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419. 작은 비틀림
“아~.”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부채질을 했다.
“야, 천세희.”
“응.”
“슬슬 더워지는 것 같지 않냐?”
“그러게.”
세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은 아이들의 복장은 대부분 춘추복. 하복을 입은 아이는 더위를 잘 타는 태화와 땀이 잘 나는 지윤 둘뿐.
날이 조금 덥긴 했지만, 세희의 몸은 열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달라고?”
“아니? 아닌데? 넌 내가 맨날 사달라고만 하는 거지새끼로 보이냐? 참나. 웃기셔.”
“찔려서 그러는 거지?”
“아닌데? 아닌데?”
태화는 혀를 차고는 윗옷 단추를 풀었다.
“아, 오늘 왤케 덥냐. 걍 벗고 싶은데 쌤이 또 뭐라 하겠지? ……뭐야, 너 왜 그래?”
“응?”
“왜 놀라는데?”
저도 모르게 움찔해 버렸다. 세희, 아니 상희는 고개를 돌려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간만에 세희랑 둘이서만 잤더니 또 영혼이 엇갈렸다.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태화의 눈길을 피하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뭘 놀라……. 그냥 딸꾹질한 거야.”
“얘 또 이상해졌는데.”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웃했다.
“너 왜 자꾸 맛이 가는 거야? 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졸려서 그래, 졸려서……. 피곤해서 힘이 없는 거라고.”
“아니 너는 피곤하면 짜증낸다니까?”
“왜 니가 날 정하는데…….”
“뭔가 이상한데……. 야, 손 줘봐.”
갑자기 태화가 손을 뻗어 상희의 손을 낚아채더니 가슴에 턱 하고 올렸다. 상희는 기겁해서 손을 잡아뺐다.
“야!”
“야는 무슨 야야. 얘 진짜 이상하네. 단추 풀었다고 놀라고 가슴 만졌다고 놀라고……. 니 뭐 새로운 취향에 눈을 떴냐?”
“무슨…….”
무어라 따지려던 상희의 입이 꾹 닫혔다. 이츠키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이츠키는 그의 상태를 알고 있다. 인연의 실의 개수를 통해. 상희는 깜짝 놀라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태화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바보같은 짓 좀 하지 마, 진짜.”
“참나, 지가 이상해놓고 남탓하는 건 평소랑 똑같네.”
콧방귀를 뀌는 태화의 곁에서 나빛이 끼어들었다.
“얘들아, 얘들아.”
“응?”
“우리 내일 스승의 날 어떻게 해?”
상희의 몸이 또 움찔했다.
“닌 또 왜 그래? 또 딸꾹질이야?”
“어.”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그래도 맨날 아이들에게 당하기만 했으니, 한 번쯤은 대비를 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는 잠자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쌤헌티 머 해줄 기 있나? 쌤이 머 좋아하노?”
“게임기.”
“그건 태화 네가 쓰려는 거잖아.”
“그럼 니는 뭐 좋은 생각 있냐?”
“선생님은 고양이 좋아해!”
“그거야말로 니가 키우려는 거잖아!”
태화가 나빛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다람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혁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태화는 그 모습을 보고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상희는 태화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딸꾹질이야?”
“뭐래.”
툴툴거리는 태화의 앞자리에서 단비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깜작였다.
“멍, 선물 살 돈은 어떻게 해? 다 같이 모아?”
“우리 협회 일 하고 받은 돈 있으니까. 돈 생각하지 말고 뭐가 좋을지나 생각해 봐.”
“머엉……뭔가 몸에 좋은 거? 선생님 요즘 바쁘셨으니까.”
“보신탕?”
“멍?!”
보다 못한 상희는 태화의 뒤통수를 쳤다.
빠악
“야, 동생들 놀리지 말랬지.”
“악! 아오, 씨……, 염병하네, 니가 쌤이야?!”
“선생님이 할 말을 대신 한 것뿐이야.”
“X바…….”
태화는 꿍얼거리며 뒤통수를 문질렀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 건데? 선물이 별로면 뭐 이벤트라도 하든가.”
“이벤트?”
“교실에 하트 모양으로 촛불 깔고 그 안에 눕는 거지.”
무슨 악마 소환이냐. 상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어. 선생님은 그런 거 싫어해. 그냥 소박하게 편지나 써서 드리면 그걸 제일 좋아하실걸.”
“에이, 뭔 편지야. 쌤 초졸이라 글 잘 못 읽어.”
“…….”
“아~. 뭐 좋은 거 없나아아~.”
태화가 책상에 철푸덕 엎어졌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상호, 정확히는 상호의 몸에 들어간 세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왔다, 얘들아. ……뭐야, 태화. 왜 그러고 있어.”
“쌤!”
태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앞섶을 풀어헤쳐 속나시가 드러난 채로.
“쌤은 뭐 취미 같은 거 없어? 그냥 심심하면 여자랑 놀고 땡이야?”
“뭘 여자랑 놀아, 임마. 헛소리 말고 똑바로 앉아.”
세호의 말투는 제법 상호와 비슷했다. 아니, 사실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상희 본인마저도 그렇게 느낄 만큼.
태화도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는지, 평소처럼 책상을 양손으로 두드리며 세호의 주의를 끌었다.
“쌤, 쌤.”
“뭐.”
“웬일로 단추 잠그라고 안 하네?”
태화가 실쭉 웃었다.
“이제 슬슬 내가 눈에 들어오나 봐? 여자로 보이구 막 그래? 응? 응?”
그러자 세호가 눈을 끔뻑이다가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아니, 니 껌딱지만한 거 봐봤자 별 느낌 없는데.”
교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상희는 덜덜 떨며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이 학생의 신체를 품평하다니.
후진 없는 성희롱에 아이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선…….”
단비가 떠듬거렸다.
“선생님이 나쁜 선생님이 됐어, 멍…….”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몰라…….”
“우리 뭔가 잘못했나봐…….”
아이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세호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슬쩍 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호는 헛기침을 하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교탁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수업이나 하자, 수업이나. 운동장에 있을 테니까 옷 갈아입고 나와.”
“네에…….”
세호가 나가자 아이들이 전투복을 꺼냈다.
상희는 서둘러 화장실로 도망칠 준비를 하면서 태화를 흘끗했다. 설마 세호 때문에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태화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삐죽삐죽, 씰룩씰룩 내밀고 있었다.
“키스한 지 얼마나 됐다고, 씨이…….”
태화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신경질을 부리며 블라우스를 벗고는 마구 구겨진 블라우스를 책상에 내동댕이쳤다.
상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땀을 흘리다가, 옷을 갈아입는 아이들을 피해 교실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또 시작이네…….’
사람이 바뀌면 일이 꼬일 수밖에 없구나. 그는 한숨을 쉬고 화장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야, 천세희.”
“응?”
상희가 뒤를 돌아보자 태화가 엄지로 등 뒤를 가리켰다.
“지갑 챙겨.”
오전 수업이 끝난 후 교실로 돌아와 점심 먹을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또 급식 안 먹고 매점에 가려는구나. 상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밥 먹으러 가야지.”
“할 말 있어서 그래. 빨랑 지갑 들고 따라와. 내가 사줄게.”
“야, 야…….”
태화는 상희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둘은 급식실을 향하는 아이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매점에서는 컵라면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상희는 매점에서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응?’
그러다 구석에서 컵라면을 먹던 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이서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을 했지만, 이미 서로의 눈이 마주친 뒤였다.
‘이서도 밥 잘 안 먹는구나…….’
상희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를 보고 체한 이서가 필사적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보니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든 태화가 뻔뻔한 표정으로 상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줘.”
“……너 돈 많잖아.”
“지갑 놓고 왔어. 사줘.”
“야, 나한텐 챙기라고 했으면서 넌 놓고 온 거야?”
“비밀 하나 알려줄게.”
비밀이라니.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태화가 세희에게 알려줄 비밀이 뭐가 있을까. 애초에 이 둘 사이에 모르는 게 있긴 했나. 상희는 그 비밀에 혹해서 고분고분 지갑을 꺼냈다.
계산을 마친 둘은 정수기 앞으로 향했다.
“그래서.”
상희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으며 물었다.
“무슨 비밀인데?”
“디저트로 빵까지 사주면 말해줄게.”
“…….”
둘은 말없이 식사를 했다.
라면과 삼각김밥을 다 먹고, 국물통에 국물을 버리고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그런 후 상희가 크림빵을 사주자 태화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너 어린이날에 쌤 어디 갔었는지 알아?”
안다.
하지만 진짜 세희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른다. 상희는 세희가 모를 거라고 가정했다.
“모르는데. 왜?”
“나랑 쌤이랑 에버월드 갔었거든.”
태화가 크림빵을 한 입 베어 오물거렸다.
“나랑 쌤이랑, 하나빛이랑 교장선생님이랑 이렇게 넷이서. 졸라 재밌드라. 은호일 때 데리고 갔는데 펭귄옷 입히고 츄러스 사주고, 쌤도 나한테 애교 부리고 엄청 귀여웠어.”
“그래?”
상희는 어깨를 들썩이고 딱히 놀랍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좋았겠네.”
그 이유는 당연히,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러자 태화가 잠시 상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태화는 곧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래서 밤까지 놀다가~, 하나빛이 관람차 타자고 했는데, 쌤이 나한테 둘이서만 타자고 그랬다?”
“…….”
상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다른 의미로 착각한 태화는, 만면에 우쭐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상희에게 속삭였다.
“그랬더니 쌤이 나한테 뭐 했는지 알아?”
“……글쎄.”
“키스했다?”
웃음의 색이 조금 달라졌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웃음에서 혼자만의 웃음으로.
“되게 좋았어. 분위기까지 다.”
“그래.”
상희는 시선을 피하며 태연한 척 대답했다.
“좋았겠네.”
그 말이 태화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태화는 표독한 눈빛으로 상희를 째려보더니 크림빵을 신경질적으로 뜯어먹다가, 남은 비닐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대충 던지고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오늘 쌤 이상하지 않냐?”
“글쎄. 난 별로…….”
“완전 다른 사람 같던데. 평소엔 그래도 나 기분 나쁠 말은 안 했거든? 근데 오늘은…….”
태화의 입이 또 댓발 튀어나왔다. 삐죽삐죽, 씰룩씰룩.
아침에 들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리라. 상희는 손을 들어 태화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선생님이 우리하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데서 짜증나는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가.”
“너도 이상해.”
태화가 상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오늘 왜 화를 안 내냐?”
“그니까 그냥 그런 날도 있는 거라고…….”
“아니, 이상하잖아. 너 왜 내가 쌤이랑 키스했다고 하는데도 반응이 없어? 너한텐 별것도 아니다 이거야? 너 쌤이랑 키스 몇 번 했는데?”
“뭘 몇 번씩이나야……. 한 번밖에 없어.”
“한 번? 진짜?”
“응.”
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새학기 전에 기습적으로 당했던 그 한 번.
‘……아닌가? 더 있나?’
스스로의 기억력에 확신이 들진 않았으나,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태화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상희를 바라보더니.
“……오늘은 귀여우니까 봐준다.”
그러고는 툴툴거리며 문가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태화는 몰랐다. 태화의 주변 사람들은 전부 태화의 꼬리만 보고도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다는 것을.
상희는 태화의 살랑이는 꼬리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좀 풀렸나 보네…….’
내일 원래 몸으로 돌아가서 달래 주면 다 풀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영혼이 바뀐 날. 원래대로 돌아간 후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오늘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공유해야 하는데.
그 말은 곧.
‘내 입으로…….’
태화에게 입을 맞췄고.
태화가 그 사실을 상희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 그의 입으로 세희에게 전해야 했다.
‘……쉽지 않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태화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