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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22화 (422/501)

<422화>

422. 배신자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차가운 방.

푹신한 이불이 깔려 있긴 하지만,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사지가 잘린 여인은 약간 눅눅한 이불보에 붉은 머리카락을 펼친 채로 그저 누워 있었다.

별안간 방의 문이 열렸다.

“나 왔다.”

“……콜록!”

뭘 먹고 있지도 않았던 베르멜로는 제 침에 사레가 들려 버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왜 죽으려고 해. 죽지도 않는 게.”

상호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베르멜로가 살던 세상의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번듯한 네모 상자였다. 다만 베르멜로도 이제는 그게 대충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는 알고 있었다.

종이를 두껍게 만들어 무언가를 담는 상자.

“먹으라고 사왔다.”

상호는 베르멜로의 앞에 쪼그려 앉아 케이크를 꺼냈다.

“꼴이 그래서 먹지도 못하겠네.”

보이지 않는 힘이 케이크를 조금 떼어 베르멜로의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한 입 먹자마자 단맛의 황홀감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맛있냐?”

“네.”

“너희 세상엔 이런 거 없지?”

“……아뇨.”

상호의 고개가 기웃했다.

“있어?”

“네.”

베르멜로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인간 시절엔…… 있었죠.”

“그래?”

상호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러고보니 너 원래 인간이었댔지?”

“네.”

“악마가 된 인간은 너 하나야?”

“네.”

“배신했나 보네?”

베르멜로의 어깨가 움찔했다.

“……네.”

“그래서 다른 녀석들이 자꾸 널 의심했던 거였구만. 이미 전적이 있으니까.”

“그놈들은 그냥 인간을 안 믿는 거예요.”

“뭐 어쨌든 결국 이렇게 배신을 했으니까 결국 그놈들이 맞았던 거네.”

“…….”

“꽤 중요한 일이었나 봐?”

혼자서 세상을 말아먹을 만큼.

상호는 베르멜로에게 케이크를 먹이며 안부라도 묻는 것처럼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 편에 계속 붙어 있지 그랬어. 그러면 사지 멀쩡하게 즐기면서 살았을 거 아니야.”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악마들이 너무 강해서…….”

“네가 배신하지 않았으면 못 이겼을 거 아냐? 그래서 너한테 나름대로 보상을 준 거 아냐? 이렇게 악마로 만들어서.”

“어느 쪽이 유리한지랑 제가 죽고 사는 건 상관이 없잖아요…….”

베르멜로가 시선을 떨궜다.

“죽여도 안 죽는 놈들 상대로 뭘 어떻게 해요……. 악마를 상대로 버틸 수는 있겠지만, 이길 수도 없잖아요……. 그럼 저 같은 평범한 사람만 죽어나가는 거예요…….”

“평범한 사람이었어? 배신도 능력이 있어야 할 거 아냐. 평범한 사람이 뭘 했길래 악마가 갑자기 이긴 건데?”

“……그건 말 못 해요.”

붉은 눈동자에는 초조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상호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일말의 양심을 찾아냈다.

“후회하고 있구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오늘은 취조를 하러 온 건 아니야. 더 캐묻지는 않을게. 그래도 네가 내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

상호는 케이크 박스를 흔들었다. 네 욕구와 양심이 한곳을 향하고 있지 않느냐, 라는 뜻을 담아서.

“배신이 지쳤다면 언제든지 말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말없이 케이크만 먹였다.

베르멜로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 다가오는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

달고, 부드럽다.

그 감각이 그녀가 인간 귀족이었던 시절에 맛보았던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지쳤다……라.’

베르멜로는 붉은 눈을 감고 상호가 내민 케이크를 먹었다.

* * *

“태생이 사람이라더니.”

상호는 커피를 홀짝였다.

“사람의 감정이 많이 남았는가봐.”

“그치만 툭하면 배신하는 녀석이잖아.”

탁자를 두고 마주 앉은 민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믿기는 좀 위험하지 않을까?”

“안 믿어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잖아. 저 녀석한텐 말 안 했지만…… 저 녀석이 안 도와주면 우리 못 이겨.”

“더 필요한 게 있어? 쟤는 악마 죽이는 데에는 쓸모가 없다며.”

악마의 몸 어딘가에 있는 구멍.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악마의 심장. 하지만 베르멜로는 인간 태생이라 그 구멍을 볼 수 없다.

상호는 베르멜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알면 알수록 좋으니까. 당장 그 여섯 따까리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저기 갇힌 녀석이 욕망. 섞어서 봉인한 놈들이 야성과 신비. 아직 본체를 만나지 못한 놈들이 지배, 불사, 그리고 베르멜로도 모른다는 한 놈.

상호는 지배의 악마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성연의 몸을 차지해서 상호와 대화를 나눴던 악마.

“지금 사람들 사이에 들어온 악마 놈들은 그 지배의 악마라는 녀석이 부리는 놈들 같더라고. 그럼 그 지배의 악마를 처리하면 숨어드는 악마 놈들도 없어지지 않을까?”

“모르는 일이지.”

민정은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치만 모르는 일이니까…… 저 녀석이 필요하다는 건 맞는 말 같네. 네 말이 맞아.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우리를 도와줄 확률이 제일 높은 건 저 녀석이고. 그럼 저 녀석한테 걸어봐야겠지.”

“그치.”

상호는 커피를 쭉 들이켜고 입맛을 다셨다.

“저놈들도 우리들도 시간이 필요해. 저놈들은 마신이 회복할 때까지. 우리는 악마의 심장이란 걸 확인하는 방법을 알아낼 때까지…….”

“그렇겠네.”

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도시 쪽은 어때? 악마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며.”

“이젠 좀 괜찮아. 가끔 나오는 녀석들이 있긴 한데…… 우리끼리 다 해결하고 있어.”

“다행이네. 애들은 잘 지내?”

“애들은…….”

상호의 시선이 창가를 향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아마도.”

* * *

“아아아아아악!”

산골짜기에 소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짜증나! 짜증나! 왜 나는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건데! 왜! 왜! 왜!”

“시끄러워.”

세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너만 온 것도 아니잖아. 나랑 나빛이도 와야 해서 온 건데 왜 혼자 불평이야.”

“아아아아악!”

또 야생에 던져진 아이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훨씬 사람이 줄어 있었다. 딱 네 명. 세희, 태화, 나빛, 지윤.

태화는 악마를 감지해야 해서 왔고.

세희는 다혜와 함께 단 둘뿐인 초혼강기 보유자인데, 다혜는 이미 야생에서의 생존을 완전히 익힌 지 오래라 세희가 따라왔고.

나빛은 나디아와 함께 단 둘뿐인 신앙인이지만, 가뜩이나 인원도 적은데 나디아를 보내기에는 너무 위험해서 나빛이 따라왔고.

지윤은 그냥 나머지 아이들 중에서 첫 타자로 따라오게 된 것이었다.

“짜증나! 이걸 이츠키랑 도은율이랑 나디아랑 또 해야 된다고?!”

“글쎄……, 쌤이 허는 말 들어보믄 2학년도 시킬 것 같은디. 내는 모르겄다.”

“아아아아아악!”

“드럽게 시끄럽구마.”

“으잉…….”

나빛이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울상을 지었다.

“모기 너무 많아……. 왜 벌써 모기가 있는 거야…….”

“산모기가 진국이제.”

“근데 우리 왜 걷고 있는 거야……?”

“쌤이 능력 쓰지 말랬다 아이가.”

지윤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꾸했다.

겨울에 왔을 땐 낙엽과 헐벗은 나무들뿐이었지만, 지금은 5월 말. 땅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무성한 잡초들과 우거진 숲이 아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물부터 찾고, 지낼 데 찾고, 묵을 거 찾아야제. 그기 야생이데이.”

“물은 어딨는데……?”

“낸들 아나. 모르니까 돌아다니제.”

세희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호가 내걸은 조건은 하나. 무공, 마법, 성력은 전투에만 사용할 것.

그러니까 원시적으로 생존하는 법을 익히라는 의미였다.

‘물을 찾으려면…….’

가장 간단한 것은 소리.

세희는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했다.

“아~. 왜 맨날 아침에 말하고 던져놓는 거야! 미리 말해주면 어디 덧나?! 아 진짜, 이제 사탕이라도 챙겨 다녀야지…….”

“……야, 이태화. 좀 조용히 해.”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귀에 닿는 것은 새의 지저귐과 벌레 우는 소리뿐.

내공을 귀에 집중시키면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상호와의 약속을 어길 순 없었다.

세희는 눈을 뜨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좀 더 걸어 보자.”

“뭐야. 못 찾았어? X나 당당하게 말하길래 뭐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걷기나 해.”

아이들은 나무 사이를 터벅터벅 걸었다.

* * *

한참을 걷다 보니 냇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니 그럭저럭 물이 맑았다. 끓여서 먹으면 문제없을 만큼.

냇가 주변에는 물을 마시러 오는 동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냇가 옆에 난 풀숲에서 토끼 한 마리가 폴짝이며 뛰어가자 나빛이 눈을 반짝였다.

“토끼다! 키우자!”

“키우긴 뭘 키우노.”

지윤이 조약돌을 집어 토끼의 뒤통수를 향해 던졌다.

빠악

토끼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토끼야아아아!”

“우리 먼저 묵고 살아야 될 기 아이가.”

“그치만…… 불쌍하잖아…….”

“니는 앞으로 풀떼기만 묵으라잉.”

지윤은 토끼의 귀를 잡고 들어 올렸다.

물은 찾았고, 어쩌다 보니 먹을 것도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숨어서 잠을 잘 만한 곳.

세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에서 떨어진 곳에 만들어야겠지.’

동물들과 몬스터가 돌아다니는데다가, 냇가 주변 고인물엔 모기가 창궐하고 있을 테니. 쾌적하게 자고 싶다면 물가와는 거리를 둬야 했다.

냇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저거 넘어가서 집 만들자.”

“집은 뭘로 만들어?”

“나무로 만들어야지. 빈틈은 진흙 바르고.”

마감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모기들의 소문난 맛집이 될 테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갓 베어낸 나무는 꽤나 습한 물건이고, 거기에 진흙까지 바르면 축축하니 병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될 텐데.

‘불을 피워서 말리면 되려나.’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난다. 그럼 몬스터들이 올 거고.

그렇지만 물을 끓이는 데에도 불이 필요했다. 대충 굶고 땅에서 잘 수는 있겠지만 물은 마셔야 하니.

불을 피우긴 해야 하는데.

‘연기가 덜 나게 하려면 나무를 말려야 하고…….’

나무를 말리려면 불이 필요하다. 기다릴 시간은 많지 않으니.

불, 연기, 물. 집, 땔감, 음식. 세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오는 놈들은 죽인다.’

장기간 생존에 있어서 불은 필수불가결. 피우면 몬스터가 오지만, 안 피우면 죽는다.

그럼 당연히 피워야 하는 것이다.

“지윤이랑 내가 나무 베면서 따라갈게. 너흰 먼저 가서 터 보고 있어.”

세희는 검을 뽑아 나무를 베었다.

* * *

그렇게 나무와 진흙으로 지은 집.

세희는 불붙인 나무토막을 집에 바싹 붙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면 마르겠지?”

“불붙는 거 아냐?”

“진흙을 더 발라야 하는 거 아이가?”

“모르겠네…….”

마법의 도움 없이 생존하는 건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세희는 피워놓은 모닥불과 그 옆에 선 태화를 돌아보았다.

“태화 네가 감시 잘 해. 그러라고 아무것도 안 시키는 거야.”

“하고 있거든?”

태화가 콧방귀를 뀌었다.

“넌 맨날 내가 실수하기도 전부터 잔소리하더라. 잔소리는 실수하고 나면 해. 사람 못 믿는다고 티내지 말고.”

“실수하면 죽는데 잔소리를 어떻게 하냐?”

“아 시끄러! 몰라몰라몰라. 악마만 잘 찾으면 될 거 아냐!”

그때 그들의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들이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

아이들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꾸어어엉

웬 곰 같은 몬스터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희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검을 뽑았다.

“너 좀 있다 봐.”

“야, 저게 악마야? 악마 오는지 감시하라매!”

“시끄러. 저거 잡고 나서 얘기…….”

“마! 잠깐, 잠깐!”

“……응?”

뒤를 돌아보니 지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지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곰 몬스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마 저거…… 내가 아는 놈이데이.”

“뭐?”

아이들의 눈도 덩달아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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