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418. 무단침입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이 지나자 하솔이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해련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뒤를 이었다.
쥐죽은 듯 조용히 있던 상호는 그제서야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그리고 침대 위의 조손을 내려다보았다.
민소매를 입은 하솔이 잠옷을 입은 해련의 품에 안겨서 자고 있다. 덕분에 상호는 조금 대담하게 해련의 옆에 누울 수 있었다. 조금 뒤척이는 것 정도는 하솔이라고 생각할 테니.
‘빨리 자고 튀자.’
그는 해련을 살짝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 * *
‘들어왔나.’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른 공터에 세워진 옛날식 집. 상호도 이미 한번 와봐서 알고 있는 곳이었다.
해련의 옛집.
그는 마당으로 들어서서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계십니까~.”
그러자 누군가 우당탕 달려 나왔다.
큰방을 뛰쳐나와 마루에 서서 눈을 끔뻑이는 해련. 그녀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신기함이 한데 섞여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강 선생?”
“네.”
“뭐야? 잠깐만, 그럼…… 이건 꿈? 그치만 너무 생생한데…….”
“교장선생님한텐 그렇죠. 저는 꿈이 아니지만. ……아니 잠깐만, 옷 좀 냅둬봐요.”
상호는 자신의 윗옷 단추를 향해 다가오는 해련의 손을 막았다. 하도 많이 겪어 본 일이라 이젠 자동으로 손부터 튀어 나갔다.
“저는 꿈이 아니라 진짜 저예요.”
“뭐어?”
“저번에 말했잖아요. 영혼이 들어온 거예요. 아니 벗기지 말라니까! 초혼강기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러 온 거라고요.”
“……아아, 맞다.”
해련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을 거뒀다.
“그럼 그것 때문에 침대 밑에 숨어 있었던 거야? 날 잡아먹으려고가 아니라?”
“그럼요. 제가 미쳤다고 교장선생님을 덮치려고 하겠어요?”
“그치만 그럼 왜 몰래 들어왔는데?”
“……그건.”
같이 자자고 하면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릴까봐. 하지만 상호는 곧이곧대로 말하지 못했다.
“……서프라이즈, 라고 해 둬요.”
“꿈에 들어오기 전에 이것저것 좀 주물러 봤겠네?”
“뭘 주물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사람을 뭘로 보고…….”
“아니면 말구.”
키득거리던 해련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초혼강기라……. 어떻게 만드는 건데?”
“그냥 이제, 이렇게 영혼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운기조식할 때에도 심상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거고…… 하솔이 교장선생님이랑 같은 심법이죠?”
“응.”
“하솔이랑 같이 운기조식을 하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예요. 별것 없다면 별것 없긴 한데…… 그래도 저도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응, 뭐 그럴 수 있지.”
해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는 건가?”
“그런 셈이죠.”
“그럼 여기서는 어떻게 나가?”
“충격을 주면 돼요. 뭐 뺨을 때리거나, 세게 꼬집거나…….”
“그래?”
다음 순간, 해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
상호는 멀거니 눈을 끔뻑였다. 이 할머니가 갑자기 어디 갔는지.
그러다가 해련이 꿈 밖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기겁하며 자신의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깨어야 돼……!’
당장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안 그러면 할머니의 탈을 쓴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빨리……!’
상호는 뺨이 터지도록 후려쳤지만, 어째 오늘따라 꿈에서 잘 깨어나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를 한번 꽉 악물고.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쳤다.
“……크흡!”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해련이 그의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상호는 자신의 몸 위에서 꾸물거리는 해련을 밀어내며 눈을 부라렸다.
“아니 옆에 하솔이 있잖아요! 정신머리가…….”
“하솔이는 고모가 갖고 싶대…….”
“염병하지 말고……!”
하지만 해련의 힘이 너무 우악스러웠다.
겁탈을 당하는 사람은 평소보다 3배 강한 힘으로 저항하게 된다더라. 하지만 겁탈을 하는 사람도 힘이 7배로 솟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더라. 상호는 해련의 힘이 평소보다 7배로 강해진 것을 느꼈다.
‘으악……!’
옆에 하솔이 있어서 내공으로 싸울 수는 없고.
그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
“하솔아! 하솔아!”
“어머머, 강 선생! 미쳤어 미쳤어! 야밤에 그렇게 소리치면 어떻게 해!”
“으으……. 어?! 서, 선생님?!”
“하솔아, 경찰 불러…… 악!”
“미쳤어!”
해련의 손이 그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 * *
“거하게 한판 하셨나 봐요.”
앞치마를 두르고 국자를 든 세희가 상호를 흘겨보았다.
“수녀님한테 다녀오셨던 거예요?”
“아니.”
상호는 벌겋게 부은 뺨에 얼음주머니를 문질렀다.
뺨이 좀 터지긴 했지만 어쨌든 순정은 지켰다. 하솔의 고모도 생산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제 초혼강기를 만드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해련의 몫이다.
“드세요.”
식탁에 된장찌개와 밥이 놓였다.
상호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는 세희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으응, 잘 먹을게.”
“오늘은 지윤이랑 제가 선생님이랑 자기로 했어요.”
“……너희 뭐 순번 짜니?”
“내일은 나빛이랑 나디아예요.”
대체 아이들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알려달라고 해 봤자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식사를 시작했다.
“밥 먹자, 세희야…….”
“그래서 누구한테 맞으신 거예요?”
세희의 날카로운 눈빛이 상호를 샅샅이 훑었다.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 때릴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일단 네가 생각하는 후보를 한번 말해 볼래?”
“미진 선생님이요.”
“……그리고?”
“가은이 정도?”
“…….”
교장은 용의선상에 없나 보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하솔이 입단속만 잘 하면 되겠군…….’
해련이 알아서 잘 시켰을 것이다. 그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밥은 맛있는데 입맛이 없네…….’
그런데 세희의 핸드폰이 한 번 진동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던 세희의 눈에 한기가 깃들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세희야? 무슨 일…….”
“선생님.”
“으응.”
“이거 뭐예요?”
“응?”
“이거.”
상호는 세희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화면 속 메세지 앱에는 해련의 이름으로 문자가 와 있었다.
[지난밤 본교에 재직중인 남교사(23)가 교장(신체연령 25)의 숙소에 침입하여 교장과 동침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
[해당 시도는 미수로 끝났으나, 교장과 함께 있던 교장의 손녀(16)가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음, 따라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해당 교사를 당분간 교장실에서 교육할 예정, 해당 학급은 부담임의 지도를 받을 것…….]
‘…….’
상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의 옆에서 세희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렇게 급하셨어요?”
“…….”
“어떻게 교장선생님을…….”
“아니야, 세희야. 초혼강기 때문에…….”
“말이 되는 변명을 하세요. 초혼강기랑 동침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
그냥 곱게 같이 자자고 할걸. 괜히 화를 피해보겠답시고 머리를 굴렸다가 더 큰 화를 부르고 말았다.
상호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밥을 먹었다.
‘국이 짜다…….’
* * *
그래서, 출근하자마자 교장실로 불려오게 되었다.
상호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해련을 바라보았다. 흙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꼭 동네방네 소문내야 했어요?”
“그치만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었는걸.”
해련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학교에서 범죄가 일어났는데 학생들도 알아야지 그럼. 세상에 어느 학교 선생이 교장이랑 자겠다고 창문을 따고 들어와서 숨어?”
“이유가 있었잖아요…….”
“틀린 말은 안 했잖아~.”
해련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상호를 흘끗했다.
“그나저나 이젠 알겠네.”
“뭐를요.”
“내 손녀.”
이미 알아차린 지 1년이 되어간다. 하지만 상호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걸 말해버리면 그동안 하솔을 이용해서 해련을 놀려먹었던 것을 자백하는 셈이 되어버리므로.
그래서 그는 연기를 했다.
“언제부터였어요? 대체…….”
“그야 물론 태어날 때부터지.”
“이야…….”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해련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며 씩 웃었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
“네, 네? 뭐…… 뭐가요?”
“날 놀리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다든가…….”
“에이, 설마요……, 하하.”
촉이 너무 좋다. 상호는 떨리는 손을 슬쩍 무릎 사이로 숨겼다.
“그런데 그러면…… 왜 숨기셨던 거예요?”
“하솔이는 그런 거 싫어하니까. 교장 손녀라고 사람들 관심 받는 거. 그래서 학교 사람들 아무도 몰랐어. 이제 강 선생 한 명 생겼네.”
“아하…….”
짐작했던 내용과 같았다.
“그러면 신청서도 교장선생님이 직접……?”
“으응. 내가 갖다놨지.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까 기억났는데, 강 선생.”
해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자꾸 하솔이 신청서를 빼놓더라?”
“……네?”
사실 기억하고 있었지만, 상호는 까먹은 척하기로 했다.
“제가요? 언제요? 정말요?”
“갖다놔도 갖다놔도 자꾸 빼놓길래 짜증났었는데, 숨기느라 화는 못 내겠고. 덕분에 속 좀 썩였어. 강 선생, 왜 그랬던 거야?”
정면에서 정통으로 쏟아지는 살기.
진땀이 줄줄 흘렀다.
“그으…… 글쎄요. 왜 그랬을까…….”
“하솔이가 뭔가 부족했어?”
“그건 아니었을 텐데…….”
“강 선생은 외모 보고 뽑지 않나? 하솔이가 눈에 안 찼어? 내 손녀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의 몸이 펄쩍 뛰었다. 무슨 학생을 기쁨조처럼 뽑는다는 소리를 하고 있나.
“제가 무슨 외모를 봐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 잠깐만, 그딴 소리는 어떤 자식이 한 거예요?”
“난데?”
“…….”
괴소문의 근원지가 이 인간이었다니. 상호는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하솔이는 알아서 잘 하는 아이 같아서…….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유가 없어서, 제가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들만 받았던 거예요. 잘났고 못났고 때문에가 아니라요.”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네. 예쁘고 날씬한 애들만 받았으면서.”
“날씬한 건 무예가 반이니까……. 그리고 하솔이도 당연히 예쁘죠. 날씬하고, 피부 곱고……. 근데 그게 기준이 아니라…….”
그 말에 해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내 손녀한테 관심 보이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어머, 어머. 그 어린 애기를 어디 볼 데가 있다고……!”
“애는 맞는데 애기는 아니죠! 그건 교장선생님한테나 그렇게 보이는 거고…….”
뭔 말을 못하겠다. 상호는 손사래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수업 갈게요.”
“어머? 그렇게 애들이 좋아?”
“선생인데 그럼 교장보단 학생을 좋아해야겠죠. 당연히……. 교장선생님은 초혼강기나 연습해 주세요.”
“재혼강기는 안 돼?”
“…….”
말도 안 되는 소리 들으면서 늙은이랑 입씨름하느니 빨리 아이들과 수업하러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도망치듯이 교장실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한숨 돌리려는데.
“선생님…….”
하솔이 눈앞에 서 있었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 상호의 등에 교장실 문이 닿았다.
“으, 으응. 하솔아. 어쩐 일로…….”
“저…….”
하솔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이…… 많이 혼나실까봐…….”
“구해주러 온 거야?”
상호는 쓰게 웃었다.
“괜찮아, 별로 안 혼났어.”
“정말요……?”
“응, 그냥 좀……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시니까. 이번에도 그런 거야. 가자, 교실 가자.”
“네.”
하솔이 순한 눈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
이 짓궂음은 가족 내력인 걸까.
상호는 비틀거리며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음부턴 절대 무단침입하지 말아야지…….’