안 오는 곳 음식을 축내면 어쩌냐매!”

“라면은 많아서 상관없어.”

베르멜로는 그 모습을 보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맛있나……?’

그래서 한입 먹어 봤는데.

“……푸웨헤헥!”

입에서 뿜어지는 붉고 노란 분수.

베르멜로의 타액이 섞인 촉촉한 분비물들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안면을 강타했다.

“…….”

“콜록, 콜록, 어으…….”

“얌마, 좀 참고 그릇에 얌전히 뱉을 것이지 드럽게…… 응?”

상호는 기침을 하는 베르멜로의 등을 두드리다가 당황했다.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베르멜로의 고개가 숙여지자 칼을 뽑는 세희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에.

“잠깐만, 잠깐만……, 세희야?”

“칼빵 한 번만 놓을게요.”

“안 돼……!”

“빵을 좋아하던데…….”

상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내공으로 세희의 손을 잡아 눌렀다.

베르멜로는 그때까지도 식탁에 얼굴을 처박고 콜록거리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콜록콜록, 우욱, 케흑…….”

“괜찮냐?”

“자, 잘못했어요, 다 말할게요, 다…….”

“음식을 고문 취급하지 말아줄래?”

행주가 날아와 식탁을 닦고, 물티슈가 날아와 세희의 얼굴을 닦았다. 상호는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라면을 후루룩거리던 태화가 베르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얘 몇 살이야?”

상호도 베르멜로를 내려다보았다.

“몇 살이냐?”

“여기 나이로는…… 열아홉이요.”

“뻥까지마 임마. 거기서 악마 되자마자 바로 넘어왔다고 쳐도 여기서 몇 년을 더 있었을 거 아냐. 니 그럼 열 살에 세상을 말아먹은 거야?”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열아홉이에요…….”

“나이의 뜻이 거기랑 다른가? 태어난 지 몇 년이 지났냐고.”

“19년 됐을 때 악마 돼서 고정됐으니까 열아홉이에요…….”

“얘가 사람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네. 야, 몇 살이냐고.”

“그, 멸망한 뒤로는, 나이를 세지 않아서…… 그래도 아마, 마흔……다섯…… 살쯤이요.”

그 말에 태화가 눈을 부릅떴다.

“아줌마야?!”

“아니야! ……요.”

베르멜로는 벌컥 화를 내려다가 상호의 눈치를 보며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상호는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네가 배신한 뒤로 얼마 만에 멸망했는데?”

“1년…… 도 안 걸렸어요. 이쪽 세상의 기준으로는…… 한 달 정도.”

“그럼 그쪽 세상에서 20년 가까이 있다가 갑자기 이쪽 세상으로 넘어온 건가?”

“네…….”

“혹시 왜 세상끼리 합쳐졌는지 알아?”

“그건 저도 몰라요……. 그치만, 마신이나 신비의 악마라면…… 알고 있을지도.”

그 말에 민정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마신은 그렇다쳐도. 신비의 악마는 뭐 하는 놈인데?”

“마법과 주술을 관장하는 악마예요.”

“여섯 놈이랬나? 너랑 그놈이랑 다른 녀석들. 마신이 직접 떼어낸 녀석들이라고 했지?”

“네. 저희는…… 악마의 여섯 특징에서, 각자 맡은 요소를 마신과 같은 수준으로 갖고 있어요. 신비는 마력, 야성은 근력, 지배는 정신력, 불사는 생명력……. 그리고 저는…… 사실상 없죠.”

“욕망이라며.”

“탐욕에 무슨 힘이 있겠어요…….”

베르멜로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상호는 생각이 달랐다. 욕망은 생물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것.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

만약 그가 마신을 죽이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베르멜로야말로 악마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졌던 셈이 될 터였다.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니까.

어쨌든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다른 궁금한 것이 있어서.

“벨.”

“네.”

“너 다른 악마들을 찾을 수는 없냐?”

상호의 물음에 베르멜로가 당황했다.

“그을……쎄요, 영혼세계에서 불러내는 건 가능한데…… 대답을 안 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못 찾고…… 또 그러다가 마신을…… 마주칠 수도 있어서…….”

“하기 싫다?”

“만나면 죽어요……. 아무리 영혼세계더라도…….”

“필요해서 물어본 건 아냐.”

상호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한테 시비를 건 놈이 있어서. 너 혹시 지배의 악마가 어디 있는지 알아?”

“……그게.”

베르멜로가 초조한 듯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지배의 악마는……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어요.”

“영혼세계에선 있다는 말인가?”

“네. 그치만 그것도 마신이 저희 여섯을 호출할 때뿐이고…… 평소에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전할 말이 있을 때도 부하 악마의 몸을 빌려서 하고…….”

민정이 중얼거렸다.

“본체가 없나?”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몸이 없는데 영혼만…….”

있을 수가 있을까, 라고 물으려던 상호는 곧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런 경우가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있을 수도 있겠네.’

놈이 했던 말. 온 땅을 뒤져도 자신을 찾을 수 없을 거라던 말이 이해가 갔다. 없는 걸 찾을 수는 없으니.

‘근데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하지……?’

그 영혼세계라는 것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그럼 영혼세계엔 어떻게 들어가나.

‘……악마랑 자야 하나?’

이제는 뭘 해결하려면 꼭 여자와 엮여야 하는 기분이다. 상호는 지배의 악마를 떠올리며 베르멜로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 시선이 아이들과 민정에게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상호야?”

“응?”

“눈빛이…… 왜 그래?”

“……뭐가?”

“방금 되게 눈빛이 뜨거웠는데…….”

아이들도 민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쌤이 뻔하지 뭐.”

“핑계도 차암 많심더. 무신 이유가 있네 어쩌네……. 기냥 가스나를 안으믄 기분좋다 하이소.”

“선생님 왜 그 악마 보면서 입맛을 다셔요……?”

“악마는 역시 죽이는 게 맞아요, 선생님.”

“아니, 아니 얘들아. 그게 아니고…….”

상호는 손사래를 치며 설명하려 했다.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절대 그럴 생각 없다고.

그런데 베르멜로가 그를 돌아보며 뺨을 발그레 붉히더니, 슬금슬금 허리를 돌리며 그를 자극했다.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

“꺅!”

그가 벌컥 화를 내자 베르멜로가 몸을 움찔하며 황급히 다리를 오므렸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과 민정의 눈에 확신이 깃들었다.

“섰네.”

“세웠네.”

“쌤 일어나 봐. 일어나 봐. 못 일어나지? 응?”

“뭘 못 일어나! 이상한 소리하지 마.”

“근데 왜 못 일어나는데?”

“…….”

“빼박이네.”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고마.”

“아니라고…….”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고개는 불가항력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지만.

베르멜로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저어, 불편하시면 일어날까요……?”

“……아니. 그대로 있어.”

“그치만 자꾸 찌르셔서…….”

“그대로 있으라고.”

둘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또 아이들이 둘을 째려보며 밖으로 나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협회 앞에는 황금색 양탄자에 탄 아이들과 상호, 그리고 꾸웅이 서 있었다. 민정이 그 옆으로 다가가자 상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갈게.”

“응.”

민정의 시선이 상호의 옆에 앉은 베르멜로를 향했다.

“이제 안 오겠네.”

“……난 항상 누나 보려고 온 거였어.”

“어머, 얘가 참……. 여자가 어떤 거짓말을 좋아하는지 알아 버렸구나. 예경이가 보면 웃겠어. 그 어린 꼬마애가 언제 이렇게 선수가 됐을까…….”

“진짜야…….”

“그런 말은 눈을 마주치면서 해야 하지 않겠니?”

“…….”

상호는 볼을 붉히며 민정과 간신히 눈을 마주쳤다.

그도 베르멜로를 좋아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여기 처박아 두고 싶었다. 악마를 도시로 데려가는 것도 찝찝하고, 궁금한 게 생기면 전화로 물으면 되니까.

그러나 이곳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시설. 아무리 전향했다고는 해도 악마를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는 없다.

또 베르멜로를 풀어준 이상 어느 정도는 자유를 주어야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을 테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상호와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이 좋을 테니.

협회에 떨궈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바람 피러 데려가는 건 아니야. 누나도 알잖아.”

“난 잘 모르겠는걸. 효은이한테 한번 물어볼까?”

“……비밀 지켜주면 좀 더 일찍 올게.”

그제서야 민정이 빙긋 웃었다.

“약속이야.”

“응.”

둘이 입을 맞추자 뒤에서 태화의 야유가 들렸다.

“우우~. 그림 좋은데~.”

“좋다면서 뭘 우우야, 임마. 누나, 갈게.”

“응.”

양탄자가 앞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고, 손을 흔드는 민정이 점점 멀어져 갔다.

꾸웅은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까딱이다가 그들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꾸웅이 따라온다! 봐요, 선생님!”

“도시까진 지켜봐야지.”

양탄자는 꾸웅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만 날았다. 느릿느릿. 자동차는 물론이고 달리는 사람보다도 느린 속도였다.

태화가 세희의 어깨에 고개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심심해, 쌔앰~. 영화라도 틀어죠~.”

“뭐 보고 싶은…….”

상호는 급히 말을 삼켰다. 베르멜로에게 영화로 사기를 쳤던 것이 기억나서.

베르멜로에게는 CG가 나오는 영상매체를 보여주면 안 되었다.

“……뉴스나 보자.”

“아악! 뭔 뉴스야!”

태화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상호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틀어 허공섭물로 띄웠다.

스피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에서 헌터가 난동을 부리다 체포되었는데요, 협회 관련자의 말에 따르면 악마에 빙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새 또 악마가 설친 모양이었다. 그것도 헌터의 몸으로.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면을 돌아보았다가, 전투복을 입은 다혜와 이츠키를 발견하고 눈을 끔뻑였다.

‘뭐여.’

[해당 범인을 잡는 데에는 여기 보이는 이 학생들, 흔히 마조부대라고 알려진 협회 소속 헌터 지망생들이 큰 역할을 했는데요, 현장에서 이야기 한번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니혼진데스.]

[……아, 일본인이시군요~. 통역이 없는 관계로 다른 분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므앙.]

[…….]

마이크를 든 손의 흔들림에서 리포터의 당황을 느낄 수 있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팍팍 느껴지는 이츠키와 달리, 다혜는 방송을 탔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손짓발짓 다 해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므아우우웅, 아으아, 꾸웅~ 아으아으. 느앗?! 뚜시뚜시, 꾸아앙~.]

[……네에,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느아악!]

[마, 마이크 가져가시면 안돼요…….]

‘아이고…….’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뉴스를 보던 베르멜로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는…… 분들이세요?”

“……내 제자들.”

“제자가 되게 많으시네요…….”

“학교 선생이니까.”

그 말에 베르멜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에?!”

“뭐 임마. 그쪽 세상은 학교가 없냐?”

“아뇨, 아뇨……. 전혀 상상도 못 한 직업이셔서…….”

“몰라. 시끄러.”

“네에…….”

사람이 넷하고도 반 명, 악마가 하나하고도 반 마리, 그리고 뒤를 쫓아오는 몬스터 한 마리. 또 아기새가 한 마리.

여덟 존재가 느릿하게 도로를 따라 날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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