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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21화 (421/501)

<421화>

421. 촛불들

다음 날.

상호는 원래대로 돌아온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몸이 이래야지…….’

평소 자신의 근육을 보고 자아도취하는 버릇은 없었지만, 오늘만은 옷 위로도 드러나는 자신의 울룩불룩한 몸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옆에서 자는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알아서 깨겠지.’

시간은 아직 이른 새벽. 학교 갈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그렇지만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에는 적당히 빠른 시간이었다.

그는 이불을 끌어 올려 세희의 귀까지 덮어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먹을 게 뭐가 있나…….’

아이를 키운 지 3년차가 되어가는 주부에게 재료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뚝딱뚝딱 샌드위치를 만든 상호는 두 개는 식탁에, 네 개는 쟁반에 담았다.

그리고 마실 것을 챙겨 창문을 나섰다.

‘애들 방에 몰래 들어가는 건 처음이네…….’

다시는 무단침입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어디로 갔을까. 상호는 일주일 전의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태화의 방 창문을 열었다.

침대에 태화가 자고 있는 게 보였다.

‘잘만 자는구만.’

어제 세희의 몸으로 찾아가서 풀어주지 않았다면 눈에 눈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을 것이다. 상호는 살며시 다가서서 태화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야. 태화야.”

“우웅…….”

“아침 먹어.”

“응?”

빨간 눈동자가 멀뚱히 끔뻑거렸다.

태화는 한참 동안 맹한 눈빛으로 상호를 바라보다가, 상호가 들고 있는 쟁반 위 샌드위치를 살피더니,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주먹을 내질렀다.

“명치!”

“명치강화.”

“버텨? 명치 뿌수기!”

“명치반사.”

“우씨……!”

상호는 가랑이로 날아드는 태화의 주먹을 막아내고 태화의 입에 샌드위치를 물렸다.

“샌드위치.”

“아기씨 으깨기…… 웁!”

“밥이나 먹어.”

샌드위치를 물려주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태화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상호를 흘끔거리더니, 갑자기 입맛이 없어지기라도 한 듯 샌드위치를 입에서 떼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 별로야?”

“쌤.”

“응.”

“어제 왜 그랬어?”

서늘한 눈빛. 혹은 서운한 눈빛.

태화는 그런 눈빛으로 상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번에는 쌤이 나한테 했잖아.”

“그랬지.”

“근데 나는 쌤한테 하면 안 돼?”

“아니.”

“그럼 왜 그랬어?”

그야 그가 한 짓이 아니라 세희가 한 일이지만. 상호는 씩 웃었다.

“좀 더 분위기 좋을 때 하고 싶어서 그랬지.”

“어제 완전 분위기 좋았는데?”

태화가 눈을 깜작였다.

“쌤이 완전 그윽하게 나 보고 있었잖아. 손도 잡고 있었고.”

“……그랬나?”

그것까지 알 방법은 없다. 당황해서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아니 나는, 딱히 별생각 없었는데 네가 갑자기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밀친 거야.”

“개쎄게 쳤잖아. 입술.”

“……미안해.”

그는 태화의 얼굴을 붙들고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네가 싫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야. 너도 알잖아? 아직도 의심이 들어?”

“쌤이 쳐놓구선…….”

태화는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몰라. 나 삐졌어. 꼴랑 샌드위치 두 개로 풀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응. 세 개 먹어. 난 하나면 된다.”

“아아니이! 저녁에 밥 사줘! 비싼 걸루.”

“그래, 그래.”

둘은 식사를 마치고 등교 준비를 했다.

* * *

드르륵

태화는 열리는 교실 문을 돌아보았다.

문지방 너머, 가방을 메고 칼을 찬 세희가 태화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하이.”

교실에는 아무도 없고 둘뿐.

세희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고, 태화는 어색하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세희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와 있어?”

“쌤이 깨웠어.”

침묵.

역시 어제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태화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세희의 허리를 검지로 슬쩍 찔렀다.

찰싹

평소처럼 손이 날아왔다.

‘돌아왔네.’

태화는 얼얼한 손등을 문지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는 매점에서 밥도 사주고 케이크도 사주고 착하더니.

오늘은 꼭, 어제 자신의 입을 때렸던 상호와 바뀌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망상일 뿐. 태화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번엔 세희가 태화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왜?”

“너 점심에 매점 갈 거지?”

“돈가스 나온대서 돈가스만 먹고 매점 갈라고. 근데 왜?”

“나도 같이 가. 사줄게.”

“뭐?”

태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니가? 매점을?”

세희의 눈이 샐쭉해졌다.

“뭐. 꼬우면 가지 말든가.”

“아니, 니가? 매점을 이틀 연속으로 가서? 이틀 연속으로 사준다고?”

“됐어, 꺼져. 사준대도 X랄이야.”

“누가 싫대?”

“고마워하지도 않잖아, 넌.”

“X나게 고마운데?”

태화는 코웃음을 쳤다.

“얼마까지 사줄 건데? 제한 있어?”

“5천 원.”

“야, 5천원을 누구 코에 붙여? 만원은 돼야 할 거 아냐!”

“됐어, 5천 원이야.”

“쫌생이 새끼…….”

“꼬우면 얻어먹질 말라니까?”

“뉘예뉘예~. 알겠쯉니뒈~.”

다른 아이들이 반에 들어올 때까지, 둘은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입씨름을 했다.

* * *

“……야.”

“뭐.”

“이거 몰카지.”

태화의 손에는 방금 산 초코우유와 빵, 컵라면, 삼각김밥이 무더기로 들려 있었다. 거기다 후식으로 먹을 젤리와 반에 들고 갈 과자까지.

태화는 세희가 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 오늘 이상해…….”

“뭐가.”

“어떻게 사람이 돈까스를 양보할 수가 있어?”

“나 원래 딱히 안 좋아하는데, 돈까스.”

“사람 맞아? 악마 아냐?”

“좋을 대로 생각해.”

세희는 핀잔을 날리고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빨리 먹기나 해. 그거 다 먹으려면 한참 걸리겠네.”

“이상해…….”

“또 뭐가.”

“5천원을 넘었는데도 그냥 내주고 있잖아!”

태화의 몸이 덜덜 떨렸다.

“너 누구야! 이 괴물! 내 친구 몸에서 당장 나가!”

“닥치고 처먹기나 해. 빨리 안 처먹으면 나 그냥 간다.”

“아, 잠깐만. 기다려……. 혼자 먹으면 개찐따같단 말이야. 가지 마…….”

“너 개찐따 맞잖아.”

세희가 몸을 돌리자 태화는 황급히 세희의 손을 잡았다.

“아 진짜! 가지 말라고! 아아, 알았어! 닥치고 처먹을게…….”

“진작에 그럴 것이지. 빨리 먹어.”

“웅…….”

둘은 매점 구석에 나란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 * *

마지막 교시의 직후. 종례를 앞둔 시간.

지윤이 무언가가 가득 든 손가방을 책상에 쿵 내려놓았다.

“스을 준비해야제.”

어제 말했던 스승의 날 이벤트.

아이들의 눈에 기대감이 비쳤다.

“편지는 다 썼제?”

“……편지?”

세희가 눈을 끔뻑였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그러자 어제 마트에 같이 갔던 3학년 아이들이 어이없어했다. 이츠키만 빼고.

“응? 세희 편지 안 썼어……?”

“므아아앙?”

“니 어제 같이 있던 거 아이가? 와 모르는데?”

“너 어디 아파?”

은율이 세희의 이마를 짚었다.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는 세희에게 이츠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전해주는 걸 깜빡했나 봅니다.”

“아이다, 마. 야 어제 우덜이랑 같이 있었는디 뭔 소릴 하노.”

“세희는 귓속에서 전해주는 사람이 또 있나 봅니다.”

“그기 무신…….”

지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쨌든 까먹었다 카니 우짤 수 읎고. 우덜이라도 준비해야제. 마, 시작하제이.”

“응.”

아이들이 저마다의 가방을 열었다.

* * *

“선생님! 선생님!”

교무실로 뛰어 들어온 나빛이 상호를 향해 달려왔다. 혁구처럼 양손을 마구 파닥이면서.

상호는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빛을 돌아보았다.

“응?”

“큰일났어요! 큰일!”

“무슨 일인데?”

“큰일!”

“차분히 말해 봐.”

물론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를 낚으려고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빛이 지금 필사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것을.

그의 태연한 반응이 예상외였을까. 나빛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소리쳤다.

“나디아랑 다혜 언니랑 싸워요!”

그 둘은 애초에 말이 안 통할 텐데. 싸움도 성립이 안 되고. 만약 그 둘이 정말로 싸운다면 5초도 지나지 않아 나디아의 두 소매가 묶이고 양말로 발목이 묶일 것이다.

그렇지만 상호는 속은 척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가 아니지, 뭐? 싸운다고?”

“네! 빨리, 빨리 오세요!”

“그래그래, 얼른 가자.”

둘은 교무실을 나와 교실로 달려갔다.

멀리서부터도 교실의 불이 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라? 왜 불이 꺼져 있을까?”

“얼른 들어가세요!”

나빛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바닥에는 촛불이 하트 모양으로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열네 명의 아이들.

아이들이 촛불 하트의 가운데를 향해 허리를 꾸벅이며 손을 싹싹 비볐다.

“아수라 발발타…….”

“마음아 모여라…… 얍!”

그러자 검은 연기가 펑 하고 터지더니, 촛불 하트 한가운데에 편지 한 무더기가 나타났다.

상호의 곁에서 나빛이 폴짝 뛰었다.

“우와! 마음이 편지가 됐어요!”

“…….”

상호는 그저 웃었다.

“……그러게. 편지네.”

“얼른 뜯어 보세요!”

“아니, 천천히 읽고 싶은걸…….”

그는 하트 안으로 들어가 편지들을 집었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벌리고 그를 포위했다. 딱 두 명, 이서와 가은만 빼고.

그러나 그 둘도 나빛의 손에 이끌려 상호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왔다.

“헤헤, 선생님~.”

“으응.”

“안아주세요~.”

상호는 몰려든 아이들을 팔을 벌려서 품었다. 이서와 가은 때문에 약간 엉거주춤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래, 다들 안 싸우고 건강하게 있어줘서 고맙고…….”

“뽀뽀도 해주세요~.”

“……그건 너무 허들이 높네.”

그는 씩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도 준비한 거 있어.”

“네?”

“정말요?”

“응. 너희들 책상 밑에 있어.”

“책상?”

아이들은 치워놨던 책상으로 달려가 그 밑을 보았다.

“어? 편지다.”

“에헤이, 누가 편지 썼다고 알려줬구마. 의리 없는 짜슥…….”

“아냐, 아냐. 선생님이 알아낸 거야.”

상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서 쉬면서 읽어봐. 한명 한명 다 쓰느라 고생 좀 했어. 설마 읽지도 않고 버리진 않을 거지?”

그의 눈빛을 받은 가은이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은율이 작게 중얼거렸다.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선물을 각자 따로 사자니 별로고, 돈을 걷자니 그건 선생님이 더 싫어할 것 같고…… 해서 이번엔 못 샀고, 졸업하면 알아서 선물해 드리기로 했어요.”

그 말이 맞았다.

선물을 각자 샀다면 아이들 스스로가 서로 비교하면서 괜히 부끄러워하거나 서운해했을 것이고, 돈을 걷었다면 그가 3학년 아이들을 혼냈을 것이다. 가은과 이서가 자발적으로 돈을 냈을 리 없으니까.

어차피 필요한 물건 따윈 없다.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고마워. 고맙고…….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어. 선생님이 너희한테 바라는 건 하나야. 3학년들은 무사히 졸업했으면 좋겠고, 2학년들은 내년까지 건강했으면 좋겠다. 다들 그래 줄 거지?”

“네.”

“믿는다.”

상호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품에 깊숙하게.

“나도 무사하도록 노력할 테니까…… 너희는 꼭, 건강하게 자라 줘.”

“네.”

“네!”

촛불처럼 밝은 대답이 교실을 울렸다.

교실을 밝히는 열다섯 촛불들. 그의 세상을, 그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이 작고 소중한 촛불들. 상호는 가슴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이들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빌었다. 이 촛불들이 부디 꺼지지 않기를. 그의 모든 것을 바쳐 이 촛불들을 지켜낼 수 있게 되기를.

언제나 촛불만을 향했던 그 사람처럼.

* * *

그날 저녁. 어느 고급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앞.

태화가 울먹이며 상호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말도 안 돼!”

“뭐가 임마.”

“이거 몰카지! 쌤이 나한테 이런 비싼 밥 사줄 리가 없잖아!”

“니가 비싼 거 사달라며…….”

“이상해! 쌤도 이상하고 천세희도 이상해! 오늘 무슨 날이야?! 둘이 나한테 왜 그래?! 왜 나한테만 몰카해?!”

“아니래도…….”

“안 속아아아!”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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