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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25화 (425/501)

<425화>

425. 회유

“허튼짓하면 피차 피곤해진다.”

상호는 휠체어를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겠지?”

“그럼요.”

베르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린 팔다리는 담요를 둘러 가렸다.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카락은 휠체어 위로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자.”

상호가 휠체어를 밀자 베르멜로가 움찔했다.

“자, 잠깐, 잠깐만요…….”

“왜.”

“바퀴에, 머리카락이…….”

우두두둑

“……갸아아악!”

“아프냐? 미안. 궁금해서.”

“당연히 아프죠! 이건 제 원래 머리카락이라구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대책없이 기르래?”

상호는 혀를 차고는 붉고 긴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베르멜로의 엉덩이 아래로 밀어 넣었다.

방 밖으로 나와 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복도를 걷던 이들이 베르멜로를 보고 멈칫했지만, 곧 그 뒤에 있는 상호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인사만 건네고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베르멜로는 봉인소 중앙을 향해 난 창문을 곁눈질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거대한 통 속에서 뒤섞이고 있는 악마 곤죽과 혈석이 놓여 있었다.

“저건…… 계속 저렇게 놓는 거예요?”

“그럼 어떡해. 죽일 때까진 그래야지.”

상호가 베르멜로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불쌍하냐? 아니면 부러워?”

“아, 아니요. 그냥…….”

베르멜로는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저 꼴을 보니 실감이 났다. 자신은 악마. 이들은 인간. 이들에게 자신은 봉인하고 퇴치해야 할 존재일 뿐.

비밀을 알려주든, 그들의 편에서 싸우든, 인간들은 언젠간 그녀를 죽이려 들 터였다.

‘…….’

상호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베르멜로를 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기껏 산책 나와 놓고서.”

“…….”

“겁먹었냐?”

하지만 베르멜로는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상호는 휠체어를 끌고 건물 밖으로 향했다. 봉인소 안의 바닥은 매끄러웠지만 바깥은 휠체어를 끌기엔 영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비포장도로 수준이 아니라 그냥 맨땅, 자갈과 잡초가 아무렇게나 뒤섞인 울퉁불퉁한 땅이라서.

결국 그는 휠체어에서 베르멜로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쯧, 귀찮게 하는구만…….”

“…….”

그의 품에 안긴 베르멜로의 뺨이 붉어졌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품에 안겨 산책을 하는데, 어딘가에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베르멜로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무슨 소리예요?”

상호는 말없이 소리의 진원지로 발을 옮겼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 숲속의 너른 공터에서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베르멜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 사이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곰을 닮은 괴물이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꾸웅아~. 이거 봐, 이거~.”

“꾸어엉.”

“하이고, 그놈의 낚싯대 좀 그만 흔들어라. 꾸웅이는 치고받고 싸우는 걸 좋아한디.”

“야, 나도 줘봐. 함 해보게.”

“태화는 안돼!”

“그럼 내가 해볼래.”

“세희는 돼!”

“이 씨X랄뇬이…….”

머리를 길게 땋은 아이가 황금색 낚싯대를 잡았다.

베르멜로는 곰을 닮은 괴물이 낚싯대 끝에 달린 물고기를 툭툭 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옆에서 상호가 물었다.

“뭘 그렇게 놀래?”

“저건…….”

“아아, 저거? 저건 낚싯대라는 거야. 미끼를 달아서 바다에 넣으면 물고기가 딸려오지. 그쪽 사람들은 모르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은근슬쩍 세상을 싸잡아서 바보 취급을 하고 있었지만, 베르멜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도 생경해서.

괴물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고.

인간이 괴물을 공격하지 않는.

“……저 애들은 누구예요?”

“내 제자들.”

상호는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자연스럽게, 자랑스러운 웃음을 짓는 부모처럼.

“두 명은 너도 저번에 봤을 텐데. 기억나?”

“아아, 네. 그런 것 같기도…….”

베르멜로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길게 땋은 아이, 한눈에 봐도 악마의 피가 섞인 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아이와 갈색 피부에 몸이 탄탄한 아이.

다들 아무런 적대감 없이, 괴물에게 장난감을 흔들고, 과일을 따서 내밀고. 팔씨름을 하려 들거나 유술을 걸며 놀고 있었다.

“마, 꾸웅아. 이기 암바라는 기여.”

“꾸우어어엉!”

“야, 꾸웅. 이 버섯 먹어 봐. 독 있냐? 없냐?”

“꾸어어억…….”

“있나보네.”

대화를 잘 들어보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광경 자체에 눈이 팔려버린 베르멜로는 듣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겉모습만 보고 마녀라 부르며 공격하던 이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괴물이라 부르며 두려움에 떨던 이들.

‘…….’

괴물.

악마가 된 후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이자,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게 된 단어.

하지만 눈앞의 아이들은, 그런 단어를 아예 모르는 듯했다.

“……저기, 주인님.”

“응?”

“저 애들은…… 괴물이 뭔지 모르나요?”

“알 만큼 알지.”

“그러면 왜 살려 두는 건가요? 여태 그렇게 싸워왔던 상대들인데…….”

“저 녀석이 우릴 안 공격하잖아.”

상호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그럼 우리도 공격할 이유가 없지. 필요 없는 살생은 할 필요 없으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다 그래요?”

“아니.”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베르멜로를 향했다.

“그렇지만 곧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야.”

“…….”

베르멜로는 이 낯선 세상에서 처음으로 온기를 느꼈다. 따스함, 포근함, 피부에 와 닿는 허공의 촉감.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는 준비됐어요.”

상호는 베르멜로를 흘끗했다.

“배신인가?”

“네.”

베르멜로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 배신이에요.”

이 세상을 위해서라면, 싸워볼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 * *

“……그러니까.”

상호는 마주 앉은 베르멜로를 바라보았다.

둘의 사이에 놓인 탁자에는 찻잔과 과자가 놓여 있었다.

“황족이었다?”

“네.”

베르멜로는 붉은 손을 들어 홍차를 홀짝였다. 상호의 허락을 받고 혈마법을 써서 임시로 팔다리를 수복한 것이었다.

꼭 붉은 장갑과 붉은 양말을 신은 것 같았다. 거기다 처음 봤을 때처럼 멀쩡해진 반투명한 핏빛 드레스까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죠.”

“그런데 왜 배신했어?”

“악마들이 황궁까지 침투해 있었어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겪어봤던 탓에 이해가 빨랐다. 상호는 허공섭물로 주전자를 들어 차를 더 따르며 물었다.

“그래서 죽기 싫어 가지고 배신한 거고?”

“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신했길래?”

베르멜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궁내에 나라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있었어요.”

상호는 잠자코 들었다.

“황실 기사단장이었죠. 사람이 아닌 것처럼 강했어요. 마치…… 지금의 주인님처럼. 악마들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하지 못했어요.”

베르멜로의 눈빛에 회한이 비쳤다.

그 모습을 보니 짐작가는 게 하나 있었다. 상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베르멜로를 꿰뚫었다.

“혹시 사랑했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질문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받아 마땅한 질문이었다. 상호는 말없이 진땀을 흘리는 베르멜로를 노려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거야?”

“……제가 살아야 했어요.”

베르멜로는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 먼저 살아야 했어요. 누구나 그렇잖아요……. 저보다 강한 기사들도 툭하면 죽어나가는데, 그 사람이 마신을 죽이러 떠나버리면 저는 누가 지켜주는데요…….”

“누구나 그렇진 않아.”

상호는 예경의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쨌든 그래. 이해는 할 수 있어. 그때의 네 선택을 지금 내가 따지고 들 순 없지. 그래서, 어떻게 그이를 죽였는데?”

“독으로…….”

베르멜로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독으로요.”

“좀 더 자세히 말해봐.”

“그건…….”

“부끄러운 줄은 아는가 보네?”

“……네.”

베르멜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상호는 그런 베르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심이 있긴 하지만, 제 보신을 위해서라면 양심 따위 얼마든지 저버릴 수 있는 인간.

신념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리주보다도 되먹지 못한 족속.

그러나 그런 인간이 세상엔 더 많았다.

“벨.”

“……네.”

“누구나 잘못은 한다.”

베르멜로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상호를 바라보았다가, 무섭게 치켜뜬 고리눈을 마주하고는 움찔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잘못을 두 번 세 번 하면 그때부터 X발놈인 거지. 넌 이미 한 번 실수를 했어. 그것도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상호는 베르멜로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또 그럴 거냐?”

“……아뇨.”

“내가 널 믿어도 되겠어? 사랑하는 사람까지 제일 비겁한 방식으로 죽여버린 너를. 내가 믿어도 돼?”

그는 양손으로 베르멜로의 얼굴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이.

“네 입으로 말해. 날 믿어달라고. 그럼 이 순간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널 믿을게. 절대 의심하지 않을 거야. 약속한다.”

“…….”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선이 떨리고, 손이 떨리고. 심장이 떨리기라도 하는지 맥박이 뛰는 게 피부 위로 보일 지경이었다. 붉고 반투명한 드레스 속, 하얗고 가느다란 몸의 중심에서, 솟구친 열기가 얼굴에, 상호의 두 손 사이에 몰려들었다.

이윽고 붉은 입술이 열렸다.

“……믿으세요.”

“그래.”

상호는 그녀의 얼굴을 놓았다.

“그럼 이제 넌 우리 편인 거지?”

“네.”

“나랑 같이 마신과 싸울 거지?”

“……네.”

대답이 느렸던 건 공포 때문이리라. 그는 베르멜로의 손을 잡았다.

“이것 하난 알아둬. 난 널 승산 없는 싸움에 버리는 장기말로 써먹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내가 너보고 싸워 달라고 할 때는, 무조건 승산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엔 무조건 내가 같이 있을 거고. 알았어?”

“……네.”

목이 메는지, 베르멜로는 똑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럴게요…….”

“내가 지금 제일 궁금한 건 두 개야.”

상호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베르멜로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하나는 마신이 지금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하나는 마신의 약점이 따로 있는지. 그 외에도 물어볼 게 많지만, 일단은 그 두 개부터 당장 들어봐야겠어. 대답해줄 수 있지?”

“네.”

베르멜로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망설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신은 지금 회복 중이에요.”

“그건 알아. 근데 좀 이상한 게 있어.”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엄지로 바깥을 가리켰다.

“지금 저기 혈석에 봉인된 놈도 나랑 몇 번씩 싸웠단 말야. 근데 저놈은 엄청 쉽게 회복해서 돌아오더라고. 근데 마신이란 놈은 왜 이렇게 느린 거야?”

“그, 그건……?”

베르멜로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신의 몸이 더 복잡……해서? 자, 잘은 몰라요. 정확히는…….”

“……그 새끼.”

순간 상호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사실 악마 아닌 거 아냐?”

“네? 그, 그건 아니에요. 악마의 기운은 분명 느껴져요. 적어도 악마들끼리는 알아요…….”

“반푼이 악마일지도 모르지. 너처럼 인간 태생이라든가.”

“네에……?!”

베르멜로가 입을 떡 벌렸다.

“그, 그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마신이 인간 태생은…… 아닐 것 같아요…….”

“뭐 아닐 수도 있고. 나도 악마가 아니니 정확히는 모르지. 그냥 되게 이상하다는 거야. 명색이 신이라는 새끼가 쫄따구만도 못해서 처박혀만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가 있긴 있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이러면 두 번째 질문도 뻔하구만. 니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안 물어봐도 알겠다. 약점은 모르지?”

“네…….”

“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는 같이 밥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그 말에 베르멜로가 당황했다.

“바, 밥이요……?”

“밥 뭔지 몰라? 아, 니들은 빵밖에 모르냐?”

“아니 그게 아니구…….”

“그럼 뭐?”

“……아니에요.”

“싱겁긴.”

상호는 베르멜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빨리 가자. 배고프다.”

“……네.”

손길에 이끌려가는 베르멜로의 붉은 눈빛 속에는, 조그마한 소망의 꽃망울이 서서히 맺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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