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423. 전향자
“뭐어?”
무릎을 꿇고 양손을 든 태화가 눈을 부릅떴다.
“실습 때 봤던 녀석이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넌 벌이나 똑바로 서.”
“치이…….”
세희는 핀잔을 날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지윤이 통나무에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왜 놔준 거야?”
곰 몬스터는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쫓겨난 뒤였다.
“그 녀석이 친구들 몰고 오면 어쩌려구. 무더기로 와 봤자 좀 귀찮은 정도겠지만…… 기껏 지은 집을 버려야 하잖아.”
“……미안타.”
지윤은 입맛을 다셨다.
“근디 그럴 놈은 아닌 것 같드라.”
“무슨 소리야? 너 몬스터랑 말할 줄 알아? 하긴 몬스터럼 먹어대긴 하지. 너 알고보니 몬스터 융합체…….”
“넌 반성하고 있으라고.”
“흥! 칫! 뿡!”
아무것도 안 시키고 감시만 시켰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하면 반성이라도 제대로 하든가. 세희는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기왕 여기서 불 피웠으니까, 식사랑 물은 여기서 해결하고. 집은 다른 곳에 가서 새로 짓자. 그놈이 또 올지도 모르니까.”
* * *
그래서 물을 끓여 마시고, 잡은 토끼를 구워 먹고. 다른 산에 가서 뚝딱뚝딱 집을 지어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
모닥불 옆에 지윤과 곰 몬스터가 앉아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나…….’
세희는 눈을 비볐다.
그렇지만 눈앞의 풍경은 그대로. 코에 뿔이 달리고 팔이 긴, 근육질의 곰 같은 회색 몬스터가 지윤의 곁에 앉아 있었다.
“……지윤.”
세희가 부르자 지윤이 세희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 인났나.”
“뭐해?”
“임마가 찾아와가꼬. 잠깐 놀아줬데이.”
곰 몬스터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것까진 알겠는데 왜 저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건가. 세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조심해. 함정일지도 몰라.”
“에이, 아이다. 그럴기면 이 짜슥이 머하러 혼자서 다시 왔겠노.”
“속임수는 상대가 모르니까 속임수인 거야. 계속 경계해.”
“에이…….”
지윤이 곰 몬스터의 등짝을 찰싹 후렸다. 곰 몬스터는 움찔하기만 할 뿐 특별히 공격성을 드러내진 않았다.
“이 짜슥 그래 똑똑해뵈진 않는디.”
“악마가 들었을 수도 있지.”
“그라믄 태화가 알았겠제. 그리고 이 짜슥 내가 저번에 본 놈이라. 그때도 이래 멍청했다.”
“……알아서 해. 방심하진 말고.”
그때 곰 몬스터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어딘가를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세희는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잡았다.
“뭘 더 데려올지 몰라.”
그러자 지윤이 세희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에이, 함만 더 믿어 보자. 응? 내 함만 더 믿어 도.”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니까? 알잖아.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너는 쟬 보내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아직 위험허지도 않은디 죽이믄 그기 헌터가. 도살자만도 못한 기다. 백정은 묵으려고 죽이고 망나니는 죄 지었응게 죽이는디 저놈이 한 기 머가 있다꼬 죽일라카노. 함 살리주라.”
“…….”
세희는 검을 내렸다.
“널 믿고 내버려두는 거야.”
“고맙디.”
지윤은 씩 웃고 세희의 팔을 놓았다.
저 멀리 달려간 곰 몬스터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지윤과 세희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어딘가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세희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뭐 하는 놈이람…….’
* * *
“꾸어엉.”
“꾸아앙~.”
“꾸어엉?”
“꾸앙꾸앙~.”
나빛이 헤헤 웃으며 황금색 낚싯대를 흔들었다.
낚싯대의 끝에는 황금색 모빌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달 모양, 별 모양, 물고기 모양 등의 것들이. 곰 몬스터는 그걸 툭툭 건드리며 노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중얼거렸다.
“저건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곰 아냐?”
“…….”
세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어딘가로 사라졌던 곰 몬스터는 점심이 되자 입가에 피를 묻히고 나타났다. 아마 배를 채우러 갔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저렇게 앉아서 나빛과 놀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적대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건 순전히 지윤이 강하기 때문. 지윤이 저 몬스터보다 약했다면 당연히 잡아먹혔을 터였다.
인간을 특별히 적대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세희는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나빛이 모빌을 흔들며 웃었다.
“꾸앙아~.”
“니가 이름을 지으믄 우짜노. 내가 데려왔는디.”
“어, 그럼…… 뭐라고 불러야 돼?”
“곰잉께 곰 웅짜 써가꼬…… 오지웅이.”
“지웅아~. 근데 이건 지윤이 너랑 너무 헷갈리는데. 꾸웅이 어때? 꾸웅아~.”
“꾸어엉.”
“앗! 대답한다!”
“오꾸웅이가?”
세희는 이마를 짚었다. 친구들이 저러는 꼴을 보니 짚이는 게 있어서.
“너희……, 설마 걔 데려가서 키우자고 할 건 아니지?”
그 말에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돼?”
“…….”
어디서부터 어떻게 태클을 걸고 설명해야 할까. 세희는 갑자기 상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몬스터잖아.”
“그치만 사람이랑 잘 지내는걸…….”
“어쨌든 다른 사람들한텐 몬스터야. 그리고 쟤를 어디서 먹이고 재울 건데?”
“교실!”
“…….”
상호가 들었다면 눈물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교실이 동물원이냐. 교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 상호가 나빛에게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지는 않겠지만.
세희의 입에서 상호와 똑같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나빛. 잘 들어.”
“응.”
“이 녀석 몸무게가 1톤이 넘을 거야.”
곰 몬스터의 키는 불곰만했다. 대략 3미터 정도. 게다가 일반적인 곰보다 팔도 길고, 어깨도 크고, 근육질이고, 옆으로도 앞뒤로도 훨씬 두꺼웠다.
“1톤이면 사람 몇 명이야?”
“몰라…….”
“우리 기준으로 20명이야. 우리보다 약간 찐 여자가 20명이라고. 아니 그것보다 훨씬 많이 나갈 거야. 30명이라고 하자. 너 하루에 고기 얼마나 먹어?”
“몰라…….”
“한 근이면 배부르게 먹겠지? 너 배고프면 화나지? 쟤를 화 안 나게 배불리려면 하루에 아무리 못해도 30근은 필요하겠지? 돼지고기 30근이면 제일 싼 걸로 얼마야?”
“몰라…….”
“도매로 사믄 싸디. 한 근에 5천원.”
“……그래도 15만원이야. 하루에 15만원이라고. 한 달이면 450만원이야. 너희 얘 밥값 감당할 수 있어?”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했다.
“그거 많이 드는 거야……?”
순간 세희는 눈깔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너는 수행원 아저씨들까지 있는 집이라 모르겠지만, 애완동물한테 한 달에 450이 들어간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기절해. 솔직히 너희 아버지도 깜짝 놀라실걸?”
“그치만 사료를 좋아할지도 모르구…….”
“……알아서 해.”
세희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너희 맘대로 해. 난 모르는 일이야. 난 분명히 경고했어. 선생님한테 무슨 소리를 듣든 내 탓하지 마.”
“괜찮아~.”
나빛이 밝게 웃었다.
“선생님도 꾸웅이 보면 좋아하실 거야~.”
“……쓰러지시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그때 갑자기 곰 몬스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허둥대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집을 부풀렸다. 털을 바짝 세우고, 가슴에 바람을 넣고.
무언가 위험을 감지한 것 같았다.
‘뭐지?’
세희가 의문을 품는 찰나, 곰 몬스터가 아이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크르르…….”
“머꼬.”
지윤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미칬나. 꾸웅이 니 와 이러는데. 또 한 판 뜨자꼬?”
“도망치라는 거 아냐?”
“응?”
아이들이 돌아보자 태화가 말을 이었다.
“꼴이 딱 그런데. 도망치라고. 봐봐, 공격을 안 하잖아.”
“그러게…….”
나빛이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몬스터가 오는 걸 알려주려는가봐. 걔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연기를 봤겠지. 냄새를 맡았거나. 얘가 우릴 찾아온 것처럼.”
세희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태화가 하늘에 두둥실 떠 있었다.
“보여?”
“보이는데…….”
태화는 먼 곳을 바라보며 입맛을 씁 다셨다.
“좀…… 많네.”
“악마는?”
“하나도 안 느껴지는데.”
“그럼 됐어.”
세희는 검을 뽑았다.
“오는 대로 죽이면 돼.”
“꾸웅아, 걱정 마~. 우리 꽤 강하거든~.”
“꾸어엉……!”
“무서우면 엎드려 있어~.”
나빛의 주변에 수십 개의 성창이 나타났다.
“사람을 해치려고 오는 애들은 봐주지 않으니까~.”
“가자.”
아이들은 태화를 필두로 해서 흙먼지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곰 몬스터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쩔쩔매다가, 아이들보다 한참 느린 발로 최대한 빨리 뛰어 아이들의 뒤를 쫓았다.
“꾸어엉…….”
굵으면서도 가냘픈 울음소리가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 * *
“X빱이네에~.”
머리 대신 수십 다발의 촉수가 달린 거대한 코끼리 몬스터의 위.
팔짱을 낀 태화가 콧대를 높이며 거들먹거렸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도망치라고 한 거야?”
“네가 쓰러뜨린 것도 아니잖아.”
세희는 핀잔을 날리고 칼에 묻은 피를 털었다.
“네가 처리한 건 잔챙이들이니까 잔챙이들이나 밟고 있어. 괜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똥폼 잡지 말고.”
“내가 제일 많이 죽였거든? 1등은 원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거야.”
“이츠키가 그랬는데, 바보는 높은 곳을 좋아한대.”
“흥.”
“너거는 지치지도 않나. 고마 싸워라. 에이, 피 다 묻어뿟네…….”
지윤은 옷을 내려다보며 짜증을 내다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는 꾸웅을 발견했다.
곰의 얼굴이었지만, 얼이 빠졌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떡 벌어져 다물지 못하는 입 때문에.
“아이고, 꾸웅이 놀랐나. 괘안타 괘안타. 니는 안 쥑인데이.”
“……꾸어엉.”
“괘안데이~.”
아이들은 꾸웅을 억지로 돌려세우고 등을 토닥였다.
“꾸웅아, 쟤들은 나쁜 애들이라 어쩔 수 없이 죽인 거야. 꾸웅이는 나쁜 몬스터 되면 안 돼.”
“꾸웅이 너 운 좋다. 오지윤 아니면 넌 진작에 뒤졌어.”
“아이, 찝찝해 죽겄구마……. 멱이나 함 감으까?”
“가자~.”
경쾌하게 걷는 아이들의 뒤를, 꾸웅은 잔뜩 쪼그라든 채 조심조심 따라갔다.
* * *
‘잘 지냈겠지?’
상호는 쏜살같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땅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을 야생에 던진 지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번에 아이들을 던져놓은 곳은 지난번보다 더 깊은 곳, 아르게스 쪽. 그의 눈이 아이들의 흔적을 찾아 숲을 샅샅이 뒤졌다.
‘이쯤에 냇가가 있지 않았던가…….’
오랜 옛날이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야영지로 제일 많이 이용했던 냇가.
물소리를 따라 냇가로 찾아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맞군.’
굳이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그는 냇가에 착지해 숨을 깊게 들이켰다.
“얘들아!”
산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곧 조금 먼 숲속에서 풀과 나뭇가지를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쌤예~.”
“쌤! 쌤!”
“얘들…….”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던 상호의 발이 우뚝 멈췄다.
“……아?”
의문 가득한 목소리.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꼬질꼬질했다. 흙먼지가 달라붙은 얼굴, 피가 말라붙은 옷. 세수도 세탁도 제대로 하지 못해 상거지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당황한 게 아니었다.
“……얘들아?”
나빛이 환하게 웃었다.
“네!”
“뒤에 그건…….”
“꾸웅이예요!”
“…….”
상호는 아이들 뒤에 뻘쭘하게 서 있는 곰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꾸웅이라니. 벌써 이름을 붙인 걸까.
그렇다는 말은.
“데려갈…… 거니?”
지윤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예.”
“키우려고?”
“예.”
“…….”
제발 도와다오, 상호는 그런 뜻을 담아 간절한 눈빛으로 세희를 돌아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
“응……?”
세희가 한숨을 푹 쉬고 입맛을 다셨다.
“데려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
상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님!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또 와 그러십니꺼. 지랑 나빛이가 알아서 키울 깁니더. 걱정하지 마이소.”
“얘들아, 나 너무 어지러워…….”
“그러고보니 쌤. 웅담이 그렇게 몸에 좋다던데…… 악!”
“꾸꾸야! 쪼아!”
“아이씨, 이 새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어! 악! 악!”
“뺙.”
“꾸어엉…….”
사람이 넷하고도 반 명, 악마가 반 마리. 그냥 동물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존재들이 두 마리.
상호는 그 사이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교실이 동물원이냐…….’
그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빛과 지윤은 꾸웅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옆구리를 툭툭 두들기기도 하면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